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추방 (1)2021.12.08.
두 명의 클라인펠터는 밧줄로 손이 묶였다. 보통 죄수들과 똑같은 대우였다. 손을 묶은 밧줄 끝은 서로 연결되어 그 끝을 티와칸이 쥐었다. 이런 대우는 있을 수 없다며 린든 클라인펠터가 버럭버럭 고함을 질렀지만 몇 차례 정강이를 걷어차이자 조용해졌다. 그리고 리에네는 그 과정을 전부 지켜보았다. 딱히 일부러 보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보였다. 지금 리에네는 대의회장까지 두 명의 죄수를 호송해 가는 블랙을 배웅하러 나왔으니까.
“조심하세요.”
리에네는 말에 오르는 블랙을 보며 당부를 잊지 않았다. 블랙이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클라인펠터 가를 향한 충성심은 깊어요. 자발적으로 저들을 구하려고 오는 사람들이 있을지 몰라요.”
“네.”
대답이 참 쉬웠다. 리에네가 손에 닿는 대로 블랙의 무릎을 툭 치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진짜란 말이에요.”
“못 믿겠다고 한 적 없습니다. 대비를 해두었으니 괜찮을 겁니다.”
“그래도요. 정말 조심해야 해요. 다쳐서 오지 말아요.”
“하아…….”
돌연 그가 한숨을 내쉬기에 잔소리가 과했나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리에네가 틀렸다.
“움직이지 말아요.”
“네?”
“말 위라서 위험하니까.”
말에 탄 블랙이 몸을 한껏 기울여 리에네에게 입을 맞췄다. 남들이 다 보는 와중인 걸 알았지만 이 순간이 그렇게나 애틋하고 달았다. 리에네가 발꿈치를 들어 키스에 응했다. 자세가 불편한 키스는 꽤나 길게 이어졌다.
“이러다 못 가겠는데.”
키스를 마친 블랙이 미적대며 리에네를 놓아주었다.
“잠시만요.”
그가 멀어지기 전 리에네는 한껏 까치발을 들어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아 주었다.
“아무튼 약속한 거예요. 안 다치기로.”
“뜻대로.”
대답하는 블랙의 홍채가 미묘하게 짙어지는 듯했다. 그가 언제 저런 눈을 하는지 몸이 먼저 알아차렸다. 심장이 저릿해지며 다시 입을 맞추고 싶어졌다. ……나도 참. 정신이 나갔나 봐.
“다녀오세요.”
“……서두르겠습니다.”
리에네가 먼저 거리를 벌리길 기다린 다음 블랙이 말을 출발시켰다. 리에네는 그 자리에 서서 블랙이 성문을 나설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 앞을, 블랙보다 늦게 움직이기 시작한 라피트가 스쳐 갔다.
“리에네.”
“…….”
리에네가 눈을 돌렸다. 상대해 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내게 보여 주려고 일부러 한 짓이라면 소용없습니다. 나는 믿지 않을 겁니다. 그대는 영원히 내 연인입니다.”
“……하.”
그런데 이건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라피트 클라인펠터. 잘 들어요. 그대는 마음에 병이 들었어요. 그 처지가 딱하다는 마음도 들지 않는 건 그대의 무례가 나를 몹시 불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부디 정신을 차리고, 그대가 살길이나 염려해요.”
“리에네!”
“다시는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말도록. 나는 그대의 군주이고, 그대는 내게 반역을 저지른 죄수일 뿐입니다. 이자를 이만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만들어 줘요.”
뒷말은 밧줄을 쥐고 있는 티와칸을 향한 것이었다.
“예, 공주님.”
티와칸은 인정사정없이 라피트를 묶은 밧줄을 잡아당겼다.
“읏! 리에네!”
“저자가 내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은 무례이니 그땐 입을 다물게 하고요.”
“물론입니다, 공주님.”
퍽! 말을 마치자마자 다른 용병이 라피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윽!”
그가 비틀대며 넘어지려고 하자 다시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될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대들의 수장을 위해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무사히 다녀와 줘요.”
“감사합니다, 공주님.”
티와칸들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대신한 뒤 라피트를 질질 끌고 사라졌다.
“……너무했나.”
넋이 나간 듯, 종이 인형처럼 흐느적대며 끌려가는 라피트가 한참 멀어지자 리에네가 중얼거렸다.
“아니, 그렇지만 점잖게 말하면 통 못 알아들었으니까. 마지막까지 그런 말이나 하고.”
리에네가 턱을 절레절레 저었다. 마음을 써 줄 필요가 없었다. 라피트 클라인펠터는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당해 본 거절을 믿지 못해 집착하는 것뿐이었다.
“저 사람도 좀 어른이 되길.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는 살기 힘들 테니까.”
마음이 거짓말처럼 평온했다. 리에네는 발길을 돌려 부지런히 성 안으로 향했다. 오늘도 바쁠 예정이었다. 대의회가 무사히 마무리되면 남은 일은 혼인식이었다. 블랙과 티와칸의 용병들을 각기 귀족과 기사로 임명하는 서임식도 함께 진행할 예정이라 준비할 게 무척 많았다.
“보석을 판 돈이 넉넉히 남았으니까 침실도 새로 단장해야 해.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미리 물어볼 걸 그랬네.”
새로 맞이하는 왕실의 반려를 위해 침실을 단장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것저것 할 일이 계속 떠오른 리에네가 계단을 뛰어올랐다. * * *
“대의회의 신성함을 어찌…….”
클라인펠터를 제외한 다섯 가문 중 세 가문이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나머지 두 가문은 할 수가 없었다. 일단 로사델은 왼손이 부러져 있는 데다가, 오른손은 어디에 써야 하는지 똑똑히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부터 제 오른손이 할 일은 서명을 하는 것뿐이었다. 주먹을 움켜쥐고 떨 게 아니었다.
“그러지 말고 앉읍시다.”
로사델이 오른손을 휘저어 다른 귀족들을 말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아직 티와칸의 수장을 정식으로 대면한 적이 없었다.
“대의회에 참석할 권리는 나우크의 신과 리세베리에 의해 공고히 축복받은바, 외부인은 감히 출입을 하지 못한다. 당장 나가라!”
기세등등하게 소리를 친 자는 버레이였다. 오늘 이 자리에 가장 많은 사병을 데려와 대의회장 밖에 세워 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럼 이것들은 어쩌라고.”
블랙은 딱히 맞받아치는 기색 없이 턱짓으로 클라인펠터 둘을 가리켰다.
“죄수를 감시할 자는 있어야지.”
“무, 무엄하다……! 어찌 일개 용병 따위가 나우크의 원로에게 말대꾸를 하는가!”
버레이가 이런 말을 지껄이자 로사델이 한숨을 쉬었고, 엘라로이덴이 짚고 온 목발을 괜히 도로 움켜쥐며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무엄이고 뭐고.”
블랙은 문 앞을 가로막은 버레이를 가볍게 손으로 떠밀었다.
“일단 비켜라. 죄수를 옮겨야 하니까.”
“감히 내 몸에 손을 댔느냐!”
버레이가 울컥 소리를 지르며 밖에 세워 둔 사병들을 향해 손뼉을 딱딱 쳤다.
“뭣 하느냐! 이놈들을 벌해라!”
다른 세 가문이 그렇게 멍청한 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클라인펠터 가와 말을 맞춰 두었다. 가주가 공석인 그곳은 현재 전 가주의 사촌들이 노련한 집사와 함께 집안일을 맡고 있었는데, 대의회장에서 소란이 일어나면 그 핑계로 사병을 보내기로 얘기가 되어 있었다. 나우크 성 근처에는 진작 눈을 심어 두었다. 대의회장으로 향하는 용병들은 여덟밖에 되지 않았다. 그 정도 숫자라면 아무리 악명이 자자한들 처리하지 못할 정도가 아니었다. 제 사병 서른을 데려왔고, 클라인펠터 가에서 보내기로 한 사병이 오십이었다. 열 배나 되는 숫자는 무위의 차이를 우습게 만들 것이다. 하여간 그렇게 믿는 구석이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블랙이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뭐라고? 뭘 알았다는 말이냐?”
“내가 오늘도 기분이 좋다는 걸. 네가 말했나?”
뒷말은 로사델을 향한 것이었다. 졸지에 지목을 당한 로사델이 손목이 부러졌단 사실도 잊고 열심히 양손을 흔들었다.
“무, 무슨 말이오! 나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소이다!”
“그럼 너인가?”
이번에는 엘라로이덴이었다. 그 역시 부러질 것처럼 고개를 저어댔다.
“그, 그럴 리 없잖소! 죽은 듯 있으라 해서 오늘까지 내내 죽은 듯 있었소!”
“이상한데.”
블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은 내 얼굴에 대고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놈들은 없는데. 나우크의 대귀족들이 유난히 멍청한 건가.”
“뭐라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
“눈을 똑바로 뜨고 다니란 뜻이야.”
태연하게 답을 한 블랙이 버레이의 왼쪽 손을 붙들었다. 너무 가벼운 동작이라 팔이 잡히는 줄도 모르고 있던 버레이가 뒤늦게서야 놀라 어깨를 흔들었다.
“늦었어. 잡혔으면 이미 끝난 일이다.”
로사델과 엘라로이덴에게는 몹시 익숙한 소리가 울렸다.
“으아악!”
버레이가 부러진 손목을 쥐고 길길이 날뛰었다.
“이 몸에게 무슨 짓을! 여봐라! 대체 뭣들 하고 있나! 내가 이런 짓을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는 게냐!”
블랙이 버레이의 무릎 아래를 걷어찼다.
“으악!”
단숨에 엎어진 버레이가 눈물을 흘리며 버둥거렸다. 부러진 손목 못지않게 무릎이 아팠다.
“이, 이게 무슨…….”
처음에는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던 다른 귀족들이 이때서야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신분에 평생 길들어 온 귀족들은 감히 이런 짓을 하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 어떻게…… 대체 어떻게…….”
“시끄러우니 가서 앉아. 대의회를 진행해야지.”
“밖에…… 버레이 가문의 사병들이 있는데…….”
“있었겠지.”
“뭐……?”
“지금은 없어.”
“무슨 소리를…… 왜 없다는 게냐. 왜…….”
“궁금하면 확인해.”
블랙이 선뜻 몸을 비켜 주었다. 두 귀족이 눈치를 보다가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그사이 블랙은 원래는 클라인펠터가 앉아야 하는 상석에 가서 태연히 앉았다. 자연히 두 명의 죄수는 그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아야 했다.
“시작해.”
로사델이 냉큼 그 말을 받았다.
“그럼 시작합시다. 다, 다들 자리에 앉으시오.”
아무도 버레이를 일으켜 주지 않았다. 버레이는 그대로 바닥에 앉은 채 제 사병들이 오길 기다렸지만 한참을 지나도 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더는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을 때, 밖으로 나갔던 두 귀족이 창백해진 얼굴로 돌아왔다. * * * 사병들은 없었다. 그들이 버리고 간 무기와 약간의 핏자국, 그리고 태연히 서 있는 티와칸의 용병들이 있을 뿐이었다. 블랙은 가급적 피를 보지 말라는 리에네의 말을 착실히 따르고 있었다. 그걸 다른 가문들이 모르고 있다는 게 안타까운 일이었다. 게다가 단순한 수치 비교는 의미가 없었다. 재미 삼아 하는 대련 외에는 칼을 휘두를 일도 없는 귀족의 사병들과 한때 전쟁터가 집이었던 용병들과는 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이상입니다.”
오늘 대의회는 왕실에서 소집을 요청한 만큼, 말을 전달할 자가 필요했다. 알란드는 이 자리에 오기 전 밤을 꼬박 새우며 준비한 문서들을 귀족들에게 나눠 주었다. 거기에는 린든 클라인펠터와 그의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로페스 클라인펠터가 무슨 짓을 저질렀으며, 그게 어떻게 반역에 해당되는지 조목조목 법리적 해석을 곁들여 적혀 있었다. 글자만 읽을 줄 알면 무죄라는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해서, 합당한 처벌은 교수형입니다.”
교수형이라는 말이 끝나자 동요가 시작되었다.
“그, 그럴 수는…… 그럴 수는 없지 않나!”
손목이 온전한 두 명의 귀족 중 하나가 큰 소리를 냈다. 린든 클라인펠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목을 매달겠다고? 누가 감히?”
블랙이 힐긋 턱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무심해 보이는 눈짓에는 그게 어렵겠냐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 땅에서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나?”
린든 클라인펠터도 지지 않고 맞섰다. 블랙이 두려운 건 사실이었지만 교수형을 잠자코 당할 수는 없었다. 만일 그가 교수대에 선다면 가문의 사병들이 몽땅 몰려올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건 전쟁의 시작을 의미했다. 귀족 하나가 손을 들고 말했다.
“나는 반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