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 중독 (1) (92/145)

92. 중독 (1)202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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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59796902.jpg“웨로즈 경의 귀환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랜달은 단호했다.

16550959796902.jpg“경비대와 사이가 삐걱대는 것은 뭐, 당분간 그러리라 각오했던 일이고요. 저로서도 웨로즈 경이 있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부대장은 평소 뭘 먹고 사는지 그 나이에 벌써 꼰대 기질이 있어서…… 아니, 이건 못 들은 걸로 해 주십시오. 하여간 물증은 없는데 기분은 좀 찜찜합니다. 아, 경비대가 아니라 웨로즈 경을 모셔온 자들 말입니다.”

랜달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자리를 잡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에는 리에네도 동감이었다.

16550959796911.jpg“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것과 별개로 수상쩍다 여기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16550959796902.jpg“음……. 굳이 말하자면, 먼저 액수를 부르지 않았다는 것?”

16550959796911.jpg“보상을 원하는 게 아닌가요?”

16550959796902.jpg“생각해 보십시오, 공주님. 길에서 환자를 발견해 집에 데려다준 자들이 뭘 바랄지. 돈, 아니면 선행을 했다는 명예입니다. 돈을 바랐다면 대놓고 숫자를 밝혀야 합니다. 나우크는 일부러 오기도 쉽지 않은 곳이지 않습니까. 이틀 거리를 왔다고 하니 여비도 좀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놈들은 이도 저도 아니란 말이지요.”

리에네의 등 뒤에 그림자처럼 말없이 붙어 서 있던 클리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59796902.jpg“기, 기분이 안 좋…… 안 좋습니다. 그냥 이상해요.”

랜달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16550959796902.jpg“막내 너는 왜 말을 더듬고 그러냐? 어디 아프냐?”

16550959796902.jpg“아, 아니, 그게…… 걱정이 돼서…….”

오히려 리에네가 놀랐다.

16550959796911.jpg“원래 이런 말투가 아니었어요?”

16550959796902.jpg“……아, 아닌데…….”

16550959796911.jpg“나한테는 항상 이렇게 말했잖아요.”

16550959796902.jpg“아니……. 그, 그런…….”

랜달이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16550959796902.jpg“네가 그렇게 긴장하고 있으면 어쩌냐. 숨어든 놈들이 너 보고 저건 뭐냐고 하겠다.”

16550959796902.jpg“……자, 잘하겠습니다. 잘할 거예요.”

16550959796902.jpg“어, 그래.”

얘기가 잠시 샜지만 결론을 내려야 했다.

16550959796911.jpg“그럼 이렇게 해요.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묵게 하고, 내일 식사 대접 후 보내는 걸로요.”

16550959796902.jpg“그건…… 뭐, 그 정도는 어쩔 수 없겠지요. 대신 지켜보긴 해야 합니다.”

16550959796911.jpg“가능한 한 그자들은 모르게 하세요.”

16550959796902.jpg“물론입니다.”

얘기를 마쳤더니 그새 밤이 더 깊어져 있었다.

16550959796911.jpg“로드 티와칸은 더 늦어질 건가 봐요.”

지나치듯 묻자 랜달은 괜히 그가 더 쑥스러운 얼굴을 했다.

16550959796902.jpg“신전까지 오고 가는 시간이 있으니 아무래도요.”

16550959796911.jpg“그렇겠죠.”

클리마가 자꾸 기분이 이상하다고 하니까 자신도 물이 드는 느낌이었다.

16550959796911.jpg“그럼 나는 가 보겠습니다. 이 밤을 부탁해요.”

16550959796902.jpg“너무 염려 마십시오. 주군이 오실 때까지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오늘은 유난히 일이 많은 날이었다. 다시 본궁으로 돌아가려는 리에네 앞에 경비대가 다가섰다.

16550959796902.jpg“공주님. 샤르카 왕국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성문 밖에서 문을 열어 달라는 중입니다.”

16550959796911.jpg“네?”

16550959796902.jpg“공주님을 뵙자 하는 건 아니고, 여기 알리토 공국의 대공자가 계시다며 그분께 편지를 가지고 왔다 합니다.”

16550959796911.jpg“아…….”

누이가 샤르카 왕국의 왕자비라고 했지. 그렇다면 거절할 수 없는 사자였다.

16550959796911.jpg“신분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 주세요. 성 안으로 이동할 땐 꼭 경비대를 동행시키고요.”

16550959796902.jpg“알겠습니다.”

  * * * 샤르카 왕국은 나우크와 가장 가까운 곳이자 나우크가 20년 전 잃어버린 영화를 지금 누리고 있는 곳이었다. 가뭄으로 인해 많은 귀족과 상인들이 나우크를 등지고 샤르카로 이주했다. 그러다 보니 혈연으로 이어진 가문도 제법 있었고, 아예 같은 이름을 쓰는 자들도 많았다. 그만큼 밀접한 나라였는데, 그런 것치고는 왕실 간 왕래는 드물었다. 어쩌면 한 쪽이 일방적으로 잃는 관계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샤르카 왕국으로서는 나우크는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는 벌집이었다. 기다리고 있으면 알아서 야금야금 꿀을 가져다줄 테니.  

16550959796911.jpg“그랬다 해도 이젠 아니지.”

샤르카 왕국은 더는 단절된 곳이 아니었다. 티와칸과 알리토 공국이 연결되어 있으니 샤르카 왕국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샤르카에는 추방당한 클라인펠터가 있었다. 신분과 재산을 모두 잃었으니 지금은 아무런 힘도 없다지만, 클라인펠터의 뿌리가 모두 사라지지 않은 지금은 그들도 신경을 써야 했다.

16550959796911.jpg“모른 척할 수는 없어.”

리에네는 혼잣말을 작게 중얼대며 디에렌이 묵고 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16550959796902.jpg“……공주님?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16550959796911.jpg“샤르카 왕국에서 사자가 왔다고 들었어요.”

방문은 금방 열렸다. 디에렌의 시종은 군말 없이 리에네를 방 안으로 안내했다. 디에렌이 소파에 앉아 사자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샤르카에서 왔을 편지가 들려 있었다. 인사를 받고 맞은편 자리에 앉은 리에네가 눈으로 편지를 가리켰다.

16550959796911.jpg“샤르카 왕국은 이제 나우크로서도 아주 먼 타국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곳이 됐습니다. 혹시 무슨 변고라도 있나 얘기를 나눌까 해서 왔어요.”

16550959796902.jpg“변고…… 그렇군요.”

디에렌이 손으로 편지를 구겼다. 힘이 들어가는 손을 보고 리에네가 놀라 그를 불렀다.

16550959796911.jpg“공자?”

16550959796902.jpg“……누이의 남편이 죽었답니다. 사흘 전…… 아니, 하루가 지났으니 나흘 전에.”

16550959796911.jpg“그건…… 설마, 샤르카 왕국의 바셰드 왕자가요?”

16550959796902.jpg“네.”

놀라운 일이었다.

16550959796911.jpg“제가 알기론 젊고 건강한 분이었을 텐데……. 혹시 사고가 있었던가요?”

디에렌이 턱 선을 비틀며 말했다. 충격을 받은 건지, 아니면 화를 내는 건지 잘 모를 표정이었다.

16550959796902.jpg“사고라……. 잘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로 자세한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아서. 누이도 경황이 없이 써 내려간 것 같습니다.”

거짓말이었다. 편지의 내용은 물론 남편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담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극히 일부였고, 그 뒤로는 더 미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누이다운 짓이었다. 별다른 정황도 없이 남편이 죽었다고만 되어 있는 글귀에는 그 어떤 슬픔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누이는 위험천만한 도박을 시작했다. 심지어 지금으로서는 목적도 알 수 없는 도박이었다. 바셰드 왕자는 샤르카의 제1 왕자였다. 그가 죽었으니 누이는 자리보전에 급급해야 할 때였는데 남의 나라에서 사고를 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16550959796911.jpg“그럴 만도 하겠군요. 그럼 공자께서는 샤르카 왕국으로 가시나요? 장례식은 벌써 끝났다던가요?”

16550959796902.jpg“장례식은 끝난 듯합니다. 저는…… 네, 아무래도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마침 본국으로 가는 길보다 샤르카 왕국이 더 가까우니 누이를 위로하며 한동안 머물러야 할 듯합니다.”

16550959796911.jpg“비록 아직 샤르카의 왕자비와 일면식은 없지만 티와칸과 알리토 공국의 인연이 이어진 바, 제 깊은 조의를 전해 주세요.”

16550959796902.jpg“그러겠습니다.”

16550959796911.jpg“언제 출발하시나요?”

16550959796902.jpg“내일……. 아니, 어쩌면 지금부터라도 준비가 되는 대로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16550959796911.jpg“그럼 제가 도울 게 있다면 알려주세요. 성심껏 거들겠습니다.”

16550959796902.jpg“감사합니다, 공주님. 그럼 도움이 필요하면 기별을 넣겠습니다. 시간이 늦더라도 부디 무례를 탓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16550959796911.jpg“이런 상황에서 무례라니 당치 않습니다.”

되잖은 외모 칭찬을 하지 않는 디에렌 대공자는 한결 상식적인 사람이 되었다. 이런 사람이 왜 이제껏 종종 경우 없는 짓을 했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16550959796911.jpg“그럼.”

리에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디에렌이 무릎을 굽혀 인사를 했다. 그가 인사를 마친 다음 시종과 샤르카의 사자가 차례로 같은 인사를 했다. 클리마는 어설프게 아는 예법 대신 그냥 고개를 꾸벅 숙이고 리에네를 뒤따라 나왔다. 탁. 제 손으로 방문을 닫은 클리마가 목소리를 한껏 낮춰 말했다.

16550959796902.jpg“이상합니다. 저 사람.”

16550959796911.jpg“누가요?”

16550959796902.jpg“저 사자.”

방금 전부터 클리마는 전부 다 이상하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16550959796911.jpg“어떻게요?”

16550959796902.jpg“그냥 좀…… 표정이…….”

16550959796911.jpg“표정이?”

16550959796902.jpg“공주님을 자꾸 쳐다봤습니다. 안 보는 척하면서. 그래서 이상합니다. 그리고 손도.”

16550959796911.jpg“손?”

16550959796902.jpg“한 손을 계속 쥐고 있었습니다. 한쪽 손만. 그건 아주 이상한 일입니다.”

이상하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명확하게 걸고넘어질 수는 없는, 그런 애매한 것들이었다.

16550959796911.jpg“그런 거라면 일단은 경계하고 있을 수밖에 없겠군요.”

16550959796902.jpg“조심, 해야 합니다. 정말로 이상합니다.”

불안감이 입술을 새어나갔다.

16550959796911.jpg“……로드 티와칸이 빨리 돌아와 줬으면 좋겠어요.”

블랙이 제 곁을 떠난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며칠은 된 기분이었다. * * *

16550959796902.jpg“하마터면 들킬 뻔했군요.”

샤르카 왕국에서 온 사자는 쥐고 있던 손을 폈다. 그 손에 들린 건 자그마한 병이었다. 너무 작아서 용도를 알 수 없을 정도였다.

16550959796902.jpg“대체 이게 무슨 미친 짓이야!”

디에렌은 손으로 구기고 있던 편지를 홱 집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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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사이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흘러 편지 곳곳에는 얼룩이 번져 있었다.

16550959796902.jpg“쉿, 저하. 크게 말을 하시면 밖에서도 들립니다.”

누이가 보낸 사자는 샤르카 왕국의 사람이 아니었다. 대공이 오래도록 부리던 심부름꾼이었다. 누이는 르케스 왕국의 노예 출신이라는, 어디서 굴러먹다 온 지도 모를 인간을 혼인 선물로 받아 갔다. 부친은 차라리 삽으로 금을 퍼 가라며 고함을 질렀지만, 누이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이름이 바이야르라고 했을 것이다. 이름에서조차 비천한 냄새가 났는데, 이자는 이름을 바꾸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16550959796902.jpg“대답이나 해! 자기 남편이 죽었는데 왜 남의 나라 공주를 데려오라는 거야! 카비노 같은 위험한 약까지 먹여서!”

바이야르는 차분한 손짓으로 목소리를 낮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흥분한 것 같아 보이지만 디에렌도 사실 밖을 의식해 소리를 지르다 말긴 했다.

16550959796902.jpg“말씀이 어긋났습니다. 공주를 데려와야 하니 카비노를 먹이라는 겁니다. 맨정신으로는 힘들 테니까요.”

16550959796902.jpg“그러니까 왜!”

16550959796902.jpg“저는 그것까진 알지 못합니다. 공녀께서 지시한 일이니 따를 뿐입니다.”

그는 누이가 혼인을 한 지금도 왕자비 전하가 아닌 공녀라고 불렀다. 디에렌은 그가 진작 누이와 붙어먹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제 알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제 앞에서 누이의 뭐라도 된 것처럼 으스대는 꼴은 보기 역겨웠다.

16550959796902.jpg“지금 뭐가 뭔지 알지도 못할 일로 내 목을 걸라는 건가? 여기가 티와칸의 소굴이라는 걸 잊었어?”

16550959796902.jpg“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16550959796902.jpg“네까짓 게 뭘 알아서 하겠다는 건데.”

16550959796902.jpg“약도 제가 먹이겠습니다. 저하께서는 적당한 시간에 나우크의 공주를 이 방으로 불러 주시면 됩니다.”

16550959796902.jpg“미친……. 그 계획이 무사할 것 같나? 티와칸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16550959796902.jpg“저들의 수장은 자리를 비웠잖습니까.”

16550959796902.jpg“……뭐?”

디에렌이 놀란 것은 블랙이 마침 성을 비운 것을 모르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방금 도착한 바이야르가 그 사실을 알고 있어서였다.

16550959796902.jpg“어떻게…… 그걸 어떻게 알았어?”

16550959796902.jpg“저는 오늘 여기에 도착한 게 아닙니다. 미리 와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16550959796902.jpg“뭐라고? 대체 언제부터 왔었다는 소리야?”

16550959796902.jpg“바셰드 왕자가 죽기 전에 출발했습니다.”

16550959796902.jpg“무슨…… 미친…….”

죽기도 전에 죽었다는 편지를 보냈다는 건 왕자가 죽을 것을 알았다는 뜻이었다. 죽을병에 걸려 오늘내일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결론은 하나였다. 누이가 바셰드 왕자를 죽인 것이다.

16550959796902.jpg“죽여서…… 아니, 좋아. 허약한 주제에 난봉꾼 노릇이나 하는 남편이 지긋지긋해서 죽였다고 쳐. 누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다음에 하는 짓이 왜 납치냔 말이야. 누이가 리에네 공주가 누군지 알고나 있던가? 아무런 원한도 없는 사람을 왜…… 이런, 젠장.”

말을 하다 말고 디에렌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16550959796902.jpg“아직도 포기 못 했군. 티와칸의 수장을.”

바이야르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16550959796902.jpg“말씀드렸듯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저하께서는 단 한 가지 일만 해 주시면 됩니다.”

16550959796902.jpg“……안 하겠다면?”

16550959796902.jpg“별로 달라지는 건 없을 겁니다. 저는 독약을 가져왔고, 공녀의 사람이고, 그리고 저하께 볼일이 있어 온 사자니까요.”

어차피 한 배를 탔다는 말이었다.

16550959796902.jpg“대공 전하께서도 같은 생각이십니다. 몇 해 전부터 전하께서는 티와칸에 보내는 금이 아깝다는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다.”

16550959796902.jpg“…….”

지금 이 순간 드는 생각은 한 가지였다. 블랙이 손목을 놓아주었을 때 진작 떠났어야 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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