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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남기고 온 것 (88/145)

88. 남기고 온 것2022.02.02.

이상한 말이었다.

16550958847543.jpg“그 위험한 곳에요? 말이 안 되잖아요. 거기에는 부인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진 이들도 많을 텐데.”

16550958847548.jpg“짐작일 뿐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거기밖에 없을 것 같아서. 하지만 클라인펠터 가로 간 게 확실하다면 걱정할 일은 없을 겁니다. 페르모스가 있을 테니.”

16550958847543.jpg“부인은 거기에서 오래 일을 했으니까…… 뭔가 두고 왔을 수도 있겠군요.”

16550958847548.jpg“아마도.”

16550958847543.jpg“…….”

찾아와야 하긴 하지만, 이제껏 말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 그만한 비밀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는 뜻이었다.

16550958847543.jpg“나도 같이 가요.”

리에네는 그게 여전히 상처로 얼룩진 과거의 편린일까 봐 걱정스러웠다. 헨튼 부인은 이제 간신히 슬픔을 이겨 내던 중이었는데.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떡해.

16550958847548.jpg“그러지 않는 게 좋을 텐데요. 말을 타면 허리가 더 아플 겁니다.”

16550958847543.jpg“그 정도로 아픈 건 아니에요.”

못 믿겠다는 듯 눈썹을 치켜뜨는 블랙에게 리에네가 고개를 흔들었다.

16550958847543.jpg“부인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나도 알아야 하잖아요.”

16550958847548.jpg“……약속해요, 그럼. 돌아와서는 엄살을 실컷 부리겠다고.”

16550958847543.jpg“좀 이상한 말 같은데…… 방금 전까지 엄살을 부려도 안 듣던 게 누구였죠?”

16550958847548.jpg“그러니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또 같은 짓을 하지 않게.”

플램바드 부인이 방금 전 이 자리에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16550958862517.jpg“제가 책임지고 공주님께서 무리하시지 않도록 거들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가십시다.”

  그렇게 플램바드 부인까지 클라인펠터 가로 향하게 됐다. 성 안팎에서는 경비대가 여기저기 부인을 찾기 시작했다. * * *

16550958862522.jpg“으아……. 오시지 않기로 얘기가 된 게 아니었습니까?”

시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먼저 출발한 페르모스가 클라인펠터 가의 정문을 부수는 데 막 성공했을 무렵 블랙과 리에네가 도착했다.

16550958847548.jpg“그렇게 됐어. 저항이 있나?”

16550958862522.jpg“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자칫 일이 험해지겠는데요.”

16550958847548.jpg“그만큼 집 안에 감추고 있는 게 있다는 뜻이겠지.”

리에네나 플램바드 부인이나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16550958847543.jpg“혹시 헨튼 부인을 보지 못했나요?”

16550958862522.jpg“음? 뭐라고 하셨습니까, 공주님? 헨튼 부인이라고요?”

16550958847543.jpg“못 봤다는 소리군요. 그럼 여기 온 게 아니거나 아니면 몰래 왔다는 뜻이네요.”

헨튼 부인은 문과 창문이 모두 꽁꽁 닫힌 저 저택 어딘가에 있을지도 몰랐다.

16550958862522.jpg“으음……. 그게 사실이라면 일이 좀 복잡해지겠는데요. 자칫 저놈들이 인질로 잡을 수도 있을 테고……. 아, 설마 그래서 문을 안 열고 버티는 건가.”

16550958847548.jpg“미리 단정 짓지 마. 놈들이 숨기고자 하는 게 꼭 헨튼 부인이 아닐 수도 있다. 가진 게 많았던 집구석이니.”

16550958862522.jpg“그야 그렇지요. 일단 문을 여는 게 순서겠습니다. 부인을 인질로 잡고 있다면 놈들이 먼저 그 사실을 써먹으려고 들겠지요. 그때 대응하면 됩니다.”

거기까지 말을 했을 때 저쪽에서 클리마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16550958862517.jpg“어, 어머니가 저 안에 계시다고요? 어, 어째서요?”

그 역시 헨튼 부인이 사라진 걸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16550958847543.jpg“확실한 건 아니에요. 일단 경비대도 따로 부인의 행방을 찾고 있긴 해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16550958862517.jpg“아, 그래도…… 저 안은…… 어머니는 왜…….”

클리마가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발을 동동 굴렀다. 그간 너무 마르고 구부정했던 탓에 잘 몰랐지만 키가 큰 편이었다. 우울이 걷힌 얼굴은 이제 원래 지녔던 선량함이 도드라졌다. 잠깐 사이에 클리마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런 사람이 그런 삶을 살았다니……. 정말이지 못 할 짓이었어. 새삼 지난 일들에 마음이 다시 아파 왔다. 리에네가 클리마의 팔을 토닥였다.

16550958847543.jpg“괜찮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그래야 하니까.”

다시는 과거가 현재를 침범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놔두지 않을 테니까.

16550958862517.jpg“…….”

아주 놀란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잠시 리에네를 바라보던 클리마가 말했다.

16550958862517.jpg“어머니가 저기 계시다면…… 정말 그게 맞다면, 아마 그 길을 쓰셨을 겁니다.”

16550958847543.jpg“네? 길이 따로 있나요?”

16550958862517.jpg“네. 제가 다니던 길……. 심부름을 할 때. 어머니도 알고 계십니다.”

16550958847543.jpg“아…….”

16550958862517.jpg“그런데 좁습니다. 한 사람씩 다녀야 하고…… 또 머리도 많이 숙여야 하고…….”

페르모스가 반색을 했다.

16550958862522.jpg“뭐?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얘길 했어야지!”

16550958862517.jpg“아무도 안 물어봤는데…….”

16550958862522.jpg“으아, 모르니까 안 물어봤지! 아, 하여간 그럼 그 길로 안에 들어가면 되겠군요. 이 앞에서는 계속 문을 열면서 시선을 끌고. 주군께서 직접 가시겠습니까?”

16550958847548.jpg“아니. 랜달을 보내.”

페르모스가 어깨를 주춤했다.

16550958862522.jpg“의외군요. 당연히 간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아, 이런. 공주님이 계시지. 알겠습니다.”

리에네가 블랙의 소매를 붙들었다.

16550958847543.jpg“나도 같이 가요. 부인을 더 빨리 찾는 길이라면.”

블랙이 정색을 했다.

16550958847548.jpg“그럴까 봐 남겠다고 한 겁니다. 어림없습니다.”

16550958847543.jpg“위험하진 않을 거잖아요. 당신이 같이 있으니까.”

16550958847548.jpg“내가 열 명쯤 있어도 안 됩니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한.”

16550958847543.jpg“그래도…….”

블랙과 리에네의 말다툼을 잠깐 듣던 페르모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플램바드 부인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58862522.jpg“랜달을 보내겠습니다. 두 분 괜한 다툼은 마십시오. 애초에 물어본 제가 잘못이었습니다.”

  그렇게 랜달을 비롯한 용병 셋이 클리마의 안내를 받아 클라인펠터 가로 들어섰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문을 다 닫아 놓은 채 텅 비어 있는 침묵이었다. 헨튼 부인은 별채의 어떤 방에서 칼에 찔린 채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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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0958847543.jpg“부인, 부인? 정신이 들어요? 헨튼 부인!”

16550958862517.jpg“……공, 주님?”

헨튼 부인은 성으로 옮긴 지 반나절 만에 정신을 차렸다.

16550958847543.jpg“하아……. 다행이다.”

무사히 눈을 뜨는 부인을 보고 리에네가 탈진한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반대편에서는 클리마가 모친의 손을 잡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16550958862517.jpg“아이고, 공주님!”

마침 물병에 새 물을 담아 오던 플램바드 부인이 리에네가 주저앉는 걸 보고 후다닥 달려왔다. 그 와중에 바닥에 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게 꼭 플램바드 부인다웠다.

16550958862517.jpg“세상에! 이제 눈을 떴네요!”

리에네를 일으키려던 플램바드 부인인 그새 깨어난 헨튼 부인을 발견하고는 끝내 물병의 물을 엎질렀다.

16550958862517.jpg“아이고, 이를 어째!”

바닥에 물이 주르륵 쏟아졌고, 두 사람의 치맛단을 적셨다. 평소 같으면 능숙하게 사고를 처리했을 부인이 지금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허둥대기만 했다.

16550958862517.jpg“세상에, 세상에…….”

16550958862517.jpg“그러지 말고 물병이나 제대로 잡아요. 나는 안 죽었으니까.”

두 사람보다 죽다 살아난 헨튼 부인이 더 멀쩡해 보였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리에네와 플램바드 부인이 허둥지둥 바닥을 정리하고 의사를 불러왔다. 정확히는 의사가 아니라 페르모스였다. 칼에 찔린 상처는 어지간한 의사보다 월등히 아는 게 많다고 했다.

16550958862522.jpg“거, 손 좀 놓고.”

부인의 상처를 살피려던 페르모스가 석상처럼 똑같은 자세로 울고 있는 클리마에게 눈치를 주었다.

16550958862522.jpg“내가 안 돌아가실 거라고 했지. 손 놓고 그냥 가만히만 있어. 커다란 놈이 딱 들러붙어 있으니 아무것도 못 하겠잖아.”

16550958862517.jpg“…….”

클리마가 애써 모친의 손을 놓았다. 클리마는 아르사크 수호기사단의 유일한 기사 견습생이었다. 그간 사람을 죽였으니 이제는 누군가를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 누군가가 아르사크라는 사실 때문에 마찰이 있었지만 결국 티와칸에 제자리를 잡았다. 처음으로 견습생을 맞이하게 된 티와칸은 다들 신이 났다. 너무 열성적으로 기사 수업을 시켜 주려고 들어서 탈이었다. 덕분에 클리마는 바쁘고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던 터라 모친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더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16550958862522.jpg“상처를 좀 보겠습니다, 부인. 여기였죠?”

페르모스는 의사보다 능숙하게 감아 놓은 붕대를 풀고 자상을 살폈다. 칼에 찔린 부위는 왼쪽 늑골 사이였는데, 조금만 위치가 잘못되었어도 목숨을 장담 못 할 상황이었다.

16550958862522.jpg“상처가 깨끗한 대신 깊이가 깊은 것을 보면 잘 갈린 칼이었을 겁니다. 클라인펠터 가의 일꾼이 아니라 사병이었지요?”

16550958862517.jpg“…….”

헨튼 부인이 복잡한 얼굴을 했다. 입을 열고 싶어도 잘 열리지 않는 그런 얼굴이었다.

16550958862522.jpg“알고 묻는 것이니 내키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여간 운 좋게 잘 찔렸고, 소독도 잘했으니, 약 잘 먹고 게으름을 피우는 일만 남았습니다. 한 달 정도 잘 지내면 감쪽같이 나아 있을 겁니다.”

그건 참 다행이었다. 상처가 덧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페르모스가 약을 바르고 다시 말끔히 붕대를 감아 놓았다.

16550958862522.jpg“약은 넉넉히 발랐으니 이틀 뒤 다시 바르면 됩니다. 그때 다시 한번 아문 정도를 확인할 겁니다. 다시 벌어지지 않으려면 크게 웃지 마시고 반듯하게 누워서 잠들어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16550958862517.jpg“……거기, ……습니다.”

헨튼 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16550958862522.jpg“부인? 뭐라고 하셨어요?”

16550958862517.jpg“내가 칼에 찔린 그 방, 거기가 그자의 방이었습니다.”

16550958862522.jpg“그자……? 그자가 누군데요?”

부인이 홱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직 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눈동자에 이글대고 있었다.

16550958862517.jpg“그자…… 테르난 클라인펠터.”

   * * * 테르난 클라인펠터는 21년 전 클라인펠터 가의 가주였다. 그의 죽음은 너무 급작스러웠다. 그의 장자이자 라피트의 친부였던 차기 가주도 엇비슷한 시기에 죽었다. 모든 게 21년 전의 반란과 짜 맞춘 듯 시간이 맞물려 있었다. 이걸 우연이라 치부할 수는 없었다.

16550958862517.jpg“그 집에서 저는 죽지 않은 그 인간을 돌보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테르난 클라인펠터는 죽지 않았다. 중풍으로 쓰러졌을 뿐이었다. 그가 제 몸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눈동자뿐이었다.

16550958862517.jpg“가주나 되는 자가 그런 중병을 얻었으니 차라리 죽었다고 한 모양입니다.”

지금이야 그걸 병이라고 하지만, 그때만 해도 원인을 모르는 병은 대개 신의 저주였다. 신의 저주가 내린 이름을 꺼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6550958862517.jpg“20년이나 시체토막 같은 몸을 먹이고 입히고 씻겼습니다.”

헨튼 부인은 그가 원수임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감시가 심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부인이 그 오랜 시간 동안 해 왔던 일은 먹이라는 약에 먹지 못할 것들을 섞거나 몰래 버리는 것뿐이었다.

16550958862517.jpg“목숨이 어찌나 질긴지 오래도 버티더군요. 제가 그 집을 떠날 때에도 숨이 붙어 있었습니다. 오늘 갔던 건…….”

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16550958862517.jpg“그래도 마무리는 내 손으로 해야겠다 싶어서…….”

테르난 클라인펠터가 제 손으로 기사 헨튼의 목을 자른 것은 아니었다. 둘째 아들의 심장을 찌르지도, 큰아들과 자신을 붙잡아 서로의 인질로 삼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헨튼 부인에게는 원망하고 저주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게 테르난 클라인펠터였다.

16550958862517.jpg“죽이려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자가 깨어나 있었습니다. 지팡이를 짚었지만 제 발로 서서 저를…… 저를 노려보았습니다.”

테르난 클라인펠터를 부축하던 집사가 사병에게 부인을 죽이라고 했다. 칼에 맞고 쓰러지는 순간에 보이던 것은 멀쩡히 살아서 떠나는 테르난 클라인펠터의 등이었다. 그게 그렇게 원통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원수를 놓아 보낸다는 게. 저택이 깡그리 비워져 있던 것은 그래서였다. 테르난 클레인펠터가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남은 재산을 황급히 꾸려 어디론가 도망쳤을 것이다. 나우크 성에 비밀 통로가 여러 개인 것처럼, 클라인펠터 가도 마찬가지였다. 티와칸의 눈을 피해 어딘가로 숨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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