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귀가 먹는 순간2022.01.30.
“클라인펠터 가 말입니다, 혼인식이 무사히 끝났으니 아예 비우는 게 어떨까 합니다. 눈에 보이는 재산은 회수했지만 그 집구석이라면 비밀 금고 한두 개쯤은 어디 감춰 두고 있을 것 같아서요.”
페르모스가 쓸데없이 이 시간에 사실까지 와서 괜한 말을 꺼내는 게 아니었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네가 그런다면 그 집을 뒤져야 할 이유가 있다는 소리겠군.”
“맞습니다. 짐작이긴 한데 좀 찜찜해서요.”
리에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게 뭔가요?”
“사실상 사라진 가문이잖습니까. 직계가 다시는 이 땅에 발을 못 붙이게 됐는데. 그런데 아직 일꾼들이 남아 있단 말입니다. 대체 그 일꾼들을 누가 어떻게 관리하고 있겠습니까? 가문에 대한 충성심으로 남아 있다고 쳐도, 먹고는 살아야 할 텐데요.”
혼인식 이후로 가장 큰 일은, 새로운 치세를 반대하는 세력을 살피는 것이었다. 클라인펠터 가가 사라졌다고 해도 그들이 이제껏 내린 뿌리는 깊을 것이다. 남은 다섯 가문을 새로운 조약으로 묶어 뒀다지만 혼인 직후 마음을 달리 먹으면 골치 아파졌다. 통치와 전쟁은 전혀 다른 분야였고, 티와칸의 수장이 하려고 하는 것은 전자였다. 그런 의미에서 클라인펠터 가에 일꾼들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누가 있다는 소리겠군.”
“네. 그때 말씀드렸던 것처럼요. 생각할수록 수상한 겁니다. 이제껏 누릴 걸 전부 누리고 살던 집인데 굳이 지금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지냈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리에네도 동감이었다. 클라인펠터 가를 뒤에서 움직일 만한 인간이라면 이 작은 나라에서 이제껏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믿기 어려웠다.
“그런 인물이 있는 것 같지만 확신할 수는 없는 거로군요.”
“그렇지요. 그래서 그 집을 되도록 빨리 비우고 싶습니다. 숨겨 놓은 게 반드시 있을 겁니다.”
리에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다면 해야죠. 혼인식 때문에 사람들이 왕실에 우호적인 편이니 지금 하는 게 차라리 나을 거예요. 클라인펠터가 추방된 이유도 지금쯤이면 많이 알려졌을 테고요.”
“네. 그 저택 또한 재산의 일종이니 마찬가지로 왕실 소유가 됩니다. 규모도 크고 괜찮은 건물이니 비워 두는 게 아니라 적당한 용도로 쓰는 게 어떻겠습니까? 도서관이나 학당 같은 것으로요.”
“와.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허락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비우는 걸로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건 절대 주군께 새삼 잘 보이려는 게 아니라 냉정한 판단하에 드리는 말인데.”
페르모스가 말을 끊고 씩 웃었다.
“주군께서는 내일 그냥 성에 계십시오. 행여나 주군께서 클라인펠터 가에 직접 가시면 모양새가 썩 좋진 않을 거라서요. 제가 가겠습니다. 마침 도와줄 사람도 있으니까요.”
페르모스가 말하는 이는 클리마였다. 클리마는 오래도록 그 저택을 드나들었으니 린든 클라인펠터가 사용하던 은밀한 장소에 대해서도 아는 게 많았다. 블랙도 딱히 사양하진 않았다.
“그렇다면.”
“당분간 실컷 함께 계십시오. 아, 그런데 정말 당분간입니다. 꼭 당분간이어야 합니다.”
아차 싶었던지 페르모스가 웃음기를 지우고 거듭 당부를 한 다음 떠났다. 이제는 잠을 청할 시간이었다. * * *
“그런데 우리 내일 갈 데가 있어요.”
신혼은 사치스러웠다. 늦은 저녁도 손 하나 까딱이지 않고 받아먹었는데 머리를 말리고 침실로 가는 일까지 전부 블랙이 해 주고 있었다. 그에게 안겨 목에 팔을 감고 있으면 얼굴이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리에네가 안아주겠다는 말을 사양하지 않은 이유였다.
“어디를?”
“대신전이요.”
“왭니까?”
“대사제를 뵙고 싶어서요.”
“아…….”
리에네가 씩 웃자 블랙은 이유를 깨달았다. 리에네는 거지 노인을 만난 적은 있어도 대사제 마나우를 만난 적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저도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혼인식에서 얼굴을 알아보고 얼마나 놀랐다고요.”
축성을 하겠다며 다가오는 마나우를 보던 리에네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를 꼭 깨물고 참느라 턱이 아플 지경이었다.
“미안합니다. 미리 말한다는 걸 잠시 잊었습니다.”
그가 잊어버리는 일이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그런 실수는 나나 하는 줄 알았는데. 리에네가 장난을 치듯 블랙의 귀를 약하게 잡아당겼다. 그는 아프다고 하는 게 아니라 뚜렷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 대사제였던 거죠? 생각해 보니까 그렇겠더라고요. 그래서 페르난드 왕자를 알아봤던 거였겠어요.”
“어릴 때는 몸이 허약했습니다.”
블랙은 리에네를 침대에 내려 주며 지나간 이야기를 시작했다. 둘은 나란히 누워 이마를 맞댄 채 아직은 낯설고 어려운 시간을 나누었다.
“왕실에 내린 신의 저주라는 말도 있었고.”
그래서 페르난드 왕자는 신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마나우가 단숨에 얼굴을 알아본 것은 꽤 오랜 시간 그에게 기도와 축성을 해야 했던 탓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잔인한 말을…….”
리에네가 블랙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그냥 아팠을 뿐이잖아요. 가장 힘든 건 몸이 아픈 아이였을 텐데.”
“그런 곳이잖습니까. 선왕도 가뭄으로 같은 말을 들었을 텐데요.”
그가 리에네 자신의 부친을 선왕이라 부르는 게 가슴 아팠다. 왕이 아니라 왕관을 빼앗은 사람이잖아요. 당신에게는. 리에네는 차마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블랙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대사제가 나에게 당신 이름이 헨튼이라고 했던 건 일부러 그런 거죠?”
“내가 부탁했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전쟁을 시작하고 싶지 않다고.”
블랙이 리에네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다행히 내 말을 따라 줬습니다. 얕은수라 금방 소용이 없어지긴 했지만.”
“되게…… 먼 길을 돌아온 것 같아요. 우리가.”
“멀리 돌아도 와야 했던 길이었습니다.”
“그게…… 맞는 거겠죠?”
어쩐지 자그마해진 목소리에 블랙이 쑥 몸을 내려 억지로 눈을 마주했다.
“아닌 것 같습니까?”
“그냥 좀…… 내가 이래도 되나 싶어서요. 이렇게 많이 받아도 되는 건지, 그런 거요.”
“받는 건 납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도 안 돼.”
“내가 지금 여기 이렇게 누워 있는 것도 공주님이 준 겁니다.”
“그걸 왜 준 거라고 하세요. 혼인했으니까 그런 건데.”
“나는 옆방을 쓰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나우크의 다른 귀족들처럼.”
그 말을 하는 표정이 너무 부드럽고 뜨거워서 그가 말한 의미를 이해했다. 내가 마음을 줬다는 소리였구나. 그게 자기한테 아주 큰 의미라는 뜻이겠구나.
“한 방을 써서 내가 더 좋을걸요. 당신은 나우크의 겨울이 얼마나 추운지 잘 모르잖아요. 방이 클수록 더 춥다고요.”
“그럼 더 좋아해요. 공주님이 아무리 나를 좋아해도 내가 더 좋아할 자신이 있으니까.”
“그건 모르는 거죠.”
“두고 보면 알 겁니다.”
“네. 두고 보세요.”
눈을 마주한 채, 두 사람은 한참 웃었다. 웃음이 멎었을 땐 키스가 시작되었다. 제 입술에 맞물리는 입술이 위험할 정도로 달았다.
“내일은…… 늦잠…… 안 돼요. 신전에 갈…… 거니까.”
입술이 벌어지는 중간중간 리에네가 엄살을 부렸다. 무슨 말이든지 들어주는 블랙은 이럴 때는 조금 달랐다.
“오라고 하면 됩니다.”
“아니, 무슨…… 대사제……라고요. 다리도 불편하고…….”
“무슨 상관인데.”
목덜미를 슬쩍 깨문 입술이 아래로 향했다. 느슨한 잠옷은 아주 쉽게 벌어졌다. 한숨을 터트리자 그게 모두 열기가 되었다. 리에네는 가슴께를 간질이는 블랙의 검은 머리칼을 손가락 새로 흘렸다. 이 남자는 대체 나를 어디까지 데려갈 셈일까.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가 데려가는 곳은 어디든 황홀할 것이다.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 * * * 그래도 오늘은 어제처럼 저녁 무렵까지 쓰러져 있진 않았다. 리에네는 정오를 아슬아슬하게 넘기지 않은 시간에 눈을 떴다.
“이만하면 아침이지, 뭐…….”
이틀 연속 늦잠을 잔 리에네는 제가 듣기에도 민망한 변명을 중얼대며 몸을 일으켰다. 제 말로는 반성을 많이 했다던 블랙이 정말로 반성을 했는지는 좀 모호했다.
“일어났습니까?”
아직 잠옷 차림인 자신과는 달리 블랙은 근사한 성장 차림새였다. 문에 기대 웃고 있던 그가 침대를 향해 다가왔다.
“음……. 일어나긴 했는데 아직은 모르는 척해주세요. 세수도 안 했거든요.”
“네, 알고 있습니다.”
아직 잠기운이 묻어 있는 눈가에 블랙이 입을 맞췄다. 눈가가 저절로 가늘게 접혔지만 리에네는 애써 그를 밀어냈다.
“이건 반칙이잖아요. 혼자서만 말끔하다니.”
“모르는 척할 테니 더 자요.”
“그건 안 되고요. 다 잤어요.”
“아직 자는 것처럼 보이는데.”
무슨 소리지. 눈이 부었다는 소린가.
“그 말을 들으니까 더 씻고 싶어졌어요. 나만 너무 게으른 사람이 된 것 같잖아요.”
“더 자도 되고 게을러도 됩니다. 눈을 떴을 때 나와 있기만 하면 돼요.”
“아, 안 돼. 그런 말을 그렇게 듣기 좋게 하지 말아요. 넘어가고 싶어지니까.”
리에네가 블랙의 팔을 붙들고 일어섰다. 그 전에 블랙이 가볍게 몸을 들어 침대에서 내려 주었다.
“오늘은 아픈 데 없습니까?”
없긴요. 방금 두 발로 서는데 눈물 날 뻔했어요. 허리가 너무 당겨서.
“……조심하면 괜찮을 것 같아요.”
“안 괜찮다는 말이로군요. 더 누워 있으면 안 됩니까?”
“그건 싫어요. 환자가 된 기분이에요.”
“아프면 환자가 되는 게 맞습니다.”
“그러니까요. 나는 병이 생긴 게 아니라 애정을 나눴을 뿐이잖아요. 그때마다 매번 환자가 될 순 없어요. 이젠 이런 게 일상이 될 텐데.”
블랙이 이유 모를 한숨을 흘렸다.
“어쩌면 좋지.”
“뭐가요?”
“그렇게 말한다고 몸이 갑자기 좋아지진 않을 텐데……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공주님은 너무 사랑스럽고. 나는 결과가 좋지 않을 생각만 들고.”
“왜 결과가 좋지 않…….”
“한 번만 봐줘요. 다신 안 그럴 테니까.”
리에네의 말을 자른 그가 다급히 입술을 삼켰다. 리에네가 당황해 그의 어깨를 붙들자 팔이 단단하게 허리를 받쳐 안았다.
“아니, 방금 일어났…….”
무슨 말이든 들어주는 블랙은 가끔 귀가 먹을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 * *
“공주님, 공주님.”
탕탕. 다행인지 안타까운 일인지 리에네가 다시 침대로 떠밀리기 전에 플램바드 부인이 찾아왔다.
“……그냥 가라고 하면 안 됩니까?”
블랙이 못 들어줄 소리를 했다.
“되겠어요? 부인이 나를 연달아 불렀다고요.”
탕탕.
“공주님. 공주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목소리가 초조했다. 블랙이 고개를 한 번 내젓더니 얌전히 몸을 떼어냈다.
“가만히 있어요. 내가 일으켜 줄 테니까.”
블랙이 허리를 안아 침대에 앉혀 주는 동안 리에네가 부인에게 답을 했다.
“들어와요, 부인.”
“공주님. 공주님.”
덜컥 문이 열리고 안색이 어두워진 플램바드 부인이 들어섰다.
“이런……. 두 분이 아직 함께 계셨군요. 부디 제 무례를 탓하세요. 하지만 도무지 가만히 있지를 못하겠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부인?”
“아침부터 그이가 안 보이지 뭡니까. 여기저기 다 찾아봐도 감쪽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왠지 심상치가 않아서…….”
“그이라면, 헨튼 부인 말씀이세요?”
“네, 공주님.”
친구라 하기엔 아직 서로 칼같이 예의를 따지면서도 마음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성 안에는 없는 게 확실한가요?”
플램바드 부인이 양손을 꼭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밖에 나가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성을 떠난 건지 통 알 수가 없지 뭡니까…….”
“그럼 일단 경비대에게 알리고 부인을 찾도록 할게요. 혹시 모르니 성 안과 밖을 전부 찾는 게 좋겠어요.”
얘기를 듣던 블랙이 끼어들었다.
“나는 클라인펠터 가로 가보겠습니다.”
“네? 거긴 가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렇긴 한데 헨튼 부인이 거기로 갔을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