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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아주 작은 그늘 (59/145)

59. 아주 작은 그늘2021.10.24.

16550951589214.jpg“그럼 몸은 틀림없이 괜찮으신 게지요?”

태어나서 처음 있는 늦잠이 플램바드 부인에게는 자못 충격인 모양이었다. 부인은 그냥 일어나기 싫어서 침대에 누운 채 빈둥거렸다는 리에네의 말을 통 믿기 어려워했다.

16550951589214.jpg“정말인 게지요? 혹 제가 수선을 피울까 싶어 적당히 참고 계신 게 아니지요?”

16550951589223.jpg“그렇다니까요. 푹 잤더니 한결 개운해졌어요. 평소보다 더 기운이 넘치는 것 같아요.”

16550951589214.jpg“그런데 왜 그리 오래 침대를 못 벗어나셨습니까?”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요, 부인……. 리에네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답을 피했다. 그런데 부인의 입장에서는 이해 못 할 일이 맞기도 했다. 부부가 각방을 쓰는 게 너무 당연한 곳이었다. 아이를 갖기 위해 잠자리를 가지는 게 아니라면 한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 부인은 블랙이 오전을 내내 리에네의 침실에서 보낸 게, 아픈 리에네를 지켜보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했다.

16550951589223.jpg“그게, 큼, 식사가 늦어서 곤란해진 건 아니죠?”

16550951589214.jpg“아직도 몸이 불편하시면 더 쉬셔도 됩니다. 공연히 무리하지 마세요.”

16550951589223.jpg“괜찮아요. 부인까지 이러지 마세요. 실제로 아이를 잃은 게 아니라는 걸 잘 알잖아요.”

16550951589214.jpg“그야 그렇지요……. 아, 그러면 그자가 혹시 억지로 누워 있게 했습니까?”

16550951589223.jpg“아뇨. 그게 아니라…….”

……자꾸 묻지 말아 줄래요.

16550951589223.jpg“……아, 참. 말했어요.”

리에네가 중간에 말머리를 돌렸다.

16550951589214.jpg“네? 뭘 말입니까?”

16550951589223.jpg“임신한 게 아니라고 말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냥 아이를 잃었다고 알도록 내버려 둘 거지만. 하여간 로드 티와칸 앞에서는 계속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돼요.”

16550951589214.jpg“아이고, 잘하셨습니다. 그자는 뭐라던가요?”

그 말에 대답을 하자니 일단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게 먼저였다.

16550951589214.jpg“공주님?”

16550951589223.jpg“……마음이 몹시 가벼워졌대요.”

잃지 않겠대요. 잊지도 않겠대요. 그런 말을 내 심장 위에 새겨 놓았어요. 나는 그게 그 남자가 원래 하려던 청혼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처음부터 그랬다면 나는 대륙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가 됐을 테죠…….

16550951589214.jpg“그렇지요. 딴에는 제 자식으로 대하려 마음을 굳게도 먹었겠습니다만, 암요, 그래도 남의 자식인 것을요. 어찌 제 자식과 같겠습니까. 잘하셨습니다, 공주님. 두 분은 이제 행복하실 일만 남았겠습니다.”

16550951589223.jpg“그럴 작정이에요.”

리에네는 다른 얘기 없이 그렇게만 말했다. 저만 비밀을 묻고 있으면 모두가 행복할 것이다. 리에네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16550951589214.jpg“아이고, 그럼 저는 이제 가서 식사를 들여와야겠습니다. 식사를 다 드신 후에 공주님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16550951589223.jpg“그게 뭔가요? 지금 할게요.”

16550951589214.jpg“급한 일은 아닙니다. 식사부터 하셔요. 그자가…… 아이고, 참. 나는 대체 언제까지 공주님의 정혼자를 그자로 부를 건지…… 송구합니다, 공주님. 그만 입에 붙어서요. 그, 티와칸 공께서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식사를 잘 챙겨 달라고요.”

16550951589223.jpg“네? 그랬어요?”

리에네가 웃는 것도, 그렇다고 찡그리는 것도 아닌 생소한 표정을 지었다.

16550951589223.jpg“안 믿겨……. 그 남자가 그렇게 곰살맞은 짓을 다……. 아니, 물론 굉장히 다정하지만…… 그래도 그건 둘만 있을 때 아닌가…….”

리에네가 당황한 사람처럼 혼자 중얼대는데 플램바드 부인이 공연히 부듯한 얼굴을 했다.

16550951589214.jpg“사랑에 눈먼 사내가 못 할 짓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성격이 아니라는 말은 사랑 앞에 없지요.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많이 시장하실 테니 후딱 다녀오겠습니다.”

16550951589223.jpg“아니, 괜찮아요. 천천히 다녀와요.”

16550951589214.jpg“아닙니다, 아닙니다.”

플램바드 부인이 후다닥 침실을 떠났다. 리에네는 부인이 마치 기념이라도 하듯 공들여 손질해 준 머리를 거울로 들여다보았다. 오늘따라 제 금발이 거짓말처럼 예쁘게 보였다. ……이래도, 되는 건가. 내가. 그 남자 앞에서. 리에네가 한숨을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다시 거울을 들여다본 리에네가 제 얼굴에서 천천히 그늘을 지우기 시작했다. 아니, 이래야 해. 나는 그 남자가 받아 마땅한 것을 전부 줄 거야.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 * 평소와 비슷한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리에네는 플램바드 부인의 볼일을 잠시 뒤로 미루었다.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마침 신께서 운을 허락하셨던지, 할 일이 알아서 리에네를 찾아왔다.

16550951632768.jpg“식사는 잘 마치셨습니까? 시간을 잘못 맞춘 게 아닌지 걱정스럽군요.”

16550951589223.jpg“아니에요. 마침 딱 좋은 시간에 왔어요. 거기 앉도록 하세요, 페르모스 경.”

16550951632768.jpg“네, 공주님.”

페르모스가 습관인 듯 의자에 앉으며 외알 안경을 달칵 만지작댔다.

16550951632768.jpg“아시겠지만 주군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혹시 저를 독대하는 게 불편하시다면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블랙이 없기에 딱 좋은 시간이라고 말한 것이었다.

16550951589223.jpg“불편하지 않아요. 하지만 거기까지 신경을 써 주어 고맙군요. 그럼 이제 말해 보세요. 무얼 알아 왔는지.”

16550951632768.jpg“네, 그 사라진 왕실 기록 말입니다. 저를 의심하셨던.”

페르모스는 자기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로 진짜 범인을 찾아 알리기로 했다.

16550951589223.jpg“누가 그랬는지 알아낸 건가요?”

16550951632768.jpg“아니요. 대신 다른 것을 알아냈습니다.”

16550951589223.jpg“다른 것? 그게 뭐죠?”

16550951632768.jpg“범인을 알 도리가 없겠다는 사실입니다.”

말장난 같은 대꾸에 리에네가 콧등을 찡그렸다.

16550951589223.jpg“나는 경이 실없는 장난을 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어요. 고작 그런 말을 하려고 나를 보자 한 건 아니겠죠. 제대로 말해 주겠어요?”

16550951632768.jpg“……저런. 그리 말씀하시니 뜸을 들일 수도 없겠군요. 공주님께서도 꽤나 직선적이고 가차 없는 성격이십니다. 주군처럼요.”

16550951589223.jpg“이제껏 그런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요. 하지만 그대의 주군과 같다는 말이라면 칭찬으로 여기겠습니다. 범인을 알 수가 없다는 게 무슨 뜻인지부터 말해 주겠어요?”

페르모스가 잠깐 입꼬리를 올려 웃더니 곧 진지하게 표정을 바꾸었다.

16550951632768.jpg“말 그대로입니다. 해당 기록이 없어진 건 최근이 아니라 아주 예전입니다.”

16550951589223.jpg“……? 그게 사실인가요?”

16550951632768.jpg“그렇습니다. 제가 또 제책과 서지에는 일가견이 있는 몸입니다. 왕실 기록서란 그 자체로 제책의 역사 아니겠습니까.”

티와칸의 영리한 참모는 다방면으로 지식이 풍부했다. 저런 사내가 대체 왜 도서관이 아니라 전쟁터를 구르고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16550951632768.jpg“음, 뭐, 저만 즐거울 얘기는 차치하고,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기록서를 묶은 실이 아주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어림잡아 20년은 됐을 겁니다. 만약 최근에 기록서에 손을 댄 것이라면 해당 부분을 손본 실도 새것이어야 합니다.”

16550951589223.jpg“20년……이라고 했나요?”

16550951632768.jpg“네. 틀림없습니다.”

16550951589223.jpg“…….”

그렇다면 범인은 누군지 뻔했다. 아바마마였을 거야. 가이너스 왕가의 마지막 왕을 내가 기억하지 않기를 바랐던 거야. 훗날에라도 왕실 기록서를 펼쳐 볼 인간이라면 뻔했다. 리에네밖에 없었다. 그러니 숨기려 했을 것이다. 일곱 가문의 반란도, 페르난드 왕자의 실종도, 가이너스와 아르사크의 정혼 사실도.

16550951589223.jpg“알겠어요. 수고 많았어요, 경.”

16550951632768.jpg“엇? 이대로 믿으시는 겁니까?”

16550951589223.jpg“경이 사실을 말했다고 생각하니까요.”

16550951632768.jpg“그야 물론이지만……. 그게 다가 아니겠군요.”

페르모스는 영리했다. 그는 리에네의 반응이 자신의 예상에서 어긋나는 시점에서 벌써 이유를 파고들고 있었다.

16550951632768.jpg“제가 공주님이라면 좀 더 놀랐을 겁니다. 20년 전 자신이 모르고 있던 왕실 비화 같은 게 있었다는 증거니까요. 그런데 전혀 놀라시지 않는 걸 보니 이미 알고 있으셨나 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리에네가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재빨리 감추었다.

16550951589223.jpg“……20년 전이라면 오래전 일이라 별 관심이 없다는 뜻일 수도 있겠죠.”

16550951632768.jpg“네. 그러나 공주님께서는 그렇게 게으른 군주가 아니지 않습니까.”

16550951589223.jpg“필요하다면 게을러질 수 있어요. 여하간 약속을 지켜 준 건 치하하겠어요. 사례는 왕실 집무실에 무단으로 침입한 것을 눈감아 주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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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51632768.jpg“이런, 생각지도 못한 관대한 처사십니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리에네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16550951589223.jpg“그리고 그대에게 할 말이 있어요.”

16550951632768.jpg“음? 제게 말씀입니까?”

페르모스가 얼마나 머리 회전이 빠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블랙에게 무언가를 감추며 그를 상대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리에네는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16550951589223.jpg“클리마 종제에 관한 일이에요. 내 입으로 종제님이 피 흘리는 것을 봤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건 그때 노인에게 맞아서 그런 거였어요. 그러니 종제님은 대사제를 죽인 범인이 아닙니다. 클리마 종제를 뒤쫓는 건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16550951632768.jpg“아하…….”

페르모스는 쉽게 속지 않았다.

16550951632768.jpg“공주님께서는, 그자를 살리고 싶은 모양이로군요. 맞습니까?”

16550951589223.jpg“……네.”

16550951632768.jpg“이유가 있을 텐데요.”

리에네는 몰랐지만 블랙은 이미 클리마를 살려 주기로 했다. 그 자리에 페르모스도 있었다.

16550951589223.jpg“범인이 아닌 자를 범인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16550951632768.jpg“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자가 공주님을 납치한 일도 있잖습니까. 그것까지 모른 체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16550951589223.jpg“그건…… 종제님이 범인이 아닐지도 몰라요. 저는 누가 저를 납치했는지, 범인의 얼굴을 보지 못했어요. 깨어나 보니까 거기 혼자 있었고, 곧 로드 티와칸께서 저를 찾아오셨어요.”

16550951632768.jpg“아하.”

페르모스가 한숨도, 웃음도 아닌 애매한 소리를 흘렸다.

16550951632768.jpg“외람되지만 공주님께서는 거짓말을 썩 잘하시는 편이 아닌 것 같습니다.”

16550951589223.jpg“…….”

뭐야. 아이를 가졌다는 말에는 다들 속았으면서. 리에네는 약간 민망해진 얼굴로 애꿎은 옷자락을 구겼다.

16550951589223.jpg“꼭 그렇지만은 않을걸요. 그리고 내가 납치에 관해 거짓말을 한다는 증거는 없지 않나요?”

16550951632768.jpg“……뭐, 그렇기야 합니다.”

16550951589223.jpg“그럼 내 말을 믿으세요. 클리마 종제는 범인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로드 티와칸께서 동의하지 못하신다면 내가 따로 얘기하겠어요.”

16550951632768.jpg“음……. 뭐, 동의와는 상관없이 공주님께서 부탁을 하면 거절하진 않으실 겁니다.”

페르모스가 마른세수를 하며 쓰게 중얼거렸다.

16550951632768.jpg“오늘은 특히 더 그럴 것 같고요. 방금 전 뵀을 때 무서울 정도로 기분이 좋아 보이셨거든요. 아마도 그건 공주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셨기에 그런 것 같으니 뭐…… 그렇지요.”

16550951589223.jpg“그럼 클리마 종제에 관한 건 얘기가 끝난 걸로 알겠어요.”

16550951632768.jpg“음……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공주님.”

그 종제를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건 확실했다. 블랙도 그렇게 말했으니까. 블랙은 그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페르모스는 블랙과 헨튼 부인이 나눈 짧은 대화에서 많은 것을 알아 버렸다. 블랙은 헨튼 부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네 아들이라고 했다. 그 말은 블랙이 종제뿐 아니라 그의 모친까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헨튼 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블랙을 알아보았다. 그렇다고 반갑거나 기뻐하는 눈치가 아니라 해소되지 않은 원망 같은 게 엿보였다. 두 번은 죽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건 여인에게 또 다른 자식이 있었고, 블랙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블랙이 다른 짓도 아니고 리에네 공주에게 손을 댄 자를 살려 주겠다고 한 건 과거의 빚 때문이 아니었을까. 과거의 빚이 뭔지도 페르모스는 얼핏 짐작을 하는 중이었다. 블랙이 제 입으로 알려주진 않았지만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까지 하지 말란 소리는 하지 않았다. 헨튼 부인은 아홉 개의 폭포라고 했고, 블랙은 그걸 무리 없이 알아들었다. 한때 아홉 개의 폭포가 남단에서 가장 부유했던 나우크 왕국의 상징이었던 것을 보면 블랙은 예전 왕실의 핏줄이거나 할 것이다. 그렇다면 궁금해지는 것은 리에네와 블랙의 관계였다. 블랙이 리에네에게 진심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과연 리에네는 어떨까. 어떻기에 블랙이 빚을 지고 있는 자를 살려 두라고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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