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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찢어진 예복 (61/145)

61. 찢어진 예복2021.10.31.

엘라로이덴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도로 문을 닫으려 했다. 쾅!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16550952071029.jpg“목소리가 크던데.”

티와칸의 수장이 느린 음성을 흘렸다.

16550952071029.jpg“덕분에 잘 들었다. 밖에서도.”

16550952071038.jpg“뭐, 뭘……? 뭘?”

블랙은 그 말에는 대꾸 없이 엘라로이덴의 가슴을 걷어찼다. 퍽!

16550952071038.jpg“으허어…… 억!”

엘라로이덴이 길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가슴을 움켜쥐고 뒹굴던 그를, 블랙이 말 한마디로 얌전히 있게 했다.

16550952071029.jpg“안 움직이는 게 좋아. 뼈가 나갔을 테니. 잘못 움직이면 폐가 찔려.”

16550952071038.jpg“……!”

16550952071029.jpg“그래서 죽으면 나야 편하지만.”

16550952071038.jpg“…….”

그 말에 엘라로이덴은 더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 자세로 굳어 눈만 굴릴 뿐이었다.

16550952071038.jpg“주, 주인님……. 이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로사델 가의 집사가 어쩔 줄 모르고 주인을 부축했다. 로사델은 겁에 질려 두 발로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16550952071038.jpg“왜, 왜…… 왜 내 집에…… 어, 어떻……. 무, 무얼…….”

비틀대며 집사에게 온몸을 기대고 있는 로사델을 향해 블랙이 걸음을 옮겼다.

16550952071038.jpg“가, 가까이 오지 마……. 으으……!”

허둥지둥 뒷걸음질을 하던 로사델이 도로 넘어졌다. 로사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자빠지자 블랙은 그 앞에 여유롭게 앉았다.

16550952071038.jpg“왜, 왜 앉는 거야…….”

눈높이가 더 가까워지자 로사델은 오히려 그걸 더 못 견디겠던지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무서워서 더는 달아나지도 못했다. 앉은 자리에서 허둥대고만 있는 로사델을 무감하게 바라보며 블랙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16550952071029.jpg“이백십일. 열여섯…… 아니, 열다섯이 빠졌으니 백아흔다섯.”

16550952071038.jpg“……? 허, 으헛! 그, 그걸 어떻게……!”

로사델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블랙이 읊은 숫자는 로사델 가의 사병이었다. 로사델은 대체 그걸 티와칸이 어떻게 끝자리 숫자까지 정확히 알고 있는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블랙은 반대로 어떻게 여섯 가문의 사병 숫자를 티와칸이 이제껏 파악하지 않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지, 그 멍청함을 더 믿을 수가 없었다. 적의 병력 규모를 파악하는 것은 전투에서 가장 기본이었다.

16550952071029.jpg“그중에 기사라 부를 것들은 스물쯤 되겠군. 지금 여기 있는 것들은 그중에서 네다섯이겠고. 다 합쳐 봤자 오십 남짓이겠군.”

16550952071038.jpg“어, 어떻게!”

블랙이 입을 열 수록 로사델의 표정은 가관이 되어갔다.

16550952071029.jpg“숫자는 셀 수 있을 테니 말해 봐. 오늘 여기 온 티와칸이 몇인지.”

16550952071038.jpg“어, 어…… 뭐?”

16550952071029.jpg“묻지 말고. 네가 할 건 답이다.”

16550952071038.jpg“어, 어…… 어…… 그…….”

로사델이 너무 겁을 먹고 비틀대자 보다 못한 집사가 숫자를 셌다.

16550952071038.jpg“여덟입니다, 주인님.”

16550952071038.jpg“여, 여덟…….”

멍하니 집사의 말을 따라 하는 로사델에게 블랙이 다시 물었다.

16550952071029.jpg“그럼 계산을 해 봐. 혼자서 열여섯을 상대하는 인간들이 여덟이다. 네 집에 있는 오십을 상대하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16550952071038.jpg“그, 그…… 어, 어?”

계산이 불가능했다. 그냥 눈 깜짝할 사이에 전부 다 목이 잘린다고 생각하면 될 듯싶었다. 블랙은 지루한 구경을 하는 사람처럼 검지로 제 뺨을 툭툭 쳤다.

16550952071029.jpg“계산이 끝났나? 원하면 불러 보든지.”

16550952071038.jpg“아, 아니…….”

로사델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저택에 있는 사병들을 불러 모아 봤자 어차피 죽을 것이다. 사병들을 사지에 밀어 넣고 저 혼자 도망친다 한들,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연히 쫓기는 신세가 되느니 얌전히 무슨 말을 하는지나 들어보는 게 나았다.

16550952071038.jpg“왜…… 내, 내게 무얼 원하시오…….”

16550952071029.jpg“간단해. 곧 있을 대의회에서 너희들이 상식적인 발언을 하면 된다.”

16550952071038.jpg“사, 상식적……? ……이라면…….”

16550952071029.jpg“왕족에게 위해를 가한 인간은 반란죄로 다스려야 한다는, 그런 당연한 일.”

16550952071038.jpg“흐업…….”

그러자 로사델은 입술에 아교 칠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블랙은 일부러인 듯 작은 한숨을 말 사이에 흘렸다.

16550952071029.jpg“너희들은 운이 좋아. 오늘은 내가 좀, 미친 것처럼 기분이 좋은 날이라.”

16550952071038.jpg“……?”

16550952071029.jpg“쓸데없이 목을 따진 않겠다. 대답만 하면.”

16550952071038.jpg“그, 그럼…….”

16550952071029.jpg“너희들끼리 입을 맞춰도 돼. 모든 건 클라인펠터가 혼자 알아서 했다고 속아 주겠다.”

16550952071038.jpg“……아!”

로사델은 비로소 블랙이 말하는 바를 온전히 이해했다. 대의회를 통해서 클라인펠터 하나만 처벌하겠다는 뜻이었다. 고맙게도 먼저 와서 빠져나갈 길을 만들어 준 것이다.

16550952071038.jpg“아, 알겠소이다! 그리하겠소이다!”

16550952071038.jpg“로사델 경!”

로사델이 고개를 마구 끄덕이자 엘라로이덴이 기겁해 소리를 쳤지만 길진 않았다. 갈비뼈 부근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워 혀를 빼물고 숨을 헉헉대기 바쁜 탓이었다.

16550952071029.jpg“좋아.”

블랙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마치 악수를 청하듯이 로사델에게 손을 내밀었다.

16550952071038.jpg“……?”

로사델이 주춤대며 블랙이 내민 손을 잡았다. 왼손이었다. 그래서 티와칸의 수장이 왼손잡이인가 보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손이 잡히는 순간, 그대로 손목이 뒤로 홱 꺾였다.

16550952071038.jpg“……으헉!”

왼쪽 손목이 깔끔하게 부러졌다.

16550952071029.jpg“오른손을 남겨 둔 건 네가 서명할 일이 있어서야. 혹시라도 서명이 하기 싫어질 땐 그 손이 붙어 있는 이유를 곱씹어 봐라.”

바꿔 말하면, 서명을 하지 않으면 오른손도 부러질 거라는 협박이었다.

16550952071038.jpg“으으, 으으…… 으으으!”

16550952071038.jpg“아이고, 주인님…….”

블랙은 부러진 손목을 움켜쥔 채 흐느끼는 로사델을 뒤에 두고 몸을 돌렸다. 엘라로이덴을 향해서였다.

16550952071029.jpg“내가 부러트린 뼈는 세 개야.”

블랙이 다가서자 엘라로이덴이 침을 꿀꺽 삼켰다.

16550952071029.jpg“계산을 잘하도록. 그 이상 부러지면 낫기도 힘들어.”

16550952071038.jpg“…….”

16550952071029.jpg“이런 말까지 해 주는 내가 나도 어이가 없지만…… 그래도 정말로 기분이 좋아서.”

엘라로이덴은 기분이 좋다는 인간이 다짜고짜 남의 갈비뼈를 세 대나 부러트리냐고, 이쪽이야말로 상식적인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갈비뼈가 너무 아팠다.

16550952071029.jpg“너도 오른손은 남겨주겠다.”

16550952071038.jpg“……? 아, 안 돼!”

그 말에 엘라로이덴이 왼손을 움켜쥐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블랙은 왼손을 부러트리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블랙이 고개를 돌려 도끼를 쥔 용병에게 손짓을 했다.

16550952071029.jpg“발목. 아무 쪽이나. 나을 수는 있게 해라.”

16550952071038.jpg“네, 주군.”

16550952071038.jpg“바, 발목? 무, 무슨 짓을……! 안 돼!”

저항은 이미 늦은 감이 있었다. 티와칸의 용병은 아주 산뜻한 태도로 도끼를 거꾸로 잡아 엘라로이덴의 복사뼈 아래를 퍽 내리쳤다.

16550952071038.jpg“으으, 으악! 으헉! 억!”

비명을 지르는 엘라로이덴의 입에서 침이 튀었다. 그래도 발목이 잘리거나 완전히 못쓰게 되지는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엘라로이덴의 입장에서는 그게 더 무섭게 인지되었다. 티와칸은 얼마든지 제 다리를 못 쓰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티와칸의 수장이 오늘따라 기분이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 저런 예측불허인 인간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엘라로이덴은 조금도 몰랐다. 반면에 10년을 전쟁터에서 구르며 상대를 이기는 것만 해왔던 블랙에게 엘라로이덴 같은 인간을 다루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블랙은 티와칸의 용병들에게는 이상할 정도로 온화한 표정으로, 물론 다른 사람들은 펄쩍 뛰며 부정할 일이었지만, 하여간 그렇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16550952071029.jpg“서명을 할 때까지 잘 기억해라. 너희들 몸에는 서명할 때 외에는 별 쓸모가 없는 부위가 아직도 많다는 걸.”

16550952071038.jpg“……!”

16550952071038.jpg“흐…….”

블랙의 방식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로사델은 블랙이 저를 발가벗겨 노예 상인한테 팔겠다는 증서를 내밀어도 기꺼이 서명할 준비가 되었다.

16550952071029.jpg“다른 세 가문에도 전해.”

16550952071038.jpg“…….”

16550952071038.jpg“…….”

대답은 없었지만 다들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볼일을 마친 블랙은 가볍게 몸을 돌려 로사델 가를 떠났다. 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르자 기분이 한결 더 무섭도록 좋아졌다. 그곳에는 리에네가 있을 테니까. * * *

16550952071038.jpg“이쪽으로 와 보세요, 공주님.”

플램바드 부인이 신이 나서 리에네를 잡아끌었다.

16550952071038.jpg“옷걸이에 걸어 두었더니 너무 근사해 보이지 뭡니까. 직접 보셔야지요.”

부인은 블랙이 입을 혼례복이 다 되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리에네가 언젠가 말했던 대로, 부인은 간만에 화려한 의상을 만지게 되어 몹시 신이 난 상태였다.

16550952071038.jpg“손에 들고 보면 다 모릅니다. 입혀 보는 게 제일 좋지만 그러기 쉽지 않으니 아쉬운 대로 옷걸이라도 써봐야지요.”

부인이 걸음을 서두르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 남자를 나보다 더 싫어하는 것 같았는데. 이젠 안 그런가 봐. 나보다 더 혼인식을 기대하는 사람처럼 보여.

16550952071038.jpg“어서요, 공주님. 제가 이걸 보여드리고 싶어서 얼마나 애가 탔는지 아십니까.”

부인이 달뜬 얼굴로 자신의 방 문을 열었다.

16550952071038.jpg“아앗……!”

그리고 비명을 질렀다. 비어 있어야 할 부인의 방에는 누가 있었다. 마르고 창백한, 꼭 유령 같은 누군가가. 비명이 나온 이유는 처음 보는 그 여인이 가위를 들고 있는 탓이었다. 플램바드 부인이 바느질을 할 때 쓰는 그 가위였다. 서걱! 여인은 비명이 들려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눈앞의 옷에 가위 날을 꽂았다. 찌이익!    옷감이 길게 찢겼다. 부인이 방금 완성했다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혼례식 예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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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52071038.jpg“안 돼! 이게 무슨 짓이냐!”

너무 놀란 나머지 뒤늦게 정신을 차린 플램바드 부인이 유령 같은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16550952071038.jpg“이게 어떤 옷인데! 너는 대체 누구야! 왜 이런 짓을 저지르고 있느냐!”

여인은 플램바드 부인이 제 몸을 붙드는데도 계속 옷을 찢으려 들었다. 그럴수록 부인은 더 경악을 금치 못했고, 몸싸움은 과격해질 것 같았다.

16550952204977.jpg“그만둬요! 위험해요!”

하마터면 부인이 다칠까 싶었다. 리에네는 한데 엉킨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가 유령 같은 여인의 손목을 붙들었다.

16550952071038.jpg“……놔!”

여인이 소리를 질렀다.

16550952204977.jpg“가위를 놓아요. 어서.”

리에네는 있는 힘껏 여인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그사이 부인이 여인의 가슴팍을 떠밀자 결국 가위가 손을 떠났다. 덜컹! 가위가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여인도 바닥으로 쓰러졌다.

16550952071038.jpg“……흑!”

여인의 입에서 억눌린 울음이 터졌다. 생김새에 비해 머리가 이상할 정도로 새어 있었다. 플램바드 부인이 왈칵 소리를 질렀다.

16550952071038.jpg“어디서 우는 게야! 진짜 울고 싶은 사람은 난데!”

부인이 참지 못하고 옷을 망친 여인의 머리채라도 잡아당길 것 같아서 리에네가 재빨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16550952204977.jpg“누군가요.”

기분이 이상했다. 혼례식 옷이 저렇게 엉망이 되었다는 게 사실 지금도 잘 믿기지 않았다. 잠깐 선잠이 들었을 때 꾸는, 밑도 끝도 없는 꿈처럼 현실감이 하나도 없었다.

16550952204977.jpg“누군데 성에 들어왔나요. 어떻게?”

16550952071038.jpg“…….”

16550952204977.jpg“이 옷은 왜 이렇게 만들었나요? 이 옷이 어떤 옷인지 알고 한 짓인가요?”

16550952071038.jpg“…….”

16550952204977.jpg“대답해요. 나는 그대를 벌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16550952071038.jpg“……럼, ……세요.”

마침내 여인이 입을 열었다.

16550952204977.jpg“……? 뭐라고 했나요?”

16550952071038.jpg“그럼 목을 자르시라고 했습니다.”

여인이 홱 고개를 치켜들었다.

16550952071038.jpg“죽이십시오. 이제는 두려울 게 없는 몸입니다. 죽고 싶어도 죽지도 못하는 삶은 이제 끝났습니다.”

16550952204977.jpg“……?”

플램바드 부인이 기가 차다는 듯 리에네의 등 뒤에서 발을 쿵쿵 굴렀다.

16550952071038.jpg“대체 어디서 이런 자가……. 미친 게 틀림없습니다, 공주님. 이러지 마시고 경비대를 불러서 끌어내야겠습니다.”

16550952204977.jpg“이유는 알아야죠. ……왜 두려울 게 없나요?”

뒷말은 다시 여인을 향했다. 여인은 입을 꾹 다물고 리에네를 노려보았다. 플램바드 부인은 그 불손함에 기절할 지경이었지만, 리에네는 왠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닮았어. 정말 이상한데, 닮았어. 여인은 클리마와 닮았다. 순하고 유약해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망가져 있는 듯한 커다란 갈색 눈이 비슷했다.

16550952204977.jpg“그건 이전까지는 두려워하는 게 있었다는 말이겠군요. 뭐가 무서웠나요.”

여인은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질문을 한 리에네가 답을 했다.

16550952204977.jpg“클라인펠터가? 아니면 그래서 아들이 망가지는 게?”

16550952071038.jpg“……? 뭐……라고요?”

다시는 입을 열지 않을 것 같던 여인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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