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구애 (1)2021.11.14.
“공주님! 어쩌다 옷을 그리 더럽히셨습니까!”
북쪽 탑에서 돌아온 리에네를 맞이한 것은 플램바드 부인이었다.
“아니, 하필 이 옷을요! 이건 몇 벌 안 남은 좋은 옷인데요!”
“……미안하게 됐어요.”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미안했다. 제 옷이 더러워지면 고생하는 사람은 플램바드 부인이었다. 리에네가 빨래라도 거들까 나서면 부인은 한사코 말렸다. 다른 일이야 어쩔 수 없다고 쳐도 공주님이 빨래 같은 허드렛일을 거드는 꼴은 자기가 눈을 뜨고 있는 한 도무지 봐줄 수가 없다고 했다.
“과일즙이니까 그것만 살살 닦아내면 되지 않을까요?”
플램바드 부인이 고개를 홱홱 흔들었다. 감정이 실린 게 확실했다.
“웬걸요. 과일즙이니까 더 닦아내기 힘이 듭니다. 색이 있는 과일즙은 물이 든단 말입니다.”
“아, 저런……. 몰랐어요. 미안해요.”
“일단 옷부터 벗으세요, 공주님. 과일즙은 시간 다툼입니다. 묻자마자 바로 닦아내야 하는 것을요.”
그 말을 들으니 더 미안해졌다. ……미안해요. 묻히고도 한참 있었어요. 헨튼 부인이 아주 많이 울었거든요. 나는 손수건이라도 빌려주고 싶었는데 마침 없지 뭐예요. 그래서 그냥 내 옷자락을 내줬어요. 헨튼 부인은 굉장히 어이없어하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그걸로 닦더라고요. 덕분에 울음이 좀 빨리 멈춘 것 같기도 했어요.
“지금 벗을게요.”
“네, 네. 어서요.”
플램바드 부인은 직접 리에네를 돌려세워 등 뒤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오늘 일부러 이 옷을 입혀 드린 건데요…… 어쩔 수 없지요. 갈색 옷을 입으셔야겠습니다. 아이 참. 그 옷은 너무 투박해서 썩 보기 좋지 않을 텐데.”
“아, 그건 상관없어요. 그런데 왜 이 옷을 입으라고 했나요?”
“그야 뻔하지 않습니까. 예쁘게 보이시라고요.”
“안 그래도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습니까.”
부지런히 옷을 벗기던 플램바드 부인의 손짓이 순간 주춤거렸다.
“……화해하셔야지요.”
“아…….”
플램바드 부인의 눈에도, 어제 혼례복을 찢은 일로 블랙과 사이가 멀어진 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부인한테 사과를 안 했네. 그 옷에 가장 공을 들인 사람이 부인이었는데.
“미안해요, 부인.”
“아니, 로드 티와칸과 화해를 하셔야지 왜 제게 사과를 하십니까?”
“옷을 망친 일 말이에요. 부인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고 있는데…….”
“제 기분이라면 그건 괜찮습니다. 공이야 공주님께서도 많이 들이셨지요. 하지만 혼례복이 없는 건 큰 문제입니다, 공주님. 이제 와 무슨 수로 그만한 혼례복을 또 장만합니까?”
그것도 큰 문제였다.
“어쩔 수 없죠. 보석을 하나 파는 수밖에요. 내 목걸이를 팔면 좋은 옷 한 벌 정도는 살 수 있어요.”
“으아…… 설마 그 사파이어 목걸이를 말하시는 겁니까? 생전에 비 전하가 하셨던 것을요?”
“그거 외엔 없잖아요.”
“아이고, 공주님!”
플램바드 부인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그걸 판다는 말을 그리 쉽게 하십니까? 그게 어떤 물건인데요!”
모친이 생전에 애지중지하던 목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걸 준 사람은 부친이었고, 혼인 전 두 사람만의 정표가 되었다. 리에네는 눈을 질끈 감고 일부러 냉랭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대관식 지팡이를 팔 수는 없잖아요.”
“공주님!”
“시간이 없으니까 서둘러야겠네요. 부인은 혼례복이 될 만한 천을 알아봐 줘요. 가격은 신경 쓰지 말고 가장 좋은 걸로요.”
“공주님, 정말…… 정말로 파실 생각입니까?”
“네.”
어머니를 추억하는 일도, 나는 죄를 짓는 것 같아요. 그 남자에게 부친의 죽음은 악몽일 텐데, 내게 추억이 가당키나 할까요.
“제발……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공주님. 뒤져 보면 팔 만한 게 또 있을 겁니다.”
“부인.”
리에네가 저를 부르는 음성이 차갑다 싶었던지 플램바드 부인이 주춤대며 대답을 늦췄다.
“……네, 공주님.”
“마사의 마턴 씨에게 보석상에 가라고 말을 전해 줘요. 내가 오늘 안으로 봤으면 한다고요.”
“공주님…….”
“혼례복 정도는 내 마음대로 해 주고 싶어요. 더는 뭐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알겠…… 알겠습니다.”
플램바드 부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리에네에게 다른 옷을 입혀 주었다. 톡톡한 옷감의 갈색 드레스는 장식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투박하고 질긴 느낌이라 리에네도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퍽 궁상맞아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 * *
“……망할.”
블랙이 짜증을 내뱉었다. 그러자 다들 블랙의 앞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노려보았다. 그 누군가는 클리마였다. 클리마는 영문도 모른 채 겁을 집어먹고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클리마가 붙잡힌 곳은 에베트 강 이남의 빈 저택이었다. 10년 전까지는 제법 명망 있는 귀족이었던 스팰딩 가문이 거주했으나, 그들은 계속되는 가뭄을 견뎌내지 못하고 나우크를 떠났다. 관리가 안 되는 빈집은 당연히 폐허가 된 지 오래였다. 큰 집일수록 황폐함도 더 컸다. 클리마를 잡아 오라는 블랙의 명령에 페르모스는 나우크를 샅샅이 뒤지는 대신, 역으로 그를 유인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게 이 빈 저택이었다. 이곳을 새 요새로 삼은 것처럼 보초를 세우고 깃발을 걸어 놓은 다음 티와칸이 이곳에 잡아간 사람들을 가둬 둔다는 말을 흘렸다. 아무리 그래도 소문이 그렇게 빨리 돌 리가 없지 않느냐는 우려와는 달리, 클리마는 이튿날 새벽 모습을 드러냈다. 페르모스는 콧노래를 부르며 클리마를 붙들어 블랙의 앞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블랙은 그가 리에네에게 한 얘기를 남김없이 들었다.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블랙이 미간을 문지르며 혼잣말을 중얼댔다. 그를 아는 티와칸의 용병들은 그 모습이 칼을 들었을 때보다 왠지 더 건드려서는 안 될 것 같은 모습이라고 느꼈다.
“망할……. 어떻게 수습을 하지.”
“그게…… 꼭 나쁘게 여기실 일만은 아닙니다, 주군.”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페르모스가 결국 모두를 대신해 말을 붙였다.
“공주님께서 과거를 다 알았어도 여전히 혼인을 하겠다는 입장이시고, 이자와의 접점을 부인하시는 걸로 보면 과거를 문제 삼을 생각도 없으시단 뜻이지 않습니까.”
“문제를 삼으면?”
“네?”
블랙이 얼음 조각 같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페르모스를 응시했다.
“문제를 삼으면 뭐가 달라지는데.”
“음…….”
순간 페르모스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는 걸 깨달았다. 블랙에게는 이제 더 이상 혼인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건 기정사실이었으니까. 얼마나 만족스러운 혼인을 할 수 있는지, 지금은 그게 문제였다.
“공주는 이 혼인을 무를 수 없다는 걸 알아.”
그렇다면 리에네에게 최선은 과거를 덮는 것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러면 여섯 가문은 새삼 어린 페르난드 왕자를 죽였듯이 블랙을 죽이려 들 필요가 없고, 블랙 또한 여섯 가문을 상대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겠지.”
블랙은 피 흐르는 손으로 가위 날을 움켜쥔 채 혼례복을 내리긋던 리에네의 모습을 전부 기억했다. 동작은 격렬했지만 눈은 텅 비어 있었다. 해소하지 못할 충격을 받은 눈이 그랬다.
“정혼이니 하는 건 지껄이지 말았어야 했나…… 아니, 소용이 없었겠군.”
그가 마나우나 헨튼의 존재를 짐작하지 못했던 것처럼, 과거란 언제 어디서든 튀어나올 수 있었다. 기껏 좁혀 놓았다고 생각했던 리에네와의 거리감이 시작처럼 멀어졌다. 블랙이 한숨을 짓씹고는 일어섰다.
“처음부터 다시 하는 수밖에.”
페르모스와 용병들이 내내 괜한 긴장감으로 굳어 있던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전쟁의 신은 판단이 빨랐다. 그는 후퇴할 때와 진군할 때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밀려났으면 다시 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도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그가 말한 대로, 리에네에게는 혼인을 무를 수단이 조금도 없었으니. 대의회가 끝나면 리세베리 조약을 믿고 까불었던 가문들도 잠잠해질 것이고, 클라인펠터는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다. 리에네와 자신의 혼인을 방해할 수 있는 곳, 그래서 리에네가 행여나 손잡을지 모르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날파리들이 없으니 온전히 마음을 얻는 데만 집중하면 될 일이었다.
“……방법을 모른다는 게 문제겠지만.”
입 속으로 삼킨 한숨에서 쓴맛이 묻어나왔다.
“돌아간다.”
그렇다고 여기 처박혀 있을 수만은 없었다. 싫든 좋든 부딪쳐야 했다.
“종제는 어떻게 합니까?”
“아…….”
리에네의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리가 클리마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넌 뭘 어쩌고 싶나?”
블랙이 클리마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는…… 어머니가 무사하시면 됩니다.”
“헨튼 부인은 당분간 나우크 성에 머물 것이다. 클라인펠터를 처리할 때까진 거기가 제일 안전할 테니. 너도 성으로 가고 싶나?”
“저는…… 그게 잘…….”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던지 클리마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니면 신전으로 돌아가든가.”
“신전으로…….”
“거기가 좋다면. 싫으면 말고.”
“…….”
그 말은 대답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클리마는 시켜서 해야 되는 일이 아닌,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 본 지가 너무 오래였다.
“천천히 생각해. 시간은 많다. 당분간 부인과 함께 지내면서 얘길 나눠 봐.”
“어머니와 얘기를……. ……그래도 되는…… 아, 네! 그, 그러겠습니다.”
순간 다들 클리마의 표정이 조금쯤 더 밝아진 것 같다고 느꼈다.
“여길 정리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블랙이 페르모스에게 손짓을 남겼다.
“네, 주군.”
다들 신속하게 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분주한 하루를 보낸 뒤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처럼. * * * 공교롭게도 시간이 딱 맞아떨어졌다. 리에네의 지시대로 마사를 찾은 플램바드 부인은 마침 성으로 돌아오는 티와칸 일행을 발견했다.
“아니…… 저이는 그 종제가 아냐?”
새삼 말을 타고 오는 블랙의 반듯한 자세를 몰래 감탄하며 보고 있던 플램바드 부인이 깜짝 놀라 내뱉었다. 혼례복을 망친 그 여자가 종제의 모친이라는 얘기를 플램바드 부인도 얼핏 들었다. 듣자 하니 그게 예전에 사라졌다던 로드 티와칸의 가문과 다 연관이 있고 그런 듯했다. 리에네는 자세한 얘기를 피했지만 혼례복을 망치는 짓을 저질렀어도 여인은 아무런 벌을 받지 않았다.
“종제도 성에 들어온단 말이야? 대사제를 죽였다면서?”
플램바드 부인이 고개를 갸웃대며 블랙을 향해 다가갔다. 종제 얘기야 저가 상관할 게 아니라지만 지금 당장은 할 말이 있었다. 플램바드 부인은 블랙이 리에네에게 진심으로 구애 중이라 믿었다. 리에네에게 몇 번이나 말했던 대로, 블랙은 진심이 아니라면 하지 못할 일들을 매번 하고 있었다.
“로드 티와칸.”
플램바드 부인이 다가서자 블랙의 표정이 변했다.
“무슨 일이 있나?”
무표정하던 얼굴에 선뜩한 긴장감이 스쳐 가는데, 그를 보던 플램바드 부인이 당황해 도로 뒷걸음질을 할 정도였다.
“공주님은?”
무슨 사람 눈이 저리도 오금 저리게 생겼을까 싶은 것도 잠시, 부인은 블랙이 표정을 바꾼 이유를 알아차렸다. 저런. 공주님께 무슨 일이 생긴 줄 아시는 모양이네. 하기사 공주님께 변고가 생긴 게 아니라면 내가 먼저 말을 걸 이유가 없긴 하지.
“집무실에 계십니다. 별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아…….”
그러니 긴장이 녹아 사라졌다. 이제야 그가 좀 사람답게 보였다. 플램바드 부인은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을 건넸다.
“제가 잠시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청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차가운 표정을 지닌 사내일 것 같은 블랙은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에서 내린 그는 말고삐를 페르모스에게 건네며 말했다.
“너희들은 종제를 데리고 먼저 들어가. 모친에게 데려다줘라.”
“네, 주군.”
용병들이 클리마를 데리고 사라졌다. 주변을 비운 뒤 블랙이 고개를 돌렸다.
“말해도 된다.”
“아…… 네. 그게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