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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너무 어려운 부탁 (86/145)

86. 너무 어려운 부탁2022.01.26.

16550958394544.jpg“와…….”

자는 동안 이런 일이 벌어져 있었다.

16550958394544.jpg“이걸 언제 다?”

욕실이 새로 치장되었다. 크기만 했지 물통과 물을 버리는 곳밖에 없던 욕실에 이전처럼 번쩍번쩍한 대리석 욕조가 생겼다. 커다란 거울과 물그릇을 올릴 수 있는 널찍한 받침대도 생겼다. 물을 바로 데울 수 있도록 커다란 화덕도 들어섰다. 욕조에 물을 넣고 불을 피우면 물이 데워지는 방식인 듯했다.

16550958394544.jpg“이런 건 처음 봐. 다른 나라에서 들여온 건가 봐.”

화덕과 욕조를 연결한 장치를 신기한 듯 구경하던 리에네가 수건을 몸에 두르고 욕조에 올라섰다. 플램바드 부인이 둔통에는 따듯한 물에 푹 담그는 게 제일이라고 했다. 몸이 물에 잠기자 따듯함이 번져 왔다.

16550958394544.jpg“아…… 너무 좋아.”

욕조가 이렇게 좋다는 걸 그간 잊고 살았다. 리에네는 욕조 가장자리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몸 여기저기 욱신대던 통증이 나른하게 물에 녹아 갔다. 탕탕.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16550958394565.jpg“들어가도 됩니까?”

블랙이었다.

16550958394544.jpg“엇…… 아, 잠시만…… 네, 괜찮아요.”

급하게 몸에 두른 수건을 매만진 리에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철컥, 문고리가 돌아가고 블랙이 들어섰다.

16550958394544.jpg“아, 너무 가까이는 오지 마세요. 그럼 창피할 것 같거든요.”

발을 한 번 주춤대던 블랙이 피식 웃었다.

16550958394565.jpg“말을 하면 듣겠지만 창피할 이유가 조금도 없을 것 같은데요.”

16550958394544.jpg“왜 없겠어요.”

지금은 그에게서 등을 지고 있는 위치였다. 그래서 고개가 자꾸만 뒤로 돌아갔다. 이제 저녁이 다 되어가고 있었으니 그를 한참이나 못 본 셈이었다.

16550958394544.jpg“수건 한 장 두르고 있는 데다 얼굴은 익어서 새빨갈 텐데.”

16550958394565.jpg“어제는 수건도 없었습니다.”

16550958394544.jpg“아니, 그건…… 어두웠잖아요.”

16550958394565.jpg“달빛은 환했는데.”

저런 부끄러운 말을 잘도 하네.

16550958394544.jpg“그런 말을 하니 더 부끄러워졌어요. 나가셔야 될 것 같아요.”

16550958394565.jpg“제 기억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몹시 어두웠습니다.”

16550958394544.jpg“이제 와 거짓말을 하면 소용이 있겠어요?”

16550958394565.jpg“한 번만 속아 줘요. 보고 싶은 걸 하루 종일 참았으니까.”

그럼 또 내가 할 말이 없네.

16550958394565.jpg“지금도 몰래 왔습니다. 부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주눅 들었다더니, 정말인가.

16550958394565.jpg“……정말 나가야 합니까?”

……그럴 리가. 나도 너무 보고 싶었는데.

16550958394544.jpg“그럼 등 뒤에 계세요.”

리에네가 웃으면서 말하자 블랙이 빠르게 다가와 욕조에 팔을 기대고 앉았다. 물에 닿아 젖어 있는 어깨에 입술이 한숨처럼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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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58394565.jpg“보고 싶었습니다.”

……나도요.

16550958394544.jpg“종일 어디 계셨어요?”

16550958394565.jpg“여기저기. 침실에는 발을 붙이지 말라고 해서.”

리에네가 소리 내서 킥킥 웃었다.

16550958394544.jpg“부인들이 그렇게 무서웠어요?”

16550958394565.jpg“공주님이 무서웠습니다.”

내가? 왜? 부드럽게 내려앉은 입술이 어깨를 데웠다.

16550958394565.jpg“내게 실망하거나 화를 낼까 봐. 자제하지 못했다고.”

그랬……나. 블랙의 말은 애써 잊고 있던 어젯밤의 기억을 되돌렸다. 가뜩이나 따듯한 물에 잠겨 있느라 올라가 있던 체온이 훅 달아올라 버렸다.

16550958394544.jpg“그게 음…… 혼자만의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요.”

16550958394565.jpg“이렇게 힘들어할 줄 몰랐습니다. 알았어야 했는데.”

목소리에 묘하게 기운이 없었다. 그래서 리에네는 그가 주눅이 든 진짜 이유를 알았다. 부인들이 잔소리를 해서가 아니라 나 때문이었구나.

16550958394544.jpg“그걸 어떻게 알았겠어요. 처음이었는데.”

16550958394565.jpg“어젠 너무 넋이 나가서.”

리에네는 손을 뒤로 돌려서 블랙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지금 상태에서 몸을 돌릴 자신은 없었다.

16550958394544.jpg“꼭 그런 것 같진 않았는데…….”

사실 그 반대였던 것 같은데. 어젯밤을 감각에 비유하자면 파도를 탄 것 같았다. 끝도 없이 몰아치는, 한순간도 끊이지 않는. 빠져나올 틈이 없었다. 사람의 몸에 만질 곳이 그렇게 많다는 것도, 쾌감이 그렇게나 다양하다는 것도 이전까지는 전혀 몰랐던 일이었다. 리에네의 얼굴이 익은 것처럼 새빨개졌다.

16550958394565.jpg“많이 반성했습니다.”

그러면서 어깨와 뒷목을 살짝살짝 찍어대는 입술은 멈추지 않았다. 리에네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면서 물었다.

16550958394544.jpg“반성 중인데 왜 자꾸 키스를 하시는 거예요.”

16550958394565.jpg“반성을 했으니까.”

16550958394544.jpg“네?”

16550958394565.jpg“그러니 오늘은 다를 겁니다.”

와……. 그게 어떻게 반성이야.

16550958394544.jpg“반성을 어떻게 했다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16550958394565.jpg“보면 알 겁니다.”

그러니까 일단 봐야 한다는 얘기네. 웃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 웃음이 나와 곤란했다. 리에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의 귀를 살짝 잡아당겼다.

16550958394544.jpg“좀 양심이 없으신 것 같아요. 내일 부인들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요.”

16550958394565.jpg“양심이 꼭 있어야 합니까?”

블랙은 제 쪽으로 향해 온 리에네의 턱을 붙들어 입술을 겹쳤다. 따듯한 물에 잠긴 채 나누는 키스는 왠지 더 농염한 기분이었다.

16550958394544.jpg“아, 더는 안 돼……. 여긴 욕실이에요.”

리에네가 젖은 손으로 블랙을 붙들었다. 점점 짙어지는 키스를 이쯤에서 꼭 말려야 할 것 같았다.

16550958394565.jpg“조금만 봐주면 안 됩니까? 오늘 처음 하는 키스인데.”

그러기엔 벌써 너무 길어졌다. 게다가 고개를 트는 바람에 수건이 벗겨질 것 같아 계속 신경이 쓰였다. 이 남자가 작정을 하면 나는 수건이 다 흘러내려도 모를걸. 여기서 말려야 해.

16550958394544.jpg“키스는 충분히 한 것 같은데요.”

16550958394565.jpg“그럴 리가.”

블랙이 머리를 감싸 안으며 더 깊숙이 입술을 물어 왔다.

16550958394565.jpg“평생 해도 충분해질 일은 없을 겁니다.”

16550958394544.jpg“그게…… 으음…….”

또 한참 키스가 이어졌다.

16550958394544.jpg“그래도…… 더는 안 돼요. 내일도 늦잠을 잘 수는 없다고요.”

16550958394565.jpg“신혼은 그래도 돼요.”

16550958394544.jpg“글쎄……. 신혼이 처음이라 잘 모르겠는데요.”

16550958394565.jpg“모르니까 내 말을 들어요.”

아, 이 남자는 이런 일에 고집을 부리네. 다른 말은 꼬박꼬박 다 들어주면서.

16550958394544.jpg“나는 아직 식사도 못 했어요.”

16550958394565.jpg“아…….”

느릿하게, 뜨듯하게 달구어진 미련을 가득 담은 채 입술이 떨어졌다. 블랙이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16550958394565.jpg“그러면 더는 고집을 못 부리잖습니까.”

고집을 부렸다는 걸 알긴 아는구나.

16550958394565.jpg“그럼 목욕을 마치고 나와요. 식사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선뜻 일어서는 동작이 여전히 아쉬워 보인다는 게 신기했다.

16550958394544.jpg“가기 전에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요.”

리에네가 손을 뻗어 블랙의 손가락을 쥐었다.

16550958394565.jpg“말해요”

16550958394544.jpg“한 번만 더 키스해 주고 가세요. 너무 길지 않게요.”

블랙은 눈가를 찌푸리며 웃었다.

16550958394565.jpg“너무 어려운 부탁인 건 압니까?”

16550958394544.jpg“그래도 들어주실 거잖아요.”

블랙이 상체를 숙였다. 역시나 너무 어려운 부탁이긴 했다. * * *

16550958479894.jpg“지금이 기회야.”

시종이 제 셔츠에 금줄로 된 보석 펜던트를 달아 줄 동안 디에렌이 거울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거울 속에 있는 건 미끈한 외양과 세련된 화술을 지닌 알리토의 대공자였다. 그는 어떤 여인들에게도 매력적이었고, 스스로도 그 점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16550958479894.jpg“혼인식 다음 날. 첫날밤을 보내고 나면 대개 혼인을 후회하기 마련이라.”

디에렌이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씩 웃었다. 시종은 그저 묵묵히 치장을 거들었다. 그것도 사람 나름이지 않나 싶었지만, 어차피 디에렌은 제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16550958479894.jpg“공주가 늦잠을 핑계로 하루 종일 침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잖아. 그게 바로 후회의 증거야.”

16550958479894.jpg“……다 됐습니다, 저하.”

16550958479894.jpg“머리도 다시 빗겨. 근사해 보여야 하니까.”

지금도 기름을 발라 곱게 빗겨 둔 머리였다. 시종은 묵묵히 빗을 들었다.

16550958479894.jpg“상심에 빠진 여인을 달래 줄 만한 물건이 뭐가 있지?”

16550958479894.jpg“글쎄요. 여인이라면 누구든 보석을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16550958479894.jpg“그런가. 가서 아무거나 적당한 걸 골라 와. 너무 비싸지는 않되 눈이 혹할 만한 걸.”

그게 무슨 차갑게 마시는 뜨거운 차 같은 소리일까 하면서도 시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침대 밑에 넣어 둔 커다란 여행용 트렁크를 열어 디레엔이 소유한 보석들을 살폈다. 사파이어와 오팔을 섞어 만든 백합 모양 브로치가 여인에게 선물하기에 괜찮아 보였다.

16550958479894.jpg“이건 어떻겠습니까?”

16550958479894.jpg“괜찮네. 그걸로 해.”

시종이 보석을 상자에 담았다. 잠시 후 알리토 공국 식으로 공작새처럼 화려하게 차려입은 디에렌이 보석 상자를 손에 들고 리에네의 방을 찾았다. * * * 페르모스는 몹시 달갑잖은 상황을 마주했다. 그는 지금 리에네와 블랙의 새로운 사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늦은 저녁 식사는 식당이 아니라 침실 옆 사실에서 이뤄졌다. 안 봐도 뻔했다. 주군은 이제 밖으로 나올 생각이 없었다. 혼인식 때문에 미뤄진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시는지 저를 말려 죽일 셈이냐는 말이 목구멍에 차올랐지만 페르모스는 서러움을 참았다. 그래, 신혼이니까. 며칠은 참아야지. 지금 잘못 건드렸다간 큰일 나겠지. 하여간 그래서 사실로 향하는데 그보다 앞에서 사실 밖을 얼쩡대고 있는 알리토의 대공자를 발견했다. 저 인간이 미쳤나. 눈썰미가 좋은 페르모스는 단숨에 디에렌의 목적을 알아보았다. 발정 난 공작새처럼 차려입고서 손에는 보석상자를 들고 있네. 리에네에게 볼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페르모스가 소리 내어 혀를 찼다. 멍청해도 저렇게 멍청할 수가. 아무리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인간이라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군의 여자를.

16550958508139.jpg“거기서 뭐 하십니까?”

페르모스가 큰 소리로 부르자 디에렌과 시종이 화들짝 놀라 등을 돌렸다.

16550958479894.jpg“아, 마침 잘됐군. 리에네 공주님께 내가 왔음을 알리게.”

디에렌이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해댔다.

16550958508139.jpg“무슨 볼일이십니까? 이 시간에.”

16550958479894.jpg“그건 네 알 바가 아니지. 고하기나 해.”

16550958508139.jpg“제 알 바가 맞습니다. 주군께 들어오는 알현 요청은 제 소관인데요.”

16550958479894.jpg“눈이 나쁜 줄 알았더니 귀도 먹은 모양이지. 내가 리에네 공주님을 뵈러 왔다고 말하지 않았나?”

16550958508139.jpg“들었습니다. 두 분이 함께 계신데 구분이 무슨 소용입니까.”

16550958479894.jpg“……함께 있다고?”

디에렌의 얼굴이 옅게 굳었다. 페르모스가 다시 혀를 찼다.

16550958508139.jpg“식사 시간이니 함께 계신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16550958479894.jpg“이 시간에 식사를?”

16550958508139.jpg“공주님이 늦게 일어나셨으니까요. 그래도 고할까요?”

16550958479894.jpg“……아니, 그렇다면.”

잠시 머리를 굴리는 듯하던 디에렌이 한발 물러났다. 생각했던 대로였다. 디에렌이 저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와서 하려던 짓은 블랙이 있으면 할 수 없는 종류였다.

16550958479894.jpg“다음에 뵙지.”

16550958508139.jpg“손에 든 그건 뭡니까?”

디에렌이 불쾌한 얼굴을 했다.

16550958479894.jpg“네가 몰라도 좋을 물건이다.”

그래 봤자 보석일 게 뻔했다. 디에렌의 여성 편력은 화려했지만 그만큼 그가 여인들에게 뿌린 보석도 많았다. 그는 여인들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겠지만 페르모스가 볼 땐 신분과 재산의 힘이 팔 할이었다.

16550958508139.jpg“그럼 살펴 가십시오. 시간이 워낙 늦어 말입니다.”

페르모스는 빈정대는 걸 잊지 않고 대강 인사를 했다. 디에렌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시종을 앞세워 등을 돌렸다.

16550958508139.jpg“쯧, 고맙다는 말도 없네. 어디 한 군데 부러질 뻔한 걸 내가 구해 준 건데.”

페르모스가 탕탕 사실의 문을 두드렸다.

16550958508139.jpg“주군, 공주님. 접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16550958394565.jpg“……들어와.”

대답은 한참 뒤에야 들려왔다. 뭐, 그럴 거라 짐작은 하고 있었다. 혼인식이 어제였고, 블랙은 하루 종일 리에네의 옆에 있지도 못했으니까.

16550958508139.jpg“식사는 잘하셨습니까?”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지금이 밤이 아니라 대낮 같다는 것이었다. 아주 훤하네, 그냥. 리에네의 얼굴이 어찌나 화사하고 생기 넘치는지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 인간은 쫓아내길 잘했는데. 저런 얼굴을 뵀으면 더 누울 자리 못 가리고 얼쩡댔겠어. 페르모스의 말대로 함께 있는 두 사람은 쳐다보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너무 좋아 보였다.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방해꾼 같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어색하게 헛기침을 한 페르모스가 빠르게 입을 놀렸다.

16550958508139.jpg“시간이 늦었으니 할 말만 하고 사라지겠습니다.”

페르모스의 얘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꼭 알아야 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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