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전야 (3)2021.12.22.
“큰일 났습니다, 공주님!”
오늘도 몹시 바쁜 하루가 될 예정이었다. 눈을 뜨고, 씻고, 옷을 갈아입고, 아침을 함께 든 다음 블랙을 배웅했다. 할 일이 많은 게 힘든 게 아니라 속이 상했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을 그만큼 줄여야 했으니까.
“무슨 일이에요, 부인?”
성 안으로 돌아온 리에네는 주어진 일에 열심히 매달렸다. 알란드가 합류하자 수십 장의 서임장을 작성하는 일에도 진척이 있었다. 한창 펜이 양피지 위를 사각대는 소리만 들려오는 가운데, 플램바드 부인이 느닷없이 들이닥쳐 문제를 알렸다.
“그게 재단사가 천을 보내왔는데……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저하고 가십시다. 이건 눈으로 직접 보셔야 합니다!”
당황이 가득한 얼굴이 참 안되어 보이기도 했다. 알란드에게 눈짓을 건넨 리에네가 펜을 놓고 일어섰다.
“그래요. 같이 가요. 어디로 가면 되죠?”
“제 방으로요.”
마음이 급했던지 플램바드 부인은 아예 리에네의 손을 잡고 종종걸음으로 뛰기 시작했다. * * *
“이게 말이나 됩니까!”
부인은 재단사가 가져온 천을 마구 펄럭대며 울컥 분을 토했다.
“대체 이런 자수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세상에나! 돈을 그렇게나 줬는데!”
“아…….”
블랙의 치수에 맞춰서 자른 옷감에는 재단사가 고용한 일꾼들이 자수를 놓기로 했다. 시간이 빠듯한 탓에 넉넉한 웃돈까지 듬뿍 얹어 주어야 했다. 그런데 결과가 엉망이었다.
“세상에, 세상에……. 이걸 어찌 왕실 혼례복으로 쓴답니까, 예?”
가까이에서 본 자수는 엉성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바늘땀은 제각각이었고 매듭을 제대로 짓지 못해 겉으로 삐져나온 부분도 있었다. 플램바드 부인의 안목이 워낙 높기도 했지만 블랙이 입을 혼례복에 이런 자수가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인상이 써졌다.
“입이 있으면 어디 말이라도 해 보아라! 대체 어느 왕실에서 이걸 자수라 하겠느냐!”
플램바드 부인이 양손을 잡고 쩔쩔매는 재단사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이러다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털이라도 뽑을 기세라 일단 리에네가 부인을 말렸다.
“그러게요. 일단 말부터 들어보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그게, 공주님……. 저는 정말…….”
재단사가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였다.
“도통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한 가장 숙련된 자들을 고용해 말씀하신 시간까지 틀림없이 자수를 완성하느라 다들 눈알이 빠졌단 말입지요.”
“뭐라고? 몇 명이나 고용을 했는데?”
재단사가 당당하게 손을 쫙 펼쳐 보였다.
“다섯입지요! 그래야 시간을 맞출 테니까요!”
“이 양반아! 다섯씩이나 들러붙었으니 바늘땀이 이렇게 제각각이지!”
플램바드 부인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가슴을 쿵쿵 쳤다.
“숙련이 됐긴 뭐가 됐다고! 이만한 자수를 다섯이 들러붙어 눈알이 빠졌으면 바늘 잡은 지 하루 이틀 된 애송이들이겠는데!”
“아이고, 그리 말씀하시면 소인은 어쩝니까. 애송이라니요. 다들 삼사 년씩 자수 일을 해온 숙련꾼들이란 말입니다요!”
“시끄럽다! 삼사 년씩이나 일을 해봤는데 가져오는 게 고작 이런 게냐!”
맹세코 말하는데, 플램바드 부인이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귀 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게 도무지 말려 볼 수도 없었다.
“그럼, 음……. 고치는 건 안 될까요? 정 안 되면 다시 하든가요.”
“공주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자수를 어찌 고친단 말입니까! 그리고 저 양반이 진짜 숙련꾼들을 구해 오기 전에는 해봤자 똑같을 거란 말입니다!”
재단사가 분하지만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런……. 그럼 어쩌죠?”
“죄다 뜯어내고 첫 땀부터 다시 떠야지요. 그게 그나마 천이라도 건지는 길이겠습니다.”
“아…… 그런데 그만한 시간이 없잖아요. 그리고 다시 해봤자 똑같을 거라면서요.”
“공주님.”
플램바드 부인이 비장한 얼굴로 리에네를 불렀다.
“별수가 없습니다. 공주님과 저, 둘이서 하는 겁니다.”
“네?”
대체 그게 무슨 무서운 말인지 모르겠다.
“한 삼 일 밤만 새우면 될 겝니다. 아니, 이틀.”
“부인…….”
그러면 사흘 뒤에는 손가락을 쓸 수도 없을걸요……. 저도 지금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도무지 다른 인간들한테 맡기지 못하겠습니다. 바늘땀을 맞춰야 된다는 기본도 모르는 인간들한테요! 무려! 혼례복 아닙니까!”
리에네라고 저 자수 상태가 용납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틀 밤을 새우라는 건……. ……어쩔 수 없나. 정 방법이 없다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저런 자수가 들어간 옷을 선물이라고 줄 수는 없잖아. 그건 내가 싫어.
“알겠어요. 그렇게 해요.”
“네, 그럼요! 감사합니다, 공주님!”
이틀 밤샐 일감이 생겼다는데 플램바드 부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언제나 자수에는 진심인 사람다웠다.
“아니, 공주님…….”
반면에 재단사의 얼굴은 새파래졌다.
“그, 그러시면 대금은…….”
“대금은 무슨 놈의 대금! 괜히 천에 쓸모없는 바늘구멍이나 내 왔는데!”
부인이 괘씸하다는 듯 소리를 꽥 질렀다.
“아니, 그래도 일꾼을 다섯이나 고용했는데 어찌 모른 체한단 말입니까…….”
“그러게 쓸모 있는 인간들을 구했어야지! 덕분에 공주님과 내가 더 고생을 하게 생겼는데!”
플램바드 부인의 말도 맞았지만 재단사한테도 일리는 있었다.
“이렇게 해요.”
리에네가 입을 열었다. 다섯 명의 일꾼에게 갈 노임은 남겨두기로 했다. 대신 재단사는 제 몫으로 떼 둔 돈을 도로 토해내야 했다. 재단사는 울상을 한 채 돌아갔지만 플램바드 부인은 그조차도 너무 관대하셨다며 혀를 찼다. 재단사가 돌려준 돈은 부인의 몫으로 돌아갔다. 예상외의 일감이 쌓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손해 본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아, 아니구나. 나는 손해겠구나. 리에네가 괴로운 얼굴로 자수를 한 땀 한 땀 뜯어내는 부인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이틀간 블랙은 혼자 잠이 들게 생겼다.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라는 말이 조금 미안하게 귓가에 남았다. * * *
“오늘은 들어오지 못한다.”
대의회장을 미리 선점한 원로들은 결연했다. 미리미리 사병도 배치해 두었고, 입구도 막아 두었다. 오늘은 결코 어제처럼 티와칸의 방해를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죄수를 감시한다는 핑계도 없을 예정이었다. 새로운 대사제를 선정해 왕실에 통보하는 일만 하면 될 일이었으니까.
“그 더러운 발을 붙일 생각 말고 당장 돌아가.”
버레이는 어제의 원한을 실어 강력하게 말했다. 오늘도 티와칸은 수장이라는 자를 빼고 여덟이 고작이었다. 무기를 지니지 않은 인간이 하나 더 있었지만 등이 굽은 것으로 보아 용병은 아니었다. 반면에 닥닥 긁어모아 데려온 다섯 가문의 사병들은 이백이 넘었다. 사병을 한 명도 내놓지 않은 로사델이 좀 괘씸했지만, 그래도 이백이라는 숫자는 엄청나게 든든했다.
“오늘은 좀 머리를 썼군.”
사병들을 배치해 놓은 진형을 보며 블랙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된통 당하더니 이번에는 대가리를 굴릴 줄 아는 자가 나선 모양이었다.
“무어라 지껄이는 게야. 당장 돌아가! 태생이 비천한 용병 따위가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체르케스의 등 뒤에서 버레이가 계속 고함을 쳤다. 하지만 버레이는 말을 잘못 골랐다.
“비천해……?”
화를 내는 것은 블랙이 아니라 용병들이이었다. 랜달이라는 이름의 십 년 차 용병이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나우크의 귀족이라는 건 어떻게 된 게 하나같이 이런 등신뿐이지.”
아무리 남단에 처박힌 작은 왕국이라지만 어떻게 티와칸에 얽힌 일화를 하나도 모를까 싶었다. 처음에 멋도 모르고 블랙에게 태생이 어쩌네 했던 왕족이나 귀족들 중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는 별로 없었다. 어지간한 일은 귓등으로 넘기는 그들이 단 하나 참지 못하는 게 블랙의 출신에 관한 험담이었다.
“혀만 잘라 놓겠습니다, 주군. 다른 데는 손 안 대고요.”
랜달이 이렇게 중얼대며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됐어.”
그 손을 툭 친 이는 블랙이었다.
“아니, 말리시려고요? 왭니까? 프리아나 왕국에서도 안 그러셨으면서…….”
“번잡해. 너 혼자 백아흔셋을 다 상대할 게 아니라면 그만둬라.”
“해 보지요, 뭐. 이렇게 기록을 하나 세우는 건가.”
다른 용병들은 터무니없는 소리를 듣고도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장난은 한가할 때나 해.”
“아, 진짜. 이런 걸 말리시다니.”
랜달이 투덜대는데, 귀족들은 그게 더 기가 막혔다.
“이 자들은 다 미친 건가……?”
엘라로이덴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로사델은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집에서 손 한 번 못 쓰고 얻어터진 충격은 아직도 강렬했다. 새로운 대의장을 뽑아 혼인을 방해하기로 한 결정을 지금이라도 무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나, 나가라고 했다……!”
버레이가 애써 목소리를 쥐어짰다.
“아, 그건 곤란해.”
블랙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고, 곤란하긴 뭐가…… 일개 용병이 나우크의 대의회에서 곤란한 일이 뭐가 있다고…….”
“대의회는 취소다.”
“뭐? 뭐라고?”
그 말에는 체르케스도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회주의자인 그는 손해를 볼 일에는 앞서서 한 발 빼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나우크의 대의회가 어떤 것인데 누가 감히 취소를 운운한단 말이냐?”
지금은 무력 충돌을 감행해서라도 저 야만인이 제멋대로 구는 걸 막아야 할 때였다.
“오늘 너희들이 모인 건 대사제 임명 때문이잖아.”
태연한 반말지거리가 자연스럽다는 것도 분노를 부추겼다.
“너 따위가 뭔데 대의회의 안제를 입에 담느냐!”
“대사제는 이미 있으니 회의도 필요 없지.”
“대사제가 있다니…… 무슨 그런 헛소리를!”
“데려와.”
블랙이 등 뒤로 손짓을 했다.
“네, 주군.”
용병들이 누군가를 대의회장의 입구로 데려왔다. 길쭉한 로브로 발목 끝까지 가린, 머리칼이 하얗게 센 노인이었다.
“뭐? 이게 누구라고?”
버레이가 헛웃음을 쳤다. 기가 막혀서 비아냥거림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런 게 나우크의 대사제라는 게냐?”
“그렇소이다, 엘링 버레이 경.”
“……?”
제 이름을 정확히 알고 말하는 노인이 수상했던지 버레이가 입을 벌렸다. 이름을 아는 것도 문제였지만 왠지 그 목소리가 익숙하게 들리는 것도 문제였다.
“뭐…… 누구?”
노인이 불편한 손을 움직여 코끝까지 눌러쓴 후드를 젖혔다.
“21년 만에 뵙소. 다들.”
“……!”
21년이라는 말은 다섯 귀족에게 보이지 않는 화살과도 같았다. 뭔가가 날아와 양심에 콱 처박히는 느낌에 다들 눈을 부릅떴다.
“그렇다면…… 설마…….”
버레이가 노인을 손가락질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체르케스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21년 전 대사제라면…… 마나우?”
노인이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목소리로서 신께 허락받은 그 이름이 내 것이외다.”
“이, 이런…… 이런……!”
다섯 귀족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노래졌다. * * * 블랙의 말이 옳았다. 마나우의 존재는 대의회의 목적을 없애 버렸다. 마나우가 대사제가 된 것은 리베세리 조약이 있기도 전이었다. 따라서 조약에 근거해 대의장이 그의 적합성을 운운할 권리는 없었다. 마나우는 대사제로서 왕실의 혼사를 축복했고, 혼인 날짜를 사흘 뒤 정오로 정했다. 신의 목소리가 신을 대변해 혼인을 인정했으므로 아르사크 가문과 맺은 혼인 계약서에 의해 블랙은 나우크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체르케스는 아직 혼인한 게 아니라며 항의했지만, 이미 서명을 마친 계약서는 나우크의 관습에 의해 효력을 지녔다.
“이제 너희들의 오른손을 쓸 때가 됐다.”
상석에 앉은 블랙이 귀족들에게 이 말을 툭 던졌다. 미리 왼손이 부러져 있던 귀족 셋이 침을 꿀꺽 삼켰다.
“서명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