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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웨로즈의 귀환 (91/145)

91. 웨로즈의 귀환2022.02.13.

16550959524871.jpg-신의 권능을 왕이 훔쳤습니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인간이 어떻게 물을 가져가 버릴 수 있지. 한창 생각에 매몰된 리에네가 저도 모르게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그러다 미간에 클리마의 손가락이 닿아 와 깜짝 놀랐다.

16550959524877.jpg“왜……?”

16550959524871.jpg“으아, 아아……! 아, 아니! 그러니까 손이……!”

리에네보다는 오히려 클리마가 더 놀란 듯했다. 그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서 손을 마구 내저었다.

16550959524871.jpg“손이 그냥…… 제가 하려던 게 아니라…… 그냥, 그냥…… 주름이 져서…….”

16550959524877.jpg“아…….”

리에네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59524877.jpg“그래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그런데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요.”

클리마가 했던 일은 오늘 자신이 블랙에게 했던 일이었다. 주름이 져서 아파 보이는 미간을 펴 주었다. 클리마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과 꼭 같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블랙이 아닌 사람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필요 없는 일이었다.

16550959524871.jpg“아,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클리마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16550959524877.jpg“주름을 신경 써 준 일을 노여워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16550959524871.jpg“아, 알겠습니다.”

클리마가 몹시 미안해하는 얼굴로 거리를 벌렸다. 리에네는 그제야 그들이 아주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왠지 공기가 어색해지는 것 같아 리에네가 가벼운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16550959524877.jpg“내게 오기 전까지는 헨튼 부인과 함께 있었죠? 부인의 상태는 어떤가요? 많이 좋아졌어요?”

16550959524871.jpg“예, 예. 어머니는 이제 많이…….”

16550959524877.jpg“많이……?”

그때였다. 클리마가 갑자기 눈을 번득이며 리에네의 입을 틀어막았다.

16550959524877.jpg“……!”

16550959524871.jpg“쉿.”

당황해 손을 뿌리치려는 리에네에게 클리마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16550959524871.jpg“밖에 누가 있는 것 같습니다.”

16550959524877.jpg“……?”

클리마가 소리 없이 손바닥으로 촛불을 눌러 꺼트렸다. 숨 막히는 어둠이 찾아들었다. * * *

16550959547159.jpg“아무래도 신경 쓰여.”

아직 마무리가 덜 된 계단이 가물가물하게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섬뜩한 속도로 말을 달리는 와중에도 블랙이 혼잣말을 툭 내뱉었다.

16550959547164.jpg“뭐가, 후우, 문제입니까.”

페르모스는 그런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블랙은 적이나 수하나 공평하게 방심할 틈이 없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16550959547159.jpg“헨튼. 새 이름은 렌펠이었나.”

16550959547164.jpg“우리 귀여운 막내 말입니까?”

블랙이 어이없다는 듯 잠시 페르모스를 돌아보았다.

16550959547159.jpg“귀엽다고?”

16550959547164.jpg“다들, 후, 막내가 간만이라 귀여워들 하고 있습니다.”

16550959547159.jpg“……맹목적이잖아.”

16550959547164.jpg“아, 그래서, 후우, 더 귀엽지 않습니까? 오리 새끼가 어미를 따르는 것 같잖습니까.”

16550959547159.jpg“그게 리에네라는 게 문제겠지.”

16550959547164.jpg“아, 이런……. 그런 뜻이었습니까.”

페르모스가 속으로 끄응, 앓는 소리를 삼켰다. 렌펠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된 클리마가 리에네 공주에게 맹목적이라는 건 다들 눈치채고 있는 일이었다. 수업 중에는 무섭도록 집중력이 좋은 그가 갑자기 넋을 놓고 얻어터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건 어김없이 리에네 공주의 모습이 저 멀리서 언뜻 스쳐 갈 때였다. 그가 나이와는 상관없이 티와칸의 막내 노릇을 하게 된 것도 아르사크의 수호기사가 되겠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페르모스는 그걸 문제라 생각하지 않았다. 암살자라는 과거 때문에 더할 나위 없는 호위기사가 될 수 있듯이, 애정보다 더 맹목적인 그의 감정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이다.

16550959547164.jpg“오히려 그래서 더 공주님의 안전을 맡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막내가 음…… 불손한 마음을 품지도 않을 테고.”

16550959547159.jpg“그건 나도 알아.”

16550959547164.jpg“그런데요?”

16550959547159.jpg“신경이 쓰인다는 거야. 누가 됐든.”

16550959547164.jpg“아…….”

남녀 사이의 애정사에 무지한 페르모스는 이제야 블랙이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그냥, 이놈이고 저놈이고 얼쩡대는 것들이 죄다 거슬린다는 말이겠네. 원래 이런 분이었나……. 그래, 그랬겠지. 내가 몰랐던 거겠지.

16550959547164.jpg“그럼 공주님의 호위를 다른 놈으로 바꿀까요?”

16550959547159.jpg“……아니. 헨튼이 제일 나아.”

그야 그렇지요. 이미 결론을 내린 얘기지 않습니까.

16550959547159.jpg“그래도 거슬려.”

16550959547164.jpg“…….”

페르모스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블랙도 딱히 대안을 찾아내라고 말을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속 신경이 쓰이니 참지 못하고 한마디 뱉어내신 거겠지. 그래, 주군이 저렇게 부질없는 말도 하시는 분이었구나…….

16550959547164.jpg“대사제 말입니다.”

다행히 화제는 무사히 옮겨졌다. 어쨌거나 이쪽이 더 중요한 사안이었으니까. 아니, 어쩌면 주군께는 저쪽이 더 중요하겠지만. 어쨌거나.

16550959547164.jpg“생각을 좀 해 봤는데 여전히 애매하더군요. 그자를 신뢰하십니까?”

16550959547159.jpg“아니.”

답이 너무 즉각적이라 오히려 페르모스가 당황할 정도였다.

16550959547164.jpg“대사제로 만드셨잖습니까.”

16550959547159.jpg“마침 적당했으니까. 그 덕에 혼인식과 그 빌어먹을 조약을 해결했고.”

16550959547164.jpg“그건 그랬지요. 대사제는, 그럼 21년 전에는 그것들과 손을 잡은 쪽이었습니까?”

16550959547159.jpg“내 기억으로는.”

그를 한 팔에 안은 채 기사 헨튼이 말했다.

16550959524871.jpg-너희가 한 짓을 신은 기억할 것이다.

클라인펠터 가의 누군가가 비죽비죽 웃으며 대꾸했다.

16550959524871.jpg-글쎄. 그건 신관들이 알아서 해결해 주겠던데?

16550959524871.jpg-가이너스의 핏줄에 저주를 내린 게 신이라니까, 그 핏줄을 없앤 우리는 신의 사자가 아니겠나.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다. 헨튼은 신전까지만 가면 살 수 있을 거라 했지만, 사실은 그럴 수 없으리라는 것을. 대사제는 신의 입이었다. 신이 축복을 내릴 때에도, 저주를 내릴 때에도 그걸 알리는 건 대사제였다.

16550959547164.jpg“그럼 몸이 그 지경이 된 건, 음……. 손을 잡은 놈들과 중간에 이해관계가 틀어졌다고 봐야겠군요.”

16550959547159.jpg“둘 중 하나겠지. 틀어졌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이용만 당하고 버려질 패였거나.”

16550959547164.jpg“둘 다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상처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건 죽이려고 한 게 아니라 오히려 고문의 흔적 같았습니다.”

16550959547159.jpg“고문이라……. 말이 되는군. 놈들은 마나우가 뭔가를 알고 있다고 짐작했을 것이다.”

16550959547164.jpg“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고문은 통하지 않았고, 놈들은 새로운 대사제를 그 자리에 앉혀 놓고 신전을 장악했다……. 음, 그렇다면 안타까운데요. 대사제도 아는 게 없나 봅니다.”

16550959547159.jpg“그래도 얘기는 해야 해. 적어도 열쇠가 뭔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16550959547164.jpg“아, 그렇겠군요.”

그사이 티와칸은 신전 계단 앞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두 발로 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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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쿵쿵…… 쿵. 선명해진 발자국 소리가 멎었다. 똑똑. 이어서 들리는 것은 노크 소리였다.

16550959524871.jpg“공주님. 여기 계십니까?”

16550959524877.jpg“……?”

리에네는 그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의외긴 했지만 경비대 부대장의 목소리였다. 리에네가 손을 들어 제 입을 막은 클리마의 손을 치우라는 신호를 보냈다. 클리마도 뒤늦게 신원을 알아채고는 허둥지둥 손을 치웠다.

16550959524877.jpg“네. 들어와요.”

문을 열고 들어온 부대장은 당황한 눈치였다.

16550959524871.jpg“……?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뭘 하고 계셨습니까? 그리고 저자는…….”

16550959524877.jpg“왕실 기록서를 읽던 중이었는데 중간에 초가 넘어지는 바람에 불이 꺼졌어요. 그래서 허둥대던 참이었어요. 이쪽은 로드 티와칸께서 제 개인 호위를 맡긴 사람이고요.”

16550959524871.jpg“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저는 개인 호위에 대한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16550959524877.jpg“혼인식 다음에 결정된 일이었으니까요. 그나저나 이 시간에 나를 찾아온 용무가 뭔가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16550959524871.jpg“예, 공주님. 웨로즈 경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아무래도 당장 말씀을 올리는 게 좋을 듯해서…….”

16550959524877.jpg“세상에! 웨로즈 경이요?”

한 달이 넘게 소식이 없던 사람이었다. 리에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16550959524877.jpg“지금 성에 도착했나요? 어디 있어요? 나를 보자고 하던가요?”

16550959524871.jpg“그게…… 문제가 있습니다.”

16550959524877.jpg“문제라니요?”

16550959524871.jpg“많이 다치셨습니다.”

16550959524877.jpg“다치다니…… 얼마나요?”

16550959524871.jpg“운신이 어려울 정도라…… 일단 경비대 숙소에 급히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누워 있다는 얘기였다. 리에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59524877.jpg“그렇다면 내가 갈게요. 안내해요.”

16550959524871.jpg“예, 공주님.”

부대장이 꾸벅 허리를 숙인 뒤 몸을 돌렸다. 클리마가 등 뒤에서 리에네의 옷자락을 조심스레 붙들었다.

16550959524871.jpg“내일 아침에 가시면…….”

16550959524877.jpg“네? 그럴 이유가 있나요?”

16550959524871.jpg“아니, 그냥……. 지금은 너무 늦고 그랬으니까요.”

16550959524877.jpg“웨로즈 경은 내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에요. 그런 이유만으로는 외면할 수 없어요.”

16550959524871.jpg“그, 그렇다면…….”

클리마가 별수 없다는 듯 옷자락을 놓았다. 그래도 옅게 굳은 얼굴은 여전했다. 왠지 좀 전부터 기분이 이상했다.

16550959524871.jpg“조, 조심해야 합니다…….”

리에네는 클리마가 처음으로 호위 임무를 맡아 많이 긴장한 탓이라고 여겼다.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입을 틀어막고 불을 껐지만 정작 나타난 사람은 경비대 부대장이었다.

16550959524877.jpg“알겠어요.”

리에네는 괜찮다는 의미로 클리마의 손을 살짝 잡았다 놓았다. 아직도 웨로즈가 돌아왔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다. * * *

16550959524871.jpg“여깁니다, 공주님.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있습니다.”

웨로즈는 온통 부목과 붕대투성이였다.

16550959524877.jpg“세상에……. 어쩌다 이렇게 다친 건가요.”

성벽 아래 붙어 있는 경비대 숙소는 조금 묘한 기운이 감도는 중이었다. 티와칸이 아르사크의 수호기사단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된 뒤로 기존 경비대와 알게 모르게 알력다툼이 있긴 했다. 티와칸은 별 쓸모도 없는 경비대는 정리하자는 쪽이었고, 경비대는 그들을 낯선 침입자처럼 대했다. 용병 전체가 기사 서품을 받았으니 경비대의 위치는 한층 더 애매해졌다. 경비대에서 기사 작위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왕실 기사단과 경비대는 업무가 구분되긴 했지만, 기존 경비대가 하는 일이 티와칸의 눈에 찰 리 없었다. 결국 페르모스와 랜달이 경비대 업무를 뜯어고치게 되었는데, 성의 수비가 공고해진 것과는 별개로 경비대의 불만은 커졌다. 웨로즈의 귀환은 그 와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가 혼자 돌아왔으면 분위기가 달랐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운신이 어려운 탓에 그를 데려온 자들이 있었다. 신원을 알 수가 없었다. 저마다 칼을 찬 것을 보면 기사 비슷한 자라는 걸 알았지만 긴장감이 확연히 드러났다. 티와칸이 그들을 감시하는 건 당연했다. 경비대는 웨로즈를 데려다준 은인들을 마땅히 손님으로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6550959524871.jpg“그건 알 수 없습니다. 데려온 자들의 말로는 길에 쓰러져 있던 웨로즈 경을 발견했고, 중간에 정신을 차렸을 때 나우크로 데려다 달라는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16550959524877.jpg“그렇군요.”

리에네가 착잡한 얼굴로 웨로즈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보면 웨로즈는 지난 한 달간 의미 없는 고생을 한 셈이었다. 그가 캐내고자 했던 티와칸의 비밀은 결국 리에네도 알게 되었고, 그것은 함께 다독여 가는 희미한 상처 자국으로 남았다. 깨어나면 그 사실에 더 허탈해할까 봐 마음이 쓰였다.

16550959524877.jpg“의사는요? 지금 오는 중인가요?”

16550959524871.jpg“그게…… 사실 시간이 늦어 공주님께 여쭤보려던 참이었습니다.”

16550959524877.jpg“그랬군요. 즉시 사람을 보내도록 하세요. 치료를 받은 것 같아 보이긴 하지만, 그게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으니 의사가 필요해요.”

16550959524871.jpg“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16550959524877.jpg“웨로즈 경을 데려온 자들은요? 어떻게 하기로 했나요?”

16550959524871.jpg“경비대 숙소에 묵도록 했습니다. 보답을 바라는 것 같은데 그것도 공주님께 여쭤야 해서…….”

부대장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딱딱해졌다.

16550959524871.jpg“……그런데 티와칸 측은 돈을 주고 내보내자는 입장입니다. 우리의 손님인데도요.”

리에네는 그 표정에 담긴 본심을 읽었다. 부대장은 티와칸의 결정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었다.

16550959524877.jpg“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16550959524871.jpg“신원을 보증할 수 없다는 이유입니다. 아니, 웨로즈 경을 모셔 왔는데 그보다 더한 보증이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16550959524877.jpg“그자들은 무얼 원하던가요?”

16550959524871.jpg“여독이 너무 쌓여 일단 피로를 풀고 싶다 했습니다. 지금 당장 성을 나가면 묵을 곳을 찾기도 쉽지 않으니까요. 돈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당장 쓸 수 없다면 말이지요.”

16550959524877.jpg“내가 티와칸과 얘기를 해 보겠어요. 일단 의사를 데려와 줘요. 경비대는 웨로즈 경의 상세에만 신경을 써 주면 되겠습니다.”

16550959524871.jpg“공주님……. 설마 티와칸의 편을 드시는 겁니까?”

16550959524877.jpg“경. 티와칸의 새 이름이 아르사크의 수호기사라는 건 알고 있는 건가요? 편을 든다는 말은 당치 않아요.”

16550959524871.jpg“……실언했습니다.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부대장이 애써 한발 물러섰다. 그 역시 충성스러운 자였지만 지금은 티와칸에 대한 불만이 더 큰 상태였다. 리에네는 그에게서 눈을 돌려 침대에 누워 있는 웨로즈의 손을 잡았다.

16550959524877.jpg“웨로즈 경……. 고생 많았어요. 어서 나으리라 믿어요.”

16550959524871.jpg“…….”

웨로즈의 눈꺼풀이 어둑한 촛불 아래 짧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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