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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귀소본능 (1) (63/145)

63. 귀소본능 (1)2021.11.07.

16550952865919.jpg“……싫지 않아요.”

갈등은 없었다. 이미 내린 결론이었다. 자신에게 가이너스 왕가의 마지막 왕자를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해도, 리에네는 그를 갖기로 마음먹었다. 평생 거짓말을 할 것이다. 그래야 가질 수 있다면.

16550952865919.jpg“미루지 말아요. 그건 싫어요.”

16550952865933.jpg“둘.”

16550952865919.jpg“안 세도 괜찮아요.”

16550952865933.jpg“잘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16550952865919.jpg“네. 그러니까 세지 않아도 된다고요.”

16550952865933.jpg“……세…….”

블랙의 입술이 셋, 모양으로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리에네는 발꿈치를 들고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두툼한 붕대가 감긴 그 손이었다.

16550952865919.jpg“세지 마세요.”

16550952865933.jpg“…….”

리에네를 내려다보는 푸른 눈이 흐르다 멈춘 물처럼 온갖 감정의 파편들을 반사했다.

16550952865919.jpg“나는 내가 뭘 원하고 원하지 않는지, 그걸 잘 몰랐어요. 내가 원하는 건 대부분 다 나우크의 군주라면 누구나 바랄 것들이었어요. 가뭄이 끝나는 일 같은 거요.”

지금은 심장이 아프도록 느끼고 있었다. 눈앞의 이 남자를 갖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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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52865919.jpg“이젠 알아요. 나우크의 군주가 아닌 리에네 아르사크가 무얼 원하는지.”

16550952865933.jpg“……그게 뭡니까.”

블랙은 제 입을 막은 리에네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낸 다음 물었다.

16550952865919.jpg“당신. 그리고 이 혼인이요.”

블랙은 리에네를 마주한 채 붕대가 감긴 손을 움켜쥐었다. 찢긴 손바닥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16550952865933.jpg“공주님이 내게 늘 자극적인 건…….”

리에네는 입 속에서 아프다는 말을 삼켰다. 그가 저를 아프게 만드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16550952865933.jpg“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인간이 하는 거짓말은 명확한 데 반해, 가끔은 속았다는 걸 모르는 때도 있는 것 같고. ……날 정신 나가게 만들던 그 말들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면 화가 나기도 합니다. 기왕 거짓말을 할 참이라면 좀 더 잘하지 그랬습니까. 계속 속고만 있게.”

16550952865919.jpg“거짓말이 아니에요.”

16550952865933.jpg“그건 이제 상관없습니다.”

블랙이 입술을 비틀었다.

16550952865933.jpg“잊었습니까? 한 번뿐이라고. 나와 혼인하는 게 싫지 않다던 게 거짓말이든 아니든 공주님은 내 아내가 될 겁니다. 그건 이제 무슨 짓을 해도 달라지지 않아.”

16550952865919.jpg“나도…… 나도 원하는 바예요.”

블랙은 그 말을 믿지 않는 듯했다. 그가 손을 놓아주며 말했다.

16550952865933.jpg“말했듯이, 손이 아플 겁니다. 아플 동안 왜 다쳤는지 생각을 해 둬요. 손이 낫고 나면 두 번 다시는 같은 상처로 아플 수 없을 겁니다.”

16550952865919.jpg“로드 티와칸…….”

16550952865933.jpg“그럼 쉬십시오. 나는 나대로 머리를 식히고 올 테니.”

쿵! 블랙은 두 번은 잡히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문을 열고 침실을 나섰다. 리에네 역시 그를 두 번 잡을 용기는 들지 않았다.

16550952865919.jpg“……저 남자 말이 맞아.”

리에네가 이제야 통증이 스멀스멀 번져 오는 손바닥을 스스로 눌렀다. 이제야 다친 것을 실감했고, 이제야 아팠다.

16550952865919.jpg“기왕 할 거라면 더 잘해야 해.”

나는 당신의 과거를 아무것도 모르고 있노라는 그런 거짓말을.

16550952865919.jpg“잘할 수 있어.”

리네에가 눈을 꾹 감고 중얼거렸다. 손바닥을 감은 붕대 위로 피가 옅게 배어 나왔다. * * *

16550952865933.jpg“이건 명백히 네 실수다.”

쾅! 페르모스는 눈앞에서 처참히 부서지는 의자에게 눈길을 던지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앉으시라고 내어드렸더니 블랙은 같잖은 수작질 말라는 것처럼 의자를 걷어찼다. 기분이 더러워도 보통 더러운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의자가 아주 산산조각이 났다.

16550952898312.jpg“송구, 합니다, 주군.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이 없습니다.”

저 발길질이 의자가 아니라 제 무릎을 향했다면 그는 남은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녔어야 할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쭈뼛 돋았다.

16550952898312.jpg“그게…… 설마 신분을 감춰야 하는 시점에서 성 안을 활보하고 다닐 줄 몰랐습니다. 아, 물론 변명이라는 건 잘 압니다.”

변명은 아니지만 사실이었다. 클라인펠터 가에서 데려온 헨튼 부인은 노예살이에서 벗어났지만, 그렇다고 신분을 되찾은 것도 아니었다. 헨튼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금기였다. 적어도 여섯 가문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래야 했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헨튼 부인이었다. 그런데 정신 나간 사람도 아니고, 갑자기 성 안을 헤집고 다닐 줄 몰랐다. 티와칸의 숙소로 쓰는 북쪽 탑 꼭대기 방이라면 현재 나우크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지만, 헨튼 부인은 그 안전함을 제 발로 걷어차고 나왔다. 부인은 다시 그 방에 데려다 놓았다. 이번에는 감시할 녀석도 하나 붙여 놓았다.

16550952865933.jpg“……그 여자가 공주에게 내 이름을 말했나?”

페르모스가 즉각 고개를 저었다.

16550952898312.jpg“그건 아닙니다. 몇 번을 캐물었지만 답은 같았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요. 다만…….”

16550952865933.jpg“다만?”

16550952898312.jpg“종제 쪽이 뭔가 말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공주님은 종제를 만난 것을 부인하고 계시지만 말입니다.”

16550952865933.jpg“……그것 때문이겠군.”

블랙이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16550952865933.jpg“다시 멀어졌어.”

블랙이 잇새로 짜증을 내뱉으며 페르모스의 책상 위에 걸터앉아 팔짱을 꼈다. 책상 위에 늘어져 있던 종이와 서류들이 엉덩이 아래 구겨졌다. 블랙이 그렇게나 짜증을 드러내는 광경은 맹세코 그에게도 처음이었다.

16550952865933.jpg“음…….”

여자 문제로 짜증을 내는 전쟁의 신이라. 그건 좀…….

16550952898312.jpg“혹시 이 일로 혼인식 일정에 차질이 생기겠습니까?”

16550952865933.jpg“아니. 그럴 일은 없다.”

16550952898312.jpg“공주님과 벌써 합의를 마치신 겁니까?”

16550952865933.jpg“혼인은 피차 원하는 바라고 했어. ……믿기지는 않지만.”

16550952898312.jpg“저런.”

그래서 저렇게 기분이 더러우시구나. 그렇구나…….

16550952898312.jpg“사실일 겁니다.”

페르모스가 안경을 만지작대다 말했다. 블랙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16550952865933.jpg“넌 뭘 아나?”

16550952898312.jpg“공주님께서는 종제를 살리려는 이유가 주군을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주군을 생각하는 마음은 진심이라고도요.”

16550952865933.jpg“내 이름을 알았다면 얘기가 달라져. 진심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16550952898312.jpg“그게 음……. 두 분의 가문이 원한으로 얽혀 있기 때문입니까?”

페르모스가 잠깐 머릿속에서 주사위를 굴려 본 뒤에 물었다. 블랙이 제 과거를 말할 생각이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일이 굴러가는 것을 보면 눈치를 못 채기도 힘들었다. 헨튼 부인 같은 존재가 자꾸 튀어나오면 어떻게든 제 귀에 이야기가 흘러들어오기 마련이었다. 그런 단서들을 그냥 조각난 채 놔두기에 페르모스의 머리는 너무 잘 굴러갔다.

16550952865933.jpg“죽고 죽이긴 했지.”

16550952898312.jpg“아, 그럼…….”

페르모스는 어쩐지 블랙의 이름도 알 것 같았다. 가이너스. 왕실 기록서에 의하면 아르사크 가문 이전에는 그 이름이 있었다. 사라진 20년 전의 기록에는 왜 왕실의 이름이 가이너스에서 아르사크가 되었는지, 그 비밀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록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 썩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그런 얘기라면 자랑스럽게 남아 있었을 테니까. 리에네 공주는 아무래도 그 아름답지 못한 부분을 알아낸 것 같았다. 종제 클리마의 입을 통해. 그 모친이 과거를 알고 있다는 건 종제 역시 같은 사실을 안다는 얘기였다. 리에네를 납치했을 때 종제가 입을 열었고, 리에네는 그래서 종제를 살리기로 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그래서 페르모스는 사실 두 사람이 약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리에네 공주가 주군에게 진심이 되었다는 말은 진실 같았으니까. 만일 공주가 과거의 원한에 얽매여 있다면 사실상 종제를 죽여 입을 막으려 들지, 반대로 살려 주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6550952898312.jpg“주군께서는 그래도 상관없으신 게 아닙니까?”

16550952865933.jpg“죽고 죽였다고 했지, 원한이라는 말은 안 했어.”

16550952898312.jpg“원한이 아니라고요?”

16550952865933.jpg“이미 말했다. 내 거라서 가지려는 것뿐이라고. 원한이라면 갖는 게 아니라 그 반대겠지.”

때려 부수거나, 피로 씻어 내거나. 둘 다 티와칸의 수장에게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알아듣기는 했다. 블랙을 움직이는 건 원한이 아니었다.

16550952898312.jpg“그럼 공주님도 같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원한이든 뭐든, 진심이 될 수도 있겠지요. 남녀 관계가 그렇지 않습니까.”

16550952865933.jpg“그렇…… 아니.”

16550952898312.jpg“왜 아니라고 하십니까?”

16550952865933.jpg“그런 사람이 혼례복을 잡아 찢지는 않아. 제 손이 다치는 것도 모를 지경으로.”

16550952898312.jpg“으음. 그건 그럴지……. ……아닙니다. 실언했습니다, 주군.”

가능성을 따져 보고 고개를 끄덕이려던 페르모스가 황급히 입을 다물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가뜩이나 험악하던 블랙의 표정이 한층 더 사납게 일그러지는 게 외알 안경 너머 아주 똑똑히 보였다. 이럴 땐 말을 아껴야 했다. 자칫 내일 정말로 울면서 지팡이를 깎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16550952898312.jpg“그럼…… 어쩌실 작정입니까? 당장 혼인식은…….”

16550952865933.jpg“그건 그대로 한다.”

16550952898312.jpg“공주님께서도 동의하셨습니까?”

16550952865933.jpg“입으로는.”

블랙이 쓰게 덧붙였다.

16550952865933.jpg“말했듯이, 믿기지는 않지만.”

16550952898312.jpg“……그래도 모르는 일입니다. 사람 마음이란 게 원래 복잡한 노릇 아니겠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공주님께서도 죽은 자들의 원한 같은 건 별것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실지도요.”

16550952865933.jpg“……기다려야겠군. 더.”

그게 문제였다. 블랙은 슬슬 인내심이 닳아 가는 중이었다. 마음이 커질수록 몸도 제어하기 어려워졌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리에네의 체취가 코끝을 감돌았다. 가끔 제 손발이 멀쩡히 움직이는 게 신기할 정도로 리에네를 보면 그저 껴안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16550952865933.jpg“일단 종제를 잡아 와. 뭘 어디까지 얘기했는지 알아야겠으니.”

16550952898312.jpg“알겠습니다, 주군.”

16550952865933.jpg“가능한 한 곱게 데려와라. 모친이 여기 있다는 걸 알면 큰일은 없을 것이다.”

16550952898312.jpg“네.”

16550952865933.jpg“그리고 마나우를 준비시켜. 대의회에 맞춰서.”

마나우는 신전 앞의 거지 노인이었다. 노인의 정체까진 모르고 있던 페르모스가 안경을 달칵댔다.

16550952898312.jpg“그런데 마나우가 누굽니까?”

블랙은 그걸 이제껏 모르고 있었냐는 식으로 페르모스를 힐긋 쳐다보았다.

16550952865933.jpg“대사제였다. 20년 전에.”

16550952898312.jpg“아, 그랬군요. 대사제…… 네? 대사제라고요? 나우크의 대사제는 종신직 아니었습니까?”

그러니 예전 대사제는 전부 죽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었다.

16550952865933.jpg“그러니 그 꼴로 살았겠지. 말을 더듬는 시늉으로 목소리를 감추고.”

16550952898312.jpg“어, 그…… 주군. 제가 이 말씀은 꼭 드려야겠습니다.”

페르모스가 갑자기 울컥 목소리를 높였다.

16550952898312.jpg“뻔한 일을 모르는 척하는 것도 힘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럼 저는 주군께서 가이너스 왕가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안다는 전제를 두고 일을 처리해도 되는 겁니까, 예?”

16550952865933.jpg“네가 알아채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마나우의 정체를 몰랐다는 건 의외지만.”

어차피 다 알아낼 게 아니었냐는 말에 왠지 억울한 기분이었다.

16550952898312.jpg“그럴 거 그냥 말씀해 주시면 안 됐습니까, 예? 일부러 더 고생시키시는 것도 아니고요.”

이어지는 블랙의 대꾸는 한 박자 느렸다.

16550952865933.jpg“……나는 아무도 알게 할 생각이 없었다. 마나우나 헨튼 같은 이름을 마주치는 건 예상 밖이었어.”

그게 진실이었다. 그는 리에네에게 제 진짜 이름을 숨긴 것 말고는 아무것도 거짓으로 말하지 않았다.

16550952865933.jpg“내 이름이 피를 부르리라는 것을 알아. 그런 걸 바라진 않았다. 리에네 공주에게 그 꼴을 보게 할 마음도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아니, 지금은 더한가.”

블랙이 말을 끊고 느린 한숨을 흘렸다.

16550952865933.jpg“가능한 한 예전 그대로 내 것이 되길 바랐던 거야.”

20년이나 됐는데 그게 가능하리라 믿을 만큼 어리석진 않았다. 나우크에는 가이너스라는 이름이 설 자리가 없었고, 그가 다시 페르난드 왕자가 될 일도 없을 터였다. 다시 왕족으로 살아가길 바란 것도 아니었다. 나우크를 가지려 했던 이유는 어린 시절 미처 다 끊어내지 못한 귀소본능 같은 것이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돌아갈 집 하나 정도는 갖고 싶어 하니까. 그에게는 집이라 부를 만한 게 나우크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예전 그대로 온전히 제 것으로 남아 있는 게 있었다. 어린 눈에는 같은 사람이 아니라 날개를 펴고 숲속으로 날아갈 것처럼 한없이 신비롭고 예쁘게 보였던 정혼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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