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전야 (1)2021.12.15.
두 명의 클라인펠터가 이름을 잃고 나우크에서 쫓겨났다는 소문은 밤새도록 입에서 입을 옮겨 다녔다. 나우크에서 가장 큰 부지를 차지하는 클라인펠터 저택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문을 굳게 닫아 두었다. 불을 켜 둔 곳도 없어 아예 텅 빈 집처럼 보였다. 혹시 집안 전체가 화를 당한 건지 다들 쑥덕댈 정도였다. 그러나 일꾼들이 해고당했다는 말은 없었다. 그저 새로운 통치자의 눈치를 보느라 몸을 사리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반면에 남은 다섯 가문은 몹시 바빴다. 그들은 은밀히 버레이 가문의 저택에 모여 내일 이어질 대의회를 대비해야 했다.
“다시는 이런 치욕을 겪을 수 없소, 다시는!”
버레이가 부러지지 않은 손으로 삿대질을 했다. 로사델이 그를 약간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럼 어쩌자는 말이오? 우리끼리 무얼 할 수 있다고?”
엘라로이덴이 한마디 거들었다.
“클라인펠터 가도 없어진 마당에.”
버레이가 울컥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렇다고 우리까지 없어지자는 말이오?”
“가만히 있으면 사라지진 않겠지.”
이렇게 중얼대는 로사델을 버레이가 한껏 노려보았다.
“어찌 그리 태평하시오, 경은! 웬 짐승이 굴러들어와 나우크의 왕 노릇을 하게 생겼는데!”
“다행히 그 짐승은 주인이 있잖소. 제 입으로 그러더이다.”
로사델과 엘라로이덴은 벌써 싸울 의지가 없었다. 버레이가 손목이 부러진 것도 잊고 씩씩대며 자리를 박찼다.
“그래, 그럼 짐승이 무서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여자에게 굽실대고 살자는 말이로군. 부끄러운 줄을 아시오! 다들 아르사크가 우리에게 어떤 빚을 지고 있는지 잊었소?”
버레이의 편을 든 것은 손목이 부러지지 않은 귀족 체르케스였다.
“그걸 잊을 수는 없지……. 다들 그리 생각하시지 않소.”
“암만!”
버레이가 힘껏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귀족들은 표정을 굳혔다.
“그럼 어쩌자는 말이오?”
“짐승은 주인이 있다지만, 그 주인은 아직 목줄을 걸지 않았잖소. 반면에 그 주인의 목줄은 우리가 쥐고 있지.”
리세베리 조약은 아르사크 왕실에 걸어 둔 목줄이었다.
“절대 혼인을 하게 만들어서는 안 돼. 그리도 짐승과 한 침대를 쓰고 싶다면 목줄을 쥐고 있는 게 누군지라도 똑똑히 알려줘야 하오.”
로사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꼴을 티와칸이 가만히 보고 있겠소?”
“놈이 지닌 건 어차피 근본도 없는 무력뿐. 허나 나우크는 오랜 세월 신의 말씀과 공정한 법으로 다스려 온 땅이오. 짐승이 여기서 살겠다면 마땅히 인간의 법을 배워야지.”
체르케스가 말하는 바는 대의회가 쥐고 있는 대사제 선정 건이었다. 말을 잘 듣는 대사제를 앉혀 두고 신의 말씀을 빙자해 최대한 혼인을 방해하면 짐승도 나우크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클라인펠터 가는 절대 이대로 그냥 사라지지 않을게요.”
체르케스는 뭔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의미심장한 말을 보탰다.
“다들 알고 있겠지. 원래 20년 전 나우크의 새 왕실은 클라인펠터가 됐어야 한다는 것을. 당시 가주였던 루카스 클라인펠터가 갑자기 신의 저주를 받지만 않았어도 아르사크 따위가 왕관을 쓰는 일은 없었을게요.”
“으음…….”
귀족들이 이를 물고 그들만 아는 과거를 되짚었다. 20년 전이라 그때는 새파란 애송이였던 이들도 있었다. 반란에 가담했던 부친이 죽고 그 자리를 물려받은 이가 아르멘다리스와 로사델이었다. 하지만 그 일로 여섯 가문이 나우크의 권력자가 되었고, 대부분의 부를 독식할 수 있었다는 기억은 뚜렷했다.
“그 값을 지불해야지, 아르사크는. 왕관이 공짜일 수는 없으니.”
다섯 명의 원로들은 린든 클라인펠터의 뒤를 이를 대의장을 하나 골랐다. 체르케스였다. 물론 다들 썩 기꺼워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속으로는 가문의 명예나 재산을 따져도 체르케스는 나우크의 대의장이 될 수 없다고 여겼다. 예고된 분열을 눌러 담은 채, 다섯 명의 원로들은 이튿날 이어질 대의회를 기다렸다. * * *
“너무 늦어.”
리에네는 창가에 서 있었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밖을 향해 내내 눈을 부릅뜨는 중이었다.
“정말로 아무 일 없는 게 맞을까? 클라인펠터를 나우크 밖으로 데려간다고 했잖아……. 그런데도 사고가 안 생길 리가 없어. 어쩌지.”
리에네가 초조하게 엄지손톱을 물었다. 얼마 전 플램바드 부인이 다듬어 준 게 무색하게 다시 끝이 거칠어졌다.
“경비대는 왜 또 소식이 없는 거야. 분명히 페르모스 경이 보내겠다고 했는데. 설마 말만 그렇게 한 건 아니겠지……. 이러지 말고 가서 물어볼까.”
시간이 거의 자정을 향해 가자 더는 참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리에네는 잠옷 위에 망토를 걸치고 촛대 하나만 쥔 채 방을 나섰다.
“페르모스 경은 방에 있겠지.”
페르모스는 얼마 전 북쪽 탑으로 방을 옮겼다. 지금은 티와칸의 영역처럼 된 그곳이 더 편한 모양이었다. 리에네는 거의 뛰다시피 걸어서 북쪽 탑을 향했다. 이 시간에도 북쪽 탑은 각각 입구와 계단을 지키는 불침번들이 있었다. 다행히 페르모스는 방에 있을 거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대신한 리에네가 부지런히 계단을 밟고 페르모스의 방에 도달해 문을 두드렸다.
“으음……? 공주님?”
다행히 아직 잠이 들지는 않았고, 자려던 것처럼 옷을 벗고 있던 페르모스가 문을 열어 주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목 뒤에서 묶었던 머리를 풀고 외알 안경을 쓰지 않은 페르모스를 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어쩐지 다른 사람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경비대를 보내셨는지 확인하려고요. 확실히 보내신 거죠?”
“아, 물론 명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걸 지금 꼭 확인하셨어야 했습니까?”
“네.”
“그럼 확인했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서 주무실……. ……공주님?”
리에네가 슥 방 안으로 들어서자 페르모스가 펄쩍 뛰었다. 이제 보니 그는 속바지만 하나 달랑 걸린 차림새였다. 티와칸들은 똑같은 속바지를 입는 모양이었다.
“아니, 제 방에는 왜 들어오시는 겁니까?”
“잠이 안 와요.”
“네? 네, 네? 뭐라고요?”
“너무 늦는 것 같지 않아요?”
“……아. 주군을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맨발을 동동거리던 페르모스가 어쩐지 맥 빠진 얼굴을 했다.
“어디 보자, 지금 시간이…… 자정이 막 지났군요. 늦기는 늦었지만 별일은 없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별일이 있었으면 소식이 왔을 테니까요. 제 생각으로는, 클라인펠터가 남겨둔 재산이 많아 그걸 깔끔히 챙겨 오느라 늦으시는 게 아닐까 하는데요.”
“아니, 그건 아니에요. 그쪽은 벌써 사람을 보내 봤어요. 클라인펠터 저택에는 불이 꺼져 있대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조용하다고 했어요.”
“저런. 어지간히도 걱정이 되셨나 봅니다……. ……아, 이런.”
리에네에게 예의상 앉으라는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페르모스는 자신이 몹시 부적절한 차림새라는 것을 깨닫고 또 화들짝 뛰었다.
“저 옷 좀 갖춰 입겠습니다, 공주님. 잠시만.”
“괜찮으니 관두세요.”
“네? ……아니, 네?”
“추가로 경비대를 더 보내는 게 어떨까요? 어디로 보내야 하는지 감이 안 와서 물으려고 왔어요.”
“아니, 공주님. 제가 그렇게 괜찮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자정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잖아요.”
“주무시고 계시면 거짓말처럼 나타나실 겁니다.”
“잠이 안 온다니까요.”
“공주님.”
페르모스는 손바닥으로 드러난 상체를 가리는 부질없는 노력을 했다. 제 눈을 빤히 향하는 시선을 보면 저가 벗고 있든 말든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게 확실했지만, 그래도 제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음, 그러니까……. 혹 주제넘은 충고가 될지 염려스럽습니다만, 그래도 음…… 주군께는 그분만의 방식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하여간 혼자서 해결하는 식이라 미리 사서 걱정해 봤자 걱정하는 사람만 손해입니다.”
“로드 티와칸을 향한 경의 믿음이 확실하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은 충분히 걱정이 되는 상황이잖아요.”
“걱정이 될 게 없다는 말씀입니다.”
“말로만 그럴 게 아니에요. 린든 클라인펠터를 추방하는 일이잖아요. 클라인펠터 가의 사병이 움직였을 수도 있고, 또…….”
“그랬다면 제가 진작 알았을 겁니다. 그리고 클라인펠터 가의 사병은 더 이상 없습니다, 공주님.”
“네? 오백도 넘는 사병이 없다니요?”
“노임을 안 준다는데 남아 있을 인간이 있을 리 없잖습니까.”
“아……?”
“잊으셨습니까? 클라인펠터 가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이제 그건 전부 공주님 몫입니다. 공주님께서 당신 돈으로 클라인펠터 가에 사병을 고용해 주실 게 아니라면 없는 거지요.”
“아하…….”
리에네가 눈을 깜박거렸다. 아직 클라인펠터의 몰락을 실감할 수 없는 모양이라고 이해했다. ……하긴. 그간 오죽 시달렸겠어. 못 믿는 것도 당연하지.
“그럼 이제 가서 주무십시오. 클라인펠터는 물론이고 다른 가문의 사병들도 얼씬대는 기미 같은 건 없었습니다.”
그만 좀 믿어 줬으면 좋겠다. 상대의 병력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건 전쟁에서 가장 기본적인 일이며, 따라서 티와칸보다 잘하는 인간들은 얼마 없으리라는 걸.
“그런가요…… 아니, 그러면 사병 말고 다른 사고라도 생긴 거라면요?”
“어떤 사고 말입니까?”
“그러니까…… 말을 타고 가다 말이 갑자기 놀랐다든지……,”
“그럼 어디 좀 부러지셨겠지요.”
태평한 대꾸에 리에네가 발끈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 사람을 보내야 한다는 거잖아요.”
“괜히 불쌍한 경비대만 고생시키는 꼴입니다. 이 밤중에 어떤 길을 택했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느라 국경 근처를 헤매라고 하는 건 너무 잔인한 짓 아닙니까? 그런 건 티와칸에서도 손사래를 칠 일입니다.”
“그런가……. 그럼 방향만이라도 알려줘요. 마중이라도 가게요.”
페르모스의 안색이 약간 파리해졌다.
“공주님. 그게 그거 아닙니까?”
“마중은 좀 낫잖아요.”
“낫기는 뭐가 낫단 말입니까…….”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진지한 얼굴을 보면 리에네는 이대로 저를 끌고 마중을 나가자고 할 사람이 확실했다.
“공주님. 만일 이 시간에 공주님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는 걸 주군께서 아시면 저는 평생 지팡이를 짚고 살게 될 겁니다. 더는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아, 그럼 나와 동행해 주면 되겠군요.”
“아니, 그게 안 된단 말입니다! 저는 지금 기필코 공주님을 말려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니 제발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네?”
“페르모스 경. 경의 충성심에 제가 의심을 품게 만들지 마세요. 서두르겠다는 사람이 오히려 더 늦고 있는데 당연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결국 이런 말까지 해야 했다.
“만일 주군께서 불의의 사고를 겪으셨다면 늦든 빠르든 연락이 올 겁니다.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지금으로서는 기다리는 게 가장 빠른 길입니다. 그리고 공주님.”
페르모스가 표정을 바꿔 리에네에게 다가섰다.
“지금 공주님께서 맨발에 잠옷 차림이라는 건 아십니까?”
“어떻게 안 거죠. 망토를 입었는데.”
“망토를 입으셨으니 안 겁니다. 옷을 갖춰 입으셨다면 굳이 성 안에서 망토를 걸치진 않으셨겠지요.”
리에네가 고개를 돌리고 작게 혀를 찼다.
“……영리하네요. 알고는 있었지만.”
“그리고 저도 참 민망한 차림새지 않습니까? 이걸 누가 보면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겁니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시는 게 낫습니다.”
“이 시간에 잠옷을 입고 있다고 그걸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요.”
“남녀 사이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경하고 나를 남녀로 엮는다는 건 무엄한 짓입니다. 티와칸에는 그런 불경한 인물이 없을 줄로 알아요.”
말은 당차게 해도 리에네는 은근슬쩍 망토 자락을 여미고 있었다. 이제야 신경이 쓰이긴 하는데, 그래도 순순히 양보할 마음은 없다는 몸짓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오죠. 그럼 경은 나와 동행해 줄 건가요?”
“하아, 공주님…….”
페르모스가 곤란해 미치겠다는 듯 얼굴을 쓸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여기 있다고?”
계단을 올라오는 저벅 소리와 함께 믿기지 않는다는 식의 낮은 말투가 들려왔다.
“엇……! 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