56. 아홉 개의 폭포2021.10.13.
블랙이 헨튼 부인을 채근했다. 평소처럼 낮고, 감정이 잘 묻어나지 않는 음성이었지만 곁에서 듣는 티와칸들은 그 목소리가 어쩐지 초조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입을 빨리 열 수록 좋을 것이다. 네 아들이 데려간 리에네 공주가 살아 있어야 하니까.”
“리, 리에네 공주……를……?”
“공주가 살아 있으면 죽이진 않겠다.”
“왜…… 왜…….”
“내게는 이럴 시간이 없어.”
“아…….”
헨튼 부인은 비로소 첫째 아들이 리에네 공주를 데려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여, 여긴 없…… 저는 아무것도 모르…… 모릅니다. 제 방에 잠시 있기는 했지만 다시 사라졌어요. 그다음부터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
“달리 갈 곳은?”
“그런 데는 없어…… 아.”
헨튼 부인이 뭔가를 기억해 냈다. 둘째 아들의 시체를 놓고 돌아서며 남편이 했던 말을. 그건 남편의 유언이자 애정이었다. 헨튼 부인이 제 목숨도 모자라 둘째 아들마저 가이너스 왕가에 바친 남편을 끝까지 저주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아무도 모르는 길이 있어. 가이너스의 핏줄에게만 허락된.
남편은 기사의 맹세를 깨고 몸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를 알려주었다. 그 순간 남편의 영혼은 조각조각 깨어졌을 것이다. 둘째 아들의 시체가 제 영혼을 부수었던 것처럼.
-거기라면 살 수 있어.
그리고 남편은 사라졌다. 첫째 아들은 남편의 마지막 부탁대로 둘째 아들의 시신을 망가트렸다. 그 모습이 제 마지막 기억이었다.
“아홉 개의 폭포.”
헨튼 부인은 가이너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했다.
“제가 들은 건 그게 답니다. 답을 했으니 그 아이는 살려두세요. 죽이시면 안 됩니다. 그 아이가…… 무슨 짓을 했든 그 아이를 죽이시면…….”
말을 하던 중에 감정이 북받쳤던지 헨튼 부인은 입술을 깨물고 어깨를 떨었다.
“두 번은 안 됩니다. 두 번은…….”
“말했듯이, 리에네 공주가 무사하다면.”
블랙이 헨튼 부인의 손을 떼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할까요?”
페르모스가 잽싸게 물었다. 그가 묻는 것은 헨튼 부인의 처분이었다. 주고받는 대화를 보면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처지라는 게 확실했다. 서로 반가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블랙에게는 과거의 한 부분이었다. 블랙이 과거를 전부 뭉개 없애 버리려는 것 같진 않았다. 그랬다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얘기 같은 건 아예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데려가서 당분간 지낼 곳을 만들어 줘. 이 집안 다른 것들과 섞이지 않게 해라.”
“알겠습니다.”
“여기는 비우고 성으로 돌아가라. 혹시 복수라도 하겠다고 다른 것들이 몰려올지도 모르니 성을 지켜.”
“지키기만 합니까?”
“상황을 봐서. 없애는 게 번잡하지 않으면 마음대로 해. 대신 성을 지키는 게 우선이다. 뒷문이 많은 곳이니 방심하는 순간 등이 따일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주군은 따로 움직이실 겁니까?”
“거긴 내가 가야 해.”
“…….”
아홉 개의 폭포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지만 페르모스는 한 걸음 물러섰다. 블랙은 묻는다고 답을 해 줄 성격이 아니었다. 자신이 알아야 할 일이라면 진작 얘기를 했을 것이다.
“부디 늦지 않으시길.”
블랙은 대답 없이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 * *
“……틀렸어. 이 길도 아니야.”
리에네가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지쳤다. 벌써 몇 번째 길을 잘못 들어 돌아가는 중이었다. 클리마가 왜 그토록 걱정을 했는지 비로소 실감했다. 어둠에 눈이 많이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그건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리에네는 허리를 숙여 바닥을 더듬었다. 자신이 남긴 발자국의 앞뒤를 정확히 확인한 뒤 방향을 정했다.
“왔던 것만큼만 돌아가자. 거기에 표식을 해두었으니까.”
거대한 미로 같은 이곳은 걷기도 쉽지 않았다. 사람이 다니라고 만들어 놓은 길이 아닌 것 같은 곳도 많았다.
“거기, 위아래로 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방향을 잘못 잡았나 봐.”
리에네는 한숨을 참고 지친 발을 다독여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대로 여기서 영영 길을 찾지 못하고 죽을 것 같다는 생각도 슬슬 들고 있었다. 내가 죽으면 그 남자는 어떻게 할까……. 말리는 내가 없어졌으니 여섯 가문과 전쟁을 벌이게 될까. 그럼 나우크는 어떻게 될까. 많이들 죽겠지…….
“…….”
그 남자는, 왜 애초에 그렇게 하지 않은 걸까. 그게 정말 나 때문인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아르사크 가문은 아마도 그 반역의 중심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가장 달콤한 대가인 왕관을 챙겼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블랙이 자신에게 청혼을 했다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었다. 역시 뭔가…… 다른 게 있겠지. 혼인이 끝이 아니라 그 뒤에 다른 걸 더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라. 나라도 그럴 테니까. 그때 가서 그 남자가 태도를 바꾸더라도, 내가 그걸 원망해서는 안 돼. 받아들여야 해. 리에네가 잠깐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생각 탓인지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남은 힘을 쥐어짜 어떻게든 이어가던 걸음이 거기서 끝났다.
“……!”
비틀대던 리에네가 바닥으로 넘어졌다. 넘어졌다기보다는 쓰러진 것에 더 가까웠다.
“그럼…… 그냥…….”
……여기 있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나는 무서워. 혼인식 이후에 그 남자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면 너무 무서워. 받아들여야 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나는 그 남자가 무서워. 사실은 처음부터 나를 원한 게 아니었을까 봐 무서워. 그러니까,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아……. 스르륵 눈꺼풀이 감겼다. 리에네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길은 미로가 아니었다. 가이너스의 핏줄과 그 피를 수호하는 이들은 알고 있는 일이었다. 미로와 같은 구조는 길을 모르는 자들, 특히나 이 길이 무엇을 위한 길인지 모르는 눈에나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었다. 블랙이 이 길을 직접 걸어 본 적은 단 한 번이었다. 그러나 길이 헷갈리지는 않았다. 걸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게 길이었다. 걷기 어려운 곳은 사람이 아니라 다른 것을 위한 길이었다. 그래서 리에네가 길을 잘못 들었음을 짐작했다. 리에네에게 이곳은 전부 커다란 미로였을 것이다. 길을 모르는 자에게는 너무 거대하고 위험한 곳이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블랙은 길을 벗어나 조금이라도 높은 곳으로 향했다. 리에네는 잠옷 차림에 맨발일 것이다. 잠옷이 흰색이라 그 점은 다행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다른 옷에 비해 눈에 잘 들어올 것이다. 그렇게 한 시간쯤, 스스로 미로로 만든 어둠 속을 헤매고 난 뒤에 블랙은 리에네를 찾았다.
“……!”
구석에 힘없이 쓰러져 있는 리에네를 발견했을 때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숨이 거칠어지도록 속도를 높여 달려가면서도 계속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몸과 생각이 분리가 된 듯, 제 머릿속은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죽을 리 없어. 쓰러진 채 미동조차 없는 공주는 시체처럼 보였다. 사람이란 의외로 쉽게 죽는 존재였다. 다른 누구보다 그가 잘 아는 사실이었다. 죽지 않아. 하지만 리에네가 죽는다니, 그건 터무니없는 헛소리처럼 느껴졌다.
“헉, 헉……!”
마침내 손이 닿을 곳까지 다가갔을 땐 폐가 찢어질 것 같았다. 제 입에서 이렇게 거친 소리가 날 수도 있다는 걸 그도 처음 알았다. 툭! 고작 한 시간 헤맸다고 체력이 닳거나 하진 않았을 텐데 이상하게도 무릎이 꺾였다. 의도치 않게 리에네 앞에 꿇어앉는 자세가 된 블랙이 호흡을 살필 요량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
약하긴 했지만 가느다란 숨소리가 이어졌다. 죽은 게 아니었다.
“……됐어.”
블랙은 리에네 공주를 안아 들려고 했다. 그런데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제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감각이 너무 낯설고 수상했다. 게다가 분명 저는 리에네의 얼굴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이 자꾸 잠옷을 향했다.
“왜…….”
블랙은 그 이유를 조금 늦게 알았다. 잠옷이 너무 더러웠다. 흰색이고 때가 묻기 쉽다는 걸 감안해도 너무 더러웠다. 저건 마치 계속 피를 흘린 사람 같았다.
“……피?”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날아갔다. 잘 움직여지지 않던 팔다리가 지금은 오히려 신속히 알아서 움직였다. 블랙은 리에네를 한 팔로 받쳐 들고 피가 묻은 잠옷 자락을 걷어 올렸다. 드러나는 흰 살갗 군데군데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도무지 상처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 추…… 추워…….”
어느 순간 리에네가 반쯤 눈을 뜨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인지도 못 하는 사이에 블랙은 리에네의 얼굴을 붙들고 강제로 눈을 마주했다.
“공주님? 정신이 듭니까? 어디를 다친 겁니까?”
“추…… 아, 로드…….”
“상처를 못 찾겠습니다. 어디가 아픈지 느껴집니까?”
“…….”
눈이 마주친 잠깐의 시간 동안 리에네가 몹시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반가움이 아니라 망설임, 걱정, 주저함이 섞여 들어간 그런 표정이었다.
“어디가 다쳤는지 말을 해 봐요.”
“아프지 않…… 다치지 않았……어요. 나 할 얘기가 있……었…….”
말소리가 계속 가늘어졌다. 마음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다른 얘기라면 나중에 해도 됩니다. 아픈 데가 없다면 옮기겠습니다.”
블랙이 리에네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시라도 허리 같은 곳을 다쳤을까 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리에네가 멀쩡히 정신을 차릴 때까지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었다. 퍽! 철컥철컥! 제 발밑에서 나는 걸음 소리도 이상했다. 사실 가장 이상한 건 너무 기운이 없어 보이는 리에네였다. 핏기없는 얼굴이 너무 창백해서 이상했다.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째서 공주님이. 나는 이런 것을 보려고 돌아온 게 아닌데. 내가 돌려받겠다고 한 건 이런 게 아닌데.
“나…… 해야…… 할…….”
리에네가 아주 차가워진 손으로 블랙의 옷깃을 쥐며 힘들게 속삭였다.
“말하려고…… 했는데, 계속…… 꼭 말해야 한다고…… 그랬…….”
어쩔 수 없이 블랙이 잠깐 걸음을 멈췄다. 그가 리에네의 입에 제 귀를 갖다 댔다. 리에네가 숨 가쁘게 입술을 움직였다.
“당신…… 아, 알아야…… 아이는 어, 없…… 없어, 요…….”
“……?”
그게 무슨 의미인지 블랙이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리에네는 할 일을 마쳤다는 듯 툭, 눈을 감았다.
* * * 리에네는 다치지 않았다. 굶은 채 오래도록 길을 헤매 지친 것뿐이었다. 그 보상을 하듯 리에네는 죽은 것처럼 깊은 잠을 아주 길게 잤다.
“……으, 응…….”
리에네가 깨어난 것은 공교롭게도 새벽녘이었다. 자정도 한참 넘은 시간인지라 대부분의 사람은 잠을 자는 중이었다. 플램바드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자기 방에서 자는 게 아니라 리에네의 곁을 지키다 침대 구석에 기대 깜빡 선잠이 들었다는 점이 달랐다.
“……흡, 공주님! 정신이 드십니까?”
리에네의 웅얼거림을 들은 부인이 화들짝 눈을 뜨고 다가왔다. 리에네는 눈꺼풀을 계속 떨다 힘들게 눈을 떴다.
“몸은 어떠세요? 좀 괜찮으신지요?”
“아……. ……네, 그런 것 같아요.”
“하아, 다행입니다. 정말로 다행입니다.”
부인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거푸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자가 어찌나 무서운 말을 하던지, 저도 정말이지 공주님께 아주 큰 일이 생긴 줄 알았지 뭡니까. 그래서 의사를 말려야 하는 것도 깜박할 뻔했습니다.”
“의사요……?”
리에네는 잠이 들기 전 헝클어진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제가 어떻게 돌아온 거죠? 거기서 길을 잃었던 것 같은데……. 그다음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아이고, 생각이 안 나십니까? 그자가 모시고 왔습니다, 공주님.”
“로드 티와칸이요……? ……아.”
어렴풋이 흐릿한 기억이 떠올랐다. 길을 잃고 헤매다 지쳐서 쓰러졌고, 그리고 블랙을 만났다. 그게 꿈인 줄만 알았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내내 하지 못했던 얘기를 했다. 아이는 없었어요,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