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전야 (4)2021.12.26.
블랙이 영구히 지워지지 않도록 침으로 글자를 새긴 양피지 두루마리를 체르케스의 앞으로 밀었다. 자칫 맞을까 봐 뒤로 물러서던 체르케스는, 기가 막힐 정도로 제 앞에 딱 떨어지는 두루마리를 보고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게 무엇이냐?”
버레이가 물었다.
“무엇이냐?”
블랙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혀가 짧군. 공주의 남편에게.”
그러자 랜달이 신이 나서 일어섰다.
“제가 자르겠습니다, 주군!”
이번에는 블랙도 관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랜달이 콧노래를 부르며 허벅지에 차고 있던 단검을 꺼내들었다. 남의 혀를 자를 생각을 하며 콧노래라니, 미친놈들이 따로 없었다. 다들 등골이 얼어붙었다.
“아, 안 된다……! 무슨 짓을! 감히 어디서 대의회의 원로에게……!”
버레이가 벌떡 일어나 랜달을 피해 뒷걸음질을 쳤다.
“감히?”
블랙이 턱을 까닥 저었다.
“나우크의 등신들은 제 집안에서 말하는 법을 덜 배웠나 보군.”
“그러니 잘라야지 말입니다.”
랜달의 콧노래가 한층 커졌다.
“저 나이 되도록 말버릇도 제대로 못 익힌 혀는 있으나 마나 아닙니까.”
랜달이 장난을 치듯 성큼 한 발을 내디뎌 달아나는 버레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입 좀 벌려 보실까. 협조하면 최대한 안 아프게 해 주겠다.”
“아악! 안 돼! 노, 놓아라!”
“쉿. 가만히. 자꾸 움직이면 깔끔하게 못 잘라.”
“아악! 안 된다, 안 돼! 이익! 왜 아무도 말리질 않는 게냐! 여보시오들! 다들 뭐 하는 게요!”
버레이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쳤다. 다른 귀족들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그렇다고 말릴 용기는 나지 않았다. 명분이 확실한 터라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물론 죄목에 비해 벌은 터무니없이 과했지만 벌을 정하는 것은 통치권자였다. 그들은 이제야 리에네가 얼마나 상대하기 쉬운 군주였는지 깨닫는 중이었다.
“입 다물지 마라. 그대로 벌리고 있어. 안 꺼내면 내가 꺼낼 테니.”
랜달이 단검 끝으로 버레이의 입술을 쿡 찍었다.
“……! …….”
스스슷……. 파랗게 질린 버레이는 눈이 뒤집어지며 그 자리에서 실금을 했다.
“으앗, 더럽게!”
부츠에 오줌이 묻을 뻔한 랜달이 질색을 하며 버레이를 놓고 옆으로 훌쩍 비켜섰다. 버레이가 자신이 싼 배설물 위로 철퍼덕 쓰러졌다.
“서명해.”
다들 석상처럼 굳어 있는 그 사이로, 블랙의 낮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무, 무엇인지는 알고…… 알고 해야 할 게 아닙……니까.”
버레이가 예시를 보여 준 탓에 체르케스의 말투도 공손해졌다.
“리세베리 조약.”
“무슨…… 뭐라고 하셨습니까?”
“공주의 남편이 원로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너희들이 리세베리 조약을 좋아하기에.”
“그걸 왜 지금 서명을……?”
“당시 서명한 이름 하나가 빠졌잖나. 그렇다면 조약도 효력이 사라지지. 너희들이 아쉬워할 것 같아 새로 마련해 왔다. 빠진 이름을 대신해 내 이름이 들어갈 것이다.”
“……?”
혹시나 싶었던 체르케스가 후다닥 두루마리를 집어 들고 펼쳤다. 블랙이 한 말의 진위가 궁금했던 귀족들도 그 옆으로 모여들었다. 깨알 같은 글자가 빼곡히 적인 양피지에는 리세베리 조약의 내용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었다. 다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한두 글자 정도가 바뀌어 있었다. 예를 들면, 나우크의 대의장은 왕실에 대해 이러저러한 권한을 갖는다, 라는 문장이 갖지 않는다, 로 바뀌는 식이었다. 그리고 추가된 항목도 있었다. 그간 예외적인 특권을 누렸던 대의회의 원로들도 이제는 납세의 의무를 지게 된다는 것, 왕족은 누구나 대의회를 소집하고 참석할 수 있다는 조항 등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글씨가 아주 작아서 한눈에는 세세한 조항까지 전부 읽어 낼 수가 없었다.
“이, 이건…… 이건 말장난이지 않습니까…….”
체르케스가 떨떠름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볼 땐 리세베리 조약도 그러던데. 그게 어딜 봐서 조약이었나. 협박장이라면 몰라도.”
“…….”
“서명해라. 손으로 서명을 하고 싶다면.”
“……? 그게 무슨……?”
체르케스를 제외한 다른 귀족들은 재빨리 의미를 알아들었다. 양손이 모두 부러진다면 입으로 펜을 물고 서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 주시오.”
로사델이 체르케스의 손에서 양피지를 빼앗아 들었다.
“경! 경솔히 굴지 마시오. 서명 전에 우리끼리 상의라도 해야 할 게 아니오.”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서명은 지금 해야 하는 것을.”
블랙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손으로 서명할 수 있는 시간은 내가 열을 셀 때까지다. 하나.”
“히익!”
숨 막히는 소리를 내지른 로사델이 재빨리 비어 있는 자리에 제 이름을 갈겨썼다.
“이보시오, 경!”
우리끼리 이렇게 손발이 안 맞으면 어쩌느냐는 항변은 엘라로이덴이 손이 날아갈 것 같은 속도로 서명을 마치자 쑥 들어가 버렸다.
“둘, 셋…….”
숫자가 다섯이 되기 전에 아르멘다리스도 서명을 마쳤다. 남은 것은 둘이었다.
“……일곱, 여덟.”
숫자가 여덟까지 가자 체르케스도 이를 갈며 서명을 했다. 부리나케 펜을 놀리는 귀족들의 왼쪽 손목이 부러진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열. 남은 것은 하나인가.”
블랙이 기절한 채 쓰러져 있는 버레이를 가리켰다.
“깨워.”
“네, 주군.”
랜달은 물을 떠 오는 수고조차 하지 않았다. 두 손으로 서명할 수 있는 시간이 끝났으니 어차피 버레이는 오른손도 부러져야 했다.
“으아악!”
버레이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그로써 수정된 조약이 완성되었다. * * *
“음……. 뭐라고 했습니까?”
목소리가 한껏 떨떠름했다. 대의회를 마치고 두어 가지 볼일을 더 본 다음 성으로 돌아온 블랙은 믿고 싶지 않은 얘기를 들었다.
“저는 일이 있어서 이틀간은 부인의 방에서 자야 한다고요.”
“……? 그 말을 믿어야 합니까?”
믿고 싶지 않다는 말이 정제 없이 튀어 나가는 바람에 리에네에게는 오해가 생겼다.
“다른 짓을 하려고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데요. 저를 못 믿으세요?”
“아, 이런.”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블랙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믿을 수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어요. 저도 안타깝지만, 그렇게 해야 하는 일이라서요.”
대체 그런 일이 어디 있는지 묻고 싶었다. 이제껏 대륙에서 티와칸의 수장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란 거의 없었다.
“공주님. 그러지 말고 다시 생각을 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제 동의도 필요한 일 아닙니까?”
“아, 그럴까요?”
두 사람이 이 얘기를 나누는 건 저녁 식사가 차려진 식탁 앞에서였다. 리에네가 난처하게 웃으며 다시 말을 했다.
“미안해요. 배우자가 생긴 게 처음이라 동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 했어요. 하여간 일이 생겨서 이틀간 부인의 방에서 자야 하는데, 문제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달칵. 블랙은 대답에 앞서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문제가 된다면. 안 할 겁니까?”
“음……. 그럴 수가 없겠는데요. 꼭 그래야 하는 일이라.”
“…….”
대체 그런 일이라는 게 뭘까. 머릿속이 무섭도록 굴러갔다. 그렇다고 좀스럽게 굴 생각은 없었다. 리에네가 필요한 일이라고 했으니 그럴 만할 것이다. 게다가 아주 긴 것도 아니고 고작 이틀 밤이었다. 그다음 날은 혼인식이었으니, 그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관습에 따라 혼인식 전까지 신랑과 신부가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지 못하게 하는 곳도 있었으니까. 초야도 그렇고 신부 측에서 준비해야 하는 일이 많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대답이 하기 싫은 걸까. ……내가 이렇게나 좀스러웠나.
“……알겠습니다.”
대답이 느리게도 나왔다. 그러고 난 뒤는 거짓말처럼 식욕이 사라졌다. 블랙은 포크를 다시 드는 대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화나셨어요?”
포도주에 졸인 완두콩을 꿀꺽 삼킨 리에네가 물었다.
“아닙니다.”
“표정이 그런 것 같은데요.”
좀스러운 걸 들킨 것 같아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이런 일로 화를 내는 게 이상한 일 아닙니까.”
“음……. 저라면 화가 날 것 같아요. 그런데 차마 그렇다고는 못 하고 아쉽다는 말로 대신하겠죠.”
그 말에 기분이 나아졌다. 냅킨을 내려놓은 블랙이 리에네를 향해 의자를 돌렸다.
“그 말은 공주님도 아쉽다는 뜻입니까?”
“그럼 아니겠어요?”
리에네는 포도주즙이 남은 입술을 훑으며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내게도 굉장히 귀한 시간이에요. 함께 누워서 하루를 어떻게 보냈나 얘기하는 거요.”
“그걸 포기하면서 할 일이란 뭡니까?”
“그게, 음…… 모른 척해 주시면 좋겠어요. 좀 부끄러운 일이라.”
혼례복을 망친 일로 리에네는 그에게 혼례복과 관련한 일을 얘기하는 게 난처했다. 미안한 마음이 커서 그럴 것이다.
“내 앞에서 부끄러울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이것만요. 다음부턴 없을 거예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블랙이 대신 제 뺨을 툭툭 쳤다.
“그래도 제가 뭔가를 해드린 것이니 키스는 해 주셨으면 합니다.”
“식사 중인데요?”
리에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사실 완두콩 요리가 참 맛있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저는 다 먹어서 괜찮습니다. 잠시만 해 주고 마저 들어요.”
“그럼……. 아, 눈은 감아 주세요.”
블랙은 순순히 눈을 감고 뺨을 내밀었다. 그사이 완두콩을 입술에 문 리에네가 장난스레 웃으며 블랙의 입술에 완두콩을 밀어 넣었다.
“……음.”
엉겁결에 완두콩을 받아먹은 블랙이 눈을 뜨고 물었다.
“이건 왜 주는 겁니까?”
“맛있어서요.”
포도주즙이 묻은 블랙의 입술이 평소보다 붉어졌다. 그러니까 새삼 더 숨 막히게 잘생겨 보인다며 리에네가 제 입술을 핥았다. 그러는 리에네의 입술도 오늘따라 포도주처럼 빨갰다.
“저는 로드 티와칸께서 입맛을 잃었을까 봐 걱정되거든요. 너무 적게 드셨어요. 기왕 맛을 보셨으니 좀 더 드시는 게 어떨까요?”
“좋은 생각입니다.”
블랙이 리에네의 턱을 끌어당겨 입술을 겹쳤다. 그가 맛을 보듯 리에네의 입술을 먼저 훑었다.
“맛있네요.”
“어, 그게 아니…….”
“잘 먹겠습니다.”
키스가 시작되었다. 잘 먹겠다는 말을 먼저 들은 탓인지 입술이 맞닿는 순간부터 쪽쪽 빨리는 느낌이라 머리가 더 멍해졌다. * * *
“공주님!”
벌써 세 번째였다.
“앗, 조심할게요.”
리에네가 재빨리 손에서 옷감을 놓았다. 바늘 끝에 찔려 핏방울이 퐁 솟는 손가락이 자칫 옷감을 더럽힐까 염려해서였다.
“세상에, 왜 자꾸 다치십니까. 예?”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요…….”
마음이 자꾸 엉뚱한 데로 가 버려서요. 혼자 자고 있을 그 남자가 있는 침실이라든지, 그 남자의 품 안이라든지, 같은 이불 속이라든지 그런 곳에요.
“벌써 너무 곤하신 겝니까?”
“그게 아니라 낮에 오래 펜을 쥐고 있었더니 손에 힘이 없나 봐요. 손이 좀 덜 낫기도 했고.”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 많은 서임장을 작성하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얼마 전 가위에 베인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아 잘못하면 따끔따끔한 통증이 일기도 했다. 그러고도 혼인식을 미루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안 드는 것을 보면, 저는 이 혼인이 그렇게나 달가운 모양이었다.
“조금 졸리기도 하고요. 찬물이라도 끼얹고 올게요.”
리에네는 바늘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부인의 방 창가에는 세수를 하기 위한 물그릇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 물을 약간 붓고, 세수를 시작했다. 물이 찼기에 정신은 들었지만 남은 자수를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