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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추방 (2) (73/145)

73. 추방 (2)2021.12.12.

16550955144266.jpg“증거와는 상관없이 대의장을 교수대에 매달 수는 없소.”

반대를 한 귀족이 동의를 구하듯 다른 원로들을 바라보았다. 로사델과 엘라로이덴은 눈을 마주하는 대신 힐끔 블랙의 눈치를 살폈다. 버레이는 퉁퉁 부어오른 손목을 쥐고 통증을 참느라 정신이 없었다.

16550955144266.jpg“대의회에서 만장일치가 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리에네 공주님께서 사면을 제시하셨습니다. 교수형을 피하는 대신 반역을 저지른 당사자 둘은 영구히 이 땅에서 추방당할 것입니다. 사면에는 찬성하십니까?”

추방을 사면이라 포장한 뜻은 명확했다. 목은 붙여 두되 더는 왕실에 덤비는 꼴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귀족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예전 같았으면 어림없을 일이 지금은 가능했다. 왕실은 티와칸이라는 무력을 손에 넣었다. 이제껏 대륙의 어떤 왕실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알란드의 차분한 음성이 계속해서 대의회장 안에 이어졌다.

16550955144266.jpg“대의회에서 사면에 반대한다면 왕실도 사면을 할 수 없습니다. 교수형에도 반대니 두 죄수는 영원히 죄수로 지내야 할 겁니다.”

16550955144266.jpg“말도 안 돼!”

린든 클라인펠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16550955144266.jpg“그런 말도 안 되는 말장난을! 감히 클라인펠터 가문에!”

블랙이 등 뒤로 손짓을 했다. 그러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티와칸이 다가왔다.

16550955144288.jpg“죄수를 떠들지 못하게 해라.”

16550955144266.jpg“예, 주군.”

쾅! 티와칸은 린든 클라인펠터의 뒤통수를 움켜쥐고 바닥에 처박았다. 퍽! 단단한 돌바닥에 이마가 찢겨 피가 튀었다.

16550955144266.jpg“이…… 짐승들이…… 감히…….”

16550955144266.jpg“떠들지 마라.”

쾅! 그리고 다시 처박혔다. 입을 열 때마다 이마가 깨지리라는 게 뻔했다.

16550955144266.jpg“…….”

결국 린든 클라인펠터는 입을 다물었고 알란드가 다시 물었다.

16550955144266.jpg“사면에도 반대인 겁니까? 그럼 대의회의 뜻대로 반역자들은 영구히 죄수가 되었다고 기록하겠습니다.”

16550955144266.jpg“자, 잠깐!”

린든 클라인펠터가 다급히 혀를 놀렸다. 티와칸이 그의 뒷머리를 치켜들었지만 블랙이 눈짓으로 말렸다.

16550955144266.jpg“사면을…… 허락하시오.”

린든 클라인펠터가 이를 갈며 말했다. 추방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곳에서 쥔 모든 권력을 놓고 목숨만 붙여 타지로 나갈 생각을 하면 뱃속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그래도 영원히 그 지하에 갇혀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쫓겨나더라도 지원을 얻을 수 있는 다른 나라를 찾는 게 나을 것이다. 다행히 가문의 장자는 샤르카 왕국의 외손주였다. 샤르카 왕국까지만 가면 어떻게든 길이 열릴 터였다.

16550955144266.jpg“알겠소이다.”

로사델이 냉큼 그 말을 받았다. 린든 클라인펠터가 이쪽을 노려보자 그는 시선을 피하는 대신 부러진 왼손을 슬쩍 들어 보였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이었다.

16550955144266.jpg“다른 가문들은?”

알란드가 묻자 네 가문의 수장들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55144266.jpg“만장일치로 사면에 찬성했음을 기록하겠습니다. 추방한 자는 나우크에서 얻은 무엇도 몸에 지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름과 신분, 재물 모두를 포함합니다. 공주님께서는 추방자들이 옷을 걸치고 싶다면 특별한 예외로 종제복을 허락한다 하셨습니다.”

16550955144266.jpg“잠깐! 그렇다면,”

린든 클라인펠터가 주춤대며 입을 열었지만 늦은 일이었다. 이제껏 권력에 기대 무의미하던 법이, 그 권력이 사라지자 마땅히 클라인펠터 가문에게도 적용되었다.

16550955144266.jpg“클라인펠터 가의 재산은 모두 왕실에 귀속됩니다.”

16550955144266.jpg“이 무슨 날강도 같은!”

퍽! 블랙이 한 번 더 눈짓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 머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머릿속이 곤죽이 된 것처럼 어지러웠다. 린든 클라인펠터는 쓰러져 자고 싶은 생각을 억지로 붙들었다.

16550955144266.jpg“안, 안 된…….”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너무 작았다. 무기력하게 흐려지는 눈빛을 다른 귀족들도 모두 목도했다. 이제 클라인펠터라는 이름에는 아무런 힘도 없다는 걸 다들 깨닫는 순간이었다. 지금 그는 입을 한 번 잘못 열면 즉시 머리가 깨지는 그런 상황에 놓여 있었다.

16550955144266.jpg“사면은 지금부터 즉각 효력이 발휘됩니다. 공주님의 자비입니다.”

알란드가 대의회를 마무리했다.

16550955144266.jpg“린든 클라인펠터는 추방자가 되었으니 신분을 잃었습니다. 따라서 나우크의 대의장이 될 자격 또한 없습니다. 대의장이 공석이 되었으니 나머지 다섯 가문이 새로운 대의장을 추대해야 할 겁니다. 기간은 내일 이 시간, 새로운 대사제를 선정하기 전까지입니다. 대사제를 지목할 권한이 있는 대의장이 없다면 그 권한은 왕실이 위임받겠습니다.”

이제 다섯 가문은 내일까지 눈치 싸움을 하게 생겼다. 균열과 갈등, 대립과 분열이 이어질 것이다. 리세베리 조약이 절대적인 힘을 지녔던 시절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블랙이 만족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목을 붙여 두는 선택지에 적극 찬성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교수형을 고집해 클라인펠터 가와 충돌하는 일은 피하겠다는 리에네의 의견은 존중했다. 재산을 몰수하면 어차피 사병들은 앞으로 먹고살 걱정에 바쁠 터였다. 더는 위협 거리가 아니었다.

16550955144288.jpg“이것들을 신전으로 끌고 가. 종제복을 입혀야 하니.”

린든 클라인펠터가 남은 힘을 끌어모아 소리쳤다.

16550955144266.jpg“뭐…… 뭐라고? 지금 당장? 가족을 볼 시간은 줘야 할 게 아니냐!”

16550955144288.jpg“그럴 리가.”

16550955144266.jpg“아니,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16550955144288.jpg“그나마 걸어서 이 땅을 떠나고 싶다면 쓸데없이 떠들지 마라. 내 앞에서 큰 소리를 내는 것들한테도 별로 익숙하지 않아.”

16550955144266.jpg“그, 무슨…….”

16550955144288.jpg“아직도 모르고 있었나?”

16550955144266.jpg“…….”

그 나직하고 느린 말이 한 번도 거짓이었던 적이 없다는 걸 몸으로 학습한 클라인펠터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든 블랙이 할 일은 바뀌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부터 거친 종제복을 입고 가진 것 하나 없는 거지꼴이 되어 나우크를 떠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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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0955222628.jpg“미리 말을 전하라는 주군의 뜻이 있었습니다. 궁금하셨을 테니 지금 할까요?”

페르모스가 리에네를 찾아왔다. 리에네의 침실은 한창 혼례복을 짓는 재단사와 플램바드 부인이 옥신각신하는 바람에 어수선한 터였다. 리에네는 그 옆에서 혼례복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서임에 관련한 문서를 만들고 있었다.

16550955222633.jpg“그랬나요? 반가운 전언이네요. 옆방으로 가요.”

16550955222628.jpg“알겠습니다.”

옆방이라고 해봤자 욕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블랙의 침실이었다.

16550955222628.jpg“왜 이렇게 치우셨습니까?”

들어오면서 보긴 했지만 궁금했다. 침대 커튼과 이불이 사라진 침실은 더는 쓸 일이 없어졌다는 말 같기도 했다.

16550955222633.jpg“아, 새로 단장을 하게요. 배우자에 대한 관례예요.”

16550955222628.jpg“그렇군요. 그런데 꼭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두 분은 한 침실을 쓰실 텐데.”

리에네가 의아하다는 듯 눈을 둥글게 떴다.

16550955222633.jpg“왜죠?”

16550955222628.jpg“네?”

오히려 페르모스가 당황해 되물었다.

16550955222628.jpg“지금도 매일 한 방을 쓰시는 게 아닙니까?”

16550955222633.jpg“그건 어쩌다 있는 일이고요. 마땅히 로드 티와칸이 쓰실 방이 있어야죠.”

16550955222628.jpg“아…… 그런 겁니까?”

16550955222633.jpg“당연한 일이에요.”

16550955222628.jpg“아아……. 그렇군요.”

페르모스는 부부끼리 침실을 따로 쓰는 나우크식 귀족 문화를 몰랐고, 리에네는 부부가 한 침실을 쓰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16550955222633.jpg“그럼 얘기를 해 줘요. 대의회는 어떻게 되었나요?”

16550955222628.jpg“아, 그게 말입니다…….”

대의회에서 벌어졌던 일이 짧고 간단하게 전해졌다. 물론 페르모스는 대의회의 원로들이 둘만 빼고 다들 사이좋게 왼손목이 부러진 사실을 생략했다. 대신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했다.

16550955222628.jpg“아주 평화적이었습니다.”

16550955222633.jpg“아, 정말인가요? 다행이네요. 클라인펠터가 고분고분히 추방령을 받아들였다니.”

16550955222628.jpg“이제 부자가 되시겠습니다, 공주님.”

고분고분했다고는 할 수 없었던 페르모스가 잽싸게 말을 돌렸다.

16550955222633.jpg“쉽지는 않을걸요. 클라인펠터가 재산을 고스란히 쌓아 뒀을 리도 없고요.”

16550955222628.jpg“그래도 할 수 있는 한 거둬들여야지요. 일단 린든 클라인펠터와 라피트 클라인…… 크흠, 그 사생아 몫으로 남아 있던 재산은 전부 회수를 할 겁니다. 부디 집구석에 현금을 많이 놔뒀기를 바라도록 하지요.”

16550955222633.jpg“그러게요.”

라피트의 존재를 헛기침으로 얼버무리는 페르모스를 향해 리에네가 가만히 웃었다. 새삼 블랙이 전부 알고 있었으면서도 입을 다물어 주었던 게 느껴졌다. 그 남자는 대체 나를 얼마나 감격하게 만들려는 걸까. 매일 심장이 두근거려서 힘드네.

16550955222628.jpg“주군께서 직접 가셨으니 남아 있는 재산은 확실히 오늘 중으로 왕실 금고에 들어올 겁니다.”

16550955222633.jpg“음…… 나는 좀 걱정이 되는데, 그래도 되는 일일까요?”

16550955222628.jpg“안 될 게 뭐 있겠습니까? 대의회에서 결정이 난 사항인데요.”

16550955222633.jpg“아뇨, 그런 게 아니라 로드 티와칸에게 무슨 일이 있을지 걱정이 된다는 얘기예요. 클라인펠터 가에서 가만히 당하고 있을 리 없잖아요. 지금이라도 경비대를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요?”

16550955222628.jpg“아, 그 얘기였습니까?”

페르모스가 싱긋 웃었다. 아무래도 이 공주님은 주군이 너무 좋으신 모양이었다. 자잘한 걱정을 사서 하는 걸 보니.

16550955222628.jpg“10년 차 녀석들을 여덟이나 데리고 가셨으니 별일은 없을 겁니다. 주군께서는 원래 번잡한 행차를 싫어하시는데도요, 공주님께서 걱정하시는 게 싫으셨던 모양입니다.”

16550955222633.jpg“여덟은 너무 적은 숫자잖아요. 클라인펠터의 사병은 오백이 넘어요.”

16550955222628.jpg“이미 확인했습니다. 저택에 상주하는 숫자는 그 반의 반입니다. 공간에 한계가 있으니까요.”

16550955222633.jpg“반의 반이라고 해도 백이 넘잖아요.”

페르모스의 미소가 늘어났다. 사람 좋은 공주님은 의외로 꽤 순진한 구석이 있었는데, 그런 표정이 드러날 때마다 이상하게 눈이 흐뭇한 게 사실이었다.

16550955222628.jpg“공주님은 주군을 다 모르십니다. 티와칸에서 10년을 버틴 인간이라면 벼락 정도는 맞아야 죽을 겁니다.”

16550955222633.jpg“네?”

16550955222628.jpg“백 정도는 부담되는 숫자가 아니고, 최악의 경우 오백이 전부 남아 있다 해도 목숨을 건질 정도는 됩니다. 그리고 주군께서 가장 재능을 보이시는 분야는 협상입니다.”

16550955222633.jpg“네?”

블랙을 다 모르고 있다는 페르모스의 말이 맞았다. 리에네는 자꾸만 그게 무슨 말인지 되묻고 있었다.

16550955222628.jpg“싸울 필요가 없는 놈들과는 싸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주군의 칼은, 제가 알기로는 무적입니다만, 하여간 그래서 그만큼 무겁습니다.”

16550955222633.jpg“아하…….”

리에네는 뭔가를 생각해 보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진지하게 말했다.

16550955222633.jpg“그래도 경비대는 보내는 게 좋겠어요.”

16550955222628.jpg“네? 아니, 괜찮습니다.”

16550955222633.jpg“아니에요. 보내는 게 좋겠어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나는 꼭 보내고 싶어요.”

16550955222628.jpg“으음…….”

정말 필요 없는 짓이었다. 나우크의 경비대를 보내 봤자 도움이 되기도 전에 상황이 종료될 게 뻔했다. 그런데 진지하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 리에네가 쓸데없이 사랑스럽게 보여서 그게 문제였다. 차마 아니라는 말을 못 하겠는데……. ……하, 젠장. 주군도 이런 심정이시겠군.

16550955222628.jpg“길이 어긋날 수도 있을 텐데요?”

16550955222633.jpg“그건 사소한 일이죠.”

16550955222628.jpg“그, 그럼…… 네. 적당히 보내겠습니다.”

16550955222633.jpg“고마워요.”

그리고 역시나 진심을 담아 활짝 웃는 얼굴은 더럽게도 예뻤다. ……이거 곤란한데. 주군께서는 눈치가 끝내주게 빠르신데. 행여라도 제 눈에 리에네가 미친 듯이 예뻐 보인다는 사실을 들키는 일은 없어야 했다. 무서워서라도 다른 마음을 품을 일은 없겠다만, 일단 예쁘다는 생각을 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웠다.

16550955222628.jpg“그럼 가보겠습니다, 공주님…….”

페르모스가 시무룩해진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16550955222633.jpg“아, 잠시만요.”

리에네가 다급히 그를 붙들었다. 페르모스는 하마터면 펄쩍 뛸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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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55222628.jpg“아니, 손은 왜 잡고 그러십니까. 그냥 말씀을 하세요. 그러면 됩니다.”

16550955222633.jpg“아,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남이 만지는 걸 싫어한다면 다음부터는 조심하죠.”

16550955222628.jpg“네, 정말 감사한 말씀입니다. 앞으로는 절대, 절대로 저를 붙잡고 그러지 마십시오. 그럼 이제 말씀하세요.”

16550955222633.jpg“로드 티와칸은 무슨 색을 좋아하시나요?”

16550955222628.jpg“어…… 네?”

뜻밖의 질문인 탓에 페르모스가 어리둥절해졌다.

16550955222633.jpg“침실을 새로 단장해야 하니까요. 가급적 마음에 드는 색으로 하게요.”

16550955222628.jpg“그, 글쎄요……? 주군께서 좋아하는 색깔 같은 게…… 있을까요?”

16550955222633.jpg“네? 그건 모른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딱히 그런 게 없다는 뜻인가요?”

둘 다였다.

16550955222628.jpg“그런 게 없으니 제가 모르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16550955222633.jpg“아, 그렇구나.”

리에네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55222633.jpg“그럼 돌아오면 물어봐야겠군요.”

페르모스도 묻고 싶었다. 좋아하는 남자가 좋아하는 색깔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얼굴이 저렇게 반짝대는 이유가 뭔지.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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