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사라진 권능2022.02.09.
“미친놈이네, 그거. 완전 악질이잖습니까. 아이를 상대로 사기를 치다니. 아니, 사기 정도가 아니지. 반역이었으니.”
페르모스가 드물게 흥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 핏줄은 다 그렇게 글러 먹은 모양입니다.”
리에네가 쓴 표정을 지었다.
“부정은 못 하겠네요.”
클라인펠터가 저지른 짓은 끝도 없었다. 그렇게 일궈 온 권력으로 지금껏 이 말라 가는 왕국을 거머리처럼 빨아먹고 살았다. 그리고 그 힘을 빌려 왕이 된 게 선친이었다. 블랙은 개의치 않는다고 했지만 리에네는 도무지 제게 흐르는 피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
블랙은 리에네가 무슨 생각으로 쓴 얼굴을 하는지 곧장 알아보았다.
“클라인펠터가 글러 먹게 태어난 건 공주님 잘못이 아닙니다.”
“알아요. 그렇지만…….”
“알면 됐어요. 다른 말은 필요 없습니다.”
“…….”
“그런 말을 할 때마다 키스할 겁니다. 장소가 어디든.”
블랙이 단호하게 덧붙인 말 때문에 어이없게도 이 상황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키스가 전부인 것처럼 말하지 말아요. 그런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공주님 입은 막을 수 있습니다.”
“입을 막는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될 겁니다. 키스는 평생 할 테니까.”
“…….”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야. 그런데도 두 팔이 먼저 그를 끌어안았다. 어쩔 수 없겠네. 이 남자가 평생 억지를 쓰겠다면 내가 들어야지. 그게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블랙의 손이 다정하게도 등을 쓸었다.
“선친은 내 기억에도 바람직한 왕은 아니었습니다. 클라인펠터가 저지른 짓은 제 욕심을 위한 것이었겠지만 다른 귀족들을 끌어들일 명분이 있었을 겁니다.”
“그건…… 그게 신의 권능을 훔쳤다는 말과 연관이 있을까요?”
“아마도.”
“대사제는 그게 뭔지 알고 있을 거예요.”
리에네가 뭔가를 짚어냈다. 차마 마주 볼 수가 없어서 블랙의 가슴에 파묻고 있었던 고개가 번쩍 들렸다.
“테르난 클라인펠터가 신전으로 찾아왔었다고 했잖아요. 아무도 모르게 신전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요. 최소한 누군가가 몰래 들여보내 줬을 거예요. 당시 대사제라면 어떻게 된 건지 알지도 몰라요.”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럼 지금 당장 신전으로 가 봐야겠습니다!”
페르모스가 안경을 달깍대며 소리쳤다.
“제 짐작이지만 그건 분명히 나우크의 이상 가뭄과 연관이 있을 겁니다.”
“가뭄과요?”
“그 모든 일이 우연일 리는 없잖습니까. 반역은 21년 전에 일어났고, 나우크에 가뭄이 시작된 것도 21년 전입니다. 그리고 신의 권능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비는 신의 영역입니다.”
리에네는 한 대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걸…… 인간이 훔칠 수 있나요? 그러니까, 인간이 비를……?”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래도 뭔가가 있었을 겁니다. 으아, 주군께서 기후를 공부한 학자들을 데려오겠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곧장 추진할 걸 그랬습니다. 그랬다면 답을 얻기가 더 쉬웠을 텐데요.”
그것도 놀라운 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리에네가 블랙을 향해 고개를 휙 돌리며 물었다.
“천천히 할 생각이었습니다. 시간은 많으니까.”
“하……. 당신은 대체 어디까지 나를 놀라게 할 셈이에요. 나는 그런 건 조금도 생각을 못 했는데.”
“공주님도 했을 겁니다. 클라인펠터가 없었다면.”
“두고 봐.”
리에네가 다시 블랙을 끌어안았다. 블랙은 그런 리에네가 사랑스럽다는 듯 조용히 웃었다.
“나도 뭔가 할 거예요. 내가 했어야 했던 일이에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페르모스가 끼어들었다.
“음……. 두 분께서 아주 사이가 좋고, 음, 또 군주로서 서로의 덕목을 고양하는 것도 매우 몹시 정말로 좋은 일입니다만, 더 시급한 일이 있다는 걸 상기해 주십시오. 대사제를 만나는 건 아무래도 과거를 알고 있는 주군께서 직접 하시는 게 더 효과가 좋을 듯합니다.”
“내 생각도 그래.”
“쇠뿔은 단김에 빼랬다고 지금 출발할까요?”
시간을 끌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테르난 클라인펠터가 모습을 감춘 지금, 그가 무슨 짓을 할 거라는 가정하에 대응은 빠를수록 좋았다.
“그렇다면.”
“같이 가요.”
리에네가 블랙을 안았던 팔을 놓고 말했다.
“아니요. 공주님은 여기 있어요.”
“왜요. 내가 아는 게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긴 해도 성 밖에는 클라인펠터가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모르는 와중에 공주님을 함부로 노출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가 너무 조심스럽게 군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반대는 할 수 없었다. 그가 어떤 마음인지 자신도 알았다. 아무리 얕은 연못이라 하더라도 발을 넣게 만들 수 없는 마음이라는 것을. 나도 그랬을 테니까.
“공주님이 성에 있는 편이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알겠어요.”
리에네가 발끝을 들어 블랙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럼 아주 빨리 다녀오세요. 내가 놀랄 정도로.”
블랙이 리에네의 허리를 안아 몸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는 이제 리에네가 가장 편한 자세로 제 목을 안을 수 있는 높이를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할 테니 공주님도 나를 놀라게 해 줘요.”
“어떻게요?”
“그건 공주님께 맡기겠습니다.”
“음……. 놀라게 하는 건 자신 없는데.”
“그렇지 않을 텐데요. 공주님은 이제껏 만난 사람 중에서 나를 가장 많이 놀라게 한 사람입니다.”
블랙이 낮게 속삭이며 귓불을 입술로 눌렀다.
“다녀오겠습니다.”
잠깐 신전에 다녀오는 것일 뿐인데 왜 이렇게나 애틋한 걸까. 나는 이제 이 남자와 떨어져 있는 시간은 아무리 짧아도 못 참게 되었나 봐.
“빨리 와야 해요.”
“계속 그러면 못 갑니다.”
블랙이 웃는 얼굴로 리에네를 내려 주었다. 하지만 산뜻한 동작과는 달리 시선은 계속 뜨거웠다.
“자지 말고 기다려요.”
“그럴게요.”
살갗에 달라붙는 것 같은 시선을 남겨두고 블랙이 신전으로 떠났다.
* * *
“무, 무서워하지 마세요. 공주님 곁에 있으라고 해서 와, 왔습니다.”
블랙이 떠나고 달이 떴다. 평소라면 씻고 잘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오늘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제 혼자 침대에 눕는 일은 결코 하고 싶지 않은 일이 되어 있었다. 씻지도,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창가에 잠시 앉아 있었는데 뜻밖에도 클리마가 찾아왔다.
“……? 무섭지 않아요. 그런데 여기 와 있으면 어떡해요. 부인 곁에 있어야지요.”
“어, 어머니는 친구분이…… 아니, 그게 다른 부인이 계셔서……. 아, 그런데 공주님 옆에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누가요?”
“페르난드 왕자님, 아니, 주군께서. 그리고 부관도.”
“이상하네요. 왜 그랬을까.”
리에네는 몰랐지만 그건 클리마가 암살 훈련을 받은 탓이었다. 본인이 뛰어난 암살자였으니, 역으로 암살자를 막는 역할도 해낼 수 있었다. 블랙은 나우크 성 안에서 리에네가 사라졌던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클라인펠터라는 이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겉으로는 순박하기만 한 클리마를 보고 있으면 그가 암살을 대비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게 잘 믿기지 않긴 했다. 게다가 리에네 옆에 있으면 괜히 목덜미가 붉어지고 말을 한 번씩 더듬는 통에 클리마는 더 어리숙해 보였다. 그건 아마도 리에네가 아주 맛있는 과자를 주고 간 다음부터 시작된 듯싶었다.
“아, 마침 잘 되었네요. 잠이 안 와서 왕실 기록서를 살펴볼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동행해 주겠어요?”
“어, 어디든 모셔 갈 겁니다. 어디든.”
클리마가 붉어진 얼굴로 정색을 하고 답을 하는 바람에 리에네가 살짝 웃었다.
“고마워요, 렌펠 경.”
혼인식 이후로 리에네는 클리마를 새 이름으로 불렀다. 엄밀히 말해 클리마는 아직 기사가 아니었지만, 헨튼 기사에 대한 예우로 그 아들에게도 경의 작위가 주어졌다.
“앞장서세요. 왕의 집무실로 가야 해요.”
“아, 아니 저는 뒤에서 가야…… 그게, 길을 잘 모르니 공주님께서 앞에…… 앞에 가셔야 합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거기 촛대를 집어 주세요. 복도가 어두울 테니까.”
“네, 네.”
클리마는 촛대를 집으라는 말에 뜨거운 촛농이 흐르는 초를 덥석 집어 건넸다.
“앗, 그러면 뜨거워요! 촛대를 잡으면 되는데!”
리에네가 황급히 촛대를 받아들었다. 야단을 맞은 아이처럼 클리마가 어깨를 움츠렸다.
“아, 아는데……. 아, 저는 뜨거운 걸 쥐어도 괜찮습니다. 많이 잡아 봐서 이제는 아프지 않습니다.”
리에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뜨거운 초를 맨손으로 잡는 것도 참회의 기도를 하는 방법이었나요?”
“그중에 하나였습니다.”
“……이제 그 기도는 그만두기로 했잖아요. 그러니까 뜨거운 초도 쥐지 말아요.”
“아, 알겠습니다.”
클리마의 뒷목이 또 괜히 붉어졌다.
“가요, 이제.”
길을 앞장서느라 리에네는 제 발자국을 얌전히 따라오는 클리마가 어두운 복도를 향하는 눈에 경계를 풀지 않는 사실을 몰랐다. * * * 왕실 기록서를 떠올렸을 때만 해도 리에네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블랙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잠이 들기 싫었고, 그러자니 뭐라도 해야겠다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왕실 기록서에서 보려던 것은 가뭄에 대한 기록이었다. 페르모스가 말한 대로 가이너스 왕가의 마지막 왕, 펨브로윈 왕이 죽고 나서 가뭄이 시작되었다면 그전에는 기록서에 가뭄이라는 말이 없어야 했다.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기록서를 살피다 보니 가벼운 마음 같은 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리에네는 정신없이 기록서를 파고들었다. 희미한 글자를 보기 위해 촛불을 너무 바짝 들이대서 머리카락이 타들어 갈 뻔한 사실도 몰랐다. 클리마가 화들짝 놀라 초를 빼앗지 않았다면 머리 한쪽이 흉하게 됐을 것이다. 덕분에 클리마는 또다시 뜨거운 초를 맨손으로 쥐어야 했고, 리에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아예 초를 클리마에게 맡겼다.
“뭐, 뭘 찾으시는 겁니까?”
“강우량이요. 비가 오면 매번 기록을 하거든요.”
“비가 얼마나 왔는지 그런 것 말입니까?”
“맞아요.”
리에네는 클리마가 블랙보다 더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혹시 어릴 때 기억이 남아 있나요? 20년보다 더 이전이요. 그때는 비가 많이 왔던가요?”
“비는…… 어, 음……. 자,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보다는 조금 더 왔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비는 계절마다 다르게 오니까…….”
“기록도 그래요.”
강우량을 비교해 보면 지금은 확실히 가뭄이 맞긴 했다. 계절도 그랬고, 비가 거의 오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연도를 한참 거슬러 올라가도 강우량이 지금보다 월등히 많지는 않았다. 이전에도 비가 오래도록 오지 않은 날은 많이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은 그때는 에베트 강이 말랐다는 기록이 없었다.
“봐요. 여기요. 이때도 반년이 넘게 비가 오지 않았대요. 그런데 농작물 수확량이나 왕실에 내는 세금은 줄어들지 않았어요.”
“그, 그게?”
“비가 오지 않았어도 물이 부족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지금과는 달리.”
“아……? 왜, 왜 그런 겁니까?”
“그걸 모르겠어요.”
에베트 강은 풍요롭게 흘렀고, 아홉 줄기의 폭포도 매일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었다고 했다. 당시의 세수를 보면 나우크는 정말로 부유한 곳이었다. 비가 적은 것도 문제였지만, 비가 많이 와도 농작은 힘들었다. 나우크는 비가 자주 오는 곳은 아니었지만 수량은 늘 풍부했다. 그야말로 신이 축복한 것 같은 대지였다.
“왜 강이 마른 걸까. 아홉 개의 폭포까지 함께.”
마치 누군가 물이란 물은 전부 거둬가 버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