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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어울리지 않는 옷 (62/145)

62. 어울리지 않는 옷2021.11.03.

역시나 여인은 클리마와 관계가 있었다. 클리마는 클라인펠터가 모친을 인질로 잡아 가두었다고 했다. 그래서 클라인펠터가 시키는 일을 해야 했노라고.

16550952644948.jpg“그렇다면 지금도 무서워해야 해요. 그대가 목숨을 잃는다면 그대의 아들은 두 번 다시 낫지 않을 겁니다. 종제님을 지탱하고 있던 건 모친의 존재였어요. 그것마저 사라지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봐요.”

16550952644955.jpg“어, 어떻…… 어떻게……? 그걸 어떻게 알고 있…….”

여인은 기사 헨튼의 부인이 맞았다.

16550952644955.jpg“그 아이를 어, 어떻게? 아르사크의 딸이?”

헨튼 부인이 더듬더듬 손을 뻗어 리에네의 옷자락을 부둥켜 쥐었다.

16550952644955.jpg“그 아이를 어떻게 했습니까? 설마 그 아이를…….”

너무 창백한 헨튼 부인은 20년 동안 햇볕을 한 번도 쬐지 못하고 지낸 사람 같았다. 그것도 나의 죄야. 기사 헨튼의 가족들이 이름을 버린 채 클라인펠터의 어두운 그림자로 살아야 했던 이유 또한 20년 전의 반란이었다.

16550952644948.jpg“종제님은 무사해요.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게 밝혀졌으니 곧 그대의 품으로 돌아올 겁니다.”

16550952644955.jpg“아, 아…….”

헨튼 부인이 울컥 젖은 숨을 내쉬었다. 안도와 동시에 사라지지 않은 혼란이 리에네를 응시했다.

16550952644955.jpg“그런데 왜…… 아르사크의 딸이 그걸…….”

16550952644948.jpg“종제님이 말해 줬어요.”

16550952644955.jpg“아, 그, 그럼? 그럼 그…… 설마 그…….”

창백한 갈색 눈이 무섭도록 흔들렸다. 리에네는 헨튼 부인이 하려는 말을 알아들었다. 부인에게는 아직도 20년 전이 어제와 같을 것이다. 반역의 주축이었던 아르사크의 딸은 부인에게 클라인펠터보다 더한 위협이자 악몽이었다.

16550952644948.jpg“나와의 혼인으로 로드 티와칸은 나우크의 공동 통치자가 됩니다, 부인.”

리에네는 주의 깊게 헨튼이라는 이름을 감추었다. 헨튼의 가족들이 살아 있는 것을 몰라야 하는 인간이 아직 너무 많았다. 성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제 편이라 해도 위험했다.

16550952644948.jpg“나는 그 사람의 피가 나우크의 통치권을 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될 거예요.”

16550952644955.jpg“그, 그게…… 저는 잘……. 어떻게…… 그게 정말입니까? 그럴 수 있습니까? 아, 아르사크의 딸이?”

16550952644948.jpg“아르사크의 딸이니까요.”

리에네가 헨튼 부인에게 경의를 표하듯 고개를 숙여 보였다.

16550952644948.jpg“내가 책임져야 할 일들이 있다는 걸 압니다. 부인과 종제님 또한 그 책임의 일부입니다. 힘이 닿는 한 두 사람을 보호하겠어요.”

16550952644955.jpg“그럴 리가…….”

리에네의 말을 믿지 못하는 건 플램바드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16550952644955.jpg“아니, 공주님……? 혼례복을 이리 망가트렸는데 보호하신다고요? 이자가 대체 누구기에 그러시는 겁니까? 혼례복을 망치라는 사주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16550952644955.jpg“이게 혼례복이라고요?”

헨튼 부인의 시선에 다시 뾰족하게 날이 섰다.

16550952644955.jpg“이건 아르사크 왕이 대관식에서 입었던 옷인데 어떻게……!”

16550952644948.jpg“아…….”

헨튼 부인이 날카롭게 내뱉은 소리에 리에네도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거야, 대체. 아바마마의 대관식 복을 그 남자한테 입히려고 하다니. 혼례복 얘기를 처음 꺼냈을 때 블랙이 드러내던 미묘한 침묵도 떠올랐다. 그 남자는 왜 이 옷을 입겠다고 한 거지. 거절하는 게 당연하잖아. 이 옷은 당신에게 피 냄새가 날 텐데. 당신은 왜 그렇게…… 왜 그렇게 다 감추기만 하는 거야. 대체 왜.

16550952644948.jpg“어디 있지?”

리에네가 발밑을 두리번거렸다.

16550952644955.jpg“공주님! 뭐 하십니까?”

16550952644948.jpg“가위…… 가위가 어디 있죠?”

16550952644955.jpg“가위요? 가위는 아까…… 아, 저기 있습니다. 그런데 가위는 왜 찾으십니까?”

플램바드 부인이 영문도 모른 채 바닥에 떨어진 가위를 주워 주려고 했다. 리에네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부인을 밀어내고 가위를 집어 들었다. 철컹! 제대로 쥐지 않은 가위 날이 손바닥을 스쳤다.

16550952644955.jpg“공주님!”

리에네가 가위 날로 혼례복을 내리그었다. 찌익!

16550952644955.jpg“공주님! 공주님!”

플램바드 부인이 기절할 것처럼 놀라 저를 부르는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려왔다. 머릿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전부 다 아득했다.

16550952644948.jpg“미쳤어…….”

우리 관계는, 이 옷하고 똑같아. 죽이고 죽였던 과거는 사라지지 않아. 헨튼 부인 같은 사람은 또 있을 거야. 내가 그 남자한테 진심이라고 하면 기가 차서 못 믿을, 그런 사람들. 무슨 자격이냐고 묻겠지. 무슨 자격으로 그 남자를 사랑할 생각이냐고. 나도 알아. 내 이름이 아르사크라서 더욱 그래야 한다는 건 개소리야. 나는 그저 무서운 거겠지. 과거를 전부 알게 된 그 남자가 내게 줬던 마음을 도로 가져가는 게. 두 번 다시 나를 지금처럼 바라보지 않는 게. 그 눈이 더 이상 뜨겁고 다정하지 않는 게. 나를 원수의 딸로 대하는 게. 찌이익! 찍! 퍽! 알고 있었다. 아무리 옷을 찢은들 과거는 찢을 수 없다는 것을. 그래도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전부 다 조각내서 없애 버리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퍼억, 퍽! 어느샌가 리에네는 가위 날을 칼처럼 쥐고서 혼례복을 찌르고 있었다.

16550952644955.jpg“……주님, 공주님! 공주님!”

플램바드 부인의 숨넘어가는 비명 소리가 선명해지는 것과 동시에 손목이 붙들렸다. 손목을 쥔 손이 가위를 강제로 빼앗아 저 멀리 던져 버렸다.

1655095268878.jpg“진정해요.”

16550952644948.jpg“……?”

귓가를 파고드는 음성은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봐 꿈에서도 무서운 그 낮고 깊은 목소리였다.

1655095268878.jpg“혼인이 싫어도 이런 짓은 하지 마.”

16550952644948.jpg“…….”

제 손을 붙잡은 블랙이 검은 눈썹을 아프도록 구긴 채 서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가위 날에 엉망으로 베인 손바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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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0952644955.jpg“……다 됐습니다, 공주님.”

플램바드 부인이 붕대를 묶어 고정시켰다. 약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도 정신이 없는 탓인지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16550952644955.jpg“당분간 손을 아끼세요. 씻을 때도 제가 거들 테니 절대 혼자 하지 마셔요. 아시겠습니까?”

16550952644948.jpg“……그래요.”

16550952644955.jpg“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인이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약을 챙겨 들고 나갔다. 마음은 밤새도록 곁에 붙어 상처를 돌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자신보다 더 간절한 사람에게 자리를 내줘야 하는 순간이었다. 플램바드 부인이 미적대는 걸음으로 사라지자 침실에는 블랙과 리에네 둘만이 남았다. 침실 안은 계속 어둑해지고 있었지만, 둘 다 불을 켤 생각을 하지 않았다.

1655095268878.jpg“아플 겁니다. 나중에라도.”

침대 발치의 기둥에 어깨를 기대고 서 있던 블랙이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16550952644948.jpg“……네.”

리에네는 뭐라고 대꾸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어둠이 무거웠다. 어깨가 짓눌리는 기분에 리에네는 무릎 위에 이마를 묻었다.

1655095268878.jpg“옛날 얘기 중에 이런 게 있었던 것 같은데.”

블랙이 표정을 지운 얼굴로 느닷없이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리에네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1655095268878.jpg“태어난 공주가 물레에 찔려 죽게 될 거라는 예언을 들은 왕이 물레를 전부 태워 버렸다고.”

블랙이 저런 말을 한다는 게 뜬금없으면서도 어느 한 구석은 다정하게 느껴졌다. 저 남자가 저렇게 안 어울리는 소리도 하네. 내가 다쳤다고.

16550952644948.jpg“그럼 안 되는데. 물레가 없으면 실을 못 만드니까.”

1655095268878.jpg“가위라서 다행입니다.”

16550952644948.jpg“네?”

1655095268878.jpg“그건 없어도 크게 지장 있는 물건은 아니라.”

16550952644948.jpg“…….”

가위를 없애겠다는 어이없는 말이 설마 진심일까 싶어 블랙을 바라보았다. 블랙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1655095268878.jpg“내가 못 할 것 같습니까?”

……어쩌지. 진심인가 보다.

16550952644948.jpg“그래도 안 돼요. 가위가 없으면 플램바드 부인은 매일 울 걸요.”

1655095268878.jpg“울라고 해요.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16550952644948.jpg“……그냥 가위질을 부인한테 맡기면 되지 않을까요. 제가 당분간 가위는 쓰지 않을게요.”

1655095268878.jpg“당분간이 아니라 계속.”

16550952644948.jpg“……계속이요?”

1655095268878.jpg“대답해요.”

16550952644948.jpg“…….”

진심이구나. 이런 일에도. 내가 다쳤으니까. 당신은…… 대체 왜 이래요. 어떻게 이래요. 나한테 그 많은 진심을 다 주면 나중에 어떡하려고요. 그가 주는 진심이 많을수록, 그걸 잃게 될 때의 상실감도 크고 사나울 것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이 남자도 그럴 텐데. 도로 가져간다고 해도 한 번 남에게 준 이상 예전 같지 않을 텐데. 더러워지고 상처 입을 텐데.

16550952644948.jpg“금방 나아요. 살갗이 조금 베인 건데요.”

1655095268878.jpg“공주님은 그럴지 몰라도 나는 아닙니다.”

16550952644948.jpg“…….”

블랙은 침대 기둥에서 느리게 몸을 뗐다. 이쪽으로 다가오려는 듯싶었는데 그게 다였다. 침실에 함께 있는 것치고 두 사람의 거리는 제법 멀었다.

1655095268878.jpg“공주님께 물어야 할 게 있습니다.”

리에네는 새삼 낯설다는 생각을 하며 블랙을 마주했다. 그가 이렇게나 떨어진 거리에 서 있는 게 이상할 정도로 어색했다.

16550952644948.jpg“……네. 얘기하세요.”

1655095268878.jpg“대답이 만약 그렇다, 라면 답하지 말아요.”

16550952644948.jpg“……?”

1655095268878.jpg“혼인을 미루고 싶습니까?”

16550952644948.jpg“네?”

1655095268878.jpg“묻지 말고. 답을 하거나, 아니면 하지 말아요. 사실은 혼인이 싫었던 겁니까?”

블랙의 질문은 난데없는 거리감만큼이나 갑작스러웠다. 리에네가 당황해 답을 할 순간을 놓치자 블랙이 무겁고 느린 한숨을 내쉬었다.

1655095268878.jpg“알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16550952644948.jpg“네……?”

블랙이 빠르게 등을 돌렸다. 그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 문으로 향했다. 그러자 가슴이 쿵 주저앉는 소리를 냈다.

16550952644948.jpg“아니…… 아니에요!”

리에네가 허겁지겁 침대에서 내려왔다. 맨발이라는 것도 잊고 달려가 블랙을 향해 팔을 뻗었다. 뺨이 등에 눌렸다. 리에네는 양손으로 블랙의 옷자락을 힘껏 움켜쥐고 말했다. 입을 잘못 열면 울음소리가 섞일 것 같아 목소리가 작았다.

16550952644948.jpg“그렇지 않아요. ……이렇게 가 버리지 말아요. 그건 싫어.”

1655095268878.jpg“…….”

블랙은 짧은 숨소리를 뱉어냈다.

1655095268878.jpg“그럼 왜 그랬습니까?”

16550952644948.jpg“……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요.”

1655095268878.jpg“뭐가.”

16550952644948.jpg“옷이…… 로드 티와칸께요.”

누가 들어도 거짓말 같을 것이다. 입혀 보지도 않은 옷을 어울리지 않겠다고 가위로 찢어댈 사람은 없었다. 이제야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정신 나간 짓으로 보였을지 느껴졌다. ……바보 같으니. 이러다 원수의 딸이라는 걸 알기도 전에 내 성격에 먼저 질리겠어.

16550952644948.jpg“잘 어울릴 줄 알았는데…… 고쳐 놓고 보니 낡은 태가 나서…… 화가 났어요.”

1655095268878.jpg“…….”

16550952644948.jpg“좋은 걸 해 드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그래서 그냥 다 너무 화가 났어요. 혼인식조차 마음대로 못 하는 공주라는 게, 그게 너무 싫어서…… 그래서…….”

1655095268878.jpg“…….”

블랙은 아주 느리게 제 옷자락을 붙든 리에네의 손을 떼어내고 돌아섰다.

1655095268878.jpg“공주님.”

16550952644948.jpg“네.”

방금 제 혀로 내뱉은 거짓의 무게가 이렇게나 얄팍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블랙이 금방이라도 안 속을 거짓말은 집어치우라고 할까 봐 리에네는 그와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1655095268878.jpg“눈 떠요. 날 봐. 그게 답니까?”

……아니요.

16550952644948.jpg“네.”

1655095268878.jpg“그런데 눈은 왜 못 뜹니까.”

16550952644948.jpg“부끄러워서요. 그런 모습을…… 들켰다는 게.”

무서워서요. 당신이 내가 숨기는 과거를 알아챌까 봐. 그래서 나를 떠날까 봐. 조금 전처럼 단 한 번도 뒤돌아보는 일 없이, 나는 따라잡지 못할 속도로 사라질까 봐. 그리고 다 잊을까 봐. 나라는 사람을, 아주 깨끗이.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리에네를 바라보며 블랙이 말했다.

1655095268878.jpg“혼례복은 아무거나 입어도 상관없습니다. 예물도 필요 없고. 리세베리 조약과는 상관없이 대사제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마련했습니다. 혼인식은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16550952644948.jpg“그, 그렇게 됐다고요? 어떻게…….”

1655095268878.jpg“그러니 공주님은 지금 한 번만 말할 수 있습니다.”

16550952644948.jpg“뭐를…….”

1655095268878.jpg“혼인하기 싫다고. 그럼 미루겠습니다.”

마침내 리에네가 눈을 떴다.

16550952644948.jpg“그렇지 않아요…….”

1655095268878.jpg“잘 생각하고 말해요. 한 번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이 아니라면 공주님은 두 번 다시 나와 하는 혼인을 피할 수 없습니다.”

16550952644948.jpg“…….”

리에네가 마른침을 삼켰다. 입 안이 말라붙어 아플 지경이었다.

1655095268878.jpg“숫자라도 세야 합니까? 그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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