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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해갈 (70/145)

70. 해갈2021.12.01.

헨튼 부인이 어떤 마음을 품을지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이었다.

16550954446206.jpg“걱정해요. 하지만 나는 그럴 자격이 없잖아요.”

1655095444621.jpg“무슨…… 그런 말을 잘도…….”

16550954446206.jpg“나는 선왕이…… 아니, 내가 이런 말을 쓰면 안 되겠죠. 선친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 피를 이어받은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나는 겁이 나서 차마 내 입으로는 그 남자에게 선친이 한 짓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언젠가 그 남자가 일곱 가문이 얽혔던 과거의 일을 전부 알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요.”

1655095444621.jpg“…….”

리에네의 말을 듣는 헨튼 부인의 얼굴이 굳었다.

16550954446206.jpg“그때 나는 아마 제대로 된 죗값을 치르겠죠. 그러니까 사실 부인을 걱정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1655095444621.jpg“어차피 죽을 테니 누가 죽이든 상관없다는…… 그런 말입니까?”

16550954446206.jpg“그런 말은 아니었어요. 그냥…… 내 목숨을 지키느라 그렇게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에요.”

가능한 한 이 시간이 길기를 바랄 뿐이에요. 무사히 혼인을 하고, 무사히 통치권을 넘겨주고, 무사히 집을 만들어 주고, 무사히 행복할 시간이.

16550954446206.jpg“그럼 어떻게 할 건지 생각해 봐요. 종제님과도 얘기를 해 보고요. 성에 머물게 되면 부인이 나우크의 시녀장을 해 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 남자를 미워하는 마음은 나를 미워하는 것으로 끝났으면 좋겠어요. 그 남자도 그때는 그냥 작은 아이였을 뿐이니까. 부인이 말해 준 대로, 그 나이의 아이는 어른을 상대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까.

1655095444621.jpg“이상…… 이상합니다.”

입에 남은 과자를 꿀꺽 삼킨 클리마가 입가의 부스러기를 털며 다가왔다.

16550954446206.jpg“뭐가 이상한가요?”

1655095444621.jpg“알고 있는데. 전부.”

16550954446206.jpg“네?”

클리마가 리에네를 바라보며 순한 갈색 눈을 끔벅거렸다.

1655095444621.jpg“페르난드 왕자님이 제게 물으셔서…… 전부 다 말씀드렸는데.”

16550954446206.jpg“전부…… 뭘 말했다고요?”

리에네는 저도 모르게 홱 몸을 돌렸다. 예상외의 거친 동작에 클리마가 어깨를 움찔 움츠렸다.

1655095444621.jpg“공주님께 제가 말씀드린 것…… 전부 다.”

16550954446206.jpg“뭐라고?”

리에네의 초록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래졌다.

16550954446206.jpg“그럼 그 남자가…… 그걸 전부……. ……아니, 그게 언제였죠?”

1655095444621.jpg“어제.”

16550954446206.jpg“어제?”

어제였다. 그가 갑자기 말이 없고 차가워졌던 게.

16550954466628.jpg-나 좋자고 강요한 일에 사실은 공주님이 좋았던 적은 없을 테니까.

차갑게 저를 밀어내던 그가 그러지 말라는 말에 돌아섰다.

16550954466628.jpg-나는 절박했습니다. 마음이 같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16550954446206.jpg“어제…… 그럼 어제…… 아르사크 가문이 한 짓을 알게 되었다는…… 그런…….”

1655095444621.jpg“아니요.”

클리마가 고개를 흔들었다. 순한 얼굴이 흔들릴 때마다 달콤한 과자 부스러기가 흩날렸다.

1655095444621.jpg“알고 계셨습니다. 어제는 제가 알던 것을 공주님께 전부 말씀드렸다는 사실을 아셨고요.”

16550954446206.jpg“이미 알고 있었다고요? 그런…… 그런……!”

리에네는 너무 놀라 몸을 비틀거렸다. 그러다 쓰러질 것 같았는지 옆에 있던 헨튼 부인이 얼떨결에 일어나 리에네를 붙잡아 주었다.

16550954446206.jpg“어떻…… 어떻게?”

리에네가 정신없이 헨튼 부인의 소맷자락을 당기며 물었다.

16550954446206.jpg“어떻게 그럴 수 있죠? 어떻게? 선왕이 그런 짓을 했는데도? 그 남자는 나한테 어떻게…….”

1655095444621.jpg“좀…… 일단 진정하세요.”

16550954446206.jpg“나한테 그런…….”

16550954466628.jpg-옛일은 잊었습니다. 나는 집을 갖고 싶을 뿐입니다.

리에네가 크게 벌어진 눈으로 더듬더듬 헨튼 부인을 향해 말했다. 사실 누구에게 말하는지는 상관없었다. 단지 지금 헨튼 부인이 앞에 있을 뿐이었다.

16550954446206.jpg“그 남자는…… 다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다. 그런데 나한테는 다 잊었다고…… 나를 빼앗긴 적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그리고 말했다.

16550954466628.jpg-공주님이 원하는 걸 해요.

16550954446206.jpg“그게 싫었나 봐요……. 내가 혹시라도 그 사람을 무서워해서…… 그 사람이 내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억지로 받아들이는 걸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고 하자 그는 더 울라고 했다. 우는 법을 잘 모르는 사람 같으니 더 울라고. 그래야 잠을 잘 수 있을 거라고. 커다래진 눈에 눈물이 울컥 고였다.

16550954466628.jpg-내게 중요한 건 그 상처를 만져 주는 사람이 공주님이고, 나는 이제 아프지 않다는 겁니다.

이제야 그 말의 의미를 전부 알았다.

1655095444621.jpg“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습니다. 사람을 불러와야 할까요?”

16550954446206.jpg“……아뇨.”

리에네는 눈물이 그렁대는 눈으로 헨튼 부인을 바라보다 활짝 웃었다.

16550954446206.jpg“고마워요, 부인. 그리고 미안해요.”

1655095444621.jpg“갑자기 말입니까?”

리에네가 두 팔을 벌려 헨튼 부인을 덥석 안았다. 헨튼 부인은 경악한 나머지 숨도 쉬지 못했다.

16550954446206.jpg“그 남자가 전부 다 알고 있었던 거요. 다 알면서도 내게 온 거요. 너무 미안해요. 그리고 감사해요.”

1655095444621.jpg“저는 통 무슨 말인지…….”

헨튼 부인을 이해시키는 건 나중 일이었다. 리에네는 부인을 놓고 클리마에게로 돌아섰다. 그리고 부인에게 한 것처럼 그를 아주 힘껏 안았다 놓았다.

16550954446206.jpg“고마워요, 종제님. 그리고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고마워요.”

1655095444621.jpg“고, 공주…… 공주님……. 공주…….”

클리마는 얼굴 전체가 새빨개져서 리에네가 놓아줄 때까지 계속 말을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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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54446206.jpg“둘 다 꼭 생각해 보세요.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말을 마친 리에네가 후다닥 돌아섰다. 양손에 치맛자락을 말아 쥔 리에네가 다섯 살 때처럼 발목을 드러내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지금은 아주 많이 울고 싶었다.

16550954466628.jpg-울고 싶을 땐 나한테 와서 울어요. 아깝게 혼자 보지 말고.

그러니까 그에게 가야 했다. * * * 블랙은 강 남쪽의 빈 저택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페르모스의 말이 맞았다. 제대로 된 성벽만 세우면 그곳은 요새로 쓰기에 최적이었다. 위치며 전망이며 지형이며 전부 나무랄 데가 없었다.

16550954523559.jpg“그렇다면 신전의 계단 공사가 끝나는 대로 이쪽도 공사를 시작하도록 하지요. 이번에도 금액은 전부 부담하실 겁니까?”

16550954466628.jpg“그래.”

16550954523559.jpg“흠…… 제대로 지으려면 꽤 지출이 큰데요.”

16550954466628.jpg“알리토 공국에서 금을 보내올 때가 됐잖아.”

16550954523559.jpg“아, 벌써 그렇게 됐습니까?”

알리토 공국 근처에는 블랙이 전쟁 대금을 대신해 소유권을 넘겨받은 금광이 있었다. 티와칸은 공국에 금 채굴권을 대여하고 매년 수익의 절반을 가져오고 있었다. 대륙에서 티와칸의 정확한 재산 규모를 알고 있는 것은 페르모스 하나일 것이다. 그만큼 재산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고, 토지나 광산처럼 소지가 불가능한 덩치 큰 재산도 다수였다. 금광은 하나였지만 철 광산과 소금 광산은 여러 개였다. 소금 광산에서 나는 수익만으로도 티와칸은 여느 소규모 공국의 일 년치 예산에 해당하는 금액을 벌어들였다. 전쟁을 벌이면 승자거나 패자거나 모두 금전적으로 커다란 손해를 보기 마련이었다. 돈을 버는 것은 용병단뿐이었다. 블랙이라는 무력에 페르모스라는 두뇌가 더해진 티와칸은 지난 십 년간 대륙에서 흘러나오는 눈먼 돈을 부지런히도 쓸어 담았다.

16550954466628.jpg“네가 그걸 몰랐을 리는 없고.”

블랙이 힐긋 페르모스를 돌아보았다. 페르모스는 민망한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16550954523559.jpg“역시 주군은 못 속이겠습니다. 저는 요새 건설은 그저 시작이지 않느냐는 말을 하려 했습니다. 나우크는 밑 빠진 독입니다, 주군. 아시겠지만요.”

16550954466628.jpg“알고 있어.”

16550954523559.jpg“그래도 쏟아부으시겠다는 뜻이군요.”

16550954466628.jpg“돈이야 벌면 돼. 가진 게 없지도 않고.”

16550954523559.jpg“그야 그렇지요……. 뭐, 주군의 재산이 워낙 덩치가 크니 현상 유지는 될 겁니다. 부족해지면 제가 상단이라도 운영해 열심히 돈을 굴리겠습니다.”

16550954466628.jpg“언젠가 가뭄은 끝난다.”

16550954523559.jpg“네?”

블랙이 너무 확정적으로 말을 하는 바람에 페르모스가 눈을 끔벅거렸다.

16550954523559.jpg“뭐 아시는 게 있는 겁니까?”

16550954466628.jpg“20년간이나 가뭄이 지속된다는 건 부자연스럽지. 기후가 전부 바뀐 게 아니라면 나우크만 그렇다는 건 말이 안 돼.”

16550954523559.jpg“어, 그야 그렇지만 말입니다.”

16550954466628.jpg“기후를 공부한 자들이 필요해. 조만간 학자들을 불러들일 생각이다. 가뭄의 원인을 알면 해결 방법도 나오겠지.”

16550954523559.jpg“아하. 그런 뜻이로군요.”

확실히 그의 주군은 시야가 넓었다. 왕국 하나를 통째로 먹여 살리겠다는 미친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앞으로의 계획이 있었다.

16550954523559.jpg”주군께서는 정말로 이 땅에 정착하실 결심을 하셨군요. ……아니, 그런데 말입니다. 오실 때만 해도 잠시 머물 생각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대체 언제 생각이 바뀌신 겁니까?”

블랙이 다시 페르모스는 힐긋 돌아보았다. 묘하게 가늘어진 눈이 어쩐지 저를 바보 취급하는 느낌이라 페르모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50954523559.jpg“왜 그렇게 보십니까?”

16550954466628.jpg“그땐 그랬고.”

뭔가를 질겅질겅 씹는 듯한 말투였다. 페르모스는 그게 주군이 유일하게 드러내는 인간적인 면모라고 생각했다. 대꾸하기 썩 내키지는 않지만 입이 알아서 열리는 그런 상태에서 튀어나오는 말투였다.

16550954466628.jpg“내 것으로 만들고 나면 떠날 생각이었으니까.”

16550954523559.jpg“다른 광산들처럼 말이지요.”

소유만이 바뀌었을 뿐, 나우크는 그가 떠나도 알아서 지금처럼 굴러갔을 것이다. 딱히 용병 생활에 불만이 없었던 그는 혼인 후에도 살던 대로 살 생각이었다.

16550954523559.jpg“그런데 나우크에는 공주님이 계셨고, 공주님은 마침 그런 분이셨고…… 음, 그래서 그렇게 된 거지요.”

페르모스가 혼잣말처럼 중얼대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을 타고 가던 중 갑자기 주변을 훌쩍 돌아본 그가 이런 말을 했다.

16550954523559.jpg“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16550954466628.jpg“뭐가?”

16550954523559.jpg“정착 말입니다. 주군께선 꽤 괜찮은 왕이 되실 겁니다.”

그 말에 블랙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장 고개를 저었다.

16550954466628.jpg“나는 왕이 될 생각이 없다. 나우크에는 이미 더할 나위 없는 군주가 있어.”

16550954523559.jpg“그게, 음……. 저도 물론 공주님이 군주로서 훌륭한 분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나우크의 정치적 상황은 공주님께 너무 위태롭지 않습니까?”

16550954466628.jpg“그래서 대단한 거야. 그런데도 지금껏 통치권을 지키고 있었다.”

16550954523559.jpg“그야 왕실 재산을 거덜 냈으니까요.”

16550954466628.jpg“그게 공주의 통치권을 지켜왔을 테지. 나우크는 리에네 공주가 아닌 다른 군주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클라인펠터가 이제껏 힘으로 통치권을 빼앗지 못했던 이유였다. 반란은 간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지 못했다. 나우크의 사람들은 여섯 가문의 반대로 아직 대관식을 치르지 못하고 그저 공주라 불리는 리에네를 사랑했다. 리에네가 써 버린 재산은 그렇게 단단한 지지기반이 되어 왔다.

16550954523559.jpg“으음……. 확실히 이상적인 군주상이긴 하지요. 하지만 한계가 있다는 게 문제지 않습니까. 공주님의 재산은 이제 거의 남지 않았을 겁니다. 공주님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도, 지금처럼 사람들의 지지가 확실하겠습니까?”

16550954466628.jpg“이제는 상관없는 일이야.”

페르모스가 입술을 실룩였다.

16550954523559.jpg“이젠 주군께서 그 역할을 떠맡겠단 말씀이겠군요.”

16550954466628.jpg“해도 돼. 그 정도는. 그게 내 역할이다.”

16550954523559.jpg“……뭐, 그러시다면요.”

페르모스가 어깨를 으쓱대며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블랙이나 리에네나. 그가 볼 때는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남을 위해 가진 걸 쏟아붓는 행위는 같았고, 그 또한 아무 군주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 의도가 조금 다르려나. 공주님께서는 나우크를 위해서 그랬다지만, 주군께서는 공주님을 위해 그러실 테니. 그런 걸 보면 둘이 참 잘 만나긴 했다. 이렇게 이상적인 한 쌍도 없을 것이다. 하여간 블랙이 자신의 역할을 정했다면 그 또한 역할이 정해졌다는 의미였다. 이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망해 가는 작은 나라를, 두 명의 썩 괜찮은 군주와 함께 부국으로 만들어 가는 일도. 혼자 고개를 끄덕인 페르모스가 화제를 돌렸다.

16550954523559.jpg“그럼 대의회만 끝내면 되겠군요. 클라인펠터는 확실히 정리가 될 테니 남은 것들은 적당히 목줄을 묶어 두고 조이면서 지내도 되겠습니다.”

16550954466628.jpg“대의회가 기대되는군.”

대의회를 위해 블랙은 작은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블랙이 하는 말을 알아들은 페르모스가 씩, 개구진 웃음을 지었다.

16550954523559.jpg“동감입니다, 주군.”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나우크 성이 성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도개교를 지난 블랙은 성문을 통과해 마사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과 마주했다.

16550954446206.jpg“로드 티와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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