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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전야 (2) (75/145)

75. 전야 (2)2021.12.19.

철컥, 문이 열렸다. 그리고 드러나는 얼굴은 몹시 떨떠름하게 굳어 있는 블랙이었다.

1655095567336.jpg“무슨…….”

16550955673365.jpg“로드 티와칸!”

블랙을 발견한 리에네가 그를 향해 덥석 안겨들었다. 블랙은 엉겁결에 달려드는 리에네를 받아 안았다.

16550955673365.jpg“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1655095567336.jpg“귀찮은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블랙은 제 어깨에 매달리는 리에네의 귓가에 대고 작게 웃었다. 그때와 똑같았다. 평소에는 누구보다 차분한 것 같았지만 감정이 북받칠 때는 막무가내로 솔직해졌다.

16550955673365.jpg“걱정이 돼서 마중을 가려고 했어요.”

1655095567336.jpg“페르모스의 침실로 말입니까?”

16550955673365.jpg“아뇨, 그건 아니고…….”

페르모스가 리에네의 등 뒤에서 펄쩍 뛰었다.

16550955673389.jpg“오해십니다! 아주, 매우, 정말 끔찍한 오해십니다!”

리에네를 잠시 떠나 페르모스를 향한 눈길은 그새 매서워져 있었다.

1655095567336.jpg“너는 왜 다 벗고 있는데.”

16550955673389.jpg“네, 네? 아니, 그야 잘 시간이었으니까요!”

1655095567336.jpg“공주님 앞에서는 입었어야지. 뭐 하고 있었나.”

16550955673389.jpg“아니, 제가 입으려고 했는데 공주님이 말리셨단 말입니다!”

1655095567336.jpg“……?”

블랙의 눈이 다시 휙 돌아왔다.

16550955673389.jpg“공주님?”

16550955673365.jpg“아, 저를 내쫓으려는 핑계인 줄 알았어요. 마중을 나간다는 저를 계속 말리려는 눈치여서.”

1655095567336.jpg“……그래서 계속 저 꼴을 보고 계셨습니까?”

16550955673365.jpg“별로 신경 쓰이진 않았어요.”

1655095567336.jpg“…….”

무슨 말을 하려던 블랙이 그 말을 꾹 삼켜 버렸다.

1655095567336.jpg“이제 여기 있을 이유는 없는 게 맞습니까?”

16550955673365.jpg“그럼요. 로드 티와칸께서 무사히 돌아오셨잖아요.”

1655095567336.jpg“그럼 이만 가는 게 좋겠습니다.”

블랙이 리에네를 들어 올린 채 몸을 돌렸다. 물론 그 전에 페르모스를 노려보는 걸 잊지 않았다. 입 모양만으로 말을 하기도 했다. 내일 보자, 라고. 페르모스가 얼어붙었고 리에네가 깜짝 놀라 블랙의 등을 툭툭 두들겼다.

16550955673365.jpg“앗, 내려주세요! 걸어갈게요.”

1655095567336.jpg“맨발인 걸 봤습니다.”

16550955673365.jpg“아니, 이건……. 슬리퍼를 신는 걸 깜박해서.”

걱정하느라 그만큼 정신이 없었다는 얘기로 들렸다. 그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도 또 정신없이 기뻐하던 리에네가 이제야 부끄러움을 느꼈다.

16550955673365.jpg“왜 이랬을까요……. 오늘 제가 좀 이상한 것 같아요.”

1655095567336.jpg“이해합니다.”

16550955673365.jpg“정말인가요?”

1655095567336.jpg“나도 공주님에 관해서는 종종 이상해지니까.”

머리로는 알았다. 페르모스와 리에네가 무슨 사이일 리 없다는 걸. 그런데 침실은 비어 있고, 리에네가 맨발로 페르모스의 방으로 갔다는 얘기를 들으니 감정은 제멋대로 끓어올랐다. 설마 하며 문을 연 순간까지 믿기지가 않았다. 대체 저 새끼는 왜 다 벗고 있는 거야.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런 생각마저 들었으니 할 말 다 했다. 리에네가 제 얼굴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안기지 않았으면 결과는 별로 좋지 않았을 것이다.

16550955673365.jpg“그래도 앞으로는 이러지 말아야겠어요.”

리에네는 이제 그에게 안겨서 계단을 내려가는 일이 익숙해졌다. 한 팔을 목에 두르고 머리를 그에게 기대고 있으면 불안정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16550955673365.jpg“부인이 봤으면 잔소리를 했을 거예요.”

1655095567336.jpg“나도…….”

16550955673365.jpg“네?”

리에네는 볼 수 없는 각도에서 뺨 근육을 실룩이던 블랙이 고개를 저었다.

1655095567336.jpg“……맨발로는 걷지 말라는 얘길 하고 싶었습니다.”

16550955673365.jpg“그러게요. 평소에는 이러지 않는데.”

1655095567336.jpg“잠옷만 입고 다니지도 말고.”

16550955673365.jpg“망토를 걸쳐서 안에 입은 건 보이지 않아요.”

1655095567336.jpg“망토를 걸쳤으니까 안에 잠옷만 입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리에네가 멋쩍은 얼굴을 했다.

16550955673365.jpg“……페르모스 경과 똑같은 말을 하시네요.”

1655095567336.jpg“그런 말도 했습니까?”

블랙의 눈가가 험악해졌다. 리에네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그래도 뭔가 미묘하게 말투가 변했다는 것은 느껴졌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람. 서둘러 오겠다고 한 게 누군데. 내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16550955673365.jpg“너무 늦게 오셨잖아요.”

리에네가 손에 닿는 대로 블랙의 목깃을 잡아당겼다.

16550955673365.jpg“정말로, 너무 걱정이 됐단 말이에요. 또 무슨 사고라도 생긴 게 아닐까 해서.”

블랙이 계단 중간에서 뚝 걸음을 멈췄다.

1655095567336.jpg“기왕 잡을 거면 다른 데가 낫겠습니다.”

16550955673365.jpg“네? 뭘요?”

1655095567336.jpg“옷 말고.”

혹시 목이 당겨서 아팠나 싶어 리에네가 얼른 손을 뗐다.

16550955673365.jpg“미안해요. 안 할게요.”

1655095567336.jpg“하지 말라는 건 아니고.”

16550955673365.jpg“……?”

1655095567336.jpg“다른 데.”

어쩌라는 거지…….

16550955673365.jpg“어디를요?”

1655095567336.jpg“공주님이 원하는 대로.”

옷자락은 싫다니 어디를 잡아야 하지.

16550955673365.jpg“아파도 몰라요.”

옷자락을 빼고 뭔가를 쥐자니 위치가 참 애매해 리에네는 반은 장난으로 블랙의 코끝을 잡았다.

1655095567336.jpg“이건 예상 못 했는데.”

코가 막힌 블랙이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를 냈다. 이 남자는 정말 이상해. 이런 소리도 듣기가 좋은 것 같아.

16550955673365.jpg“다른 데는 손이 안 닿을 것 같아서요.”

1655095567336.jpg“귀는 안 됩니까?”

16550955673365.jpg“귀는 아프지 않겠어요?”

1655095567336.jpg“코보다는 나을 것 같습니다.”

16550955673365.jpg“그런가?”

리에네가 얌전히 코를 놓고 귀를 잡았다. 혹시라도 실수로 세게 잡아당기게 될까 봐 손짓이 조심스러웠다. 그러다 보니 쥐는 게 아니라 만지작대는 모양새가 되었다.

16550955673365.jpg“귀도 잘생겼어…….”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혼잣말이 문제였다.

1655095567336.jpg“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16550955673365.jpg“……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1655095567336.jpg“아무것도 아니지 않았는데.”

16550955673365.jpg“아무것도 아니었…….”

블랙이 옆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자 등이 계단 옆 돌 벽에 닿게 되었다.

1655095567336.jpg“차가워도 좀 참아요.”

말은 그렇게 해도 블랙은 등과 벽 사이에 제 손을 넣어 찬기가 올라오는 일이 없게 했다.

1655095567336.jpg“내가 지금 공주님 눈에 보기 좋습니까?”

입술이 살짝 스치는 거리까지 고개를 내린 블랙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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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55673365.jpg“……알잖아요.”

1655095567336.jpg“믿기지가 않아서.”

16550955673365.jpg“거울은 매번 보고 살 텐, ……앗,”

블랙이 입술을 미끄러트려 귓불을 훑는 바람에 리에네가 어깨를 움츠렸다. 눈이 저절로 감겼다.

1655095567336.jpg“공주님도 그래요. 귀가 이렇게 예쁜 줄 몰랐습니다.”

16550955673365.jpg“그냥…….”

리에네가 눈을 꼭 감은 채 작게 말했다.

1655095567336.jpg“네?”

16550955673365.jpg“그런 말은 안 해도 되니까 그냥 빨리 키스를 했으면 좋겠다고요.”

나도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네……. 블랙이 귓불을 놓고 한숨을 쉬었다.

1655095567336.jpg“공주님은 내가 왜 공주님 앞에서 말이 많아지는지 모를 겁니다.”

16550955673365.jpg“지금은 안 많아져도 될 것 같은데요…….”

1655095567336.jpg“말을 안 하고 있으면 내가 뭘 할 것 같습니까?”

16550955673365.jpg“그야…… 키스를 하겠죠.”

블랙이 입술을 붙이며 속삭였다.

1655095567336.jpg“맞아요. 그런데 키스 말고도 할 게 아주 많다는 건 알아둬야 할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릴까, 싶었지만 입속을 파고드는 달콤함에 생각은 모두 사라졌다. * * * 탑을 어떻게 내려와 어떻게 침실에 들어섰는지, 그 과정은 조금 모호했다. 아주 길고 오랜 키스를 억지로 끊어낸 블랙이 씻고 오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오 분 만에 돌아온 그는 물기도 제대로 닦지 않은 채였다. 젖은 머리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 바람에 리에네가 그를 다시 욕실로 끌고 가야 했다.  

16550955673365.jpg“그런데 귀찮은 일이 생겼다는 건 뭐였어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문질러 닦아 주는 일은 의외로 재미있었다. 아니, 재미있다기보다는 즐겁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하는 김에 리에네는 머리칼 사이사이를 훑으며 다른 상처가 없는지도 살폈다. 그는 제 상처에 둔감한 사람이라 작은 상처 같은 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을 터였다.

1655095567336.jpg“아, 클라인펠터 가의 기사가 중간에 나타나는 바람에……,”

16550955673365.jpg“네? 그럼 또 싸우셨어요?”

대번에 손짓이 딱 멈추는 리에네를, 블랙이 턱을 위로 치켜들고 뜨거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가 팔을 뒤로 돌려 리에네의 손을 끌어와 손등에 입을 맞췄다.

1655095567336.jpg“그런 건 아닙니다.”

나타난 기사는 한 명이었고, 그가 요구한 것은 동행이었다. 이유는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린든 클라인펠터에게도 죽는 그날까지 충성을 다하겠다는 기사가 있었다. 아마 티와칸이 아니라 보통의 기사단이었다면 동행을 허락했을지 몰랐다. 다른 것은 몰라도 주군에 대한 충정은 기사의 존재 이유였으니까. 그런데 티와칸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티와칸이 충정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들은 그간 전쟁터에서 충정이 변질되는 것도, 이용당하는 것도 지긋지긋하게 보아 왔다.

16550955673365.jpg“그래서 거절하셨나요?”

리에네가 다시 수건을 조심조심 문지르며 물었다. 눈을 감은 블랙의 얼굴에 웃음이 옅게 떠올랐다.

1655095567336.jpg“아니요. 대신 마찬가지로 추방자의 입장이니 종제복을 입고 가라고 했습니다.”

16550955673365.jpg“저런. 기사인데…….”

1655095567336.jpg“갑옷은 벗겼지만 칼은 한 자루 허락했습니다. 기사라서.”

16550955673365.jpg“아하.”

리에네가 고개를 갸웃대다 웃었다.

16550955673365.jpg“뭔가 야박한 듯하면서도 자비롭네요?”

1655095567336.jpg“자비롭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공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16550955673365.jpg“저라면 음……. 갑옷은 허락할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전에 몸수색을 요청하겠어요. 클라인펠터 가라면 갑옷 속에 뭔가 숨겨서 왔을 수도 있잖아요.”

블랙이 욕실 의자에 앉은 자세에서 상반신을 쭉 펴서 리에네의 턱 끝에 입을 맞췄다.

1655095567336.jpg“그래서 벗겼습니다.”

16550955673365.jpg“아, 그러셨구나.”

페르모스가 괜히 둘이 닮았다고 하는 게 아니었다. 블랙에 비하면 리에네의 방식은 유한 구석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선을 지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을 정해 놓고 조율을 통해 그 부분만은 지키는 식이었다. 아마도 여섯 가문과의 알력다툼 속에서 왕실을 지키는 방법을 그렇게 익혔을 것이다. 그래서 리에네는 약하면서도 강한 사람이었다.

16550955673365.jpg“뭔가 숨기긴 했나요?”

1655095567336.jpg“네. 이것저것. 샤르카 왕국에서 통용되는 어음이라든지, 돈이 될 만한 보석이라든지.”

16550955673365.jpg“아, 역시.”

그럴 것 같았다.

1655095567336.jpg“그래서 생각을 했습니다.”

16550955673365.jpg“어떤 생각을요?”

1655095567336.jpg“클라인펠터 가문을 지휘하는 자가 남아 있을 것 같다는 생각. 아무리 충성스럽다고 해도 기사가 스스로 어음 따위를 챙겨 올 것 같진 않아서 말입니다.”

16550955673365.jpg“어……? 듣고 보니 그러네요? 집사가 지시한 일일까요?”

1655095567336.jpg“집사에게 그만한 권한이 있습니까? 금고에 손을 대는 건 가문의 사람이어야 할 텐데요.”

16550955673365.jpg“그러게요…….”

리에네가 심각해진 얼굴로 보송보송해진 머리칼을 흩뜨렸다.

16550955673365.jpg“그만한 힘을 가진 자가 남아 있다는 얘기가 될까요…….”

1655095567336.jpg“그렇게 가정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아직 존재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그럴 겁니다. 어쩌면 내일일지도 모르고.”

16550955673365.jpg“왜 내일이죠?”

1655095567336.jpg“내일 다섯 가문이 새로운 대의장을 추대할 거라. 클라인펠터가 대의장 자리를 가만히 양보할 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16550955673365.jpg“제 생각도 그래요.”

리에네가 발을 동동 굴렀다.

16550955673365.jpg“대의회에 참석할 수가 없으니 답답하네요. 내일은 알란드 경도 갈 수가 없을 텐데. 대사제를 선출하는 건 왕실 제안이 아니라 대의회에서 결정되는 일이니까.”

1655095567336.jpg“대의회에 참석하고 싶습니까?”

블랙이 몸을 돌리며 물었다. 그는 별다른 말 없이 리에네를 붙들어 제 허벅지에 앉혔고, 리에네도 놀라는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기댔다.

16550955673365.jpg“아무래도요.”

1655095567336.jpg“이제 그렇게 될 겁니다.”

16550955673365.jpg“네?”

1655095567336.jpg“내일은 아니겠지만. 그 다음부터는.”

리에네가 작게 웃으며 블랙의 귓불을 잡았다.

16550955673365.jpg“대체 무슨 일을 하시려고요?”

1655095567336.jpg“리세베리 조약을 고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서. 내일 결과를 가져오겠습니다.”

대답을 하면서 블랙이 찡그리듯 웃었다.

16550955673365.jpg“아, 아프세요?”

1655095567336.jpg“아니요. 아픈 게 아니라 좋아서.”

16550955673365.jpg“좋은 얼굴이 아닌 것 같은데…….”

1655095567336.jpg“너무 좋아도 때로는 괴롭습니다.”

블랙은 리에네를 안은 채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제는 두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이 감각도 익숙했다.

1655095567336.jpg“이제 자러 가도 됩니까?”

16550955673365.jpg“……네.”

그리고 그가 불시에 뜨거워지는 것 같은 이 느낌도. 그가 리에네의 목덜미에 이마를 대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1655095567336.jpg“나는 요새 눈을 뜨는 순간부터 하루 종일 이 시간을 기다리며 사는 것 같습니다.”

16550955673365.jpg“아…….”

대체 그가 하는 모든 말은, 왜 이렇게 매 순간 더 달아지는 걸까. 두 사람은 어제처럼 한 침대에서 서로를 마주 보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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