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꿈 (2)2022.01.02.
블랙이 일어나려던 리에네를 밀어 도로 눕혔다. 가물대던 눈이 말똥해졌다.
“못 하겠다고 하셨잖아요.”
리에네는 그가 중간에 그만둔 것을 여자 스타킹을 벗기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말인 줄 이해했다. 스타킹이란 얇고 부드러워서 자칫 실수로 찢기도 쉬웠으니까.
“설마 공주님 몸에 걸쳐진 걸 벗길 수가 없다는 뜻이었겠습니까?”
“그럼……요?”
블랙이 의미를 모를 웃음을 지었다.
“파렴치한이 되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그 말을 잠결에 들은 것도 같았다.
“이해가 안 가는데요. 벗기는 건 똑같잖아요.”
“내가 벗기는 걸 공주님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다르니까.”
“…….”
그렇게 말하니까 굉장히 야한 말처럼 들렸다. 블랙이 드레스 자락을 발목부터 천천히 걷어 올렸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말아요. 그래도 되니까.”
리에네의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저기, 좀……. 부끄러워졌어요. 그냥 제가 할게요.”
“늦었습니다.”
치마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린 블랙이 근처까지 흘러내린 스타킹 밴드를 찾아 쥐었다. 스르륵. 스타킹이 그의 손짓을 따라 내려왔다.
“…….”
잠에 취했을 때와는 달랐다. 살갗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꿎은 스타킹만 조심스럽게 잡아당기던 손은 이제 살결을 어루만지며 내려왔다.
“저기…… 자, 잠깐…….”
계속 어깨가 움찔거렸다. 블랙은 모기 소리만 한 저항을 못 들은 체했다.
“다 벗겼습니다. ……이쪽은.”
스륵, 툭. 블랙은 벗겨 낸 스타킹 한쪽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차갑고도 맑은 새벽빛 아래 하얗게 드러난 발목을 쥔 그가 리에네의 무릎을 굽혀 볼록 드러나는 무릎 뼈에 입술을 댔다.
흠칫, 몸이 떨렸다.
“이제 반대쪽도.”
“앗, 잠깐……. 잠깐만요. 이건 제가 할게요.”
매듭이 풀리지 않은 밴드는 무릎보다 훨씬 위쪽에, 그리고 안쪽에 있었다.
“이유를 말해 봐요.”
“그, 부끄러우니까…….”
“그럼 별로 타당한 이유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쓸데없이 부끄러워하는 일에 익숙해지려는 겁니다.”
“아니, 반대로 생각해 보세요. 로드 티와칸께서 스타킹을 신고 있고 제가 그걸 벗기려고 하면 그게 괜찮겠어요?”
“……기대됩니다.”
블랙의 눈이 약간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제가 스타킹을 신을 일은 어지간해서는 없는데…… 구두를 신을 때는 스타킹을 신겠군요. 공주님께서 벗겨 주시겠습니까?”
리에네가 울상을 지었다.
“……남자 스타킹은 무릎까지만 오잖아요.”
“안타깝게도.”
뭐라는 거야, 이 남자가.
“원하신다면 저도 허벅지까지 오는 걸 만들게 하겠습니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됐어요…… 됐다고요.
“정 그렇게 부끄러우시면 제가 눈을 감겠습니다.”
……그건 좀 나으려나?
“그렇게까지 해서 제 스타킹을 벗기시려는 이유가 있을까요?”
벌써 눈을 감은 블랙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게 빠를 겁니다.”
“어째서요?”
“왜냐면 그런 건 없으니까. 찾을 것도 없으니 빠르겠지.”
블랙의 손이 무릎을 타고 올라왔다. 리에네가 움찔 다리를 떨었다.
“여기였나……. 맞군요.”
툭. 손끝이 스타킹 밴드의 매듭을 건드렸다. 입술이 벌어지고 소리 없는 한숨이 새어나왔다. 살에 닿은 것도 아니었는데…… 대체 왜 이래.
“눈을 감아서 속도가 느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를 단호히 뿌리치지 않는 자신이었다.
“그럼 눈 뜨고 하세요.”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익숙해져야죠.”
리에네는 대신 저가 눈을 감았다.
“로드 티와칸이 갑자기 성격을 바꾸지 않는 이상 내내 이럴 테고…… 그때마다 부끄러워할 수는 없잖아요.”
그건 내 손해가 분명할 테니까. 솔직히 말해 보자. 지금 이게 싫은 건 아니잖아.
“공주님이 눈을 감으면 마찬가지 아닙니까?”
“한 번에 하나씩 해요…….”
“자세를 바꾸면 나을 겁니다.”
블랙은 리에네의 발치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그 옆에, 반쯤 포개지듯 누웠다. 눈을 뜨자 시선이 이어졌다.
“이 자세에서 스타킹을 벗기신다고요?”
“공주님이 도와주시면 가능합니다.”
블랙은 고개를 내려 입술을 겹쳤다. 일단 입술이 서로 닿으면 자연스럽게 키스가 시작되었다. 리에네는 손이 닿는 대로 블랙의 머리를 안고 머리칼을 매만졌다. 입술이 벌어지고 키스가 깊어질 무렵, 그의 손이 허벅지 안쪽을 더듬었다. 아…….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살짝 눈을 뜨고 보니 그는 눈을 감고 키스에 열중해 있었다. 스르륵. 동시에 드레스 안에서 스타킹 밴드의 매듭이 풀렸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밴드를 끌어내리자 반사적으로 다리가 굽혀졌다. 허벅지를 쓸어내린 손이 무릎을 스쳐 종아리로 내려갔다. 리에네가 무릎을 접어 주자 그는 키스를 하면서 수월히 스타킹을 벗겼다.
“……부인이 조금이라도 자라고 했는데.”
리에네는 두 뺨이 새빨개진 채 블랙의 어깨에 기대 더워진 숨을 내쉬었다.
“자긴 글렀어요.”
“그렇지 않아요.”
잔뜩 상기된 자신에 비하면 블랙은 아무 일도 없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눈이 평소보다 어둑했다.
“겉옷을 벗겨 줄 테니 편히 자면 됩니다.”
스타킹에 비하면 겉옷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속옷에 속치마에 속드레스까지 세 겹이나 입었으니 맨살이 드러날 일도 없었다. 리에네가 얌전히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블랙이 손을 그 아래로 둘러 등에 잘게 매달린 단추들을 풀기 시작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이렇게 스타킹을 벗겨 주는 법은 어떻게 아셨어요?”
“지금이 처음입니다.”
“그럴 리가……. 너무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건 공주님도 처음이라서 그럴 겁니다.”
“그럴까요……. 그리고 하나 더요.”
자기 글렀다는 말과는 다르게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블랙도 그걸 알아챘는지 가물대는 눈꼬리에 키스를 하며 작게 웃었다.
“네.”
“스타킹을 벗길 때 다른 생각은 안 드나요?”
“어떤 생각 말입니까?”
“야하다거나 뭐 그런.”
“…….”
등 가운데까지 단추를 풀어 내려간 손이 멈칫 굳었다.
“저는 그랬는데……. 로드 티와칸은 하나도 안 그래 보여서요.”
“……그렇게 보였다면 신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네?”
“제발 멀쩡해 보이게 해달라고 한참 전부터 비는 중이었으니까.”
“어…… 언제부터…….”
“공주님이 스타킹도 벗기라고 했을 때부터. 내 머릿속에서 공주님은 벌써 여러 번……. ……아니, 이 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팔 더 들어요.”
리에네가 엉겁결에 팔을 들어 올리자 겉 드레스가 쑥 머리 위로 올라왔다.
“다 됐습니다. 더 필요한 건 없습니까?”
“하나 더요.”
리에네는 침대 위에 누워서 그 옆자리를 툭툭 두들겼다.
“여기 누우세요.”
“……정말로 신이 없으면 안 되겠는데.”
작게 혼잣말을 중얼댄 블랙이 여느 때처럼 옆에 누웠다. 스타킹을 벗기는 일보다야 훨씬 익숙하게 그에게 안겨든 리에네가 물었다.
“왜 안 자고 계셨어요?”
“잠이 안 왔습니다. 공주님이 없어서.”
그건 뭔지 알 것 같아. 나도 그럴 것 같거든.
“그럼 우리는 혼인 후에도 매일 한 방을 쓰겠네요?”
“나를 쫓아내진 못할 겁니다. 공주님이 티와칸보다 더 실력 있는 용병단을 고용하지 않는 이상.”
말도 안 되는 농담에 리에네가 피식 웃었다.
“다들 이상하다고 할 거예요. 나우크의 귀족들은 부부가 한 방을 쓰는 경우가 없잖아요.”
“그게 걱정됩니까?”
“아뇨. 그렇다기보단…… 그 반대예요. 기대가 돼요.”
“왜?”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여겨도 결국에는 우리가 아주 사이좋은 부부라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밤에 헤어지는 것도 싫을 정도로.”
“남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좋습니까?”
“싫을 이유가 없는데요.”
리에네가 손에 닿는 블랙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다들 알았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내 사람이라는 걸. 나는 당신의 집이라는 걸. 그러니까 누구도 끼어들 수 없다는 걸. 블랙이 몸을 옆으로 돌려 리에네를 마주 보았다. 아무 말도 없이 쳐다만 보고 있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이 퍽 신기하고도 익숙했다.
“그러면 정말 좋겠습니다.”
한참 후에 블랙이 느릿느릿 리에네의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웠다.
“평생토록.”
“네. 평생토록.”
그렇게 마주하고 있다 어느 순간 눈이 감겼다. 그날 새벽의 잠은 꿈보다 더 달았다. * * *
“어…… 뭐라고요? 그게 정말이에요?”
“그렇습니다.”
리에네는 늦잠을 잤다. 변명을 하자면 일부러 그랬던 게 아니라 너무 정신이 없었다. 잠들기 전 블랙에게 깨워 달라고 신신당부를 해두었지만 그는 끝내 리에네를 깨우지 않았다. 결국 리에네는 아침이 거의 다 지나가고 나서야 깨어났는데, 눈을 뜨자마자 플램바드 부인이 신이 나서 소식을 알려왔다.
“그이가 정말 손이 빠르지 뭡니까. 게다가 얼마나 야무지고 꼼꼼하던지요. 세상에, 저보다 자수를 더 잘 놓는 것 같지 뭡니까.”
리에네가 자러 가고 몇 시간 뒤, 자수가 다 완성되었다. 플램바드 부인은 경비대 부대장을 시켜 재봉사를 성으로 불러들였다. 잠이 덜 깼다는 재봉사는 연신 하품을 하며 부인의 지시에 따라 옷을 완성했다. 혼자라면 어림없을 일이었지만 다행히도 재봉사는 재단사와는 다르게 쓸 만한 일꾼들을 데려왔고, 거기에 헨튼 부인이 거들고 나서자 혼례복은 반나절 만에 완성이 되었다.
“혹시 몰라 재봉사를 붙잡아 두었습니다. 아무래도 가봉을 하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려서 말이지요. 로드 티와칸께서 한 번 입어 보신 다음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나 살펴야지 않겠습니까.”
“아……. 네, 그렇게 해요. 그나저나 어쩌죠. 힘든 일을 두 분께 맡기고 나는 편하게 잤네요.”
“아이고,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공주님은 내일 혼인식을 앞둔 새신부란 말입니다!”
“오늘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더 할 게 많으시지요! 공주님께서도 혼례복을 미리 입어 보셔야지 않겠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제 혼례복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내 정신 좀 봐.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플램바드 부인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
“지금 저와 함께 가십시다. 로드 티와칸께서 보석실에 혼례복을 가져다 놓았다고 이르셨습니다.”
보관하던 보석은 거의 다 팔아치워 창고나 다름없게 된 곳을 부인은 여전히 보석실이라고 불렀다.
“……그래요, 그럼.”
리에네는 늦은 아침 식사를 빠르게 마무리했다. 어지간하면 천천히 더 드시라고 할 부인도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어지간히도 새 혼례복을 입혀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가요, 이제.”
플램바드 부인은 아예 리에네의 손을 붙들고 보석실로 향했다. * * *
“말이 안 나와요…….”
블랙이 입을 혼례복은 생각보다 훨씬 더 근사했다. 마침 재정에 여유가 생겨 돈을 아끼지 않은 탓도 있었고, 플램바드 부인의 안목이 높기도 했다. 그런데 자신이 입을 혼례복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이건 대체 무슨 천이죠? 저는 태어나서 이런 걸 본 적도 없어요…….”
눈으로 만든 것 같은 옷이었다. 눈부신 흰색 천은 얇고 가벼운데도 풍성하게 펼쳐져 차르르륵 흐르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단추와 장식은 모두 진주였다. 멀리서 볼 때는 커다랗게 피어 있는 흰 꽃 같았는데, 가까이서 보면 깨알 같은 자수와 장식 때문에 눈이 부셨다.
“저도 그렇습니다, 공주님. 아니, 대체 이런 옷을 누가 어찌 만들었답니까. 나우크에는 이럴 사람이 없을 텐데. 정말이지…… 어휴.”
플램바드 부인이 흐뭇한 얼굴로 자꾸 혀를 내둘렀다.
“너무너무 보기 좋습니다, 공주님. 공주님께서 입으시면 이 옷이 몇 배는 더 근사해 보일 겁니다.”
“저 말고 옷만 보이지 않을까요?”
“아이고,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 역시 머리털 나고 공주님처럼 아름다운 분은 이제껏 본 적이 없습니다.”
“그야 부인은 내 유모였잖아요.”
리에네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내친김에 지금 입어 보시겠습니까?”
“아, 아뇨. 잠시만. 좀 나중에요.”
“……? 입어 보셔야 잘 맞는지 볼 게 아닙니까.”
“그래도 잠시만요. 저 엄청난 옷을 입으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요. 그 전에 로드 티와칸의 혼례복을 보면 될 것 같아요.”
“지금 입으나 나중에 입으나 같지요. ……뭐, 하지만 알 것 같습니다. 엄청난 옷이긴 하니까요.”
“그러니까요. 아, 잘 지어졌네요.”
블랙이 입을 혼례복을 살피며 리에네가 방긋 웃었다. 새 옷은 시간이 급해 재봉사들을 닦달한 느낌이 조금도 없었다. 부인이 마음에 들어 한 만큼 틀림없이 좋은 옷이었다.
“빨리 입혀 보고 싶긴 해요. ……아, 참. 까먹고 있었네. 이걸 대봐야지.”
리에네가 몸을 돌려 구석에 놓인 함의 자물쇠를 열었다. 일부러 제 방에서 열쇠를 챙겨 왔다.
“공주님? 뭘 하시게요?”
“혼례복에 장식을 달게요. 여기에 푸른색 펜던트를 놔뒀는데…….”
“왕실의 별자리를 따서 만든 그 사파이어 말씀이신가요?”
“네.”
현재 리에네에게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보석이기도 했다. 작은 귀걸이나 머리핀 정도는 있었지만 그것들은 크기가 작아 재산 가치를 따지기는 어려웠다.
“아, 여기가 아니라 저쪽 함에 넣어뒀나.”
함이 비어 있는 것을 안 리에네가 반대쪽 모서리에 놓인 장으로 돌아섰다.
“여긴 자물쇠를 따로 달지 않아서 보석을 넣어 두진 않았을 텐…….”
그리고 굳었다.
“공주님?”
뭔가 이상했던지 플램바드 부인이 곁으로 다가왔다.
“이게…… 다 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