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귀소본능 (2)2021.11.10.
가이너스의 마지막 왕은 아르사크 가문에서 딸이 태어난 것을 몹시 기뻐했다.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아르사크 저택으로 달려가 당장 약혼식을 해야 한다며 갓 태어난 갓난아기를 안은 부모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아르사크의 딸은 건강했고, 가이너스의 아들은 잦은 병치레를 거듭했기에 약혼은 계속 기일 없이 미뤄졌다. 그리고 그 어느 날, 여섯 가문은 왕의 등에 칼을 꽂았다. 그것으로 약혼도 끝이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리에네 공주는 더 이상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제 정혼자가 아니라 다른 가문의 장자를 연인으로 삼은 나우크의 새 군주일 뿐이었다. 하지만 생각이 그럴 뿐, 마음은 조금도 아닌 듯했다. 제 마음은 언제라도 정혼자의 곁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 리 없을 테니까. 리에네가 그의 집이었다. 내내 같은 자리에 있던,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던 장소였다. 그 역시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던 것처럼 돌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이걸 다시 놓아 버릴 수 있다고 하면 그건 그냥 미친 인간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나는 공주의 남편이자 수호기사로 살 것이다. 그 이상을 위해 피를 볼 생각은 조금도 없어.”
“하긴……. 그래서 곱게 뼈만 부러트리셨지요. 잘 알겠습니다.”
나우크에 온 뒤로 주군이 내내 별 같잖은 것들에게도 참 상냥하고 무르게 구신다 싶더니 그게 다 그런 이유였다.
“종제를 데려오겠습니다.”
“지금.”
“어, 지, 지금……? 지금이라고 하셨습니까?”
블랙은 두 번 말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까닥였다.
“가능한 한 빠르게.”
“……네, 주군.”
페르모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제 방을 떠났다. * * *
“이틀 뒤입니다.”
새 고문관 알란드가 바쁘게 움직인 결과, 대의회가 정해졌다. 여섯 가문은 모두 참석을 뜻하는 동의서를 보내왔으며 알란드는 그것을 정성껏 양피지로 엮어 정식 포고문으로 만들어 광장에 걸었다. 대의회가 개최되는 곳은 신의 광장 정중앙에 위치한 대회당이었다. 한때 나우크의 상징이었던 아홉 개의 폭포를 본떠 만든 아홉 개의 분수가 장식을 대신하던 우아한 대회당은 그간 나우크의 다른 곳들만큼이나 낡고 더러워졌다. 대회당을 관리하는 일은 마땅히 여섯 가문의 일이었지만, 클라인펠터는 쓸데없는 돈이 든다는 이유로 그것을 왕실에 떠넘겨 버렸다. 갓 통치권을 넘겨받았을 때는 리에네도 멋모르고 대회당에 예산을 책정했지만, 몇 년 전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손을 놓아 버렸다. 그 결과가 구멍 난 천장과 금이 간 벽이었다.
“대회당을 보고 왔습니다만…… 청소라도 해야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리에네는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다는 얼굴로 그 말을 들어 넘겼다.
“대의회에서 알아서 하겠죠. 내버려 두세요.”
“그래도…… 되는 일입니까?”
알란드가 오히려 당황해 되물었다.
“알아서 하지 않으면 먼지를 마시게 될 테니까요. 여섯 가문의 수장이 그런 걸 견딜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급할 거 없으니 천천히 하세요. 대의회 전까지만 알리면 될 거예요.”
“네……. 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알란드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직 여섯 가문과 아르사크 왕실의 껄끄러운 관계를 반도 다 모르고 있었다. 알란드를 보내려던 리에네가 문득 생각이 떠올라 물었다.
“아, 혹시 클라인펠터 가의 동향은 들어 둔 게 있나요?”
“어떤 걸 물으시는 겁니까?”
“뭐든지요. 며칠 전에 화를 겪었을 텐데, 그런 소문은 없나요?”
알란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방문했을 때는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습니다. 왕실의 고문관이 되지 않았다면 대의장께서 저택에 없는 것도 모르고 있었을 겁니다.”
“아하……. 그렇군요. 알겠어요. 그만 나가 봐도 됩니다.”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알란드가 허리를 숙여 보인 뒤 물러났다.
“……좀, 묘한데.”
혼자 집무실에 남게 된 리에네가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생각에 잠겼다.
“티와칸이 가서 헨튼 부인을 데려왔는데 아무 일도 없는 것 같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헨튼 부인을 잃었다는 건 클리마를 심부름꾼으로 부릴 힘도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클리마는 지금껏 클라인펠터가 저지른 온갖 악행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클리마를 되찾든가 아니면 죽여서 입을 막고 싶을 텐데, 잠잠하다는 게 너무 이상했다.
“린든 클라인펠터의 빈자리가 그렇게 큰 건가? 그 인간을 빼면 일을 처리할 사람이 아예 없는 건가?”
그건 말이 되지 않는 듯했다. 클라인펠터는 나우크에서 가장 큰 가문이었다. 그만큼 많은 규모의 재산이 굴러가는 곳이라 일을 보는 사람도 많았다.
“그 많은 못된 짓을 린든 클라인펠터 혼자서 했을 리는 없고…… 누구든 일을 거드는 사람이 있을 텐데.”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리에네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나는 이제껏 내 왕국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모르고 있었어.”
왕실의 가장 큰 적인 클라인펠터 가가 제 등 뒤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화가 치미는 동시에 부끄러웠다.
“나는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만 했었네.”
사실 나우크에서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고달프고 힘들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통치권을 물려받은 리에네는 고달프지 않은 군주의 삶을 몰랐다.
“더는 그래선 안 돼.”
눈과 귀가 필요했다. 이 작은 왕국의 구석구석을 보여주고 들려줄. 한편으로는 더 늦기 전에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만일 이대로 아무 일 없이, 라피트 클라인펠터의 연인으로 살다가 더는 빚을 감당할 수 없게 된 시점에서 팔려가듯 혼인이라도 했으면, 저는 군주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블랙이 제 삶에 뛰어든 이후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그 남자는…… 나한테 너무 많은 걸 줬어.”
리에네가 창문에 기댔던 이마를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나도 줄 거야. 내가 줄 수 있는 건 전부. 집무실을 나온 리에네는 얼마 남지 않은 왕실의 보석을 하나 챙겨 들고 북쪽 탑을 향했다. * * *
“…….”
“…….”
표정은 잔잔했지만 눈은 여전했다. 순해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망가진 듯한 눈. 그래서 보는 사람을 마음 아프게 하는 눈이었다.
“잘 지내고 있는지 보고 싶어 왔어요. 잠자리는 많이 불편하지 않던가요?”
“……괜찮습니다.”
헨튼 부인은 갑자기 찾아온 리에네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그럴 만한 일이라 해도 입맛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과일을 좀 가져왔는데, 맛이라도 보겠어요?”
리에네는 오는 길에 부엌에 들러 챙겨 온 과일 바구니를 내밀었다.
“제게 왜 이러십니까?”
헨튼 부인은 바구니를 받아드는 대신 리에네를 빤히 보며 물었다.
“제가 누군지 알지 않습니까. 저는 공주님께서 주시는 건 무엇도 받지 않을 사람입니다.”
“……울적하지 않을까 했어요. 이 방에 있다고 들었을 때. 여기는 해도 잘 안 들고 늘 어둑하니까. 그럴 때 달콤한 걸 먹으면 좋다고 해요.”
“마음이 지옥이면 해가 무슨 상관 있겠습니까.”
“…….”
리에네가 할 말을 잃었다. 헨튼 부인이 겪은 일은 차마 대신 떠올릴 수도 없었다. 아들 하나가 죽고, 다른 아들은 망가졌다. 아들을 죽인 것은 남편이었다. 남편은 가족이 아니라 주군의 핏줄을 살리고자 했다. 그러다 제 목숨도 바쳤다. 부인은 남편을 죽인 자에게 인질로 잡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노예 생활을 했다. 그런 삶을 대체 어떻게 견뎌 왔을까.
“그럼 달리 먹고 싶은 음식 같은 건 없을까요.”
“필요 없습니다.”
“밤이 되기 전에 침구를 바꾸러 올게요. 이 방에 있는 건 다 오래돼서 쓰기에 좋지 않을 거예요.”
“애쓰지 마십시오.”
“미안해요. 해 줄 게 마땅히 생각나지 않아서. 그러니 부인이 필요한 게 뭔지 말해 주면 좋겠어요. 과일은 두고 갈 테니 나중에 입맛이 돌거든 먹어 봐요.”
리에네는 바구니를 침대 옆의 자그마한 탁자에 올려두고 돌아섰다. 탁! 다음 순간 소리가 리에네를 붙들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헨튼 부인이 과일 바구니를 바닥에 팽개치고는 그것도 모자라 떨어진 과일을 발로 밟고 있었다.
“……조심해요. 거기 과일만 있는 게 아니라. 잘못 밟으면 발을 다쳐요.”
“……?”
무른 과일이 린든 클라인펠터의 머리라도 되는 것처럼 발꿈치를 세워 으깨던 헨튼 부인이 리에네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거기요.”
리에네는 헨튼 부인의 곁으로 다가가 으깨진 과일의 잔해를 뒤적였다.
“이걸 넣어 뒀거든요.”
리에네의 손가락 사이에 뭔가 딱딱해 보이는 게 들려 있었다. 질척하게 묻은 과육과 즙을 리에네가 제 소맷자락을 내려 닦았다.
“어머니께서 아르사크 가문으로 시집오실 때 가져온 거예요. 내게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값이 나가는 물건이고요.”
깨끗하게 닦여 제 빛을 드러내는 물건은 루비로 만든 장미 모양의 펜던트였다.
“이걸 왜……?”
“말했듯이, 제일 값이 될 만한 물건이라서.”
“…….”
헨튼 부인의 목덜미가 훅 달아올랐다. 눈에서 보이듯이 순한 사람이었다. 화를 내도 고작해야 과일을 으깨는 정도였다. 삽시간에 변하던 피부색도 그게 다였다.
“보석을 줄 테니 그만 잊으라는 겁니까? 누가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그런 것을요?”
“아뇨.”
“보석이면 잊을 수 있답니까? 이게 그리 대단한 겁니까? 사람이 죽은 일도 다 괜찮아지게?”
“그렇게는 생각 안 해요.”
“그럼 뭡니까!”
헨튼 부인이 왈칵 달려들어 리에네의 손에서 보석 펜던트를 빼앗았다. 탁! 펜던트는 다시 뭉개진 과일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내가 이걸 가져온 건…….”
리에네도 다시 펜던트를 주워 닦았다.
“예뻐서예요.”
“……뭐요?”
“그래서 보면 위안이 될까 해서.”
“…….”
탁. 리에네는 잘 닦은 펜던트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부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어요. 얼마나 힘들었을지, 나는 잘 상상이 가지 않아요. 부인한테 나는 클라인펠터와 똑같은 사람이겠죠. 기껏 클라인펠터 가를 벗어나나 싶었는데, 나우크 성에 있게 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을 거예요. 나는 그걸 아는데, 그래도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죽은 사람을 되살릴 방법 같은 건 없으니까.”
리에네가 차분히 꺼내는 말은 길었다. 길고도 느렸다. 21년의 시간 동안 가졌어야 했던 죄책감처럼.
“괴롭고, 고통스럽고, 죽음도 무섭지 않고…… 아마도 부인은 지금 그런 마음이겠죠. 그 무엇도 의미가 없으리라는 걸 알아요. 그래도 나는…… 주변을 둘러보면 그래도 조금은 나아진 게 있지 않을까, 부인이 생각해 볼 계기가 될 만한 걸 찾아 주고 싶어요.”
“그런 게…… 그런 게 대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자식을 잃은 어미한테 그런 게…….”
“하나 있어요. 이제 종제님은 더 이상 클라인펠터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됩니다.”
“…….”
헨튼 부인이 리에네를 쳐다보았다. 클리마와 참 닮아 있었다. 클리마도 저렇게 혼란과 상처가 뒤엉킨 슬프고도 선한 눈으로 저를 보았다. 화를 내지만, 보는 사람은 마냥 가엾기만 한 눈으로.
“그 아이는…… 많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 아이는 내가 모르는 줄 알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나는 그래서…… 그 아이가 언젠가는 하던 일을 들켜서 죽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종제님이 원치 않았던 일이라는 걸 알아요. 그 죄는 마땅히 클라인펠터의 몫입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왜 아르사크의 딸이…….”
헨튼 부인이 혼란으로 무거워진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뭉개진 과일의 잔해와 더러워진 바닥이 헨튼 부인의 눈망울에 비쳤다.
“나는 그때 네 살이었어요.”
리에네는 다시 바닥으로 몸을 굽혀 바구니에 과일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자신이 치우지 않으면 결국 헨튼 부인이 치우게 되리라는 것을 알아서였다.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 나이가 좀 더 많았으면, 뭔가 달랐을까요? 내가 적어도 아바마마를 말릴 수 있기라도 했다면 헨튼 기사님은 죽지 않았을까요? 그 남자는…….”
그 남자는, 집을 잃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요? 나는 그 남자를 언제 잃게 될지 마음 졸이지 않으면서도 그 남자와 함께할 수 있었을까요? 종제님을 만난 뒤부터 그 생각이 끊이질 않아요. 평생 끝나지 않을 악몽 같아요…….
“……둘째 아이는 다섯 살이었습니다.”
우두커니 서 있던 헨튼 부인은 리에네가 과일을 주워 담는 걸 더는 못 보겠던지 저도 바닥에 앉아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또래에 비해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습니다. 다섯 살이라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았지요. 오죽하면 여덟 살 되신 왕자님과 체격이 비슷해 보였겠습니까. 아비를 닮아서 그랬을 겝니다. 그런 아이가 제 아비가 칼을 들자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
리에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힘껏 물었다. 자신이 우는 건 기만이었다. 헨튼 부인이나 블랙에 비하면 저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울 자격이 없었다.
“제가 아르사크라는 이름을 아무리 용서할 수 없어도, 네 살짜리 아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내 아이도 그랬듯이 말입니다. 내 아이는 그때…….”
툭! 헨튼 부인의 손에서 바구니로 옮겨 담던 과일이 떨어졌다.
“……흐윽!”
부인은 더러운 바닥에 쓰러지듯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리에네는 지칠 때까지 더 울라는 말도, 나도 몹시 울고 싶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헨튼 부인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곁에서 입술을 꾹 물고 제 울음을 참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