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갈증2021.11.28.
플램바드 부인이 수선을 피운 덕에 그럭저럭 평소 모습으로 돌아오긴 했다. 눈은 여전히 살짝 부어 있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다.
“보기 괜찮나요?”
“벌써 몇 번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보기 좋습니다, 공주님.”
“네.”
리에네는 간신히 거울에서 시선을 뗐다. 이렇게나 오래 거울을 들여다본 적은 아마 처음일 것이다. 제 차림새에는 무심하리만큼 담백하던 리에네가 이제야 제 나이 또래의 여인처럼 보인다며, 플램바드 부인이 속으로 가만히 웃었다.
“그럼 이제 가셔야지요. 너무 오래 기다리게 만들고 계십니다. 뭐, 애를 태울 요량이라면 그도 괜찮지만요.”
오늘은 그때 못 한 아침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그 이후로는 각자 바쁠 예정이었다. 리에네는 보석상과 포목상을 차례로 맞이해야 했고 이후로는 새 혼례복을 짓는 일을 거들어야 했다. 플램바드 부인은 다른 바쁜 일을 죄다 미루고 혼례복에 매달려야 할 처지였다. 자수 같은 거야 사람을 쓴다지만 전체적인 모양새나 알맞은 장신구 같은 것은 전부 부인의 손을 거쳐야 했다. 그리고 새로운 서임장도 만들어야 했다. 나우크의 공동 통치자이자 공주의 남편을 위한 새 작위가 필요했다. 그에게 가이너스라는 이름을 돌려줄 수는 없지만 그 못지않은 근사한 이름을 주고 싶었다. 앞으로 나우크의 새로운 왕가가 될 이름을. 새 작위를 주며 저택과 토지를 하사해야 했는데, 리에네는 그걸 마련하는 데 제 남은 재산을 기꺼이 다 털어 넣을 생각이었다.
“아, 그렇겠네요. 벌써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그럼 가죠.”
“네, 그럽시다. 식당 앞까지 제가 모시겠습니다.”
식당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
“벌써 와 계셨네요.”
아무래도 늦은 모양이었다. 리에네는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저를 발견하고 몸을 일으키는 블랙을 발견했다. 앉아 있으라는 말을 할 새도 없이, 그가 식탁을 지나 문 앞까지 다가왔다.
“제가 늦었어요.”
“괜찮습니다.”
그는 아침에 비하면 많이 달라진 얼굴을 보며 싱긋 웃었다.
“시장하진 않습니까?”
“음…… 그런 편이에요.”
“잘됐군요.”
식탁은 이미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리에네는 식탁을 장식한 꽃과 금 촛대를 보며 깜짝 놀랐다.
“이런 게 어디서 났죠? 성 안에는 없는 것들인데.”
“꽃은 고생을 좀 했습니다.”
나우크에서는 금보다 오히려 싱싱한 꽃을 구하는 게 더 어려웠다. 사실 고생을 한 것은 그가 아니라 밑의 용병들이었지만 블랙은 태연히 수하들의 공을 가로챘다.
“저런.”
공연히 가슴 아래가 따듯하게 달궈졌다. 리에네가 감사하다는 의미로 블랙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어떤 고생을 하셨는지 알 것 같아요. 꽃은 굉장히 오래간만이라 기쁘네요.”
“고생한 보람이 충분하군요.”
블랙이 손을 내밀었다. 입구에서 식탁까지 그 짧은 기간 에스코트를 받게 생겼다. 꽃향기가 진한가 봐. 자꾸 냄새가 달아.
“앉으세요.”
블랙이 반대쪽 손으로 의자를 당겨 리에네를 앉혔다. 왕실의 식탁은 관례적으로 신분에 따라 자리가 정해져 있었는데, 블랙은 그걸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저는 이 자리는 싫은데.”
그래서 저도 모르게 달콤한 꽃냄새가 비려졌다. 이 자리는 원래 당신이 앉을 곳이었는데.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 내게 양보하면 어떡해요……. 그를 앞에 두고 도무지 앉을 수가 없는 자리였다. 리에네가 재빨리 상석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옆에 앉을게요. 그게 좋겠어요.”
“이상한데.”
블랙이 웃는 얼굴로 턱을 갸웃거렸다.
“어떤 게요?”
리에네는 자리를 옆으로 옮겨 블랙이 앉았던 자리의 옆 의자를 빼려고 했다.
“그렇게 내 옆에 앉고 싶다는 소리 같지는 않고.”
하지만 블랙이 더 빨랐다. 그는 자연스럽게 리에네의 손에 제 손을 겹치며 의자를 옮겼다.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이 남자한테는 정말 거짓말이 안 통할 것 같아.
“왜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상석에 뻔뻔하게 앉을 수도 없었지만, 굳이 따지자면 리에네도 그의 옆에 앉는 게 더 좋았다.
“글쎄…… 믿기엔 너무 좋아서?”
“네?”
“나는 아직 목이 마른 쪽이라.”
블랙은 리에네를 앉힌 뒤 의자를 다시 밀어 넣어 주고는 자신도 옆자리에 앉았다. 리에네는 그가 마저 앉기를 기다렸다 냅킨을 펼쳤다.
“이쪽으로 고개를 숙여 주세요. 목이 마르다는 건 물이 마시고 싶다는 뜻은 아니죠?”
블랙은 별 생각 없이 리에네의 말대로 하다 제 목에 걸리는 냅킨을 보고 작게 웃었다.
“아닙니다.”
“그럼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알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듣고 싶네요.”
“이런 것.”
블랙은 냅킨을 목깃에 밀어 넣어 왕실 예법대로 맵시 있게 부풀려 주는 리에네의 손을 붙들었다.
“잘 안 믿깁니다.”
“이건…… 아주 사소한 일이잖아요.”
“사소하니까.”
블랙이 리에네의 손을 향해 턱을 돌렸다. 혀끝이 손가락 새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짧은 순간에 리에네는 입을 벌려 작은 숨소리를 내뱉었다.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이 남자는 쓸데없이 너무 자극적이야. 식탁 앞에서까지 이럴 건 없는데.
“이런 일까지 내게 주어졌다는 게.”
블랙이 방금 전 혀가 닿은 자리에 느리게 키스하며 속삭였다. 리에네 역시 믿을 수가 없었다. 밥 먹는 자리에서까지 그를 안고 싶어진다는 게.
“잊으신 것 같아요.”
리에네가 키스하는 동안 부드럽게 감기는 블랙의 속눈썹을 향해 중얼거렸다.
“우리는 오늘, 좀 바쁠 예정이거든요.”
“압니다.”
“그런데 이러시면…… 식사 시간이 너무 길어질지 모르잖아요.”
“왜 길어집니까?”
“네?”
그 반응은 좀 의외였다.
“당연히 길어지지 않겠어요?”
“왜?”
왜냐니.
“우리는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늦잠을 잤잖아요. 그때도 그랬는데…….”
“그건 키스를 끊지 못해서 그런 거고.”
“그러니까요.”
“…….”
블랙이 소리 없이 입술을 늘려 웃었다.
“여기서 키스하자는 말이었습니까?”
“그게……. ……네?”
“너무하는데. 그러니까 내가 못 믿는 것도 당연하지.”
블랙은 리에네가 앉은 의자를 홱 당겨 왔다. 별로 멀지도 않은 옆자리가 더 가까워졌는데, 그는 그것도 멀다 싶었던지 의자에 앉은 리에네를 번쩍 들어 제 허벅지에 앉혔다.
“이, 러면 놀라요.”
리에네가 엉겁결에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내가 공주님을 떨어트릴 일은 없으니까.”
그가 리에네의 뒷머리를 감쌌다. 그걸 신호처럼 입술이 겹쳐졌다. 떨어트릴 일이 없다는 말을 하기 전에도 리에네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블랙의 품은 자신에게 가장 안전하고 든든한 장소였다.
“공주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숨을 쉬기 위해 잠시 입술을 놓아준 블랙이 평소보다 짙어진 눈으로 중얼거렸다.
“식사가 길어질 것 같아.”
“그것 보…….”
“매일 이러면 안 될 텐데…….”
그러면서 키스는 잘만 이어졌다. 블랙의 아랫입술이 제 입술을 벌리며 들어오는 것은 키스를 알리는 시작이자 머릿속을 비우는 주문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진짜 할 일이 많은데. 혼례복을 빨리 새로 지어야 하는데. 그리고 서임장도……. ……아. 그 모든 게 어딘가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리에네는 정신없이 블랙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키스를 이었다. 리에네가 귓불이나 목을 만질 때마다 그가 어김없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키스는 차려진 음식이 다 식을 때까지 이어졌다. 식사가 너무 길어진다며 플램바드 부인이 와 보지 않았다면 시간은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 * *
“아……. 이럴 게 아니라 북쪽 탑에 가 봐야지.”
바쁘던 하루가 얼추 반이 흘러갔다. 보석상은 생각지도 못한 넉넉한 값에 모친의 사파이어 목걸이를 샀다. 그걸 팔며 생긴 아쉬웠던 마음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정도였다. 포목상이 가져온 천을 고르고 플램바드 부인과 함께 전체적인 모양새를 잡았다. 선왕의 대관식 예복보다 꼭 더 좋은 예복을 만들겠다는 욕심에 생각이 많아졌다. 그것도 얼추 끝내고, 알란드에게 서임장 작성을 지시하고 나니 해가 가운데 하늘에서 훌쩍 넘어간 시간이 되었다. 리에네는 새로 작위를 수여할 때의 법리적 문제를 검토하다 시계로 눈을 돌렸다. 마침 헨튼 부인을 찾아가 보기에 딱 좋은 시간이었다. 너무 이르거나 늦으면 서먹한 사이에 더 난처할 것이다. 미리 플램바드 부인에게 말해 챙겨 놓은 과자 바구니를 들고 리에네가 북쪽 탑을 향했다. 과자는 부숴도 괜찮아. 물들 일은 없을 거 아냐. 리에네가 피식 웃으며 탑을 올랐다. 탑을 지키는 용병들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이젠 그들을 나우크 성 안에서 보는 일도 익숙했다. 이제 여기는 그 남자의 집에 더 가까운 형태가 되지 않았을까. 그게 한순간 마음을 따스하게 만들어 주었다. 응……. 그 남자는 이제 집을 돌려받는 거야. 리에네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 헨튼 부인이 묵고 있는 방 앞에 도달했다. 탁탁.
“부인. 들어가도 될까요?”
그러자 안에서 뭔가 허둥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싶더니, 오래 걸리지 않아 문이 쿵 열렸다.
“아……?”
리에네는 놀란 눈으로, 마찬가지로 아주 놀란 눈으로 저를 보는 클리마를 마주했다.
“종제님이 여기…… 계셨어요?”
“네, 네……. 고, 공주님이…… 아니, 저…… 페르…… 아니아니, 그러니까 그……분이 와도 된다고 해서…….”
“그렇게 당황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랬구나…… 저는 까맣게 몰랐네요. 헨튼 부인은 안에 계신가요?”
“네, 네.”
클리마가 재빨리 문 옆으로 비켜섰다. 아직도 그는 자신이 리에네에게 하려고 했던 짓을 기억하는 터라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부인.”
자그마한 벽난로 앞 의자에 앉아 있던 헨튼 부인이 고개를 돌렸다. 외면할지 말지 갈등이 되는지 헨튼 부인의 몸이 작게 들썩거렸다.
“괜찮아요. 그냥 있어도. 예의를 차려 받을 처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리에네가 그때 그 탁자에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과자예요. 부수기도 쉽고, 청소하기도 더 쉬울 것 같아서요. 아, 그렇다고 맛이 없는 건 아니고요. 왕실 요리사한테 공을 들여 달라고 말을 해뒀으니 맛이 없진 않을 거예요. 종제님은 과자를 좋아하시나요?”
리에네가 묻자 방 한구석에 조심스럽게 서 있던 클리마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네? 아니…… 아니, 네! 머, 먹겠습니다! 뭐든 주시면…….”
독을 먹으라고 해도 먹을 기세였다. 그가 얼마나 순하고 맹목적인 사람이었는지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 저런 사람에게 그런 지저분한 일을 시키다니……. 진짜 악랄한 인간이었어, 클라인펠터는.
“하나 맛보고 맛있으면 더 먹어요. 내키지 않으면 꼭 먹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네, 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클리마는 이상할 정도로 비장한 얼굴로 다가와 양손을 공손히 내밀었다.
“아무것도 억지로 할 필요 없어요. 하고 싶은 걸 하면 됩니다.”
리에네가 클리마의 손바닥에 가장 맛있게 구워진 과자를 올려 주었다.
“하고 싶은 걸 하면…….”
클리마는 손에 든 과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중얼대다 한 입 깨물었다. 과자를 먹는 소리가 천천히 좁은 방을 채웠다.
“넉넉히 가져왔으니까 부인이 부술 것도 있어요.”
리에네는 싱겁게 웃으며 헨튼 부인을 향해 돌아섰다.
“이불이 바뀌었네요. 좀 더 낫죠?”
“…….”
“종제님이 왔으니까 한결 더 나을 테고요. 둘이 지내기엔 이 방은 불편할 텐데, 옮기는 게 어때요?”
“…….”
헨튼 부인은 무슨 말을 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 도로 입을 다물었다.
“내키는 대로 해요. 원할 때면 누구한테든 말을 하고요. 성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다 괜찮아요.”
“……그런 말을, 하려고 또 오셨습니까?”
마침내 부인이 머뭇대다 말을 꺼냈다.
“겸사겸사요. 상의할 일도 있고요.”
“저 같은 것에게 무슨 일을요.”
“이름을 바꾸는 것 말이에요.”
“……이름을요? 저와 저 아이의 이름을?”
“네.”
리에네는 잠깐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말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이번 대의회에서 클라인펠터 가문이 정리될 거예요. 그러나 남은 다섯 가문도 그렇게 되리라고는 보장할 수가 없어요. 헨튼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새 이름으로 살아 보는 건 어떨까요?”
“그래서…… 그래서요? 새 이름을?”
“만일 나우크를 떠나서 살고 싶다면 그래도 괜찮아요. 여비와 정착금은 내가 마련할게요.”
“…….”
헨튼 부인의 얼굴이 굳어 가는 것을 보며 리에네가 말을 덧붙였다.
“나우크에서 내쫓겠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부인도 종제님도 계속 숨어 지내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래요.”
“이름을 바꾸면…… 그러면 안전해집니까?”
“이름을 바꾸고 성에서 지내도록 해요. 이곳은 티와칸이 지키고 있으니 안전해요. 이제 성 안에 머물 사람들이 늘어날 때가 된 것 같아요.”
왕족이라고는 혼자 덜렁 남아 있던 이전과는 달랐다. 오늘 아침 식사만 해도 그랬다. 선왕이 있을 때처럼 식사 시중을 드는 사람이 있었다면 음식이 다 식어 가도록 딴짓을 하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싫었단 말은 아니지만. 하여간 매일 그러는 건 문제가 있어. 이제 나우크 성은 사람들로 북적이게 될 것이다. 티와칸이 정착하게 되면 그들도 누군가를 만나고 가족을 만들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저는 가이너스 가문의 피를 잇는 아이를 낳게 될 것이다. 아이의 유모는 당연히 플램바드 부인이 되겠지만, 그러니 곁에서 거들 일손도 필요했다.
“그걸…… 저와 제 아이에게 맡기신다고요?”
헨튼 부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 이마를 와륵 구겼다.
“제가 둘째 아이를 어떻게 잃었는지 기억 못 하십니까? 내가 언제 넋을 놓고 등 뒤에서 칼을 꽂을지 걱정도 안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