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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첫날밤 (1) (84/145)

84. 첫날밤 (1)2022.01.19.

다른 건 몰랐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샤르카의 왕자비는 티와칸의 수장이 혼인하는 꼴을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라피트가 벌떡 일어섰다.

16550957907549.jpg“언제? 지금?”

그를 보며 당숙이 기가 막히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16550957907554.jpg“워워, 진정해. 그야 빠를수록 좋다고 하셨지만 그 꼴로 왕자비 전하를 뵐 수는 없잖아. 안 그래?”

16550957907549.jpg“……젠장.”

표정을 구긴 라피트가 당숙에게 다가가 팔을 움켜쥐었다.

16550957907549.jpg“가요.”

16550957907554.jpg“그 꼴로?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16550957907549.jpg“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숙부님 집으로 먼저 가요.”

16550957907554.jpg“왜?”

16550957907549.jpg“내가 입을 옷 하나 정도는 있을 거 아냐.”

16550957907554.jpg“뭐? 아니, 잠깐. 내가 그간 준 돈이 있는데 옷도 내놓으라니 무슨…….”

16550957907549.jpg“잔말 말고 걸어.”

퍽! 라피트가 동갑내기 당숙의 등짝을 떠밀었다. * * * 촛불이 일렁였다.

16550957927861.png“좋은 시간에 왔네.”

라피트가 왕자비의 침실에 발을 들인 것은 자정이 넘어선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신분도 없는 외지인이 왕자궁에 출입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것이 왕자비의 침실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 왕자비에게도 그만큼 라피트를 만나야 할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16550957907549.jpg“무슨 일로 보자 하셨습니까.”

라피트는 당숙 덕에 그럭저럭 원래의 준수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길게 자란 머리가 그늘을 만들어 상한 얼굴을 감춰 주었다. 샤르카의 왕자비가 맹수처럼 가르릉 웃었다.

16550957927861.png“위로가 필요할 것 같아서.”

16550957907549.jpg“그래서 위로를 해 주실 참입니까?”

16550957927861.png“아니.”

16550957907549.jpg“……?”

블리니 바셰드 왕자비가 라피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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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57927861.png“그대가 나를 위로해야지.”

16550957907549.jpg“…….”

라피트는 입술을 꾹 깨물고 잠자코 블리니 왕자비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그러나 무얼 해야 할지 헷갈렸다. 왕자비가 자신에게 정확히 무얼 요구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16550957907549.jpg“왜 위로가 필요한지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가 머뭇대며 묻자 블리니 왕자비가 손톱을 세웠다. 손등에 손톱이 꾹 박혀 들었다. 날카로운 통증에 인상을 쓰는 라피트를 바라보며 블리니가 말했다.

16550957927861.png“아둔하긴. 하긴, 그러니 내가 말해 준 정보를 쥐고도 기어코 그 혼인을 말리지 못했겠지.”

라피트의 눈매가 홱 돌변했다.

16550957907549.jpg“애초에 그 정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짓이 아니었습니까?”

16550957927861.png“뭐라고?”

16550957907549.jpg“말씀하신 대로 그 정보는 혼인을 뒤엎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복수를 하러 온 게 사실이라면 그렇게 미친 사랑꾼처럼 굴 리 없지 않습니까!”

16550957927861.png“……미친 사랑꾼?”

블리니 왕자비의 눈이 가늘어졌다.

16550957927861.png“그가?”

16550957907549.jpg“그렇습니다.”

라피트는 참다못해 블리니 왕자비의 손을 뿌리쳤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선명히 손톱자국이 생겨났다.

16550957907549.jpg“정보 말고 군대를 주셨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16550957927861.png“그랬다면 그대가 여기 서서 내게 그런 말을 지껄일 수도 없었겠지. 진작 목이 잘렸을 테니.”

16550957907549.jpg“샤르카 왕국의 군대가 일개 용병단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겁니까?”

16550957927861.png“물론. 샤르카가 아니라 그 어떤 왕국이라도 혼자서는 그를 감당하지 못해.”

블리니 왕자비는 단호했다.

16550957927861.png“그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도련님이네. 그 작은 시골집에서 그저 안락하게 살았겠지.”

라피트는 상대가 왕자비라는 것도 잊고 이를 갈았다.

16550957907549.jpg“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나는…….”

16550957927861.png“뭐, 좋아. 그러니 멋모르고 덤벼들 수도 있는 것이지. 내가 아는 사내들은 전부 약게만 굴었거든. 그대처럼 무모하게 그와 맞서겠다는 인간은 하나도 없었어.”

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렸다.

16550957907549.jpg“어쩌라는 겁니까?”

16550957927861.png“내게 배짱이 있음을 보여 봐. 그대는 상대가 전쟁의 신이라 해도 그의 품에서 여자를 훔쳐 올 용기가 있나?”

라피트가 눈을 부릅떴다.

16550957907549.jpg“그건…… 나를 돕겠다는 뜻입니까?”

16550957927861.png“서로를 돕는 거야. 그대는 그의 여자를 갖고, 나는 그를 망치고.”

16550957907549.jpg“좋습니다.”

라피트는 두 번 생각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게 여전히 리에네를 사랑하고 욕망해서는 아니었다. 이대로 샤르카 왕국의 빈털터리 이방인이 되어 비참하게 살기는 싫었다. 티와칸이 빼앗아 간 것을 돌려받아야 했다. 가문, 명예, 부. 그리고 사정없이 짓뭉개진 자존심까지.

16550957907549.jpg“무얼 하면 됩니까?”

블리니 왕자비가 기다렸다는 듯 침대 옆의 문을 가리켰다.

16550957927861.png“저 문을 열면 내 남편의 침실이 나와.”

그 정도는 라피트도 알고 있었다.

16550957927861.png“남편은 죽은 듯이 잠이 들어 있을 거야. 오늘은 매춘부를 셋이나 부른 날이니까.”

16550957907549.jpg“…….”

라피트의 얼굴이 굳었다. 샤르카 왕실이 문란하고 향락적이라는 건 알았다. 그러나 혼인한 지 일 년밖에 안 된 왕자가 제 침실로 태연히 매춘부를 불러들일 정도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미 샤르카의 왕자에게는 공인된 정부가 둘이나 있었다. 왕자비에게는 그것도 충분한 모욕이었을 텐데 매춘부까지 있었다.

16550957927861.png“칼은 쓰지 마. 흔적이 남으면 안 되니까. 베개가 좋을 거야.”

그러면 상처 없이 질식시킬 수 있었다. 누가 죽였다는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시체의 코를 쑤셔 깃털이 강제로 들어갔는지 확인해 보려는 의사는 없을 테니까.

16550957907549.jpg“그럼…… 그러고 난 뒤에는?”

16550957927861.png“당분간 계승권을 가진 것들끼리 싸움을 벌이겠지. 나는 조용히 그것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짓을 다 했을 무렵 아이를 낳게 될 테고. 아이가 태어나면 나는 섭정이 될 거야. 그럼 이 왕국은 내 것이 되지. 전쟁이든 뭐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16550957907549.jpg“아이를 가진 건 확실합니까?”

16550957927861.png“아니.”

블리니 왕자비가 입술 새로 소리 없는 웃음을 흘렸다.

16550957927861.png“하지만 마침 오늘 내가 아이를 가지기에 좋은 날이야.”

희고 긴 손가락이 라피트의 심장께를 쿡 눌렀다.

16550957927861.png“그대가 무사히 저 방에서 돌아오면 내 아이의 씨가 될 영광을 선사하지.”

16550957907549.jpg“…….”

라피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빼앗긴 것을 돌려받으려면 샤르카 왕국의 왕자를 죽여야 했다. 만일 실패하면 타국의 암살자가 되어 사지가 찢겨 죽을 것이다.

16550957907549.jpg“하나 묻겠습니다.”

대가가 큰 선택인 만큼 확인할 게 있었다. 블리니 왕자비가 자신만큼 진심인지 알아야 했다.

16550957907549.jpg“그자를 왜 망치고 싶은 겁니까?”

16550957927861.png“가지려고.”

16550957907549.jpg“…….”

16550957927861.png“너무 팔팔할 땐 통 가질 수가 없었으니까. 아까워도 망가트려야 되겠더라고.”

가늘게 접혀 속을 통 모를 것 같던 눈이 지금은 검은 오팔처럼 반짝 빛났다. 거짓이 아니었다. 하는 짓은 미쳤지만, 저 욕망은 순수했다. 라피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다음 순간 그가 블리니 왕자비의 턱을 끌어당겨 혀를 씹어 먹을 것처럼 키스했다.

16550957907549.jpg“몸을 데우고 기다리십시오. 다녀오겠습니다.”

블리니 왕자비가 잇자국이 찍힌 혀를 내보이며 가르릉 웃었다. 끼이익. 라피트는 지옥의 경계처럼 검은색 테두리로 장식된 문을 열고 그 너머로 걸어 들어갔다. * * * 천 명도 넘는 사람이 너도나도 크게 질러대는 노래는 조금도 화음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한 소절도 놓칠 수가 없었다. 침실 테라스 아래 몰려와 불러 주는 나우크 국민의 노래는 리에네에게 보내는 혼인 선물이었다.

16550958021896.jpg“아…… 어쩜 좋아.”

노래 한 곡이 끝나면 또다시 시작되었다. 리에네는 반쯤은 울고 반쯤은 웃으면서 노래를 들었다. 리에네가 웃으며 손을 흔들 때마다 노래 소리가 더 커졌다. 그러느라 아직 혼례복도 갈아입지 못했다.

165509580219.jpg“밤이 새도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늘에는 벌써 달이 떠 있었다. 등 뒤로 블랙이 다가왔다. 잠시 사라지기에 옷을 갈아입으려는 줄 알았는데, 그 역시 아직 혼례복 차림이었다.

16550958021896.jpg“그래서 저도 걱정이에요. 저러다 새벽이슬까지 다 맞겠다고 할 것 같아요.”

팔이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았다. 리에네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보석 핀을 잔뜩 달아 땋아 올린 머리가 무거웠다. 사실 온몸이 다 무거웠다. 아침부터 내내 이어진 혼례식은 무슨 정신으로 그 절차를 다 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왕실 예배당에서 혼례식이 치러졌다. 혼례식은 블랙과 티와칸의 용병들 모두에게 성과 작위를 하사하는 서임식까지 함께 진행되어 엄청나게 길어졌다. 그런 다음에는 신전까지 마차로 이동해 서약서에 서명을 해서 제단에 봉인했다. 유례없이 길었다는 대사제의 축성을 듣고 다시 성으로 돌아왔다. 대신 이번에는 에이니 다리 앞에 마차를 세워 두 발로 다리를 건넜다. 반대편에서 다리를 건너오는 사람들이 일렬로 축복을 건넸다. 한 명씩 손을 전부 잡아 주고 나서야 혼인식 행렬이 끝났다. 다시 마차에 올라 성으로 돌아와 연회를 벌였다. 나우크에서 이제껏 이렇게 큰 연회는 벌어진 적이 없었을 것이다. 성문에서 연회장까지 이어지는 길이 꽃과 비단으로 장식된 적도, 산처럼 쌓인 음식과 술을 저 멀리 가장 가난한 땅에 사는 이들까지 전부 골고루 나누어 먹은 적도 없었다. 왕실 예배당은 이 땅에 지어진 이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왕국 전체가 참석한 거대한 축제였다. 마구간에 몰래 사는 생쥐들까지 맛있는 술에 취한 날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뚜렷하게 기억나는 순간은 뚜껑이 없는 혼인식 마차 안에서 블랙이 얼굴을 덮은 베일을 벗겨 냈을 때였다. 리에네가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고 싶은데 베일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순간이었다.

165509580219.jpg-그럼 벗어요.

블랙은 뭐가 문제냐는 듯 베일을 고정한 핀을 뽑아 주었다.

16550958021896.jpg-엇, 베일은 혼례복을 벗을 때 함께 벗도록 되어 있어요. 신부의 순결과 혼인의 완전성을 상징하는 거란 말이에요.

블랙은 온전히 드러나는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165509580219.jpg-내겐 이 얼굴이 가장 완전한데. 뭐가 더 필요하다는 겁니까.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165509580219.jpg-그냥 있고 싶은 대로 있어요.

시야가 선명해지고 보고 싶은 것들이 잘 보였다. 혼례복을 입은 그가 또렷하게 보이는 게 가장 좋았다.

16550958021896.jpg-당신은 항상 날 놀라게 해요.

리에네가 귀에 대고 작게 속삭이자 블랙이 손가락 사이를 간질이며 답했다.

165509580219.jpg-공주님이 내게 하는 만큼은 아닐 겁니다.

그 시간들을 거쳐 지금 이 순간이 되었다.

165509580219.jpg“다들 목이 쉬기 전에 그만두게 해요.”

블랙은 제 어깨에 기댄 리에네의 머리에서 보석 핀을 살살 뽑아 들었다. 핀이 하나씩 떼어질 때마다 쫑쫑 당기던 머리 밑 살이 편해졌다.

16550958021896.jpg“어떻게 말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들 너무 즐거워 보여요.”

165509580219.jpg“공주님을 즐겁게 하려는 겁니다. 그러니 노래를 듣는 것 외에도 즐거운 일이 있다는 걸 알려줘요.”

16550958021896.jpg“어떻게요?”

165509580219.jpg“이렇게.”

보석 핀을 전부 골라내 머리를 늘어트린 블랙이 다시 리에네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한 손으로 등을 받친 그가 입술을 겹쳐 부드럽게 빨아들이자 거짓말처럼 노래가 멎었다.

16550958021896.jpg“아, 이러면 좀…….”

정신이 나갈 것 같은 키스가 한참을 이어졌다. 그가 입술을 놔주었을 때는 양 볼이 아주 새빨개져 있었다. ……창피한데. 내가 이 남자한테 얼마나 반해 있는지 사람들이 전부 다 알아챘을 거야.

165509580219.jpg“이제 돌아서서 손을 흔들면 됩니다. 그럼 다들 기쁘게 보내 줄 겁니다.”

16550958021896.jpg“…….”

어색하게 돌아서던 리에네는 테라스 아래 몰려든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순간 다시 환하게 웃었다. 블랙의 말대로 노래를 멈춘 사람들은 아주 기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16550958021896.jpg“어떻게 알았어요?”

165509580219.jpg“뭘 말입니까?”

16550958021896.jpg“이렇게 하면 된다는 거요.”

블랙이 리에네를 돌려세우며 왠지 등줄기가 저릿해지는 웃음을 지었다.

165509580219.jpg“공주님은 처음이지만 저들은 결혼을 해 봤으니까.”

16550958021896.jpg“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165509580219.jpg“내가 오늘 밤을 미친 인간처럼 기다려 왔다는 뜻입니다.”

탁. 블랙이 등 뒤로 테라스 문을 닫았다. 툭. 커튼을 묶어 놓은 끈이 풀리자 창문이 완전히 가려졌다.

165509580219.jpg“지금부터는 나만 신경 쓰는 겁니다.”

16550958021896.jpg“…….”

리에네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블랙의 연한 눈이 방금 전부터 새카만 어둠처럼 짙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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