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심장 위의 맹세2021.10.20.
리에네를 보면서도 블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잘 모르겠다는 식이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요. 속인 건 나니까.”
“처음에는 분명히 괜찮았습니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고 해도.”
어느샌가 블랙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낮아졌다.
“이제야 공주님을 갖겠다는 생각을 한 건 나였고, 늑장을 부린 대가 같은 것이었으니. 누구 아이인지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어차피 내 애로 키울 거였으니까. 나는 아이보다는 공주님을 가지는 일이 더 중요했습니다. 아이는 정말로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구겨졌던 미간이 서서히 펴지고 있었다.
“안 괜찮았나 봅니다, 사실은.”
“……? 잘 모르겠어요.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거짓말이었다고 하니까 뭐가 툭 끊어진 기분이라.”
블랙이 손끝으로 제 가슴께를 툭 쳤다.
“여기 즈음이. 이게 꽤…….”
말을 끊은 블랙이 시간을 들여 적당한 표현을 골라냈다. 스스로도 지금 느끼는 감정의 이름을 잘 모르고 있는 듯했다.
“개운하다고 해야 하나.”
“……?”
천천히, 블랙의 입술이 벌어졌다. 기분 좋은 호선을 그리며.
“뭔가가 주체 못 할 정도로 가벼워진 기분입니다.”
“그건 기쁘다는 말 같은데요.”
“그런 것 같습니다. ……많이 아픕니까?”
맥락 없이 성급하게 이어지는 질문을 리에네는 전부 다 이해하지 못했다.
“네? 아이를 잃은 게 아니라고 말했는…….”
“그럼 괜찮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얼굴이 쥐였다. 익숙한 무게가 어깨를 누르고 입술이 겹쳐졌다. 익숙한 체취가 혀끝에 감돌자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맞아. 욕심이야. 그에게 과거의 일부를 숨기는 것, 그건 제 욕심이 맞았다. 그를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뺏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갖고 싶었다. 나는 이 남자를 잃고 싶지 않아. ……잃지 않을 거야. 선친이 저지른 짓은 제 가슴에 묻기로 했다.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더라도 입을 다물 것이다.
“저, 그…… 잠깐, 만요.”
키스는 격하고도 길었다. 리에네는 달아오른 숨을 입술 새로 힘겹게 밀어내며 속삭였다.
“좀, 천천, 히…….”
“네.”
네, 라고 하는 순순한 대답이 조금도 믿기지 않은 것은 블랙의 눈이 한참 어둑했기 때문이었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사람의 눈이 저러지 않을까. 블랙은 떨어지는 입술을 다시 성급히 물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리에네는 어느샌가 그에게 안겨 허벅지 위에 걸터앉는 자세가 되었다.
“잠깐, 천천히, 한다고…….”
“네.”
“전혀 아닌…….”
“네.”
“아니…….”
“네.”
……대체 대답은 왜 하는 거야. 숨 막히는 키스는 황홀한 만큼 몸을 힘들게 했다. 저도 욕심껏 그를 안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팔이 점점 무거워졌다.
“……아파요.”
입술이 잠깐 떨어졌을 때 리에네가 중얼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한참 마찰열을 겪은 입술이 아릿했다.
“……아프다고?”
다행히 그 말은 블랙을 멈추게 하는 힘이 있었다.
“어디가?”
리에네는 비로소 눈이 마주칠 만큼 떨어진 블랙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입술이요. 방금 깨무셨어요.”
“아…….”
잇자국이 작게 남은 입술을 발견한 블랙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 작은 반응들이 전부 다 가슴이 아플 만큼 사랑스러웠다.
“나머지는 조금 미뤄두세요.”
리에네의 말에 블랙이 잠깐 고개를 젓더니 이윽고 피식 웃었다.
“언제까지 미루면 되겠습니까?”
“글쎄요……. 내일까지?”
“내일이면 안 아파집니까?”
“그럴 것 같아요.”
내일이면. 내일까지는 마음이 단단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저를 원한다는 느낌이 이렇듯 온몸으로 강렬하게 전해질 때, 마음이 지레 찔려 바스라질 것 같은 이 감각이 내일이면 나아질 것이다.
“아직도 내가 무섭습니까?”
“아니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간 평판이 썩 좋은 인간이 아니었다는 게 신경 쓰여서.”
“…….”
리에네는 희미한 흉터가 있는 눈썹 끝이 아래로 살짝 기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남자는 알까. 나는 이런 게 하나하나 너무 좋고, 고맙고, 그래서 미안하다는 걸. 미안해서 괴롭다는 걸. 괴로워서 아프다는 걸. 그래서 당신을 보면 나도 모르게 울고 싶어진다는 걸.
“저한테 하시는 걸 보면 남색가가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겠던데요.”
리에네는 손에 닿은 블랙의 광대뼈를 만지작대며 작게 중얼거렸다.
“다른 소문도 사실이 아닙니다. ……대부분은.”
블랙이 자신 없다는 투로 덧붙인 말 한마디가 뭐라고 웃음이 나왔다.
“알고 있어요.”
“다행입니다.”
블랙은 리에네를 한 팔로 안아 다시 침대에 눕혀 놓았다.
“다시 잘 수 있겠습니까?”
“아뇨……. 별로 잠은 오지 않아요.”
“그럼 뭘 하면 좋겠습니까?”
그건 고민할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가서 씻으세요.”
블랙이 어깨를 움찔했다.
“……나한테 먼지 내라도 납니까?”
“아뇨. 그래도 침대에 들어오기 전에는 씻어야 하니까요. 씻고, 이불도 가져오세요. 베개도요.”
그리고 나를 밤새 안고 있어 줘요. 아주 다정하고 뜨겁게. 그래서 내가 다른 건 전부 잊도록. 당신을 갖고 싶다는 욕심 하나만 빼고.
“기다려요.”
블랙이 몸을 기울여 콧등에 키스를 남겼다. 입술이 아프다니까 그 와중에 콧등을 고른 것 같아 또다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빨리 오세요.”
리에네가 눈을 감고 천천히 중얼거리자 블랙이 잇새로 뭔지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그럼 못 갑니다. 더는 아무 말 하지 말고 있어요.”
리에네가 잇자국이 살짝 난 입술을 벌려 소리 없이 웃었다. 블랙은 그 미소가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집요하고 뜨거운 시선은 키스와 다를 것도 없었다. * * * 잠이 안 온다는 말이 무색하게 리에네는 꿈도 없는 단잠을 잤다. 푹 자고 눈을 떴을 때는 새벽이 아니라 늦은 아침이었다. 가물대던 눈꺼풀이 저절로 떠졌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게 하필 블랙의 얼굴이었다.
“잘 잤습니까?”
아니라고 하기에는 눈이 너무 번쩍 뜨였다.
“네.”
저는 그때처럼 블랙에게 푹 감긴 채 누워 있었다. 막상 정신을 차리니 그가 제 몸을 꼭 감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약간 무게감이 몸을 누르는 것도 느껴지는데 정작 잠은 달게 잤다니 그 점도 신기했다.
“언제 깨셨어요?”
“평소대로.”
그게 몇 시일까.
“이렇게 오래 계셨어요?”
“얼마나 됐는진 모르겠습니다. 지루하지 않아서.”
블랙은 그를 보느라 열심히 깜박대는 눈꺼풀을 손끝으로 쓸었다. 속눈썹이 스쳐 가자 그가 보일 듯 말 듯 싱긋 웃었다.
“이렇게 긴 속눈썹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계속 만져 보고 싶었는데 잠을 깨울까 봐 참고 있었습니다.”
“깨우지 그러셨어요.”
블랙의 눈썹이 아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구겨졌다.
“……더 잘 생각은 없습니까?”
“그런 것 같은데요. 하루도 넘게 잔 것 같아요. 이제 일어나야죠.”
“더 자도 됩니다.”
“그건 너무 게으르잖아요.”
“그럼 안 됩니까?”
……이상하다. 왜 내가 더 자길 바라는 것 같지. 이제껏 내내 깨어나길 기다렸던 거 아닌가?
“저를 재워 놓고 뭘 하시게요?”
“이제껏 하던 것.”
“그게 뭔데요?”
“감상.”
“……?”
속눈썹을 약하게 쓸던 블랙의 손짓이 느려졌다.
“내가 살면서 본 것 중 가장 예쁜 것을.”
쿵. 그 말에 제 가슴 속에서 소리가 났다. 무언가 아래로 쿵 떨어지는 그런 소리가.
“공주님이 게으름을 피울수록 내게는 이 귀한 시간이 늘어나는 겁니다. 그러니 마음껏 피워요. 나를 위해서.”
“…….”
이 남자는, 어디서 이런 말을 배운 거야. 전쟁터에서 배웠을 리는 없잖아.
“거짓말 같아요.”
갑자기 튀어나오는 말에 리에네가 오히려 더 놀랐다.
“아닙니다.”
“아니, 다른 게요. 저한테 경험이 별로 없어서 능숙하지 못할 거라고 하셨잖아요.”
“…….”
“그게 거짓말 같아요. 사실은 아주 많은 거야.”
블랙의 표정이 조금 곤란해졌다. 그가 짧게 마른침을 삼킨 뒤 리에네의 정수리에 입술을 붙였다.
“저도 사실 그게 거짓말이었다고 하고 싶었습니다.”
“아, 역시.”
“그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요. 나는 어떻게든 능숙하게 구는 법을 알아 올 테니까.”
“……? 이미 능숙한 게 아니고요?”
“그렇게 생각해 주면 좋고.”
블랙이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이제 그만하자는 듯, 그가 입술을 이마로 미끄러트렸다. 간질대는 숨결이 이마를 데우는 감각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그래서 아까웠다. 이걸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먼저 겪었으리라는 게.
“좋지 않아요. 그런 게 좋을 리 없잖아요.”
리에네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블랙을 쿡 찔렀다.
“과거를 문제 삼지는 않겠어요. 제가 모르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런데 그걸 본인 입으로 말하는 건 달라요.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죠.”
블랙은 리에네가 찌른 자리가 정말 아프다는 것처럼 눈매를 찌푸리며 답했다.
“그건 동의하지만 내게는 이유가 있습니다.”
“과거를 과시할 이유가요?”
“또다시 거절당하고 싶진 않으니까.”
“……?”
“능숙하지 않은 사람은 허락할 수 없다던 건 공주님이었…….”
“아, 그만.”
리에네가 황급히 블랙의 입을 막았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지. ……마음을 감추려고. 큰일이잖아.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아니에요.”
‘뭐가 말입니까.’
손바닥에 닿은 입술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희한하게도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 거…… 아니라고요.”
말을 할수록 눈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리에네는 고개를 반쯤 돌려 시선을 피한 채 중얼거렸다.
‘뭐가 아니라는 건지 말해 줘요.’
“능숙한지 아닌지…… 애초에 그런 걸 판단할 재주도 없어요.”
‘……? 그럼 그땐 왜 그랬습니까?’
“같이 자고 싶지 않아서요.”
‘…….’
“그러면…… 들킬 것 같아서.”
‘뭐를?’
“경험이…… 없는걸.”
거기까지 말하고 나자 정말로 더는 창피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리에네가 몸을 돌려 블랙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일어나야겠어요. 제가 먼저 욕실을 쓸게요.”
“어딜.”
하지만 헛된 짓이었다. 블랙은 아주 간단히, 벗어나려는 리에네를 도로 끌어와 제 몸으로 가두었다. 간신히 숨만 쉴 수 있는 자세가 이렇게나 안락하게 느껴진다는 게 놀라웠다.
“저…… 놔주세요. 지금은 너무 창피해서…….”
“안 됩니다.”
“왜요…….”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
“안 그럴 것 같은데요…….”
“공주님은 아닐지 몰라도 나는 그렇습니다.”
“그게…… 기쁜가요?”
“그런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블랙은 한참을 그 자세로 머물렀다. 미동조차 없어 그가 그대로 굳어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반대였다. 블랙은 굳은 게 아니라 힘차게 뛰쳐나가려는 것을 억지로 참는 중이었다.
“내가 나우크에 와서 매일 마주해야 했던 생각은, 너무 늦었다는 후회였습니다.”
블랙은 시간이 꽤 흐른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더 일찍 왔어야 한다고. 더 빨리 알았어야 했다고. 사실 나는 아무것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는 걸.”
“그랬……어요?”
그게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리에네는 가슴이 잘려나가는 기분이었다. 목이 꾹 메어와 리에네는 더 이상 틈도 없는 블랙의 품에 더 힘껏 파고들었다.
“그랬다면 공주님이 다른 인간을 마음에 담을 일이 없었을 테니 나를 견디는 시간도 좀 더 짧아졌겠지. 매번 그런 생각을 마주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과는 아무것도…….”
“그래서 믿지 못하겠습니다. 사실은 한 번도 빼앗긴 적이 없었다는 걸.”
“……?”
리에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블랙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뭘 빼앗긴 적이 없다고 하는 거야. 당신은 마땅히 당신이 가져야 할 것들을 전부 잃고, 이름조차 없이 떠나야 했잖아요.
“계속 내 거였어.”
그가 말하는 것은 왕관이나 신분이 아니었다. 리에네 자신이었다. 말을 마친 블랙이 몸을 내려 리에네의 가슴 위에 입을 맞췄다. 왼쪽, 심장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지금 그가 하는 키스는 야한 애무가 아니라 경건한 맹세 같았다.
“잊지도, 잃지도 않겠습니다.”
“…….”
“다시는.”
블랙이 키스를 마칠 때까지, 리에네는 숨을 참고 기다렸다. 심장이 그렇게 미친 소리를 내는 때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래. 말하지 않길 잘했어. 욕심이든 뭐든 좋아. 나는 이대로, 이걸 지킬 거야. 다시는 이 남자한테서 뭔가를 빼앗지 않을 거야……. 블랙이 놓아주는 순간, 이번에는 리에네가 그를 붙들었다. 내일로 미루자던 키스가 오늘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해가 가운데 하늘에 떠오를 때까지 내내 침실에서 머물러 다른 이들이 공연한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