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 꿈 (1) (78/145)

78. 꿈 (1)2021.12.29.

16550956404343.jpg“다 완성할 수는 있을까요…….”

리에네가 피곤으로 처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깜박대며 물었다.

16550956404349.jpg“그러게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할 시간에 단호하게 어서 자수나 놓으라 할 것 같았던 부인이 어쩐 일인지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16550956404343.jpg“네?”

부인의 반응에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다.

16550956404349.jpg“제가 공주님께서 손을 다치신 걸 깜박했지 뭡니까. 마음이 앞서서 괜한 고생을 시켜드리는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어찌 그리 생각이 짧았는지……. 이제 와 무를 수도 없고요.”

플램바드 부인이 눈물을 글썽였다. 리에네가 당황해 젖은 얼굴을 한 채 부인을 달랬다.

16550956404343.jpg“아니, 부인! 왜 이러세요. 아직 시간이 있잖아요. 어떻게든 하면 되겠죠.”

16550956404349.jpg“그깟 자수가 뭐라고, 곧 혼인식을 치러야 할 공주님을 잠도 못 자게 하는지…… 저 같은 건 유모 자격도 없을 겝니다.”

부인은 오열이라도 할 기세였다. 리에네가 열심히 고개를 흔들었다.

16550956404343.jpg“아니, 아니……. 저도 욕심이 나서 그랬어요. 부인이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닌데 그러지 마세요.”

16550956404349.jpg“공주님이 하신다고 했어도 제가 말렸어야 하는 것을요!”

결국 눈물이 터졌다. 어렸을 때부터 키워 주다시피 한 유모가 울기 시작하니 리에네도 참을 수가 없었다.

16550956404343.jpg“울지 마세요……. 그럼 나도 눈물이 난단 말이에요.”

16550956404349.jpg“저라고 뭐 울고 싶어 울겠습니까……. 흐윽,”

부인은 흐느껴 울면서도 바늘을 놓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자수를 완성하겠다는 의지가 감탄스러웠다.

16550956404349.jpg“이를 어쩌면 좋지요……. 만일 공주님의 부군께서 자수가 덜 된 혼례복을 입으시기라도 한다면…….”

그건 아마도 부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악몽일 것이다.

16550956404343.jpg“둘이서 열심히 하면 돼요! 그리고 로드 티와칸은 자수가 좀 덜 됐다고 해도 그걸 마음에 두진 않을 거예요.”

16550956404349.jpg“제가 용납이 안 됩니다, 제가!”

부인의 흐느낌이 거세졌다. 리에네도 억지로 참고 있던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앉은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다.

16550956404349.jpg“흑, 누가…… 왔습, 크흡, 니까?”

부인이 콧물을 훌쩍이면서도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16550956404349.jpg“제가, 흐윽, 나가 보고 오겠습니다.”

16550956404343.jpg“내가 가도 되는데요.”

플램바드 부인은 그냥 가만히 앉아 계시라는 강한 눈짓을 보낸 뒤 문으로 향했다.

16550956404349.jpg“이 시간에 누가 왔는지요?”

덜컥, 문을 열자 드러난 얼굴은 매우 의외였다. 사실 문을 열기 전까지 플램바드 부인은 블랙이나 페르모스가 온 게 아닐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16550956404349.jpg“……? 방을 잘못 찾아온 게 아닙니까?”

16550956404349.jpg“그건 아니고요.”

그러면서 방 안쪽을 슬쩍 곁눈질하는 사람은 헨튼 부인이었다.

16550956404349.jpg“그럼 무슨 일입니까?”

플램바드 부인이 울던 얼굴로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부인에게 혼례복을 망친 사람은 여전히 리에네가 아니라 헨튼 부인이었다.

16550956404349.jpg“낮에 얘기를 들어서요.”

헨튼 부인은 저를 싸늘히 노려보는 눈에도 기죽지 않았다.

16550956404349.jpg“무슨 얘기를요?”

16550956404349.jpg“재단사가 울면서 돌아갔다고.”

플램바드 부인이 왈칵 분을 토했다.

16550956404349.jpg“그 양반은 뭘 잘한 게 있다고 처 울기나 했답니까? 그딴 낙서를 자수랍시고 들고 와 놓고는!”

16550956404349.jpg“바늘이 남으면 나도 하나 줘 봐요.”

헨튼 부인은 입구를 가로막은 플램바드 부인을 슬쩍 떠밀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얼떨결에 떠밀린 플램바드 부인이 후다닥 그 뒤를 쫓아 헨튼 부인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16550956404349.jpg“아니, 지금 뭐 하는 거랍니까? 또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16550956404349.jpg“저만한 양이면 혼인식 아침까지 해도 다 못 할 게 뻔한데 뭐 하러 일부러 망치려 든답니까. 바느질을 할 줄 아니 돕겠다는 겁니다.”

16550956404349.jpg“그러니까 갑자기 왜 이제 와서 이러냐고요!”

16550956404349.jpg“사람 마음이란 게 언제라도 변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방에 틀어박혀 빈둥대는 것도 지겨워 그러니 미리 고깝게만 보지 말아요.”

16550956404349.jpg“지금 그쪽을 고깝게 안 보게 생겼습니까?”

옥신각신하는 두 부인 곁으로 리에네가 다가왔다.

16550956404343.jpg“그만 하세요, 부인. 그리고 헨튼 부인.”

모르겠다. 헨튼 부인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그러나 설령 제 혼인식을 망치고 싶어 해도 블랙한테까지 같은 원망을 품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여덟 살짜리 아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말을 해 준 사람이 헨튼 부인이었다.

16550956404343.jpg“내 혼례식이기도 하지만 로드 티와칸의 혼례이기도 해요.”

16550956404349.jpg“무슨 말을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말을 끊은 헨튼 부인이 쓰게 웃었다.

16550956404349.jpg“아들이 여기 살고 싶어 하더군요. 그 애가 무얼 하고 싶다고 한 게 처음이라 저도 그리 하고 싶어졌습니다. 공주님이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16550956404343.jpg“아…… 그게 정말인가요? 종제님이 그랬다고요?”

16550956404349.jpg“네.”

쓴웃음에서 쓴맛이 조금씩 옅어지는 듯 보이기 시작했다.

16550956404349.jpg“그리고 과자가 아주 맛있다고 하더군요.”

16550956404343.jpg“아아…….”

너무 피곤한 모양이었다. 무슨 말을 해 주고 싶었는데, 정작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건.

16550956404343.jpg“그것 참…… 다행이네요.”

리에네는 꽉 잠긴 것 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헨튼 부인이 겸연쩍은 얼굴로 고개를 홱 저으면서 바느질감을 가리켰다.

16550956404349.jpg“바느질이라면 저도 오래도록 했습니다. 옷이 완성되지 않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면서 헨튼 부인은 누가 정해 주지도 않았는데 바느질감 앞에 턱 자리를 잡아 버렸다.

16550956404349.jpg“바늘은 이걸 쓰면 되는 겁니까?”

플램바드 부인이 기가 막혀 하면서 리에네를 쳐다보았다.

16550956404349.jpg“공주님…….”

리에네는 졸리고 부은 눈으로 웃었다.

16550956404343.jpg“믿어 봐요, 부인.”

16550956404349.jpg“아니, 그래도 어찌……. ……아이고, 그건 내 바늘이니까 이걸 쓰도록 해요.”

영 못미더워하던 플램바드 부인은 헨튼 부인이 혼자서라도 바느질을 시작할 기세인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일감을 정해 주었다.

16550956404349.jpg“실은 이걸로 하시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해 주면 내가 한숨 돌리겠네요.”

16550956404349.jpg“알겠어요.”

두 부인은 사이가 몹시 안 좋아 보이면서도 일감을 나누는 데는 거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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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느질을 오래 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듯, 헨튼 부인은 노련하고 재빠른 솜씨로 자수를 놓기 시작했다. 심지어 플램바드 부인이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미리 바늘땀을 재어 보고 차근히 맞추기도 했다.

16550956404349.jpg“……뭐, 오래 했다는 게 거짓은 아닌 모양이로군요.”

16550956404349.jpg“20년을 남의 집에서 말 못 하는 노예 노릇을 했는데 바느질이 대수겠나요.”

16550956404349.jpg“남의 집이라면 어디…… 아니, 말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괜히 참견이지.”

16550956404349.jpg“참견이랄 건 없는데 좋은 일도 아니니 넘어가 주면 고맙겠네요.”

16550956404349.jpg“그럽시다, 그럼.”

슬슬 두 부인의 바늘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저만 너무 느린 것 같아 리에네의 손도 덩달아 빨라졌다.

16550956404343.jpg“부인이 거들었다는 걸 말해 주면 그 남자가 기뻐할 거예요.”

16550956404349.jpg“…….”

헨튼 부인이 바느질을 하면서 리에네를 쳐다보았다.

16550956404343.jpg“그 남자는 집이 갖고 싶었다고 했거든요.”

이런 건 꽤나 집 같잖아요. 가족 같잖아요. 그래서 나도 기뻐요. ……아니, 어쩌면 내가 더 기쁠지도 모르겠어요.

16550956404349.jpg“그럼 잘된 일이네요.”

헨튼 부인이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다음부터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부지런히 바늘만 놀리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어쩐지 있지도 않은 벽난로에 불을 피워 놓은 것처럼 공기가 훈훈했다. * * * 리에네가 침실로 돌아온 시간은 새벽 다섯 시 반쯤이었다. 어차피 한 시간 정도 후에는 일어나야겠지만 그 한 시간이라도 주무시라며 플램바드 부인이 등을 떠밀었다. 헨튼 부인은 그사이 리에네의 손에서 바늘을 빼앗아 들었다. 여전히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아 보였지만 하는 짓을 보면 죽이 잘 맞는 친구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침실 문을 살그머니 열었을 땐 너무 졸려서 눈꺼풀이 반쯤 내려와 있었다. 세수…… 해야 하는데. 생각은 그렇지만 몸은 이미 침대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 남자는 자고 있겠지. 잘 자요. 아침에는 볼 수 있길. 제 침실로 가면 블랙을 깨울 것 같아 오늘은 옆방의 침대를 쓸 생각이었다. 리에네는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눈이 감겼다. 팔다리가 너무 무거웠다. 신발이라도 벗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벌써 반쯤은 잠이 들었다. 꿈결처럼, 누군가의 손이 발에 닿았다. 툭. 아주 조그만 소리와 함께 신발이 벗겨졌다. 양쪽 발에서 신발을 벗긴 손이 조심스럽게 엎드린 몸을 뒤돌려 놓았다. 머리 밑에 푹신한 베개가 들어왔다. 누구지…… 집요정인가. 잠결에도 제 생각이 우스워 리에네가 작게 웃었다. 웃지 말아요. 요정이 말했다. 깨우고 싶은 걸 참는 중이니까. 리에네가 웃으며 말했다.

16550956404343.jpg“기왕 하는 거…… 스타킹도 벗겨…… 줘……. 귀찮…….”

이런 잠투정이 다 있었군요. 요정이 투덜대는 것 같았다.

16550956404343.jpg“왜…… 싫어……?”

싫은 게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왜 그런 걸 몰라줍니까. 어쨌거나 요정은 치맛자락을 약간 걷어 올린 뒤 스타킹을 잡아당겼다. 리에네가 킥킥 웃었다. 무슨 집요정이 스타킹을 벗기는 법도 몰라.

16550956404343.jpg“그거 아니야……. 밴드를 먼저…… 풀어야……지.”

밴드는 어떤 겁니까?

16550956404343.jpg“허벅……지에 있…….”

요정이 뭔가 아주 불만족스러운 소리를 끙 내뱉었다. 파렴치한이 되지 않을 자신이 없는데. 스륵. 치맛자락이 더 들리고 두 손이 치마 속으로 들어왔다. 얇은 속치마를 더듬던 손이 허벅지 안쪽에서 밴드를 고정시켜 놓은 매듭을 찾았다. 스르륵, 툭. 매듭이 풀렸다. 스타킹이 맨살에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스타킹을 요정의 손이 조금씩 잡아당겼다.

16550956404343.jpg“아, 이상…… 해애…….”

리에네가 몸을 뒤척였다. 뭐야, 좀……. 요정은 맨살을 만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듯했다. 손끝으로 스타킹만 집어서 잡아당겼다. 그러다 보니 속도는 배로 느려졌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야릇하지……. 천천히 조금씩 끌어내려지는 스타킹이 살갗을 스칠 때마다 저도 공연히 긴장을 하게 되었다. 입 안이 마르는 기분에 리에네가 자꾸만 입술을 핥았다. 만지는 것도 아닌데 왜……. 스타킹을 벗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너무 느리고 어려운 일처럼 여겨졌다.

16550956404343.jpg“그러지 말고 빨리…… 그게 아니라 여기…… 밴드를 잡아서…….”

리에네가 드레스 위를 더듬어 스타킹의 밴드가 걸려 있는 곳을 찾았다. 허벅지와 무릎의 중간 즈음이었다. 리에네가 요정의 손을 끌어와 밴드 위에 올려놓았다.

16550956404343.jpg“여기…… 이걸 잡아서 끌어내리면 빨리……. ……아?”

갑자기 요정이 손을 뗐다.

16550956550263.jpg“……더는 못 하겠습니다.”

꿈결처럼 아득하고 몽롱했던 요정의 목소리가 갑자기 몹시 지친 것 같은 블랙의 목소리로 들렸다.

16550956404343.jpg“어……. ……응? 네?”

거짓말처럼 눈이 뜨였다.

16550956550263.jpg“차라리 다른 걸 시켜요.”

집요정이 아니었다. 블랙이었다.

16550956404343.jpg“어, 언제부터……?”

리에네가 당황해 목소리를 높였다. 블랙은 리에네를 보며 괜히 이마 위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16550956550263.jpg“안 자고 있었습니다. 늦게라도 자러 올까 봐.”

리에네는 언제부터 집요정이 아니라 당신이었냐고 묻는 것이었고, 블랙은 그게 아니라 언제부터 깨어 있었냐고 묻는 줄 알고 답을 했다.

16550956404343.jpg“아니, 그게…… 그게 아니라…… 아, 그럼 처음부터요?”

16550956550263.jpg“네?”

16550956404343.jpg“꿈인 줄 알았어요…….”

16550956550263.jpg“……. 어쩐지.”

블랙이 몹시 피곤하게 들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16550956550263.jpg“괜한 짓을 해서 깨웠나 봅니다. 자도록 해요.”

16550956404343.jpg“스타킹은 마저 벗어야 하는데…….”

깬 김에 스타킹을 마저 벗으려던 리에네가 뚝 동작을 멈추었다. 스타킹을 벗기려면 드레스를 걷거나 속으로 손을 넣거나 해야 했다. 그래. 괜히 야한 기분이 들었던 게 아니었어.

16550956550263.jpg“눈을 감으면 됩니까?”

말을 하면서 블랙이 눈을 감았다.

16550956404343.jpg“혼인을 하고 나면 이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아질까요?”

리에네가 눈을 감은 블랙을 바라보며 물었다.

16550956550263.jpg“어떤 일 말입니까?”

16550956404343.jpg“잠든 상대방을 위해 옷을 벗겨 주거나 하는 일이요.”

16550956550263.jpg“……어쩌면.”

16550956404343.jpg“빨리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리에네가 스타킹을 벗기 위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16550956404343.jpg“지금은 왠지 너무 어려워서……. 아까는 너무 달콤한 꿈을 꾸는 기분이었는데…….”

사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몰랐다. 아마도 저는 이상하고 당혹스러우면서도 그 감각이 중간에 사라진 게 아쉬운 모양이었다.

16550956404343.jpg“집요정 같았거든요. 나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다 해 주는 게.”

16550956550263.jpg“그럼.”

눈을 뜬 블랙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16550956550263.jpg“지금부터 애쓰면 되겠군요. 익숙해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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