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서로 닮은 사람들2021.10.27.
리에네가 물었다.
“무슨 문제인가요?”
“아시다시피 두 분의 혼인식에는 리세베리 조약이라는 걸림돌이 있지 않습니까? 공주님께서는 그걸 뒤엎을 수 있는 게 신전이라 하셨고요. 그런데 지금 대사제는 공석이고, 그 대사제를 임명할 수 있는 건 공교롭게도 리세베리 조약을 맺은 그 썩을 것들이고, 그래서 해답이 됐던 게 그 종제 아닙니까.”
그랬다. 클라인펠터가 클리마를 시켜 대사제를 죽이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공개해 신전과 클라인펠터 가의 밀월 관계도 끊어낼 계획이었다. 클리마가 사라지면 그 계획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재고해 주십시오, 공주님. 그자의 죄를 지우면 두 분의 혼인식은 얼마나 더 늦춰질지 모릅니다.”
“……그래도 그를 죽여서는 안 돼요.”
“그럼 이유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그자를 살려야 하는 이유를.”
“…….”
리에네가 잠깐 숨을 들이쉬었다. 리에네에게도 클리마의 목숨은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페르모스는 철저히 블랙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블랙을 위해서라고 하면 따라 줄 것이다. 리에네가 길게 들이마신 숨을 내뱉으며 운을 뗐다.
“나는 아이를 가진 적이 없어요.”
“아, 저도 들었습니다. 비록 주군의 아이는 아니었지만 심히 유감…… 아니, 잠깐. 뭐라고요? 가진 적이 없다니?”
별로 마음에 없는 위로의 말을 건네려던 페르모스가 자신의 착각을 깨닫고 눈을 부릅떴다.
“처음부터…… 아니었다고요? 그게 사실입니까?”
“네.”
“주군께서는 알고 계신…… 아, 그렇겠군요. 그래서 그렇게 얼빠져 보일 정도로 기분이 좋으셨…… 아니, 이건 못 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아시겠지만 주군은 평소에 감정 표현이 별로 없으셔서 말입니다. 얼빠져 보인다고 한 게 저희들한테나 충격적이지 다른 사람이라면 봐도 몰랐을 겁니다.”
그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리에네는 블랙이 얼빠진 표정을 짓는 걸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제 눈에는 보기 좋으리라는 건 확신했다. 부드럽고 다정해 보이겠지. 행복해 보일지도 모르고. ……생각하니 나도 보고 싶네. 그 사람이.
“나는 끝까지 거짓말을 이어 갈 생각이었어요. 그렇게 아르사크 가문의 통치권을 지킬 계산을 해두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바뀌셨다는 겁니까?”
“네.”
“어째서요?”
“내가 그대의 수장에게 진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
페르모스는 놀랐다는 듯, 부지런히도 눈을 끔벅거렸다. 눈꺼풀이 열렸다 닫힐 때마다 외알 안경에서 자꾸 달칵 소리가 났다.
“더는 그 앞에서 계산하고 있을 것도, 내가 손해라도 볼까 아까워할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로드 티와칸이 나우크의 통치자가 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라고 믿어요.”
“그야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저는 좀 얼떨떨합니다. 공주님께서 진심이 되셨다니 마땅히 환영할 일입니다만 너무 이른 듯싶기도 하고……?”
“내 말이 거짓이라 생각하나요?”
리에네는 차분하게 페르모스를 마주 보았다. 거짓말은 조금도 없었다. 리에네는 숨기려 하는 게 있을 뿐, 지금 하는 말은 모두 진실이었다. 방금 전 리에네에게 거짓말이 서툴다고 한 사람은 페르모스였다. 진실을 얘기하는 표정을, 눈빛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아닙니다. 방금 드린 말은 잊으십시오. 제가 말을 보탤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주군께 충심을 맹세한 자로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는 그래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 주고 싶어요. 로드 티와칸과 앞으로 이어질 그의 핏줄이 이 땅의 정당한 통치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음, 그렇게까지 생각을 하시는군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 종제의 죄를 덮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상관이 있어요. 나는 그렇게 믿어요.”
“흐음……. 거기까지는 말을 아끼실 모양이군요.”
“누군가를 위하는 방법은 때에 따라 다름을 알아 두세요. 지금 내가 말을 아끼는 것도, 누군가의 죄를 덮는 것도 로드 티와칸을 위한 일입니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온통 그 남자밖에 없어요.”
“그,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너무 솔직하면 누군가에는 창이 되기도 했다. 페르모스는 공연히 어딘가 찔린 것처럼 뜨끔한 기분이 들어 잠깐 말을 더듬었다. 약간 아귀가 어긋난 느낌은 있었지만, 두 사람이 하는 짓은 똑같았다. 진심이 됐고, 그래서 서로를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들었다. 그중 하나가 종제 클리마를 살려 두는 것이었다. 뭔가 좀, 두 분이 같은 일을 서로 다르게 하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데. 두 분 다 말을 안 하시니 알 수가 있나. 페르모스가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인간은 저와 비슷한 인간에게 정을 준다더니, 두 사람을 보면 맞는 말인 듯싶었다. 전혀 달라 보이는 두 사람이 속은 은근히 닮아 있었다.
“그렇다면 달리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러자 리에네가 정말로 안도했다는 듯,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엇……. 네, 감사합니다.”
순간 페르모스는 저도 모르게 당황해 맞지 않는 인사말을 해버렸다.
“경은 어떤 게 감사하다는 건가요?”
“아니, 그렇게 웃으시니까, 그게 참 눈이 즐겁고 감사할 일…… 아니, 아닙니다. 제가 감히 무슨 말을……. 이, 이만 가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페르모스가 후다닥 일어나 제대로 예의도 차리지 않은 채 뛰쳐나갔다.
“……?”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모습이라 리에네는 잠시 의아해졌다. 페르모스에게 매번 예의를 챙겨 받을 생각은 없다지만 이상한 일이긴 했다.
“종제님은 그럼…… 아냐, 그래도 은신처를 마련해 줘야 해. 신전에 계속 머무르면 클라인펠터 가가 손을 댈 수도 있어.”
할 일이 많았다. 클라인펠터 가에 인질처럼 잡혀 일꾼으로 일하고 있다는 헨튼 부인도 구해야 했다.
“그건 또 어떻게 해야 하지…….”
하지만 조금도 할 필요가 없는 고민이었다. 헨튼 부인은 이미 다른 곳에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가깝고 안전한 곳에. * * * 클라인펠터 가가 깡그리 뒤엎어졌다는 얘기는 남은 다섯 가문을 분노에 떨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저 몸이 떨린 걸 수도 있었다. 아무리 린든 클라인펠터가 자리를 비웠다지만 그 저택의 문이 그렇게 쉽게 부서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것은 티와칸의 무력이 그들 전부를 합친 것보다 더 강대하다는 얘기였고, 그러니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빌어먹을.”
엘라로이덴이 체면을 구긴 채 욕설을 내뱉었다. 방문 사실을 알렸음에도 로사델 가의 저택은 벌써 십 분이 넘게 열리지 않고 있었다. 대체 무슨 놈의 일꾼들이 이리 굼뜬 건지, 이 정도 욕도 너무 점잖았다.
“어서 열지 않고 뭐 하는 게냐. 놈들이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여섯 가문의 위기였다. 두루뭉술한 정치적 위기 같은 게 아니라, 직접 살갗에 와 닿는 살벌한 위협이었다. 이대로 있으면 티와칸이라는 이름의 야만인들에게 가진 것을 전부 빼앗길 것이다. 여섯 가문이 힘을 합해야 했다. 전쟁이든 반역이든 티와칸을 몰아낼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해야 했다. 이런 일은 원래 클라인펠터가 나서야 했지만, 감옥에 갇혀 있는 터라 어쩔 수 없이 그가 직접 위험을 감수하고 몸을 움직여야 했다. 요새 나우크 성 안은 언제 어디서 티와칸이 튀어나올지 모르기에 집 밖으로 나서는 일조차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그는 본의 아니게 죄를 지었다. 린든 클라인펠터가 시키는 대로 그 집 심부름꾼에게 말을 전했다. 아직 심부름꾼이 잡혔다는 말은 없지만 티와칸은 이미 대의장의 집을 짓밟았다. 제 집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리에네 공주가 돌아왔는지 어쨌는지 남은 다섯 집은 아직 무사했지만, 그것도 모를 일이었다. 탕탕! 초조해진 엘라로이덴은 힘을 주어 로사델 가의 대문을 두드렸다. 티와칸의 눈을 피한답시고 호위도 놔두고 일꾼의 옷을 입고 왔더니 이런 일도 직접 해야 했다.
“문을 열어! 어서 열란 말이다!”
쿵! 끼이익! 결국 문이 열리긴 했다.
“쉿……. 조용히 하시랍니다.”
문을 연 자는 로사델 가의 집사였다. 엘라로이덴이 울컥 성질을 부렸다.
“그럴 거면 문을 빨리 열면 되지 않았나! 왜 사람을 문 밖에 세워 두는 게야!”
“주인님께서는 경을 뵙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그만 돌아가시는 게…….”
“뭐라고?”
엘라로이덴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감히 나를…… 저리 비켜!”
엘라로이덴은 강제로 문을 밀고 들어섰다.
“아니, 안 됩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경!”
“닥치고 로사델 경을 불러와라. 감히 어디서 하라 마라 하는 게냐.”
“주인님께서는 나오시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문을 연 것도 이 말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닥쳐! 로사델 경! 사람이 왔는데 이러는 게 어디 있소! 어서 나오시오!”
엘라로이덴은 막무가내로 걸음을 이었다. 집사가 말려 보려고 애를 썼지만 함부로 손을 쓸 수도 없는지라 발을 동동 구르는 게 다였다.
“로사델 경! 나오시오! 비겁하게 혼자 숨는다고 괜찮을 줄 아시오? 그 야만인들이 숨는다고 가만 놔둘 것 같냐고!”
“아이고, 경! 목소리를 낮춰 주십시오. 주인님은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뭔데?”
집사가 곤란해하며 입을 다무는데, 로사델이 나타났다.
“조용히 하시오, 경.”
“……? 로사델 경?”
엘라로이덴이 입을 딱 벌렸다. 기운 없는 걸음걸이부터가 수상했는데, 얼굴이 그새 반쪽이 됐다. 사병 열여섯을 한 자리에서 잃은 로사델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쓰러져 앓던 중이었다. 그나마 하나는 살아 돌아왔다. 대신 팔 하나를 잃어 이젠 기사라고 부를 수도 없게 되었다. 이백이나 되는 사병 중 열여섯을 잃은 게 별거 아니라고 할지는 몰라도, 로사델에게는 아니었다. 그 열여섯이 한 시간도 채 안 돼서 썩은 수수깡처럼 잘려나갔다고 했다. 그것도 떼로 덤벼든 게 아니라 단 한 놈이 그랬다고 했다. 티와칸은 재앙이었다.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로사델은 이미 전의를 잃었다.
“무슨 일로 왔는지는 알겠으나 그러지 마시오. 나는 빠지겠소. ……경도 그만 돌아가시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게요!”
로사델은 엘라로이덴을 응접실까지 들이지도 않았다. 안마당에서 그냥 돌려보내려고 들었다.
“빠지겠다니?”
“티와칸과 싸우고 싶지 않소. 그건 못 할 짓이야…….”
“정신 차리시오, 경! 경이 그런다고 티와칸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소? 이미 클라인펠터의 말을 심부름꾼에게 전한 일로…….”
“경!”
로사델이 질겁하며 엘라로이덴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무, 무슨……! 그건 경이 혼자 한 일이잖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대의장과 얘기를 나눈 것도 경 혼자잖소!”
“야만인들이 그런 걸 신경이나 쓸 것 같소? 그날 클라인펠터 경을 마주한 이는 둘이니 거기서 끝난 일이오!”
“아아……. 아니야.”
로사델이 털썩,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고, 주인님. 이리 찬 데 앉으시면 안 됩니다.”
충성스러운 집사가 로사델을 일으키려 했다. 로사델은 자리에 앉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건 다 클라인펠터 가와 엘라로이덴 가가 한 짓이야…….”
엘라로이덴이 기가 막힌 듯 혀를 차며 주저앉은 로사델을 바라보았다.
“경, 지금 그게 무슨 추태요? 로사델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도 않소?”
“나는 하지 않았어…… 하지 않았다고…….”
“하, 대체 이게……!”
엘라로이덴이 혀를 차다, 결국은 탄식을 했다. 로사델이 왜 저렇게까지 겁을 집어먹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금 그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건 확실했다.
“좋아. 오늘은 그냥 돌아가겠소이다. 허나 경, 정신 차리시오. 이렇게 나약한 꼴로 가문의 이름을 지킬 수나 있겠소? 지금은 어떻게든 여섯 가문이 힘을 모아야 할 때란 말이오.”
“…….”
로사델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다시 사람을 보내리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 잘 추스르시오.”
엘라로이덴이 홱 몸을 돌렸다. 머리가 바쁘게 굴러갔다. 로사델을 제외한 다른 가문과 접촉을 해야 할지, 아니면 아무 일 없는 척 몸을 사리고 일이 돌아가는 꼴을 좀 더 지켜봐야 할지 결론을 내려야 했다.
“리에네 공주가 어찌 되었다는 얘기가 아직 없으니……. 핑계를 대고 성 안에 사람을 하나 들여놓아야 할까…….”
그가 혼잣말을 중얼대며 방금 전 들어온 대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 ……으, 흐어!”
처음에는 눈이 잘못된 줄 알았다. 대문을 여는 순간 보이는 것은 검은 갑옷을 입은 자들이었다.
“티, 티와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