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저주받은 왕자2022.02.06.
“어, 어떻게 그런 일이…….”
플램바드 부인은 처음으로 헨튼 부인에게 있었던 일의 전말을 듣게 되었다. 헨튼 부인보다 플램바드 부인의 안색이 더 희게 질려 있었다. 손등을 쓸어 주는 손이 덜덜 떨렸다.
“그자겠군요.”
린든 클라인펠터와 라피트 클라인펠터가 추방당한 뒤 클라인펠터 가를 움직였던 자는 되살아난 전대의 가주였다. 페르모스가 턱을 만지작거렸다.
“네. 헨튼 부인이 떠나고 아마도 제대로 약을 먹었으니 기적처럼 차도가 생겼을 겁니다. 이것 참.”
헨튼 부인이 이를 갈았다.
“그 집구석을 떠나기 전에 내 손으로 찌르고 나왔어야 했는데…….”
클리마가 아프도록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어머니, 그건…… 그건 좋지 않습니다. 어머니께…… 어머니께서 참회의 기도를 드려서도 안 되고요……. 그러지 마세요, 어머니…….”
분노하는 부인이나 놀라는 클리마를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아팠다.
“그자를 찾아야 해요.”
리에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자, 클라인펠터를. 분명 이대로 얌전히 모습을 감추고만 있지는 않을 거예요.”
페르모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동감입니다. 아마도 그자는 21년 전 벌어진 일을 전부 다 알고 있을 겁니다. 어쩌면 일을 주도했을 테고요.”
“클라인펠터 가의 가주였으니 중심에 서서 다른 귀족들을 움직였을 거예요.”
손끝이 차가워졌다. 누군가 자신에게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과거는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클라인펠터가 마침내 죗값을 치르게 되겠군요.”
그러니 마주 보아야 했다. * * *
“어쩐 일이야?”
오늘도 실패였다. 디에렌은 들리지 않게 이를 갈았다. 오늘은 꼭 리에네 공주를 대면할 작정이었다. 이 왕국은 대체 어떻게 굴러가는지 성에 있어도 왕족을 한 번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그가 아는 왕족은 절대 이렇지 않았다. 왕족이란 아랫것들을 부리며 사치와 쾌락을 누리는 게 삶의 이유이자 목적인 자들이었다. 이 소박한 성을 보면 그만한 돈이 없겠다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왕족이 천것들처럼 밭을 갈아 감자를 캐고 있지도 않을 텐데 대체 왜 매번 할 일이 있다 하는지 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여간 지금은 리에네 공주가 외출했다가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무슨 시녀장의 방에 내내 처박혀 있다고 했다. 지금이 기회였다. 이제 리에네 공주는 제 남편이라는 야만인과 한 공간에 있는 것도 견디지 못하게 된 모양이었다. 공주를 살살 구슬려 손에 넣으려면 이런 틈을 파고들어야 했다.
“이제야 날 손님 취급할 마음이 들었나? 응?”
그런데 왜 하필 딱 이 틈에 블랙이 끼어든 걸까.
“그런데 난 이제 네 환대에 관심이 사라졌거든. 그만 가 주지 않겠어?”
제 방으로 블랙이 찾아온 이유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보나 마나 이제껏 했던 무례한 일을 사과하려고 왔을 것이다.
“나는 마침 볼일이 있어서.”
디에렌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가슴에 늘어트린 펜던트의 위치를 고심했다. 오늘따라 그는 한층 더 화려했다. 언제까지 이런 촌구석에서 뭉개고 있을 수는 없으니 한시바삐 리에네 공주와 재미를 본 다음 떠날 생각으로 마음이 약간 급해졌다.
“뭐 해. 가보라니까.”
디에렌은 아무 말 없이 문턱에 기대 서 있는 블랙을 거울 너머로 바라보았다. 대체 왜 저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 말이 안 들려?”
“……들려.”
“그럼 왜 못 듣는 척하는데?”
“그게 아니라 생각을 하느라.”
“생각? 무슨 생각?”
약간 코웃음을 섞어 한 말에는 네놈도 사람처럼 생각을 하느냐는 비아냥거림이 담겨 있었다. 그는 블랙을 잘 몰랐다. 말 잘 듣는 야생 개들을 좀 거느리고 있다고 해서 일개 용병에게 쩔쩔매는 부친이나 좋다고 덤벼드는 누이가 예전부터 한심했다.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생각. 이렇게 쓸데없는 짓을 하고 싶어진 적은 처음이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저벅, 저벅. 마침내 블랙이 기대 있던 몸을 떼고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방금 전부터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시종의 안색이 허옇게 변하기 시작했다.
“내 아내가 네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건 알아. 아마도 너는 그냥 날파리 같은 존재겠지. 귀찮고, 하지만 눌러 죽이자니 좀 가엾고. 그냥 무시하는 게 가장 편한 짓이라는 것도 알아. 대공이 트집을 잡으면 일이 하나 늘어날 테니. 그러니 네 손목을, 아니, 발목이 나으려나. 둘 중 하나를 부러트리는 건 쓸데없는 짓이겠지. 사람 뼈를 부러트리는 게 재밌는 것도 아니고.”
“무슨……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디에렌은 조금 늦게 블랙이 하는 말을 이해했다. 사실 전부 이해한 건 아니고 거리가 좁혀지며 다가오는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옅은 푸른 눈이 이상하게도 섬뜩했다. 그 눈이 가늘어질수록 제 몸 어딘가가 찢겨나갈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런데도 나는 네가 내 아내 곁에서 얼쩡대는 게 싫어.”
“뭐, 뭐라는…… 뭐라는 거야. 내가 언제…….”
“그 정신 사나운 옷도 거슬리고. 인사랍시고 더럽게 굴러먹던 손을 갖다 대는 것도 싫고.”
디에렌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블랙이 성큼 한 발을 내디뎌 디에렌의 손목을 홱 낚아챘다.
“으읏! 이거 놔!”
방금 전까지 부러트린다느니 하는 말을 해서 그런지 선연한 공포감이 들었다. 디에렌이 미친 듯이 붙들린 팔을 흔들었다. 그러나 제 힘으로는 도무지 뿌리칠 수가 없었다.
“돌아가.”
얼음처럼 번들대는 푸른 눈이 뒤엉킨 팔 너머에서 이쪽을 응시했다.
“팔다리가 멀쩡할 때.”
“그, 무슨…… 미, 미친……. 공국에 대한 예, 예의를 지켜야 할 인간이…….”
“대답해. 언제 간다고?”
블랙이 손에 힘을 주었다.
“으아악!”
디에렌이 비명을 질렀다. 시종은 완전히 겁에 질린 나머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대답이 지금이면 좋고.”
“으악! 놔! 놓으라고! 이 미친,”
손목이 부러졌으면 디에렌도 블랙이 진심이라는 걸 곧장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 리에네가 찾아왔다. 디에렌을 보러 온 게 아니라 블랙을 찾아서 디에렌의 방까지 오게 되었다.
“로드 티와칸?”
“…….”
거짓말처럼 손목을 쥐어짜던 힘이 사라졌다.
“여긴 어떻게 왔습니까?”
“로드 티와칸을 찾아서요. 손님과 담소를 나누고 계셨나요?”
디에렌이 눈을 부릅떴다.
“담소는 무슨……!”
그러나 블랙이 빨랐다. 그는 몸을 돌리면서 디에렌의 발등을 꽉 밟았다. 디에렌은 말문이 막히고, 리에네는 미처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공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해서 인사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뭔가 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혹시 말다툼이라도 있는 건가 했어요.”
블랙이 부드럽게 웃었다.
“원래 살가운 사이가 아니라 말투가 거칠어질 때가 있습니다.”
“두 분이 의형제라 그런 건가요? 저는 형제나 자매가 없어서 모르지만 사이가 좋은 동기간에는 허물이 없다고 들었어요.”
“사이가 좋진 않습니다.”
디에렌은 발등이 밟혀서가 아니라 기가 막혀서 말을 잃었다. 제대로 겁을 먹은 시종은 디에렌이 혹시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무슨 말이라도 하면 말려야겠다고 다짐하며 옷자락을 꼭 붙들고 있었다.
“돌아가시게 되었다니 작별인사를 드려야겠네요.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아침에 출발하시는 건가요?”
“…….”
디에렌이 곧장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을 두르륵 굴렸다. 쥐어 짜이던 손목이 이제야 시큰대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뼈에 금이라도 간 게 아닐까 싶었다.
“공자……?”
“봐, 서요.”
디에렌이 남은 자존심을 그러모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말이었다. 당장 간다는 말은 죽어도 하기가 싫었다.
“날씨를 봐서. 비가 오면 안 될 테니.”
그러자 리에네 공주는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쓰게 웃었다.
“그렇다면 내일 떠나시겠네요. 나우크는 지금 가뭄입니다.”
그 표정이 문제였다.
“공주님께서 원하시면 머물겠습니다.”
아니, 디에렌에게 나우크의 가뭄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그는 저 내키지 않는 표정이 자신이 떠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라고 착각했다.
“누가 뭐라고 한들 곁에 있겠습니다.”
“……공자께서 나우크에 머무르셔야 하는 이유가 비라면, 그 어떤 일보다 더 간절히 원하겠지요.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군요.”
“그러니까 그 말은…….”
“부디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평온하길 바라겠습니다.”
디에렌이 의도한 일은 아니었지만 리에네는 조금 화가 났다. 21년간이나 가뭄이 든 나라에 비 타령을 하고 있는 그가 너무 무례하지 않나 싶었다. 디에렌을 등진 리에네가 블랙의 손을 잡았다.
“형제가 일찍 돌아가서 서운해요? 내가 좀 더 머물도록 청하면 좋겠어요?”
“그럴 리가.”
“솔직해도 괜찮아요.”
“이런 사소한 일에 내 감정을 숨기지는 않습니다. 우린 신혼인데 예정에 없던 손님 뒤치다꺼리에 시간을 빼앗기는 건 싫습니다.”
그런 것치고 손님 대접을 받은 기억이 없었다.
“시기가 공교로웠던 것 같긴 해요. 나도 다른 일에 당신을 빼앗기는 건 싫으니까.”
두 사람의 거리가 둘만 있을 때처럼 가까워졌다.
“그래서 데리러 온 겁니까?”
“꼭 그런 건 아니고…… 전할 말이 있어서요. 중요한 일이에요.”
“그럼 방으로 가야겠군요.”
“네.”
두 사람은 그렇게 디에렌의 방에서 사라졌다.
“왜…….”
디에렌은 한참 뒤에야 짤막한 혼잣말을 내뱉었다. 유감스럽게도 시종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왜 저렇게 사이가 좋아 보이느냐는 말이었다. 시종은 예의상 남들 다 아는 건데 공자님만 모르고 계셨다는 말을 하진 않았다.
“짐을 챙기겠습니다, 저하.”
아무래도 내일 일찍 이곳을 떠나야 할 것 같았다. 팔다리가 부러진 디에렌을 끙끙대며 마차 바닥에 눕히게 되기 전에. * * *
“테르난 클라인펠터.”
기억 속에 있는 이름이었다. 블랙은 그를 마주했던 기억이 있었다. 선명하진 않아도 완전한 암흑은 아니었다. 분명 그가 신전으로 그를 찾아왔다. 선친이 아닌 그를.
-저주받은 왕자님.
그가 건넨 인사였다.
-그건 모두 왕의 잘못입니다.
기억을 더듬는 블랙의 미간이 계속 찌푸려졌다. 리에네가 곁으로 다가가 미간을 어루만졌다. 블랙이 그 손을 잡아 손끝에 키스를 했다.
-왕이 신의 권능을 훔쳤기에 왕자님이 대신 벌을 받고 있는 겁니다.
페르난드 왕자는 그 말을 기억했지만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니 왕자님이 신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테르난 클라인펠터가 침대에 앉아 있는 그의 곁으로 다가와 고개를 낮추고 은밀히 속삭였다.
-다음에 왕이 오면, 열쇠를 훔치세요. 신의 권능을 숨겨 놓은 곳의 열쇠입니다.
어떤 열쇠를 말하는 걸까. 페르난드 왕자가 알기론 아바마마는 아주 많은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그 열쇠를 신전 제단에 바치세요. 그게 왕자님이 신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들을수록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테르난 클라인펠터가 사라졌다. 종종 몸이 너무 아플 때에는 그가 한 말이 달콤한 선악과처럼 떠올랐다. 열쇠를 바치면 더는 아프지 않을 것이라 했다. 1년 뒤 홍역을 앓던 페르난드 왕자는 신전을 찾아온 왕에게 열쇠를 달라고 했다. 왕은 그로부터 3일 뒤에 죽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건 모두 반역의 밑그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