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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샤르카의 왕자비 (83/145)

83. 샤르카의 왕자비2022.01.16.

16550957675815.jpg“망할 인간 같으니.”

퍽! 디에렌이 술잔을 콱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시종이 화들짝 놀라 이리저리 눈치를 살폈다.

16550957675815.jpg“저하……. 누가 들을지도 모릅니다.”

16550957675815.jpg“들으라지. 설마 이런 짓을 해놓고도 내 입에서 욕 한마디 안 나갈 거라고 생각할 리가. 다 알고도 그랬을 인간이야.”

16550957675815.jpg“그런……. 대공 전하께 말씀이라도 올릴까요?”

디에렌이 내내 씨근덕대자 시종은 고자질이라도 하자는 말을 꺼냈다.

16550957675815.jpg“그래서, 어쩌자고?”

16550957675815.jpg“아무리 대공가의 의제가 되었다고는 하나 명백히 신분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대공 전하께서 이 일을 그냥 넘기시지 않을 겁니다.”

16550957675815.jpg“아버지가 잘도 그러시겠군. 오히려 당신 아들을 못난 놈이라 하시겠지.”

16550957675815.jpg“…….”

시종은 그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사실 못난 짓이긴 했다. 미리 음식을 보내 놓고 초대도 없다는 건 같이 식사할 마음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 걸 기어코 끼어들더니 한방 얻어맞았다. 가끔 시종은 디에렌이 신기했다. 어떻게 티와칸의 수장 앞에서 저렇게 겁이 없을 수 있을까 싶었다. 아무래도 의형제라는 허울 좋은 거짓을 너무 믿는 것 같았다. 정작 티와칸의 수장은 귀찮아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도.

16550957675815.jpg“젠장. 머리 손질에 그렇게나 공을 들였는데.”

16550957675815.jpg“…….”

아, 이제 봤더니 못난 짓을 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밥 한 끼 대접받겠다고 한 게 아니라 리에네 공주가 목적이었다. 시종은 속으로 혀를 찼다. 어떻게 그는 티와칸의 수장을 놔두고 제 얼굴을 돌아볼 여인이 있다고 믿는 걸까. 아무래도 대공가의 하나뿐인 아들로 태어나 너무 오냐오냐 자라 그런 모양이었다.

16550957675815.jpg“저하. 내일이 혼인식입니다.”

시종은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 디에렌의 여자 편력이 말도 못 할 만큼 더럽다는 건 익히 아는 사실이지만, 상대가 티와칸의 수장과 혼인할 여자라면 당연히 생각을 해 봐야 했다.

16550957675815.jpg“그게 무슨 상관인데. 아니, 어쩌면 기회라고 봐야지.”

16550957675815.jpg“…….”

신분이 죄라고, 시종은 볼 안쪽 살을 씹어 가며 표정을 감추었다.

16550957675815.jpg“억지 혼인이잖아. 안 그래? 청혼을 할 때 피를 꽤 흘렸다면서. 그런 난폭한 구애를 제정신으로 받아들일 여인이란 없지. 대안이 나타나면 마음이 바뀌는 게 당연해.”

16550957675815.jpg“하지만 저하께서도 보셨다시피, 티와칸의 수장과 나우크의 공주는 사이가 아주 좋아 보였습니다.”

16550957675815.jpg“그런 척하는 거겠지.”

제정신이 아닌 건 대공자 저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16550957675815.jpg“너도 봤잖아. 식당에 들어설 때. 그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너무 잘 봐서 탈이었다. 방문을 고하겠다는 용병을 뒤로 물리고 디에렌이 벌컥 문을 열었다. 식당 안에는 내일 혼인을 앞둔 연인밖에 없었고, 그들은 나란히 앉은 채 상대를 향해 의자를 틀고 있었다. 기름기가 묻어 똑같이 반들대는 입술을 보건대 문이 열리기 직전까지 입을 맞추고 있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16550957675815.jpg“어떤 미친 왕족이 밥 먹다 말고 그런 짓에 응하겠나. 내 형제가 몸에 밴 야만적인 습성을 못 버렸겠지. 공주에게는 거절할 힘이 없었고.”

16550957675815.jpg“…….”

16550957675815.jpg“대안이 생긴 줄 알면 마음을 달리 먹을 수도.”

아무래도 디에렌은 그렇게 믿기로 마음을 먹은 듯했다.

16550957675815.jpg“내가 그 대안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어떻게 알려줄까.”

디에렌이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반짝였다. 시종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제 목숨 하나는 무사하길 신께 기도했다. * * *

16550957733053.jpg“그때는 괜찮았는데 지금은 왠지 좀 미안하네요.”

중간에 끊어진 식사는 침실에서 다시 이어졌다. 명목상 블랙이 쓰던 배우자의 방이었는데, 혼인을 맞아 새로 단장을 하며 침대를 치웠기에 침실이라 부르기도 애매했다. 두 사람은 이 방을 둘만의 사실로 쓰기로 합의를 보았다.

16550957733059.jpg“그럴 필요 없습니다.”

블랙이 딱 잘라 말했다. 물론 디에렌 대공자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리에네는 그가 내민 포도알을 아삭 깨물며 멋쩍게 웃었다. 이 남자는 대공자가 정말로 싫은가 보네. 평소에는 엄청 다정한 사람인데 이러는 걸 보면. 사실 그게 아니라 블랙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가운 성격이고, 다정함은 전부 리에네의 몫이었는데 그 사실을 리에네만 아직 모르고 있었다.

16550957733053.jpg“그 많은 음식을 먹는 척하느라 고생하고 있을 거예요.”

16550957733059.jpg“그 김에 돌아간다고 하면 좋은 일입니다.”

16550957733053.jpg“저런. 혼인식에 참석하기로 했는데요.”

16550957733059.jpg“그 인간의 축하는 딱히 쓸데가 없을 겁니다. 어차피 진심이 아닐 테니.”

리에네는 상식선에서 디에렌의 편을 드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57733053.jpg“맞아요. 진심이 아닐 테죠.”

자기 누이를 생각하면 진심으로 축하는 못 해 주겠지. 그 누이가 먼저 혼인을 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16550957733053.jpg“샤르카 왕국과 평소에 친분이 없었던 게 다행이에요. 만약 혼인식에 초대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난처하네요.”

블랙이 미묘한 쓴웃음을 지었다.

16550957733059.jpg“공주님은 다른 일에 신경을 너무 많이 쓰는 편입니다.”

16550957733053.jpg“성격이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건 마찬가지 아닐까요? 책임질 일이 많잖아요.”

16550957733059.jpg“아닐 겁니다.”

16550957733053.jpg“아닌데. 남쪽 요새만 해도요. 저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16550957733059.jpg“방금 전부터 내가 신경 쓰는 일은 한 가지였습니다.”

블랙이 리에네의 말을 가로챘다. 리에네는 당황하면 말이 길어지는 편이라는 걸 알기에 나온 행동이었다.

16550957733053.jpg“뭔데요?”

16550957733059.jpg“공주님 입술 아래 포도즙이 묻었다는 것.”

16550957733053.jpg“아…… 그랬어요?”

리에네가 손등으로 입술 아래를 가리려고 하자 블랙이 재빨리 그 손을 잡았다.

16550957733059.jpg“맛이 어떨지 내내 궁금했습니다.”

16550957733053.jpg“그게…….”

16550957733059.jpg“먹게 해 줘요.”

16550957733053.jpg“…….”

이 남자는 방심을 못 하겠어. 리에네가 눈을 살짝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 아래 우묵한 곳에 블랙의 입술이 닿았다. 살갗을 초옥 빨아들이는 소리가 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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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57733053.jpg“있잖아요.”

16550957733059.jpg“네.”

의자에 앉은 저를 향해 몸을 굽힌 블랙의 뒷머리를 만지작대며 리에네가 한숨처럼 속삭였다.

16550957733053.jpg“부부가 되면 어떤 게 가장 많이 달라질까요?”

16550957733059.jpg“글쎄…… 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16550957733053.jpg“하긴. 그렇겠네요.”

포도즙을 다 핥아먹은 블랙이 입술로 입술을 옮겨 오며 느리게 말했다.

16550957733059.jpg“내일이면 하나씩 알게 될 겁니다.”

16550957733053.jpg“그렇겠죠?”

갑자기 내일이 몹시 기다려졌다. 내일이면, 이 남자가 내 게 되는 거야. 전부 다.

16550957733053.jpg“잠을 못 잘 것 같아요.”

16550957733059.jpg“나도 그렇습니다.”

16550957733053.jpg“이대로 안 자고 내일 아침을 기다릴까요?”

16550957733059.jpg“좋은 생각입니다.”

블랙이 막 맞닿은 채 있는 입술을 삼키려던 그때였다. 탕탕.

16550957675815.jpg“공주님. 안에 계신 줄 압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플램바드 부인의 목소리가 키스를 방해했다. * * * 이유는 명확했다. 혼인식 전날 새신부와 신랑이 한 방을 쓰는 관례는 없었다. 잠을 푹 잘 리 없다는 이유에서였는데, 민망하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16550957675815.jpg“그런 이유에서 공주님은 제 방에서 주무셔야겠습니다. 아침에 있을 혼인식을 위해 새벽부터 준비하셔야 할 것도 많고요.”

16550957675815.jpg“그렇습니다.”

플램바드 부인은 헨튼 부인의 동의에 어깨를 더 반듯하게 폈다. 의견이 딱 맞는 친구가 생겨 몹시 든든한 모양이었다.

16550957675815.jpg“들으셨지요? 식사를…… 아니지, 참. 늦은 간식을 다 드셨으면 이제 그만 가십시다.”

어쩐지 야단을 맞는 기분이 든 리에네가 블랙을 민망한 얼굴로 힐긋 돌아보았다.

16550957733053.jpg“아직 일곱 시도 안 됐는데요. 잘 시간에 가도 되지 않을까요?”

16550957675815.jpg“아이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늘 저녁부터 준비할 일이 따로 있지요.”

16550957675815.jpg“그렇지요. 혼인 전날 새신부는 당연히 얼굴 비칠 시간도 없이 바쁜 게 맞지요.”

원래도 플램바드 부인의 잔소리에는 약한 리에네는 그게 두 배가 되자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57733053.jpg“그런가요……?”

16550957675815.jpg“물론입니다.”

16550957675815.jpg“그렇고말고요.”

그래서 함께 아침을 기다리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16550957733053.jpg“오늘은 혼자 주무셔야겠네요.”

16550957733059.jpg“…….”

블랙의 무표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16550957733053.jpg“잘 자고 내일 봐요.”

16550957733059.jpg“……네.”

대답이 느리다 싶었는데, 그가 어느 순간 피식 웃었다.

16550957733053.jpg“왜 그러세요?”

16550957733059.jpg“좀, 웃겨서요.”

16550957733053.jpg“뭐가요?”

16550957733059.jpg“내내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고작 하루를 못 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블랙이 고개를 기울여 리에네의 뺨에 다정한 키스를 남겼다.

16550957733059.jpg“내일 뵙겠습니다. 잘 자요.”

16550957733053.jpg“잘, 자요.”

왜 갑자기 숨이 막히는지 리에네는 몰랐다. 더는 기다리기 싫다는 말이 쿵쿵 가슴을 울렸다. 비로소 그들 앞에 남은 시간이 단 하루라는 게 실감이 났다. 내일이 혼인이었다. * * * 달이 떴다. 그건 내일이 그만큼 더 다가왔다는 뜻이었다.

16550957818859.jpg“빌어먹을…….”

술은 독했고, 술잔은 거칠었다. 술잔을 쥔 손은 채 아물지 않은 생채기가 가득했다.

16550957818859.jpg“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퍽! 라피트는 만듦새가 형편없는 주석 잔을 벽으로 던졌다. 안에 든 싸구려 술이 벽에 얼룩을 만들었다. 낡은 저택의 낡은 침실 문이 끼익 열렸다.

16550957675815.jpg“쯧쯧……. 여전히 이 모양이네.”

익숙한 인기척에 라피트는 새삼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낡은 소파에 앉아 인상을 구기고 있을 뿐이었다. 제 인생은 이대로 이렇게 싸구려가 되어 버린 듯했다. 다리가 부러진 숙부를 어깨에 짊어지고 국경을 넘어올 때는 너무 괴로운 나머지 버려 버리고 싶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치미는 충동을 간신히 참고 샤르카 왕국에 도착한 보람도 없이, 숙부는 몸져누웠다. 그 역시 마음속의 무언가가 무너져 내린 듯했다. 밥도 약도 거부하더니 이제는 죽을 날만 남겨두고 있었다.

16550957675815.jpg“어이, 조카님. 이제 그만 정신 차릴 때도 되지 않았어? 이러다 술독이 오른다고. 젊어도 죽는 건 순간이야.”

짤막하고 포동포동한 흰 손이 어깨를 토닥였다. 이곳에 온 뒤로 먹을 것과 술을 살 돈을 준 유일한 손이었다. 라피트는 외당숙의 손을 사정없이 붙잡아 꺾었다. 외당숙이긴 하지만 비슷한 또래였다. 어릴 때부터 종종 왕래가 있었다. 왕족으로 태어난 것 외에는 딱히 눈여겨볼 게 없는 인간이었다. 라피트는 한 번도 그를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라고 여겨 본 적이 없었다.

16550957675815.jpg“악! 뭐 하는 짓이야!”

16550957818859.jpg“건드리지 마세요.”

라피트가 당숙을 팽개치듯 놓아주었다. 그보다 훨씬 작고 땅딸막한 당숙이 힘에 떠밀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왕실에서 서열이 가장 낮긴 해도 왕족이 어디서 이런 수모를 겪었을 리 없었다. 당숙이 잔뜩 감정을 실어 라피트를 노려보았다.

16550957675815.jpg“네 무례를 봐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부터는 조카라고 불러 주지도 않겠어.”

16550957818859.jpg“그만 가세요. 귀찮게 굴지 말고.”

라피트는 여전히 그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한참 씨근덕대던 당숙이 결국 제 손으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16550957675815.jpg“그냥은 못 가. 명을 받았어.”

16550957818859.jpg“……?”

혼자 지옥에 갇힌 사람처럼 벽만 쳐다보고 있던 라피트가 이제야 고개를 돌렸다.

16550957818859.jpg“명이라고?”

16550957675815.jpg“들었잖아.”

16550957818859.jpg“누구한테? 무슨 명을?”

당숙은 제5왕제의 아들이었다. 당숙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샤르카 왕국의 직계 왕손이나 왕제 정도일 것이다.

16550957675815.jpg“왕자비께서 널 보자시더라.”

16550957818859.jpg“왕자비라면…….”

왕자비라면 그 여자였다. 한 달 전 지원군을 요청하러 왔을 때, 제1왕자의 옆자리에서 싸늘히 웃고 있던 이상한 여자. 알리토 공국 출신이라고 했다. 어쩐지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던 웃음이라 쉽게 잊을 수가 없었다. 끝내 지원군을 거절하는 샤르카의 왕자에게 내키지 않는 절을 하고 물러나는 그를 따로 부른 것도 왕자비였다. 왕자비가 그에게 티와칸의 청혼을 방해할 만한 것을 하나 알려주었다. 복수. 티와칸이 하려는 게 청혼을 가장한 복수라는 말을 해 준 게 샤르카의 왕자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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