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이국의 대공자 (2)2022.01.09.
“왜 그러나요?”
험악해지는 시선을 알아차린 리에네가 블랙의 손을 살짝 힘주어 잡았다.
“아무 일 없었습니까?”
블랙이 구석구석 살피는 사람처럼 고개를 바짝 들이대고 물었다.
“별일 없었어요. 그런데 왜…….”
“저런. 안부를 물어야 할 사람은 사랑스러운 정혼자가 아니라 이 몸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새 마차에서 내려 이쪽으로 향해 오는 디에렌 대공자가 한 말이었다. 블랙은 불쾌한 기색을 한껏 드러낸 표정 그대로 몸을 돌렸다. 디에렌이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오랜만이야, 형제.”
형제라고? 리에네가 당황의 뜻을 담아 눈을 깜박이는 동안 블랙이 디에렌의 인사를 받았다.
“별로.”
……응?
“볼일 보고 빨리 꺼져.”
……꺼져? 저 사람 대공자라고 하지 않았나? 블랙은 어리둥절해하는 리에네에게 팔을 내밀었다.
“여기서 할 일은 끝났습니다. 돌아갈까요?”
“음……. 그래도 되는 걸까요?”
“됩니다.”
그러면서 부드럽게 웃는 얼굴은 평소와 똑같았다.
“나는 성을 나서는 순간부터 공주님이 그립기도 했고.”
평소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말을 어깨 너머로 들으면서 입을 딱 벌리는 알리토 공국의 대공자뿐이었다. * * *
“왜 그렇게 싫어하세요?”
블랙은 디에렌을 싫어하는 게 확실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성으로 출발한 이후로 디에렌은 유령 같은 존재가 되었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건네지도, 신경을 써주지도 않았다. 블랙이 리에네를 제 말이 태워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자 함께한 용병들도 속도를 맞췄다. 디에렌은 혼자 발을 구르다 저도 다시 마차에 올라 일행을 뒤쫓아 왔다. 나중에는 가엾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별로.”
블랙은 담담히 말했지만 쉽게 믿기진 않았다.
“그건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하고는 다른 것 같아요.”
“알리토 대공가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덜 싫어하긴 합니다.”
“저런.”
가장 덜 싫어하는 게 이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다는 소리야.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물어도 되나요?”
리에네가 고개를 살짝 비틀어서 눈을 마주치고 묻자 블랙은 싱긋 웃으며 콧등에 키스를 했다.
“키스는 좋은데요, 이건 물어보면 안 된다는 뜻인가요?”
“그게 아니라 재미없는 얘기가 되리라는 뜻이었습니다.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아서요.”
“괜찮아요. 당신에 대한 얘기잖아요. 나는 알고 싶어요.”
“공주님은 왜 하필 내가 두 손을 못 쓸 때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블랙은 뜻 모를 쓴웃음을 지은 뒤 천천히 얘기를 시작했다.
“알리토 공국이 르케스 왕국과 전쟁을 벌일 때 몇 번 전투를 대신해 준 적이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단순한 일은 아니었다. 알리토 공국쯤이야 우습게 봤던 르케스 왕국은 뒤늦게 끼어든 티와칸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보고 반강제로 전쟁을 끝내야 했다. 그 덕에 알리토 대공가는 영토를 사수했고, 티와칸은 대금 대신 금광 소유권을 넘겨받았다. 알리토 대공은 욕심이 많은 만큼 겁도 많은 자였다. 그는 티와칸이라는 힘을 제 곁에 두고자 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혼인이었다. 마침 대공가에는 미혼인 대공녀가 있었다. 대공가의 청혼을 거절하는 데는 대가가 따랐다. 블랙은 페르모스의 의견을 따라 혼인 대신 대공자 디에렌과 의형제가 되는 것으로 청혼을 피했다. 디에렌의 쌍둥이 누이인 대공녀는 뒤끝이 아주 긴 사람이었다. 가급적이면 대공가와는 얽힐 일이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대공자와는 말을 나눌 필요 없습니다. 틈을 보이면 파고들 인간이니 알은척하지 않는 게 가장 좋습니다.”
“그래도…….”
그건 좀 너무한 것 같은데. 예법이란 게 있잖아. 그런 말을 하려던 리에네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아니,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뒤끝이 길다잖아. 그게 무슨 의미겠어. 리에네가 저도 모르게 말고삐를 쥔 블랙의 팔뚝을 꾹 붙들었다.
“알리토의 대공녀는 지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일 년 전 혼인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덕에 혼인 선물을 제법 뜯겼다. 페르모스가 상자에 금과 보석 따위를 챙겨 넣으며 아깝다고 하도 중얼대는 바람에 노래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아, 그렇군요.”
그나마 그건 좀 다행이었다. 그럼 동생을 보내서 우리 혼인을 훼방 놓으려던 건 아니겠네.
“불안합니까?”
블랙이 고개를 낮춰 귓가에 대고 느리게 물었다.
“아뇨……. 대공녀는 벌써 혼인했다면서요.”
“그런데 팔을 놓아주지 않아서.”
“아……?”
리에네는 블랙의 팔을 쥐고 있는 제 손을 보고는 민망해 볼을 붉혔다.
“이건 그냥…….”
“그냥?”
“확인 같은 거예요.”
그 말이 그 말이었지만 리에네는 꿋꿋이 블랙을 쥐고 있었다. 나는 예전 일을 잘 잊지 못하는 사람인가 봐. 이 남자는 내가 아이를 가졌다고 해도 문제 삼지 않았는데 말이야. 나는 도무지 그게 안 되거든. 이 남자가 다른 여자의 이름만 기억하고 있어도 어떤 사이였냐고 묻고 싶을 것 같아.
“확인은 계속할 겁니까?”
“네.”
리에네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은 소리 없이 웃는 얼굴로 리에네의 정수리에 입술을 비볐다.
“평생 해도 됩니다.”
“말 안 해도 그렇게 할 거예요.”
리에네는 보지 못했던 웃음이 멎었다.
“성에 도착하면 키스부터 하고 싶습니다.”
“……말하지 말고 그냥 하세요.”
그러자 등에 딱 닿아 있던 블랙의 체온이 훌쩍 높아지는 것 같았다. * * *
“미친. 더럽게도 다정하네.”
디에렌이 창밖으로 고개를 한껏 내밀고 있다 못마땅한 소리를 내뱉었다. 원래 매사에 불평이 많은 성격이라 이미 익숙해져 있던 시종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어이, 너는 믿겨지나? 그 전쟁광이 저 짓을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저하.”
“그게 당연하지. 저 꼴을 보면 누이가 아주 발광을 하겠어.”
디에렌이 삐뚤어진 조소를 지었다. 매년 금을 보낼 때마다 아까워서 끙끙 앓는 부친은 이번에는 앓다 못해 이가 빠질 지경이었다. 받은 게 있으니 혼인 선물을 돌려보내야 한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티와칸의 수장이 기어이 다른 왕국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대륙에서 가장 티와칸의 소문에 민감한 곳이 알리토였다. 조만간 대륙 전체에 로드 티와칸의 혼인 사실이 퍼질 것이다.
“누이는 알고 있으려나.”
샤르카 왕국으로 시집간 누이가 지금까지도 집착적으로 블랙의 뒤를 캐고 다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왠지 그러고 있을 것 같았다. 매부가 된 샤르카 왕국의 제1왕자는 병약하고 흐리멍덩한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이 누이의 성에 찰 리 없었다. 사실 누이의 눈높이를 채울 사내가 그리 많진 않을 것이다. 누이는 이미 블랙을 알고 있었으니까.
“아……. 아직은 모르겠군. 알았으면 벌써 한바탕 집안을 뒤덮었을 테니.”
혼인 사실을 알았어도 그가 제 신부에게 저렇게나 넋이 나가 있다는 사실까진 모를 것이다. 디에렌은 깍지 낀 손을 이마 위에 얹고 생각에 잠겼다.
“대체 왜 이 촌구석의 가난한 공주님이었던 걸까…….”
뭐, 보기 드문 미인이긴 했다. 유행이 다 지난 투박한 옷을 입고 있어도 이제껏 스쳐 간 그 어떤 여인들보다 인상적인 외모였다.
“미모에 홀릴 인간은 아닌 줄 알았는데 말이야.”
맞은편에서 시종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디에렌이 힐긋 곁눈으로 시종의 표정을 살폈다.
“그럼 뭔가 다른 게 있다는 소릴까?”
“제 생각으로도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저하.”
“그래, 그렇다고…….”
디에렌이 짓궂게 웃었다. 방탕하게 대륙의 여인들 사이를 떠돌았던 시절의 못된 습성이 스멀스멀 기지개를 켜려고 들었다.
“그게 뭔지 나도 좀 배워 가야겠어.”
“…….”
시종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조금씩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면 대공자 저하의 못된 버릇 때문에 자칫 제 목숨이 위태로워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게 틀림없었다. * * *
“와. 인물이 확 사는데요.”
“사람이 바뀐 것 같지 말입니다. 황송해서 감히 쳐다보질 못하겠습니다, 주군.”
예복을 입어 봐야 한다는 말에 페르모스와 랜달이 시중을 자처했다. 시중은 핑계고 사실은 새 옷을 입은 블랙에게 짓궂은 장난이라도 걸어 볼 참이었는데, 옷이 너무 잘 어울리는 바람에 별 소용이 없게 돼 버렸다.
“그런 말 대신 쓸모 있는 말을 해. 기장은? 짧지 않나?”
그리고 블랙은 칭찬이든 그 반대이든 별로 신경 쓸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요. 적당해 보입니다.”
제 모습에 일절 관심이 없는 사람치고 블랙은 꽤 오래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어깨며 등 선이며 꼼꼼하게 훑는 모습이 새로웠다.
“내일 신을 신발의 굽은? 지금 이것보다 두꺼운가?”
“아니요. 비슷할 겁니다. 늘 같은 제화사가 만들지 않습니까.”
“그럼 됐어.”
블랙은 실수로 옷자락을 밟지 않도록 거울 앞에서도 뒤꿈치를 들고 발을 움직였다. 페르모스가 괜히 외알 안경을 까닥까닥거렸다.
“공주님께서 이런 모습을 보셔야 하는데 말입니다.”
페르모스보다 눈치가 덜한 랜달이 속 편한 소리를 했다.
“무슨 소립니까. 혼례식에서 보면 되지요.”
“쯧쯧……. 둔한 녀석. 그건 당연한 거고.”
“그럼 뭐요?”
“행여나 공주님께서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신 저 귀한 옷을 주군께서 밟기라도 할까 봐 까치발을 드는 광경 말이다.”
“아…… 그런 거였습니까?”
“시끄러워.”
랜달이 새삼스럽다는 듯 눈을 치켜뜨고 제 까치발을 쳐다보자 블랙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실언했습니다, 주군. 얌전히 있겠습니다.”
페르모스는 입을 다물어야 하는 순간도 빠르게 알아차렸다.
“금은 제대로 들어왔나?”
“물론입니다. 금 외에도 욕심쟁이 대공이 혼인 선물을 넉넉히 보내왔습니다. 선물이 아니라 뇌물에 더 가깝겠지만.”
“잘됐군. 대공자는?”
“어떤 의미로 여쭈시는 겁니까?”
“게으른 인간이다. 혼인 선물을 주기 위해서 직접 왔다지만 다 믿을 건 아니지. 다른 의도는 없어 보이나?”
페르모스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다른 의도라면…… 아무래도 미친 대공녀를 말씀하시는 것이겠군요. 물론 주군께서는 대공녀의 이름도 입에 담기 싫어하시지만 말입니다.”
“샤르카 왕국은 알리토보다 가깝다.”
“네, 그래서 엮이면 더 귀찮지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대공자 쪽에서 샤르카 왕국과 주고받는 게 없나 잘 지켜보겠습니다.”
랜달이 끼어들었다.
“그냥 내쫓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기엔 늦었어.”
블랙이 울컥 짜증을 내뱉었다. 혼인 선물을 들고 온 인간이 혼인식에 참석하겠다는데 그걸 내쫓으면 다음에 볼 때는 전쟁을 하자는 얘기였다. 디에렌을 쫓아낼 명분이 없었다. 어쨌거나 제 의형제였고, 공국의 대공자라는 신분이었으며, 손님의 자격으로 성문을 넘었다.
“대공자가 묵는 방에 술과 음식을 보내. 술은 독한 걸로.”
짜증을 내는 와중에도 옷을 벗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랜달이 얼른 달려가 벗은 옷을 받아들며 물었다.
“음식은 왜 보냅니까? 혹시라도 환영하는 줄 알면 어쩝니까.”
“굶기면 그 핑계를 대고 저녁 식사에 낯짝을 들이밀 테니까.”
“아……?”
“누구 하나 보내서 대작이라도 시켜. 가능하면 내일까지 취해 있게.”
랜달이 눈을 번쩍 빛냈다.
“맡겨 주십시오, 주군. 제가 확실하게 보내 놓겠습니다.”
사실 디에렌의 저녁 식사를 말리는 것보다는 공짜 술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겠지만 랜달의 주량을 알고 있는 블랙에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툭. 블랙은 랜달의 어깨를 두들겨 주기까지 했다.
“믿는다.”
평소라면 전혀 하지 않을 법한 말도.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주군.”
랜달이 히죽 웃었다. 블랙과 리에네가 함께 하는 저녁 식사 두 시간 전, 랜달이 술통을 어깨에 짊어지고 디에렌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