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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구애 (2) (66/145)

66. 구애 (2)2021.11.17.

생각해 보면 부인이 블랙과 단둘이 말을 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막연히 무섭고 야만적인 용병 수장이라고 생각했던 자가 막상 마주하니 생각과는 좀 달랐다. 지시를 내리는 태도는 익숙하고도 명확했다. 딱히 정중하진 않았지만 거친 구석도 없었다. 묘하게도 그에게서는 신분이 높은 자가 지닐 수 있는 위압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16550953548764.jpg“그게…… 혼례복 말입니다.”

자꾸 위축이 되는 기분이라 말이 조심스러워졌다.

16550953548769.jpg“새로 지어야 한다는 말이라면 그렇게 하도록. 돈이 문제라면 페르모스에게 얘기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16550953548764.jpg“아, 그럼 혹시 공주님께 직접 말씀을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공주님께서는 자꾸만 보석을 팔려고 하셔서…….”

16550953548769.jpg“보석을?”

16550953548764.jpg“예. 다른 보석이라면 몰라도 하필 돌아가신 비 전하의 목걸이를 팔라고 하셔서 말입니다. 그건 대리석 욕조를 떼다 팔지언정 고이 간직하고 계시던 건데 그것마저 팔겠다 하시니 제가 마음이 오죽 아파야지요. 비 전하께서 남겨주신 것들은 전부 다 팔고 그 목걸이 하나만 겨우 남은 거라.”

블랙이 눈썹을 찡그렸다.

16550953548769.jpg“내 혼례복 때문에 물려받은 목걸이를 판다고?”

16550953548764.jpg“예.”

16550953548769.jpg“옷 같은 거야 아무거나…….”

플램바드 부인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16550953548764.jpg“아무 옷이 아니지요. 공주님께서 다른 예물을 대신해 드리는 혼인 선물이잖습니까. 돈 생각은 말고 가장 좋은 걸로 준비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지요. 그런데 아무래도 비 전하의 목걸이를 파는 건 너무한 일이 아닙니까. 한 번 팔고 나면 돈으로는 다시 사지 못할 수도 있는 물건입니다.”

하여간 그러니 공주님을 좀 말리시라는 얘기였다. 보아하니 우리 공주님한테 진심이신 것 같고, 돈도 쓸 만큼은 많은 것 같으니 이 정도 청이야 손쉽게 들어주리라는 계산이었다.

16550953548769.jpg“……곤란한데.”

그러나 작게 이어지는 블랙의 혼잣말은 이랬다.

16550953548764.jpg“네?”

플램바드 부인이 당황해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만한 돈이 아깝다는 건가? 이 사내를 다시 봐야 하나?

16550953548769.jpg“혼인이 싫어진 게 아니었나…….”

아니, 뭔가 다른 얘기였다. 다시 가슴을 쓸어내린 부인이 말했다.

16550953548764.jpg“그럴 리가 있나요. 공주님께서는 로드 티와칸을 부군으로 맞으실 준비를 진작부터 하고 계신 것을요. 처음에 그 혼례복을 만들 때에도 어찌나 열심이셨던지, 대부분의 바느질을 공주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그렇게나 열과 성을 다해 준비를 해오셨는데 하필 딱 제가 자리를 비운 순간에 그 북쪽 탑에 데려다 놓은 여인이 옷을 망쳐서…… 어마, 참. 이 말은 하면 안 되지.”

안 된다고는 했지만 일부러 한 말이었다. 사실 플램바드 부인은 좀 억울한 감이 있었다. 대관식 예복을 망친 건 리에네가 아니었다. 물론 갑자기 감정이 북받치셔서 가위질을 하신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시작은 북쪽 탑의 그 여인이었다. 리에네가 혼자 죄를 뒤집어쓰는 건 부당했다. 그 여인과 로드 티와칸의 관계를 다는 몰랐지만, 하여간 그도 알 건 알아야 했다.

16550953548764.jpg“공주님께서 아무 말 말라고 하셨습니다. 혼례복을 망친 죄가 크다면 참으로 큰 죄인데 감싸 주고 싶으셨나 봅니다.”

그러니 우리 공주님이 그렇게나 이해심 넓고 아랫것들도 두루 보살피는 천사 같은 분이라는 말이었다. 당연히 일개 용병 수장한테는 너무도 과분한 분이니 알아서 잘하라는 말이기도 했다.

16550953548769.jpg“그런 게 아니라면…….”

다행히도 제 노력이 통한 듯했다. 블랙은 관자놀이가 꿈틀댈 정도로 생각에 잠겼다.

16550953548769.jpg“……알았다.”

플램바드 부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반색을 했다.

16550953548764.jpg“그럼 보석상에는 어찌 말을 할까요? 공주님께서는 오늘 당장 보석상을 보겠다고 하시는데요.”

잠깐 시차를 둔 블랙이 이렇게 답했다.

16550953548769.jpg“일단 공주님께서 뜻하는 대로 따르도록.”

16550953548764.jpg“네? 아니, 그럼 그 보석은…….”

16550953548769.jpg“남의 손에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16550953548764.jpg“아이고, 네. 알겠습니다.”

뭔가 달리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16550953548764.jpg“그럼 그리 알고 보석상은 불러오라 하겠습니다.”

블랙은 고개를 끄덕여 뜻을 전한 뒤 몸을 돌려 사라졌다.

16550953548764.jpg“아유…… 참, 다시 봐도 어쩜 저리 어깨가 넓은지.”

그래서 마음도 넓고 씀씀이도 넉넉한 게 아닐까 싶었다.

16550953548764.jpg“……그래. 사내에게 가문이 무슨 소용이야. 그보다는 제 여자를 잘 건사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암만.”

플램바드 부인은 그간 리에네의 상대로 용병 수장은 한참 모자라다는 아쉬움을 조금 달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둘이 나눈 얘기를 꿈에도 모르는 리에네는 그날 저녁 보석상에게 모친의 목걸이를 팔았다. 꽤 넉넉한 가격이 마음 한구석의 상실감을 달래 주었다. * * * 하루가 저물었다. 차르륵.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희미하게 물소리가 들려왔다. 마찬가지로 하루를 마친 블랙이 몸을 씻는 소리였다. 나는 이제 저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침대에 누울 생각이 안 드는 것 같아. 종종 시간대는 다르지만 잠들기 직전 들려오는 물소리는 드디어 하루가 끝났다는 다정한 위안이기도 했다. 당신도 나도 무사히,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뜻이니까.

16550953591212.jpg“…….”

리에네가 옆에 놓아둔 베개를 만지작거렸다. 블랙이 제 방으로 올지, 혹은 아닐지 아직 알 수가 없었다. 베개와 이불을 놓아두긴 했지만 쓸 일이 없을지도 몰랐다. 머리를 식힐 거라더니…… 다 식혔을까. 화가 나 보였지. 아니, 실망한 걸까. 내가 혼인을 피하려는 것처럼 보여서. 아니라고 알려줘야 하는데. 어떻게 말을 하면 좋을까. 고민을 하는 사이 물소리가 그쳤다. 블랙이 몸을 다 씻고 욕실을 나올 때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16550953591212.jpg“……안 돼.”

리에네는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나 다급히 서랍장을 뒤졌다. 그에게 말을 붙일 핑계거리가 생각났다. * * * 탁, 탁. 조금은 조심스러운 소리가 욕실 문을 울렸다.

16550953591212.jpg“들어가도…… 될까요?”

답은 없었다. 벌써 다 씻고 반대쪽 문으로 나간 걸까. 리에네가 다시 쿵쿵 문을 두드렸다.

16550953591212.jpg“다 씻으셨나요?”

……. 대꾸가 없이 닫혀 있는 문은 어쩐지 거절처럼 느껴졌다. 생각에 잠긴 리에네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어떡하지. 화해는 내일로 미룰까. 기분이 안 좋은데 억지로 말을 붙이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잖아. 그런데 그럼 싫다고 말할 사람 아닌가. 일부러 사람이 부르는 걸 못 들은 척할 성격 같진 않은데. 그럼 정말 못 듣는 건가…… 아, 설마? 혹시 그때처럼 쓰러지거나 한 걸까? 그때 블랙은 다쳐서 피를 많이 흘린 상태였었다. 리에네는 겁이 덜컥 났다.

16550953591212.jpg“로드 티와칸.”

탕탕.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조금 거칠어졌다.

16550953591212.jpg“대답이 없는 게 걱정이 됩니다. ……문을 열겠습니다.”

결국 리에네는 욕실 문을 열었다.

16550953591212.jpg“……? …….”

욕실 안에는 아무런 사고도 없었다. 블랙은 멀쩡히 두 발로 서서 머리칼에 맺힌 물기를 털고 있었다. 옷 대신 허리에 두른 수건이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었다.

16550953591212.jpg“괜찮……으신가요.”

16550953548769.jpg“네.”

대답이 짧았다. 그게 왠지 불편했다. 그 이상의 긴 볼 일은 없으니 내 앞에서 그만 사라지라는 외면 같았다.

16550953591212.jpg“불러도 답이 없길래…….”

16550953548769.jpg“딱히 할 말이 없어서.”

16550953591212.jpg“…….”

……그랬구나. 이 남자, 이런 면도 있었네. 내가 몰랐어. 마냥 다정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차가워질 수도 있구나…….

16550953591212.jpg“혹시 약을 바를 데가 없는지 물어보고 싶었어요. 덜 나은 상처가 있나 해서요.”

괜히 어깨가 움츠러드는 바람에 계속 목소리가 작아졌다.

16550953548769.jpg“없습니다.”

16550953591212.jpg“아……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말과는 달리 다행이라는 기분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럼 핑계거리도 더는 없네. 리에네가 약통을 쥔 손을 뒤로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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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조금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뭔가를 해 주는 걸 좋아했으니까. 자신이 만지면 그게 기쁘다고 했다. 그래서 약을 발라 주면 화해가 쉽지 않을까 했다. 혼인을 피하려고 혼례복을 망쳤다는 것은 오해일 뿐이라고. 나는 몹시도 당신을 원하고 있노라고. 그만큼 당신이 떠나는 게 무서울 뿐이라고.

16550953591212.jpg“오늘 밤은 어느 방에서 주무실 건가요?”

혹시나 했던 리에네가 주저하다 물었다.

16550953591212.jpg“이불을 가져다 놓아야 할까요?”

사실 벌써 가져다 놓았다.

16550953548769.jpg“……괜찮습니다.”

블랙이 평소보다 좀 더 느리게 대답했다. 머리칼을 털던 손이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수건을 하나 두른 몸이 눈앞에서 움직이는데, 그걸 보고 있는 것도 곤욕이었다. 이 남자는 자기가 내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다 알고 있는 게 틀림없어. 리에네가 애써 시선을 피하며 내키지 않는 말을 했다.

16550953591212.jpg“필요 없다는 말이로군요.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급하게 질문을 덧붙인 이유는 저도 잘 몰랐다. 아마도 속이 상해서일 것이다. 머리를 식히고 온다던 남자가 엉뚱하게도 마음을 식히고 온 게 어쩐지 서글퍼서.

16550953591212.jpg“오늘만 그런 건지, 아니면 앞으로 내내 필요가 없다는 건지 알고 싶네요.”

16550953548769.jpg“내가 싫은 걸 억지로 강요하는 건가 싶었습니다. 억지로 청혼한 내가 이제 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이마를 남김없이 드러낸 블랙의 무표정은 오히려 믿기 어려웠다. 얼굴을 가리는 게 없으면 표정이 더 잘 드러나야 하잖아. 그런데 저 남자는 반대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가면을 쓴 것 같아.

16550953548769.jpg“내가 공주님 침대에서 자는 것도 억지를 부려 시작된 일이잖습니까. 내키지 않는 사람한테 나만 좋자고 덤벼드는 것도 못 할 짓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16550953591212.jpg“내키지 않는다는 말은 한 적이 없어요.”

16550953548769.jpg“내가 공주님께 뭔가를 해 주고 그 대가로 얻어낸 일입니다. 사실 늘 그랬던 터라 정확히 뭐였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16550953591212.jpg“대가라고 하긴 했어도…….”

블랙이 리에네를 향하던 무감한 시선을 돌렸다.

16550953548769.jpg“매번 빼앗듯 받아내는 꼴이 한심해졌습니다. 신경 쓰지 말고 자요. 더는 잠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16550953591212.jpg“방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16550953548769.jpg“좋다고 느낀 적도 없을 것 아닙니까.”

블랙이 반대쪽,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16550953548769.jpg“이제는 공주님이 좋은 걸 하십시오.”

탁. 그는 무감해진 표정만큼이나 무심한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툭. 기운이 빠진 손끝에서 나무로 된 약통이 떨어졌다. 리에네는 욕실 바닥을 구르는 약통을 보며 다시 주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런 건 생각지도 못했어. ……외면받는 건 굉장히 마음 아픈 일이구나. 리에네는 정말로 어딘가가 아픈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씻을 때까진 몹시 피곤하고 기운도 없었지만, 지금은 도무지 잠이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 * * 그래서 새벽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끼이익. 리에네는 한 손에 이불을 말아 들고 발소리를 죽여 침실 문을 열었다. 걱정했던 대로 내내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러다 평생 잠을 자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왕의 화랑을 지나 블랙의 침실 문 앞에 선 리에네가 아랫입술을 잘근 물었다. 대체 언제부터. 언제부터 이 남자가 옆에 없으면 잠이 안 오게 된 거지, 난……. 단단히 닫혀 있는 문은 오늘따라 두껍고 크고 무거워 보였다. 저 문을 제 손으로 열 자신이 자꾸 사라졌다.

16550953591212.jpg“…….”

그냥 돌아갈까. 그 남자는 자고 있을 거야. 전쟁터에서 살았으니까 잠귀가 예민하지 않을까. 내가 문을 열면 금방 깰 거야. 잠을 깨우면 안 되잖아. 가뜩이나 감정도 안 좋은데 그럼 더 사이가 나빠질지도 몰라. 그래, 돌아가는 게 좋겠어. 생각은 그런데 발이 선뜻 돌아서질 않았다. 리에네는 몇 번이고 마른침을 삼키다 문고리를 살짝 잡았다. 끼익…….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린 게 문제였다. 리에네는 제풀에 놀라 어깨를 움츠렸지만 마음은 좀 더 대담해졌다. 문이 그냥 열렸어……. 내가 안 열었다고. 방 안은 조용했다. 블랙은 숨소리조차 낮았다. 깨어난 기미가 없기에 리에네는 침대까지 다가갔다. 그는 죽은 듯 잠이 들어 있었다. 굳게 감긴 눈꺼풀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단잠을 자는 그가 애틋하기도 했지만 조금 밉기도 했다. 나는 잠이 안 오는데. 혼자 자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은데. 그래도 그가 잠이 깨지 않아 다행이었다. 리에네는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그의 윤곽을 더듬었다. 고작 하루 사이에 그가 그리웠다. ……잘 자요. 내일이면 다시 어제의 당신을 만날 수 있길. 계속 있다가는 참지 못하고 어딘가를 만지고 있을 것 같아 리에네가 조용히 발을 돌렸다. 돌리려고 했다.

16550953548769.jpg“그냥 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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