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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감히 꽃 따위를 (82/145)

82. 감히 꽃 따위를2022.01.12.

16550957439538.jpg“거짓말처럼 잘 맞아요.”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각자 할 일로 바빴던 두 사람은 식당에서 서로를 마주했다. 리에네는 언젠가의 라일락빛 드레스를 입었다. 부부가 되기 전 갖는 마지막 시간을 기념하라고 두 부인이 예쁘게도 차림새를 챙겨 주었다.

16550957439538.jpg“혼례복을 입어 볼 때 두 사람이 모두 바늘을 챙겨 들고 있었거든요. 잘 맞지 않는 데가 있으면 바로 고쳐야 하니까. 그런데 고칠 데가 없더라고요.”

둘 다 몹시 기뻐하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서운해하는 표정이 보이기도 했다. 그 얘기를 하면서 리에네가 아이처럼 킥킥 웃었다.

16550957439538.jpg“두 사람을 보면 비슷한 점이 참 많아요. 평생 알고 지낸 친구라고 해도 믿을 정도예요. 물론 서로 서먹해하긴 하지만요.”

그래서 더 웃음이 난다고 했다.

16550957439538.jpg“조만간 서로 언제 그랬냐 싶게 잘 지낼 것 같아요.”

16550957439616.jpg“잘됐군요.”

16550957439538.jpg“그리고 혼례복에 할 귀걸이와 목걸이를 고르기로 했는데, 그것도 두 사람이 똑같은 걸 고르지 뭐예요. 그것만 봐도 둘은 사이가 좋아질…… 아, 까먹고 있었다.”

16550957439616.jpg“뭘 말입니까?”

블랙은 이렇게 물으며 계속 조곤조곤 말을 잇는 리에네의 입에 작게 자른 비둘기구이를 넣어 주었다.

16550957439616.jpg“먹으면서 말해요. 공주님이 식사를 제대로 못 하는 건 싫으니까.”

리에네는 엉겁결에 블랙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다 꿀꺽 삼킨 뒤 정색을 했다.

16550957439538.jpg“잠시만요. 할 말이 있었단 말이에요.”

16550957439616.jpg“말해요.”

16550957439538.jpg“보석실의 보석들요. 너무 과해요.”

16550957439616.jpg“과하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16550957439538.jpg“돈을 너무 많이 쓰셨잖아요. 그게 다 얼만지 감도 안 와요. 그건 너무…….”

16550957439616.jpg“별일 아닙니다.”

블랙이 중간에 말을 잘랐다. 그는 리에네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늘 같은 표정을 지었다. 리에네는 그게 언짢은 표현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그 보석들을 팔아야 했던 순간을 리에네가 혼자 견뎠을 것을 생각하면 심장이 꿈틀거렸다.

16550957439538.jpg“왜 별일이 아니에요. 너무 큰 돈인데요.”

16550957439616.jpg“돈 걱정은 이제 안 하기로 했잖습니까.”

16550957439538.jpg“이건 걱정이 아니라, 음…….”

16550957439616.jpg“걱정 맞습니다. 내 주머니가 빌까 봐 그러는 거니까.”

아니라고는 할 수가 없었다.

16550957439616.jpg“티와칸의 재산을 관리하는 건 페르모스인데, 사실 페르모스는 허튼 돈을 쓰는 걸 가장 싫어합니다.”

16550957439538.jpg“그럼 보석을 사는 것도 반대했겠네요.”

16550957439616.jpg“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왕실 재산이니 회수하는 게 당연하고, 그 외에도 사둘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16550957439538.jpg“어째서요?”

16550957439616.jpg“대륙의 일반적인 시세보다 저렴한 편이라 했으니 값이 오를 모양입니다. 게다가 한꺼번에 사는 바람에 가격이 더 괜찮았습니다.”

사실 그런 이유는 다 사소했다. 몇 배나 더 비싸다고 해도, 페르모스가 펄쩍 뛰었어도 블랙은 그 보석들을 제자리로 돌려놨을 것이다.

16550957439616.jpg“그리고 이런 얘기는 좀 부끄럽습니다.”

16550957439538.jpg“어째서요.”

16550957439616.jpg“기뻐하는 모습을 보려고 한 일인데, 다른 이유들을 늘어놓고 있으려니 내가 못난 사내로 보일까 싶어서.”

16550957439538.jpg“무슨 그런 말을 하세요. 그럴 리 없잖아요.”

16550957439616.jpg“그럼 그냥 기뻐해 줘요. 그러려고 쓴 돈이니까.”

어떤 얼굴을 할지 한참 난감해하던 리에네는 그냥 한숨과 함께 블랙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16550957439538.jpg“미안해요. 그러려던 건 아닌데…… 요 몇 년간 내가 한 일은 돈 걱정이 전부여서 그새 나쁜 버릇으로 남았나 봐요.”

블랙이 리에네의 등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16550957439616.jpg“그런 버릇은 금방 사라질 겁니다.”

16550957439538.jpg“약속은 못 하겠어요. 쉽지 않아서.”

16550957439616.jpg“필요가 없는 버릇이 오래 붙어 있는 게 더 어렵습니다. 돈 걱정은 이제 공주님한테 필요 없는 일입니다.”

……정말 그럴까. 여전히 믿기는 어려웠지만 리에네는 사실 블랙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간 제 돈을 빨아먹는 가장 큰 거머리였던 빚은 모두 사라졌고, 클라인펠터 가의 재산은 왕실에 귀속되었다. 그것만 해도 넉넉할 텐데 이제 다섯 가문에서 세금을 내기로 했다. 갑자기 돌림병이 돌거나 하지 않는 이상 돈이 부족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게 전부 블랙이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16550957439616.jpg“그럼 이제 한 입 더 들어요. 아까부터 너무 안 먹는 것 같은데.”

블랙이 다시 음식을 입가로 가져왔다.

16550957439538.jpg“……같이 먹어요.”

고깃조각을 삼킨 리에네가 똑같은 요리를 블랙에게 내밀었다.

16550957439538.jpg“안 먹고 있는 건 로드 티와칸이 더 하신 것 같은데요.”

16550957439616.jpg“나는 지금 좀 바쁩니다.”

16550957439538.jpg“네? 식탁 앞에서 음식을 먹는 것 말고 더 바쁜 일이 있나요?”

16550957439616.jpg“공주님을 쳐다봐야 해서.”

16550957439538.jpg“……그건 왜죠.”

16550957439616.jpg“놓치기 싫으니까.”

블랙은 리에네의 손을 끌어와 손목에 입술을 묻었다. ……큰일이야. 이러다 또 먹는 둥 마는 둥 하겠어. 게다가 곤란하게도 블랙은 입술을 붙인 채 눈을 감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눈매가 미치도록 야했다.

16550957439538.jpg“식사는…… 해야죠.”

16550957439616.jpg“큰일입니다.”

당신은 뭐가 큰일인데요.

16550957439616.jpg“요새 공주님을 보면 한 가지 생각만 들어서.”

별말이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목덜미가 후끈해졌다.

16550957439538.jpg“어떤 생각인데요?”

16550957439616.jpg“식탁 앞에서 할 얘기는 아닙니다.”

16550957439538.jpg“그럼 어디에서요?”

16550957439616.jpg“침대 위에서.”

16550957439538.jpg“…….”

야한 게 맞았네.

16550957439538.jpg“밥은 먹어야 해요.”

난처하게 눈을 흔들던 리에네가 작게 말하자 블랙이 고개를 낮추고 속삭였다.

16550957439616.jpg“그럴 겁니다.”

16550957439538.jpg“그런데 왜 속삭이세요?”

16550957439616.jpg“공주님이 먼저 속삭여서요.”

내가 그랬나. 그런데 고개를 낮추니 새삼 거리가 참 가까웠다. 옆에 나란히 앉아 밥을 먹는 것도 또 다른 습관이 됐다.

16550957439538.jpg“너무 가까워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럼 왠지 작게 말하게 되잖아요.”

16550957439616.jpg“그러게 말입니다.”

조금만 거리를 벌리면 될 것 같은데,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다는 듯 계속 속삭이는 남자 때문에 웃음이 나왔다.

16550957439538.jpg“그러면요…….”

16550957439616.jpg“네.”

16550957439538.jpg“두 번째 요리가 나오기 전에 잠깐…….”

16550957439616.jpg“잠깐?”

16550957439538.jpg“키스를 할까요?”

16550957439616.jpg“…….”

우습게도 그 순간 거리가 벌어졌다. 블랙이 몸을 뒤로 젖힌 탓이었다. 그는 고개를 젖히고, 어이가 없을 정도로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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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를 보는 리에네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왜 웃는 거야……. 내 딴에는 용기를 내서 한 말인데.

16550957439538.jpg“그만 웃으세요. 별로 웃긴 말도 아니었는데. 그리고 그런 말은 평소에 로드 티와칸께서 더…….”

16550957439616.jpg“동의합니다.”

잠깐 멀어졌던 거리가 순식간에 다시 좁혀졌다.

16550957439616.jpg“눈 감아요.”

그리고 가늘게 접혀 웃던 눈도 거짓말처럼 진지해졌다.

16550957439538.jpg“아니, 잠깐…… 저는 그럴 마음이 사라졌어요. 웃으셨잖아요.”

리에네는 다가오는 블랙의 입술을 손으로 가렸다. 키스를 할 마음이 사라졌다기보다는 그 반대였다. 갑자기 체온이 훅 오르는 기분에 숨 쉴 여유가 필요했다.

16550957439616.jpg“그럼 다시 만들어요.”

입을 가린 손바닥 안쪽에 부드러운 키스가 시작되었다. 리에네가 찡그리듯 눈을 감고 한숨을 흘렸다. 구두 속에서 발가락이 굽어드는 느낌이었다.

16550957439538.jpg“그러게 왜…… 웃고 그래요.”

16550957439616.jpg“지금 생각해 봤는데.”

손바닥을 한참 간질여 놓은 그가 리에네의 손목을 쥐어 손을 떼어냈다.

16550957439616.jpg“내가 웃는 이유는 전부 공주님입니다.”

선뜻 다가온 입술이 가볍게 제 입술에 맞물렸다. 입술을 마주 댄 채 블랙이 속삭였다.

16550957439616.jpg“나도 내가 언제 이렇게 웃었는지 기억이 안 나니까.”

아랫입술이 부드럽게 벌어졌다. 어느샌가 제 팔이 블랙의 목을 감고 있었다. 손가락에 닿는 짧은 머리칼은 매끄러웠고, 그 감촉조차 달콤하게 몸을 달구었다. 두 번째 요리가 오든 말든 키스는 아주 길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방해꾼이 있었다. * * *

16550957549772.jpg“늦어서 결례를……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일찍 와서 죄송하다고 해야겠군요.”

리에네는 식탁 맞은편에 서서 무릎을 굽히다 만 디에렌 대공자를 바라보며 애써 표정을 다독였다. 달갑지도 않은 손님이 정말로 달갑지 않게 구네. 갑자기 왜 나타나고 그런담. 식사에 초대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16550957439616.jpg“식사는 방으로 보냈을 텐데.”

이렇게 말하는 블랙의 목소리가 어찌나 차가운지 괜히 저도 팔뚝에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식당까지 디에렌을 안내한 용병이 최선을 다해 블랙에게 눈짓으로 변명을 했다. 랜달이 술을 먹이긴 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신분 차이가 있지 않느냐. 대공자 저놈이 어떻게 낌새를 차렸는지 술을 안 먹겠다고 요리조리 빠져나가더라. 랜달이 애는 써 봤지만 지금 그 술 혼자 다 먹고 뻗어 있다. 죄송하다. 한 번만 용서하시라. 그런 변명이었다.

16550957549772.jpg“식사가 아니라 간식이라 해야 할 시간이 아니었나. 손님 된 입장에서 왕실의 식사 시간을 어기는 무례를 저지를 수야 없지.”

식당에 들어섰을 때는 잠깐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던 디에렌은 그새 정신을 차렸는지 안색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16550957549772.jpg“늦어서 죄송합니다, 공주님. 이 자리에 동석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아니, 싫어. 영광은 무슨. 방해라니까.

16550957439538.jpg“연인과 함께하는 소박한 식사라 타국의 대공자에게 실망스러운 자리가 될지 염려스럽군요.”

16550957549772.jpg“괜한 걱정입니다. 공주님의 얼굴을 마주하는 자리를 어찌 소박하다 이르겠습니까.”

또 저 소리네. 저게 좋은 말인 줄 아는가 봐. 듣기 싫다고 했는데도.

16550957439538.jpg“저를 식탁 위의 꽃처럼 여기신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16550957549772.jpg“감히 꽃 따위를 공주님께 비교하겠습니까. 제 자리는 어디가 좋겠습니까?”

도무지 얌전히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리에네는 식탁 밑으로 블랙의 손을 살짝 쥐며 내키지 않는 답을 했다.

16550957439538.jpg“이미 식어 가는 식탁이라 손님께 보이고 싶진 않습니다만, 대공자께서 원하신다면 함께 하도록 하세요.”

16550957549772.jpg“허락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그럼 이 자리에 앉겠습니다.”

디에렌이 리에네의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문 앞에 서 있던 대공가의 시종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의자를 뽑아 주었다. 블랙은 그걸 못마땅한 얼굴로 보고 있다가 용병을 향해 손짓을 했다.

16550957549772.jpg“네, 주군.”

16550957439616.jpg“음식을 더 가져오라고 해. 대접을 소홀히 할 수는 없으니. 식탁을 가득 채우도록.”

16550957549772.jpg“알겠습니다.”

16550957439616.jpg“그리고 술도 가져와. 랜달이 마신 것으로.”

16550957549772.jpg“네.”

자리에 앉은 디에렌이 능글맞게 웃었다.

16550957549772.jpg“꼭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손님이라기보다는 형제라 불러 주게.”

블랙은 별말 없이 제 잔을 집어 들었다. 술을 가지러 간 용병이 헐레벌떡 돌아오자 잔을 가득 채워 디에렌에게 건넸다.

16550957549772.jpg“……고맙군.”

디에렌이 잔을 받았다.

16550957439616.jpg“마셔.”

손님에게도 예의가 필요했다. 손으로 건네는 잔을 받았으니 입도 대지 않고 내려놓는 건 실례였다. 디에렌이 열심히 잔을 비웠다. 그사이 블랙이 리에네의 손을 쥐고 다정하게 물었다.

16550957439616.jpg“우리는 이만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16550957439538.jpg“네?”

16550957439616.jpg“식사는 다 마쳤으니.”

16550957439538.jpg“언…….”

언제 그랬는데요? 디에렌이 술을 마시다 말고 잔에서 입을 뗐다.

16550957549772.jpg“뭐라고? 이제 막 시작한 게 아니었어?”

그러자 리에네가 가볍게 웃는 얼굴로 일어섰다.

16550957439538.jpg“그게 좋겠군요. 우리가 있어 봤자 대공자를 쳐다보는 것밖에 할 일이 없으니까요. 대공자께서는 부디 편히 식사를 마치시기 바랍니다. 늦은 것은 개의치 않아도 좋습니다.”

막 두 번째 요리가 식당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접시에 담겨 김을 모락모락 풍기는 맛있는 요리들이 여덟 개나 됐다.

16550957439616.jpg“다 먹도록. 내 성의니까.”

16550957549772.jpg“뭐라는 거야……. 푸대접이 너무 노골적이지 않나.”

16550957439616.jpg“어딜 봐서 푸대접이라는 건데. 극진한 대우라고 해야지.”

블랙이 리에네의 손을 쥐고 식당을 나섰다. 막 요리를 가져오던 용병에게 그가 말을 남겼다.

16550957439616.jpg“손님이 제대로 식사를 하는지 접시를 확인해. 음식을 남기면 성의를 무시당한 내가 많이 언짢아하리라는 말도 전하고.”

16550957549772.jpg“알겠습니다, 주군.”

쿵! 식당 문이 닫혔다. 디에렌과 그의 시종만을 남겨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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