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세상에 없는 사람2021.10.17.
해 줄 말이 너무 많아서 고르기가 힘들었다. 왠지 꿈에서는 시간이 되게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리에네는 그중에서도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나는 아이를 갖지 않았어요. 당신은 나를 빼앗긴 적 없었어요. 그러니 원한다면 온전히 돌려받으세요. 그런 말을. 블랙이 뭐라고 대꾸했는지는 기억에 없었다. 꿈이라서 그렇지 않을까 했는데, 그게 아니라 정말 그가 찾으러 온 모양이었다.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잠깐 불안해졌다. 혹시 그는 잘 숨어 있어야 할 클리마를 찾아낸 걸까. 그래서 클리마에게 제 행방을 물었을까. 그렇다면 클리마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 설마 죽은 걸까…….
“밖에 너무 오래 계셨습니다. 옷자락에 피가 잔뜩 묻어 다들 오해했지 뭡니까. 공주님은 아직 말씀을 못 하신 게지요? 그래서 저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네?”
부인의 목소리가 상념을 치고 들어왔다. 리에네가 고개를 들어 부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공주님. 그걸 다들 봤지 뭡니까. 그자는 공주님이 밖에서 아이를 잃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뭐라고요?”
그건 또 생각지도 못했던 얘기라 좀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플램바드 부인이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게 낫겠다 싶어서 그만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피가 그리 났으니 의사도 그게 맞다 했지요.”
“아니, 왜…….”
말했는데. 아이는 없다고. 처음부터 없었다고. 설마 그 말을 듣지 못한 걸까.
“로드 티와칸은 뭐라던가요.”
“무얼 말입니까? 아이를 잃은 것을 두고요?”
“네.”
“에휴, 그게…….”
부인은 느닷없이 리에네의 손을 꼭 쥐었다. 손등을 다독이는 손짓이 왠지 딸의 결혼을 하루 앞둔 엄마 같은 모습이었다.
“딱히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의사에게는 공주님을 살려내라고만 했지요.”
“그런가요…….”
“그래도 표정을 보면 다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그자는 정말로 공주님 걱정에 애간장이 무너지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럴 수…….”
……있는 건가요. 정말로.
“저는 공주님이 좋은 짝을 만나신 것 같습니다. 꼭 아이에 대해 다 말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을 것 같지 뭡니까. 그자는 정말 아이가 있었다 해도 제 자식으로 여겼을 겝니다.”
“…….”
그래선 안 되는데. 그 남자가 클라인펠터의 핏줄을 자기 아이로 받아들이는 것도 이상하지만, 내가 낳은 아이에게 애정을 갖는 건 정말이지 말이 안 되는 일이에요.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어요.
“부인.”
왠지 자기가 더 흐무진 얼굴로 리에네의 손등을 쓰다듬던 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네, 공주님.”
“부인은…… 예전 왕을 기억하나요?”
“선왕 말씀입니까?”
“아니요. 그 전에…… 가이너스 가문의 왕이요.”
“알기야 하지요. 가까이서 뵌 적은 없지만 말입니다. 기사단을 이끌고 사냥에 나섰다가 저주를 받아 죽은 왕 아닙니까?”
“저주……라고요?”
“네, 그랬지요.”
플램바드 부인이 주변을 둘러보다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건 쉬쉬하던 소문이지만 말입니다, 그 왕은 뭔가 신의 노여움을 살 짓을 하다가 벌을 받았답니다. 그러니 그 젊은 나이에 사냥터에서 그리 험하게 죽은 게 아니냐 했지요. 꽤나 그럴듯한 얘기라 입에 담는 것도 신께서 듣지 못할 곳에서 하라 하였습니다. 괜히 노여움이 튀면 안 되니까요. 공주님께서도 그 왕의 이름은 쉬이 입에 담지 마십시오.”
리에네는 울컥 화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저주는 무슨. 분명히 자기들이 죽여 놓고 헛소리를 꾸며냈을 거야. 그런 식으로 반역을 지우려고.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부인. 저주라니. 그런 건 없었을 거예요. 그런 말은 앞으로도…….”
쿵! 그때 부서지듯 침실 문이 열리는 바람에 리에네도, 부인도 깜짝 놀랐다. 문을 들이받듯 벌컥 열어젖힌 사람은 블랙이었다.
“깨어났습니까?”
일렁이는 촛불이 비추는 얼굴이 평소답지 않게 창백했다.
“네…….”
그를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리에네는 한숨을 쉬듯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잠깐 사이에 블랙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저는 그럼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부인은 눈치 빠르게 얼른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지 않아도 돼요.”
리에네가 부인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 손은 블랙이 중간에 받아 쥐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부르세요, 공주님.”
플램바드 부인도 애초에 잡힐 생각이 없었다는 듯, 서둘러 떠나 버렸다.
“왜 지금 깼습니까.”
블랙은 부인이 사라진 의자에 앉았다. 그것도 모자라 의자를 아주 바짝, 침대 옆으로 끌어왔다. 그가 리에네의 손가락을 벌려 깍지를 끼었다. 손이 서로 단단하게 얽매이자 입가로 가져가 손등에 부드러운 키스를 남겼다.
“제발 깨어나랄 때는 내내 자더니.”
“…….”
그는 아마도 자신이 잠들어 있을 동안 침대를 지켰던 모양이었다. 리에네가 말이 없자 블랙이 물었다.
“더 자고 싶습니까?”
“……아니, 요.”
피곤하긴 했지만 잠이 오는 건 아니었다. 단지 내일이 조금 걱정이긴 했다. 애매한 시간에 깨어나게 되면 애매한 시간에 잠이 들 거라는 뜻이었다.
“시장하진 않습니까?”
“그다지요.”
“하고 싶은 건?”
“…….”
우습게도 당장 떠오르는 건 하나였다. 기억을 지우고 싶어. 종제님을 만난 기억을 전부. 그전까지 자신이 하던 고민이란 하찮기만 했다. 블랙에게 임신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언제 말할지 그게 그렇게나 중요하고 큰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저 우습기만 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뭐라도 좋으니 말을 해요. 이런 짓을 벌인 인간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말이라도 좋으니.”
“……범인은, 못 봤어요.”
리에네는 머뭇대다 그렇게 말했다. 클리마가 저를 납치했다고 하면 그를 살리기 어려워졌다. 블랙은 이미 그가 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리에네는 그걸 몰랐다.
“정신을 잃고 나서…… 깨어나고 봤더니 혼자였어요.”
“나를 본 건 기억합니까?”
“네…….”
“그럼 됐습니다. 아무 일 없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도 그랬으니까.”
블랙은 언젠가처럼 거의 느껴지지도 않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그걸 보면 도무지 원수의 딸을 대하는 사람 같지 않았다. 이 사람은 혹시…… 너무 어릴 때라 모르는 걸까. 아르사크 가문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냥 클라인펠터 가의 문장만 기억하는 걸까. 그래서 나한테 이럴 수 있는 걸까.
“…….”
생각을 이을수록 리에네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그럴지도 몰라. 여덟 살이었다고 했지. 그럼 일곱 가문의 이름 같은 건 다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어. 나만 해도 그때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잖아.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나우크의 왕족인 줄 알았었잖아. 그래, 그런 거야. 이 사람은 내가 누군지 정확히 모르는 거야. 그냥 어린 시절 정혼 얘기가 오갔던 그 사람으로만 기억하는 거야.
“무슨 생각을 합니까?”
블랙이 손등으로 천천히 리에네의 얼굴을 쓸었다. 그 감촉은 따듯한 불꽃처럼 다정하기도 했고, 동시에 불시에 뿌려지는 찬물 같기도 했다.
“……할 말이 있어요.”
가슴이 따끔대기 시작했다. 리에네는 용기를 내서 블랙의 소맷자락을 쥐었다. 자신이 만지면, 그는 기분이 좋다고 했다. 지금도 그러기를 바랐다.
“그 전에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말해요.”
블랙은 저를 쥔 리에네의 손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리에네에게는 그 시선이 굶주린 사람처럼 보였다. ……알 것 같아. 이 남자가 내게 이러는 이유. 집을 원했다고 했다. 돌아오면 언제든 쉴 수 있는 곳, 그 어떤 위협도 없는 곳을. 무방비하게 마음을 풀어놓을 수 있는 곳을. 그에게 자신이 그런 장소였다. 비록 자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되어 버렸다. ……못 해, 나는. 그러니 도무지 말할 수가 없었다. 내 선친이 당신의 친부를 죽여 왕위를 빼앗았다고는. 나는 당신의 집도, 옛 정혼자도 아니라고. 나는 원수의 딸일 뿐이라고. 못 해. 그럼 이 남자는 또 집을 잃게 되잖아. 이 마음이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핑계인지 아닌지 리에네는 몰랐다. 그저 빼앗을 수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그걸 빼앗을 수는 없어. 처음 그에게서 집을 빼앗은 게 아르사크 가문이었다. 두 번씩이나 그래야 한다는 건 너무 잔인했다.
“뭔데 이렇게 뜸을 들입니까?”
계속 입을 벌렸다 닫는 리에네가 불안했던지 블랙이 쓸어 넘기던 머리칼을 한 줌 쥐어 제 입술로 문질렀다. 손끝이 약간 차가워진 것도 같았다.
“그게…….”
“그게.”
“듣고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데…….”
“그건 내 몫이고. 그래서?”
“그래도 다른 사람한테는…… 그러니까 부인한테는 화를 내지 마세요.”
“부인이 뭔가 잘못한 일이 있습니까?”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제가 그렇게 지시한 거예요. 그러니 부인의 잘못이 아니에요.”
“말해요. 그렇게 할 테니.”
내가 잘못하는 걸까. 자격 없는 내가 이 남자의 집을 지키겠다는 건 그저 욕심인 걸까. 어떤 게 더 당신을 위하는 길인지, 나는 모르겠어요. 나는 지금 너무 괴로운데, 당신은 괴롭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또다시 무언가를 잃지도 않았으면 좋겠어. 전부 다 되찾았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돌려받기 원했던 것 전부를. 원래 당신이 가져야 했던 전부를.
“저는 아이를 잃지 않았어요.”
블랙의 소매를 쥔 손가락에 부러질 것처럼 힘이 들어갔다. 리에네는 모르는 사실을 블랙이 먼저 알아차렸다. 그가 부드럽게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주며 말했다.
“그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까?”
그는 리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직 모르는 눈치였다.
“정말이에요. 아이를 잃은 게 아니라…….”
“입술이 텄습니다. 목이 마른 것 같은데 잠시 기다려요.”
그래서 대화를 피하려고 했다. 그는 리에네가 아이를 잃은 일로 충격을 받아서 현실을 부정하는 중이라고 여겼다. 리에네는 블랙이 놓게 한 소매를 다시 붙들었다.
“아이를 갖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 뭐라고 했습니까?”
의자에서 일어나려던 블랙이 그대로 굳은 채 리에네를 응시했다.
“거짓말을 했어요. 청혼을 거절하려고.”
“…….”
“알아요. 그간 말할 기회가 있었다는 걸. 그래도 숨겼어요. 혹시라도 나우크의 통치권을 빼앗기게 될까 봐. 그건 아르사크 가문의 몫으로 남겨 두려고 했어요.”
“…….”
“알아요. 그래선 안 됐다는 걸. 화를 내더라도 이해해요.”
“…….”
내내 말이 없는 걸 보니 아이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듯했다. 이 남자는 다 진심이었구나. 자기 이름을 감추려 했던 걸 빼고.
“……미안해요. 말하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불이 났다고 하기 전에요.”
“피가 났는데…….”
블랙이 한참 뒤에야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아이 때문이 아니라면 왜……. ……아. 그래서 출혈이 있다고…….”
“……네.”
말해놓고 보니 역시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니, 나한테만 그런 건가. 저 남자는 동요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배신감이 드는 걸까. 불안해진 리에네가 블랙의 소매를 놓고 아예 손을 당겨 쥐었다.
“부인은 잘못 없어요. 제가 그런 거예요.”
“잘못은 없…… 네, 알겠습니다.”
“그럼…… 괜찮은 건가요?”
그는 여전히 눈썹 사이를 찌푸린 그 표정이었다. 괜찮지 않아 보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역시. 그렇구나. 블랙의 손을 쥐고 있던 리에네의 손가락이 힘없이 풀렸다.
“미안해요.”
그 이상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블랙은 그 상태로 머물러 있다가, 천천히 리에네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어떨 때는 거울처럼 날카로워지기도 하는 눈이 리에네를 고스란히 비추었다.
“이런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걸 그저 괜찮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