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 구애 (4) (68/145)

68. 구애 (4)2021.11.24.

서러움이 몰려왔다. 흐느끼며 속삭이는 리에네를 보며 블랙이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러나 분명 미소가 섞여 있었다.

16550953994142.jpg“나는 좀, 절박했습니다.”

16550953994149.jpg“대체…….”

뭐가. 어디가. 그냥 차갑기만 하던데. 블랙은 다시 울기 시작한 리에네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커다란 베개 위로 리에네를 눕힌 그가 두 다리 사이에 리에네를 가두는 것처럼 앉았다.

16550953994142.jpg“공주님은 늘 멀어질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 같아서.”

16550953994149.jpg“안, 그랬어요.”

그의 말은 좀 놀라웠다. 사실은 그 반대가 아닌가. 나는 이 남자가 언제 멀어질지 몰라 무서운데.

16550953994142.jpg“내가 하루치만큼 좁혀 놓은 거리를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도로 벌려 놓는 게 공주님의 진심인지 알아야 했습니다.”

16550953994149.jpg“내가 언제…….”

16550953994142.jpg“그랬어. 늘.”

블랙은 낮게 중얼대며 손등으로 리에네의 뺨을 닦았다.

16550953994142.jpg“내가 거리를 벌리면 공주님이 안도할지, 아니면 나처럼 초조해할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다시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그러니까, 일부러 그런 거잖아.

16550953994149.jpg“하지…… 말아요. 진짜. 다음부터는 절대…… 진짜 너무…… 너무 싫어.”

16550953994142.jpg“내가 잘못했습니다.”

16550953994149.jpg“진짜 싫었어요.”

마지막 말은 울음에 섞여 잘 들리지 않았다. 리에네는 서러움과 원망을 담은 손짓으로 블랙을 힘껏 당겨 안았고, 그는 부지런히 눈물을 닦아 주며 젖은 뺨에 입술을 붙였다.

16550953994142.jpg“더 울어요.”

16550953994149.jpg“부추기지…… 말아요.”

16550953994142.jpg“내가 보고 싶어서.”

살갗에 대고 말하는 나직한 말은 바람이 되어 솜털을 오르르 떨게 했다.

16550953994149.jpg“뭐를요…….”

16550953994142.jpg“나 때문에 우는 공주님을.”

뭐라는 거야…….

16550953994149.jpg“아까는 울지 말라면서요.”

16550953994142.jpg“그땐 이유를 몰랐으니까.”

16550953994149.jpg“이유를 알면 다른가요?”

16550953994142.jpg“공주님에게는 안 다를 것 같습니까?”

16550953994149.jpg“그야…….”

모르겠다. 그런데 블랙이 자신에게 차갑지 말라며 운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저릿해지는 게 있긴 했다. 뭐야. 그러니까 나도 좀 보고 싶잖아. ……그래도 이 남자가 한 짓은 너무했어. 저도 같은 짓을 했다지만, 일부러 했다는 블랙이 너무한 게 맞다.

16550953994149.jpg“나는 이제 안 그럴 거예요…….”

리에네가 블랙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작게 중얼거렸다.

16550953994149.jpg“그땐 당신이 어떤 마음인지 몰라서 그런 거예요. 나도 내 마음을 지켜야 하니까. 그래서…….”

갑자기 블랙이 제 몸에서 리에네를 떼어냈다.

16550953994142.jpg“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16550953994149.jpg“들었……잖아요.”

중간에 침이 꿀꺽 삼켜진 건 그가 좀 이상해 보인 탓이었다. 눈매가 매서워졌는데 어떻게 보면 멍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여간 이 남자는 이상해. 너무 모순적이야.

16550953994142.jpg“다시 말해 봐요. 잘못 들은 것 같으니까.”

16550953994149.jpg“안 그러겠다고요…….”

16550953994142.jpg“그다음에.”

16550953994149.jpg“다음에……?”

16550953994142.jpg“날 뭐라고 불렀는데.”

16550953994149.jpg“……?”

너무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라 리에네는 자신이 그를 뭐라고 칭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16550953994142.jpg“당신이라고 했습니까?”

16550953994149.jpg“아……? 내가요?”

16550953994142.jpg“듣기 좋아.”

블랙이 야릇한 신음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그가 리에네를 붙든 채 몸을 기울였다. 저를 움직이는 동작은 느리고 다정했지만 거기에 실린 힘은 도무지 저항할 수 없는 크기였다. 베개가 등에 닿았다. 리에네는 그와 포개진 채 누운 자세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16550953994142.jpg“이젠 내 차례입니다.”

그가 너무 낮아서 쉰 것처럼 들리는 음성으로 속삭이며 한 손을 목 뒤로 가져갔다. 톡. 단추 하나가 더 풀렸다. 그래서 느슨해진 만큼, 그가 잠옷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익숙한 잠옷의 감촉이 빗장뼈 아래를 간질이자 아주 이상한 감각이 되었다.

16550953994142.jpg“이젠 공주님 차례.”

16550953994149.jpg“…….”

자꾸만 입술이 말라서 리에네는 무의식중에 계속 제 입술을 훑었다.

16550953994142.jpg“뭐가 하고 싶습니까?”

16550953994149.jpg“나도…… 보고 싶어요.”

리에네가 블랙의 상체를 덮고 있는 가운 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는 짧게 웃더니 순순히 몸을 움직여 가운이 쉽게 벗겨지도록 해 주었다.

16550953994142.jpg“다시 내 차롑니다.”

톡. 단추 세 개가 풀린 잠옷은 그만큼 더 헐렁해졌다. 그가 바라던 대로 자신이 흐트러지는 느낌이었다.

16550953994142.jpg“공주님은?”

16550953994149.jpg“여기…… 만지고 싶어요.”

리에네는 전부터 보아 둔 상처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상처가 많은 몸이었지만 왼쪽 옆구리에 있는 그 상처는 조금 달라 보였다. 오래된 상처 같아 보였고 살 색이 주위와 달리 도드라졌고, 여전히 아파 보였다.

16550953994149.jpg“만져도 되나요? 안 아픈가요?”

블랙의 시선이 저를 만지는 리에네의 손끝을 따라갔다.

16550953994142.jpg“내 몸에서 가장 오래된 상처입니다. 아프지 않아요.”

16550953994149.jpg“언제 생겼는데요?”

16550953994142.jpg“여덟 살.”

16550953994149.jpg“아…….”

몸에 새겨진, 영영 지워지지 않을 자국을 따라 움직이던 손끝이 바르르 흔들렸다.  

16550954052053.jpg

  이 상처를 만든 건 클라인펠터였을까. 아니면 아바마마였을까.

16550953994142.jpg“이 상처 덕분에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역으로 살 기회를 얻기도 했습니다.”

16550953994149.jpg“어떻……게요?”

16550953994142.jpg“다 말하자면 깁니다. 중요한 건,”

잠깐 말을 끊은 블랙이 상처 위에서 멎은 리에네의 손을 제 몸에 바투 눌렀다.

16550953994142.jpg“공주님이 그 상처를 만지고 있고 나는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겁니다.”

그는 모르겠지만 리에네는 제 마음에서 가장 아팠던 부분을 그가 덜어내 준 기분이 들었다. 그때는 상처 입었지만, 지금은 괜찮다고 했다. 아르사크 가의 누군가가 제 부친을 배신하고 저를 사지로 내몰았지만, 지금 상처를 만져 주는 건 아르사크의 딸이었다.

16550953994149.jpg“내가 지금 울어도…… 여전히 보고 싶은 광경이라고 해 줄 건가요?”

블랙은 단순히 네, 라고 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16550953994142.jpg“공주님이 알아야 할 게 하나 있습니다.”

16550953994149.jpg“뭔데요?”

16550953994142.jpg“평소에 공주님은 내 눈에 사람이 아닌 것처럼 예뻐 보이는데, 울면 더 그렇습니다.”

16550953994149.jpg“……그래……요?”

16550953994142.jpg“그러니까 울고 싶어지면 나한테 와서 울어요. 아깝게 혼자만 보지 말고.”

16550953994149.jpg“…….”

그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안 울 수가 있어. 이유도 모른 채 울컥 눈물이 터졌다. 이제는 그가 차갑지도, 그래서 서럽지도 않았는데 눈이 잘못되기라도 한 것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리에네는 오늘 처음 우는 법을 배운 사람처럼 끝도 없이 울었다. 블랙이 다정하게 등을 두드려 줄수록 눈물이 점점 더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한참 울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키스를 했다. 그러다 또 눈물이 터졌고, 그럴 때마다 블랙은 질리지도 않는지 뺨을 닦아 주며 더 울라는 말을 해 주었다. * * *

16550954069616.jpg“아……? 오늘은 이 방에서 주무셨습니까?”

플램바드 부인이 왔을 땐 다행히도 블랙은 씻으러 간 뒤였다. 함께 밤을 보낸 걸 들킨 게 한두 번이 아니라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안 들키는 쪽이 마음 편하긴 했다.

16550953994149.jpg“그렇게 됐어요.”

16550954069616.jpg“아이고, 저런.”

이불을 걷는 리에네를 보며 플램바드 부인이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16550954069616.jpg“설마 어제 초야를 치르신 겝니까?”

16550953994149.jpg“네? 아닌데요. 아직 달거리가 안 끝났어요.”

잠옷 단추가 세 개 풀려 있긴 했지만 아무 일 없었다. 리에네는 새삼 어깨로 흘러내린 잠옷을 의식해 슬쩍 몸을 틀어 부인의 시선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16550954069616.jpg“정말입니까?”

플램바드 부인이 좁아진 눈으로 리에네를 훑었다. 그렇게 살펴보지 말라고 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리에네는 늘 부인에게 약했다.

16550953994149.jpg“정말이에요……. 그런 걸 왜 속이겠어요. 속일 수도 없는 것을.”

속옷이며 침구 사정이며 플램바드 부인이 모를 수가 없었다.

16550954069616.jpg“아니, 그러면 대체 무슨 일로 그리 목이 잠기셨습니까?”

16550953994149.jpg“네?”

16550954069616.jpg“눈도 퉁퉁 부으셨고요. 거, 입술도 좀…….”

16550953994149.jpg“…….”

리에네가 당황해 제 얼굴을 더듬었다.

16550953994149.jpg“마, 많이 이상해요?”

16550954069616.jpg“직접 보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리에네가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블랙이 내내 예쁘다고 하는 말을 믿고 눈물도 실컷 쏟아내고 콧물도 풀었다. 오늘 아침 눈을 뜨자마자 얼굴을 마주 보며 원 없이 키스도 나누었다. 세수도 안 한 블랙이 아침부터 여전히 잘생겨서 저도 대충 평소처럼 보이는 줄 알고 마음을 놓았다. 그랬는데, 뭐? 리에네가 서둘러 제 방으로 향했다. 플램바드 부인이 뒤에서 그렇다고 뛰실 건 없지 않냐고, 그 눈으로 자칫 넘어지시기라도 하면 어쩌냐고 걱정을 한마디 보탰다.

16550953994149.jpg“아윽…….”

거울 앞에 선 리에네가 비명도 신음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16550953994149.jpg“이게…… 나예요?”

눈과 볼이 퉁퉁 부었다.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눈물 자국이 말라붙은 뺨은 침이라도 흘리고 잔 사람처럼 얼룩덜룩했고 머리칼도 잔뜩 엉켜 있었다.

16550953994149.jpg“하……! 거짓말쟁이.”

리에네는 너무 당혹스럽고 수치스러운 나머지 거울 앞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16550954069616.jpg“공주님? 제가 언제 거짓말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플램바드 부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손사래를 쳤다.

16550953994149.jpg“아니, 부인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그 남자가, 괜찮다고 했단 말이에요.”

괜찮다고만 했으면 말도 안 해. 동화책에서 사는 사람 아닌 것처럼 예뻐 보인다고 했어. ……거짓말쟁이.

16550953994149.jpg“내가 몇 번을 물었는데 그때마다 다 예쁘다고…… 진짜 잘도 그런 거짓말을.”

이 얼룩덜룩한 얼굴에 잘도 키스를 했다. 입술에만 한 게 아니라 이마며 콧등이며 턱이며 볼이며 입술이 닿는 곳에는 전부 다 했다. 리에네가 헝클어진 머리칼을 쥐며 울상을 지었다.

16550954069616.jpg“……풉.”

그러다 들었다. 플램바드 부인이 꽉 눌린 웃음소리를 더는 참지 못하고 흘리는 것을.

16550953994149.jpg“부인?”

리에네가 냅다 부인을 돌아보았다.

16550953994149.jpg“지금 웃었나요?”

16550954069616.jpg“아니, 제가 참으려고 했는데 그만…… 죄송…… 푸흡.”

16550953994149.jpg“부인…….”

퉁퉁 부은 얼굴로 노려보아 봤자 웃음을 부추길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리에네는 몰랐다.

16550954069616.jpg“정말 웃으려던 게 아니라…… 아우, 정말이지.”

부인은 한동안 허리를 붙들고 있다 간신히 웃음을 넘겼다.

16550954069616.jpg“그래도 평소 예쁘신 얼굴이라 아주 흉하진 않습니다.”

16550953994149.jpg“전혀 위로가 안 되거든요.”

16550954069616.jpg“그러니 참 좋은 짝을 만나신 게지요.”

16550953994149.jpg“거짓말을 했다니까요. 그건 일부러 놀린 게 아니에요?”

16550954069616.jpg“그야 그분께는 참말이지 않겠습니까. 이 얼굴도 그리 어여쁜 게지요.”

16550953994149.jpg“……설마요.”

16550954069616.jpg“그럼 아니겠습니까?”

부인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엉키고 흐트러진 리에네의 금발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16550954069616.jpg“얼마나 보기 좋으면 그리 말을 할까요. 나이든 제 가슴도 주책없이 살랑살랑대는 것 같습니다, 공주님.”

16550953994149.jpg“아…….”

리에네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거울을 쳐다보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만큼 못나 보이는 얼굴은 평소와는 아주 달랐다. 그가 이 얼굴을 바라보던 오늘 아침의 표정이 거울 속의 모습과 겹쳤다.

16550953994142.jpg-좀 더 보게 해 줘요.

눈이 부은 것 같아 감추려는 마음에 품으로 파고들던 리에네를 말리며 블랙이 한 말이었다.

16550953994149.jpg-세수도 안 했어요.

16550953994142.jpg-그러니까.

16550953994149.jpg-……네?

16550953994142.jpg-내 눈에 처음이지 않습니까.

웃음기는 하나도 없었다. 그는 정말로 아주 예쁜 것을 대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로 저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눈길이 닿는 곳에 입을 맞췄다.

16550954069616.jpg“참 좋으시겠습니다. 그런 분과 맺어지셔서. 나우크의 신께서 공주님을 참으로 아끼고 계시는가 봅니다.”

16550953994149.jpg“……그러게요.”

리에네가 제 머리칼을 살살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는 부인의 손등에 뺨을 기댔다.

16550953994149.jpg“감사해서 어쩌죠.”

나는 그 남자한테 이렇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을 텐데 말이에요. 그런데 어쩌죠. 그래서 너무 기뻐요. 미안해서 어쩌죠. 잘못되면 어쩌죠…….

16550954069616.jpg“어쩌긴 뭘 어쩝니까. 진심으로 감사드리면 되지요. 신께서도 아실 겝니다.”

어깨를 다독이며 다정한 말을 해 준 플램바드 부인은, 이어서 가차 없이 세수를 채근했다.

16550954069616.jpg“그래도 이제는 씻으셔야지요. 로드 티와칸 눈에는 어여쁠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 앞에 그러고 다닐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16550953994149.jpg“그, 그렇죠…….”

몹시 민망해진 리에네가 서둘러 세수를 마쳤다. 플램바드 부인은 부은 얼굴이 빨리 가라앉도록 찬물에 적신 수건으로 얼굴을 감싸 놓기까지 했다.

16550954160127.jpg

16550954160131.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