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이국의 대공자 (1)2022.01.05.
리에네가 묵직한 장미목 장 안을 가리켰다. 원래는 보석을 넣어 두던 용도로 쓰던 장이었다. 장 안은 칸마다 서랍이 달려 있었고, 손잡이 아래는 각기 다른 열쇠 구멍이 있었다. 하나씩 팔아치우면서 장이 비자 더 이상 잠글 필요도 없어 열쇠뭉치는 그냥 집무실 책상 서랍에 넣어 둘 정도였다. 텅 비어 있어야 할 서랍이, 비어 있지 않았다. 예전에 그 자리에 있었던 보석들이 시치미를 떼고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네? 뭐가 어떻…… 어머나, 세상에!”
플램바드 부인도 깜짝 놀라 입을 가리며 소리를 질렀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랍니까……. ……아.”
부인은 뭔가를 아는 눈치였다.
“부인?”
“아니, 그게…….”
플램바드 부인이 리에네의 눈치를 보며 얼마 전 보석상에게 넘겼던 선왕비의 목걸이가 담겼던 서랍을 열었다. 역시나 그곳에는 원래대로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그게……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목걸이가 공주님께서 참 아끼시는 물건이라고…….”
“누구…… 로드 티와칸께요?”
“그렇지요…….”
“그럼 이걸 전부 다 그 남자가 채워 뒀다는 건가요?”
격앙된 감정을 한숨으로 토해 내던 리에네가 불쑥 생각이 났는지 다른 함이며 장들도 모두 뒤졌다. 착실하게도 보석이 쌓여 있었다. 어떤 것은 이전에 판 것과 똑같았고, 모양이 조금 다른 것도 있었다.
“이건 일부러 그런 거겠죠?”
“그, 저…… 무얼 두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나우크에서 왕실 보석상은 하나뿐이잖아요. 그자한테 물으면 누가 사 갔는지 어지간한 건 알 수 있을 테고, 그러니까…….”
값을 상관하지 않고 구했을 것이다. 비웠던 곳을 채워 주려고. 같은 물건을 구하지 못해서 비슷한 것을 사놓기도 했다.
“말도 안 돼, 진짜. 대체 언제 이걸 다 사들인 거야. 그럴 시간이 언제 있었다고.”
“그러게나 말입니다. 제가 말씀을 드린 지 며칠 된 것 같지도 않은데…….”
부인도 감격했는지 살짝 코 막힌 소리를 냈다. 그 남자는, 좀 미친 것 같아. 아무리 여유가 있어도 이럴 수는 없잖아. 이건 몇 년 치 예산은 될 거야. 금액도 금액이었지만 리에네는 도무지 이 넘치는 선물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받을 게 있는 건 그 남잔데. 왜 내가 받고 있는 거야. 내가 더 해 줘야 하는데. 리에네가 휙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부인이 놀라 리에네를 쫓아왔다.
“공주님? 어디 가십니까? 혼례복을 입어 보셔야지요.”
“안 입어 봐도 괜찮아요. 분명히 잘 맞을 테니까.”
“아니, 그걸 어찌 아십니까?”
“그 남자가 준 거잖아요.”
“아무리 눈썰미가 좋다고 해도 사내 아닙니까. 꼭 그렇다고 믿을 수는 없단 말입니다.”
“로드 티와칸께서도 옷을 입어 봐야 하니까요. 제가 가서 데려올게요.”
“네? 공주님께서 직접 가시려고요?”
“그게 빠르지 않을까 싶네요.”
리에네가 문을 향해 돌아서며 입술을 잘근 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너무 과해. 다시 팔라고 해야겠어. 그 남자는 벌써 너무 많은 돈을 썼어. 혼례식 비용도 전부 감당하고 있는데. 게다가 블랙은 남쪽의 빈 땅에 성벽을 올려 요새로 만들 생각이라고 했다. 오랜 가뭄이 시작된 이래로 강 이남의 사람들은 대부분 나우크를 떠났다. 빈 땅은 방어에도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살 집에 빈틈이 있다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듯했다. 필요한 일이라는 데는 동의했지만, 거기에도 엄청난 돈이 들어갈 게 뻔했다. 그걸 알면서도 보석까지 사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그것도 원래는 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인데. 엄두가 안 나서 손도 못 대고 있던 일인걸. 리에네는 치맛자락을 쥐고 서둘러 블랙을 찾았다. 보석실을 나와 북쪽 탑으로 가는 길에 마주친 용병에게 물으니 블랙은 마침 남쪽 요새를 둘러보기 위해 막 성을 나서는 참이라고 했다. 그 말에 치맛자락을 쥐고 마사를 향해 달렸다. 사실 크게 급한 일도 아니었고, 밤에 해도 되는 일이었는데 그래도 놓치는 건 싫을 것 같았다. 어쩌면 보고 싶은 거겠지. 숨이 차는데도 생각은 이어졌다. 벌써 본 지 한참 된 것 같으니까.
“하아, 하아…….”
부지런히 달려온 리에네가 마사 입구에 도착했다. 하지만 거기서 보게 된 것은 말에 오르는 블랙이 아니었다. 이제껏 본 적이 없는 휘황찬란한 마차였다.
“누구……?”
그리고 그 마차에서 시종의 손을 잡고 내리는 젊은 남자였다. * * *
“주군께서는 벌써 남쪽 요새로 출발하셨습니다.”
젊은 남자의 마차를 마사까지 안내한 용병이 해 준 말이었다.
“아, 내가 늦었군요.”
“주군께서도 안타까워하실 겁니다.”
아쉬워하는 리에네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티와칸은 이어서 젊은 남자에게 말했다.
“부관은 성 안에 계십니다. 안내하겠습니다.”
“아, 잠깐. 급할 것 없잖아. 인사부터 드려야지.”
젊은 남자는 아주 비싼 향유에 퐁 담겼다가 나온 사람 같았다. 미소는 기름처럼 매끄러웠고 옷차림새는 마차만큼이나 화려했다. 아닌 게 아니라 기름을 발라 가지런하게 빗어 넘긴 머리는 나우크에서는 보기 힘들었다.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이 아름다운 분께서 나우크의 리에네 공주님이시겠지. 처음 인사드립니다. 알리토 공국의 대공자, 디에렌입니다.”
느닷없이 한쪽 무릎을 꿇는 정중한 인사에 리에네가 몸을 반듯하게 폈다. 알리토 공국이 어디 있는 곳이지……. 예법도 화려한 곳인가 보네.
“저 역시 처음 뵙겠어요. 어떤 용무인지는 모르겠으나, 선한 의도로 오셨으면 저 역시 같은 마음으로 환영하겠습니다.”
“그 외모만큼이나 우아한 화술이로군요.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과연 전쟁의 신을 벽지에 붙들어 놓을 만한 미모이십니다. 덕분에 대륙은 한숨을 덜었습니다.”
“……고작 인간의 겉모습이 어떻게 신을 가두겠습니까. 말하신 의도와는 달리 자칫 신에게 흠이 될 것 같은 인사로군요. 그런 인사는 사양하겠습니다.”
디에렌 대공자의 칭찬은 어딘가 달갑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대놓고 나우크를 벽지라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그 남자가 무슨 문젯거리였다는 식으로 말을 하네. 그게 아니라 반대였을 텐데. 자기들이 어쩌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해 준 게 그 남자일 거잖아. 그리고 자기가 뭐라고 대뜸 나더러 예쁘다 뭐다 평가야. 날 예쁘다고 하는 건 그 남자 하나면 돼.
“나우크에서는 아름다움을 아름답다 이르는 게 무례입니까?”
“상대가 원치 않을 때는 무슨 말이든 무례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째서 공주님께서는 아름답다는 말을 원치 않으십니까?”
“그런 말을 해 줄 사람은 정혼자 하나로 충분하니까요. 괜찮으시다면 화제를 돌리고 싶군요. 알리토 공국과 나우크는 이제껏 아무런 교류가 없었는데 불시에 방문하신 것은 로드 티와칸께 허락을 구한 일인가요?”
“하나로 충분하다라……. 그건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그 미모를 주신 나우크의 신이 분노하시겠습니다.”
“그런 일로 허무함을 느끼기에 나우크는 너무 바쁜 곳입니다. 공국의 대공자이시니 이해하시겠지요. 나우크의 수호기사단이 적대적이지 않은 걸 보니 허락을 구한 방문이라고 알겠습니다.”
대공자라는 인간이 할 일 참 더럽게도 없다는 뜻의 우아한 표현이었다. 디에렌이 어깨를 으쓱하며 제 볼을 과장되게 쓸어 보였다.
“뺨을 맞은 기분이로군요. 바쁘신 분의 시간을 뺏어 죄송합니다.”
“사과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럼 이제 편히 볼일을 보세요. 디에렌 공자를 페르모스 경께 안내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나는 로드 티와칸을 뒤따라가고 싶은데 길을 아는 경비대 인원이 성에 있을까요?”
“그러십니까? 아마 속도가 빨라 따라잡긴 힘들 테니 남쪽 요새까지 모시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디에렌이 끼어들었다.
“그럼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티와칸이나 리에네나 둘 다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공자께서는 나우크의 손님이시잖아요. 손님의 여독이 풀리지도 않았을 상태에서 다시 길을 떠나게 하는 예의는 나우크에 없습니다. 페르모스 경이 부족함 없이 공자를 맞이할 겁니다.”
“편하게 볼일을 보라 하신 분은 공주님이셨습니다. 제 볼일은 티와칸의 부관이 아닌 수장에게 있습니다. 로드 티와칸이 바빠서 직접 손님을 맞이할 시간이 없다면 제가 가는 것도 방법이겠지요.”
……그렇게 말하면 거절할 수가 없잖아. 리에네가 용병 쪽으로 고개를 돌려 내키지 않는 표정을 가리며 물었다.
“남쪽 요새는 손님께서 걸음해도 괜찮은 곳인가요?”
겉으로는 디에렌을 신경 써 주는 척하지만 사실은 남에게 알려줘도 되는 곳이냐 묻는 것이었다.
“가는 길은 단순해서 괜찮을 겁니다. 그런데 동행을 허락하실 겁니까?”
리에네의 입꼬리가 살짝 비죽거렸다.
“로드 티와칸의 손님을 나 혼자서 나우크의 예의로만 대할 수는 없지요.”
“주군께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으실 겁니다.”
뭐, 그건 그럴 거야. 엄청 중요한 손님이라면 내게 미리 말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신분에 따르는 예의는 엄격해서 타국의 대공자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도 알아요.”
리에네는 용병을 향해 살짝 웃어 보인 다음 내키지 않는 동행을 수락했다.
“그럼 함께 가지요. 대신 저는 간략한 행차이고 싶으니 공자께서도 과한 수행은 삼가시기 바랍니다.”
“뜻대로.”
이번에도 디에렌은 과장되게 한쪽 무릎을 구부려 예의를 표했다. * * *
“아…….”
그새 지형이 달라졌다. 리에네가 강 이남까지 걸음한 것은 몇 년 만의 일이었다. 이쪽 땅은 말 그대로 버려진 지역이라 허물어져 가는 폐가와 바짝 마른 잡풀들이 널브러진 공터밖에 없는 곳이었다. 거기에 길이 생겼다. 주춧돌이 될 것 같은 커다란 바위가 듬성듬성 자리에 맞춰 놓여 있는 것을 보자 이곳에 어떤 성이 지어질지 눈앞에 떠오를 듯했다.
“어떻게 온 겁니까?”
말라붙은 강을 잠시 쳐다보고 있자니 블랙이 다가왔다. 따라잡을 수는 없을 거라던 용병의 말이 맞았다. 그는 리에네보다 훨씬 앞서 도착해 있었다.
“손님을 모셔 왔어요.”
리에네가 고삐를 한 손으로 몰아 쥐며 내릴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블랙이 가볍게 제 허리를 안아 바닥에 내려주었다.
“손님?”
발은 땅에 닿았지만 허리를 안은 손은 그대로 머물렀다. 그게 뭐라고 괜히 혼자 볼이 살짝 달아올랐다.
“네. 뒤에 오고 계세요. 마차는 속도가 느려지더라고요.”
마차가 달리기에는 길이 좁다고 했지만 디에렌은 마차를 고집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게 싫다는 이유였다. 그 값비싼 흰색 공단 옷을 보면 아예 이해를 못 할 것도 아니라 동행은 반쪽짜리가 되었다.
“공주님의 손님이 아니라면 누군지 알겠군요. 괜한 수고를 하셨습니다.”
블랙은 리에네의 망토에 묻은 흙먼지를 부드럽게 털어내며 말했다.
“제가 온 게 괜한 짓인가요?”
“그게 아니라 성의가 아깝습니다.”
블랙은 리에네의 한 손을 쥐어 손목께를 입술로 누르듯 속삭였다. 나는 왠지 이 남자가 이러는 것만으로도 여기 올 이유가 충분했던 것 같아.
“바쁜 게 아니었습니까? 방해가 될까 봐 일부러 여기 나와 있던 건데.”
“아직 할 일이 남아 있긴 해요. 그런데 저 혼자 할 일이 아니지 뭐예요.”
“내가 필요했습니까?”
“네. 손님은 우연히 마주쳤어요. 그러다 여기까지 동행이 됐고요.”
그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두 사람은 잠시도 시선을 쉬지 않았다. 먼지를 털어 주던 손은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하다 괜히 목깃을 만지작댔고, 리에네도 그를 따라 하듯 멀쩡한 이마며 콧날을 조심조심 건드려 보았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는 건 이 남자 얼굴을 두고 하는 소리일 거야.
“저, 크흠, 주군.”
랜달이 등 뒤에서 조심스럽게 블랙을 불렀다.
“마차가 도착했는데요.”
블랙은 쓸데없이 고개를 돌리거나 하지 않았다.
“알리토에서 왔을 것이다. 받아서 적당히 보관해 둬.”
“아니요. 그런 마차가 아닌 것 같습니다.”
“……?”
리에네에게 철썩 들러붙어 있던 시선이 이제야 떨어졌다. 힐긋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 블랙의 표정이 대놓고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