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 중독 (2) (93/145)

93. 중독 (2)2022.02.20.

1655096010445.jpg“대사제께서는 며칠 전부터 내내 이런 상태십니다.”

사제들은 공손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공손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신전은 20년 전부터 여섯 가문과 한패였다. 사제가 되면 성을 버리지만, 고위 사제 대부분은 여섯 가문 출신이거나 아니면 그들과 연이 닿은 자들이었다. 마나우가 뒤늦게 신전을 잘 갈아엎은 게 아니라면 저 공손함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16550960104456.jpg“정확히 언제부터?”

1655096010445.jpg“혼인식 이후부터입니다.”

16550960104456.jpg“흠.”

짧은 의심이 입술 새로 새어나갔다. 블랙은 우연을 믿지 않았다. 혼인식 때만 해도 멀쩡하던 마나우가 갑자기 넋이 나가 침을 줄줄 흘리고 있다면 그를 이해시킬 만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16550960104456.jpg“병명은?”

1655096010445.jpg“저희들은 모릅니다. 병 또한 신께서 주신 것이니 받을 뿐입니다.”

경전에나 나올 법한 말이었다. 미리 연습이라도 한 듯싶었다.

16550960104481.jpg“신께서 독도 주시나 봅니다.”

페르모스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가 끼어들자 억지로 꾸며낸 것 같은 공손함이 깨졌다.

1655096010445.jpg“뭐라는 겁니까! 독이라니!”

16550960104481.jpg“멀쩡한 사람을 이 꼴로 만드는 약은 의외로 몇 종류나 됩니다. 어디 보자…… 저는 카비노에 걸겠습니다. 이 계절이면 그게 그나마 구할 만하지요. 대사제의 옷을 벗겨 보면 심장 주변에 보라색 반점이 올라와 있을 겁니다. 카비노에 중독되면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사제들은 페르모스가 독이나 약에 방대한 지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서도 몰랐을 것이다. 그들은 카비노라는 독을 이제껏 들어본 적도 없었고, 당연히 남들도 모르는 줄 알았다.

16550960104456.jpg“벗겨.”

블랙이 용병들에게 지시를 하자 사제들이 펄쩍 뛰었다.

1655096010445.jpg“무, 무슨 짓입니까! 감히 신의 입에게!”

16550960104481.jpg“그 입에 독을 처넣은 건 무슨 짓인데?”

1655096010445.jpg“그, 그게……!”

1655096010445.jpg“아닙니다! 독이라니! 얼토당토않은 모함이오!”

안타깝게도 부정은 소용이 없었다. 침대에 누워 탁해진 눈을 끔벅대며 간헐적으로 손을 부르르 떨어대는 마나우는 독에 대한 증거나 다름없었다. 용병들은 신속히 사제들을 마나우에게서 떼어놓았다. 그런 다음 마나우가 입고 있는 투박한 사제복을 헤집었다. 페르모스의 말대로 가슴께에는 보라색 반점이 열꽃처럼 올라와 있었다.

16550960104481.jpg“하나, 둘, 셋…… 여덟. 이 정도면 먹인 지 하루 안짝이라는 소리입니다. 사흘이 지났으면 반점이 상의 전체로 번졌을 겁니다.”

16550960104456.jpg“혼인식 직후라는 것도 거짓이었군.”

16550960104481.jpg“네. 그렇다면…… 재미있군요.”

페르모스가 안경을 달깍 들어 올렸다.

16550960104481.jpg“마침 오늘 클라인펠터 가의 망령이 하나 살아 돌아왔는데. 그 직후 대사제가 독약을 먹고 저 꼴이 되었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요?”

16550960104456.jpg“아니겠지.”

블랙이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칼집째 들어 올렸다.

16550960104456.jpg“해약을 만들 수 있나?”

16550960104481.jpg“재료만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신전에는 약초밭이 있으니 재료를 구하는 게 어렵진 않을 겁니다.”

16550960104456.jpg“그럼 만들어. 그동안 신전을 정리하겠다. 망령이 여기 숨어들었겠군.”

16550960104481.jpg“알겠습니다. 어이, 하나만 내 옆에 붙고 나머지는 주군을 따라가라. 내가 해약을 만들기 전에 끝내. 여기 오래 있고 싶지 않으니까.”

1655096015185.jpg“예, 부관.”

용병들은 하필 때려잡는 게 사제냐며 썩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하고 블랙을 따라나섰다. 피를 보지 않기 위해 그들도 칼집을 씌운 채 칼을 썼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마나우를 제자리에 앉혀 놓으면 신전은 천천히 물갈이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 생각이 예상외로 틀어졌지만 한 번 손을 쓰면 되는 일이었다. 다만 시간이 가고 있었다. 이곳에 발이 묶여 있느라, 나우크 성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시간이. * * * 발이 무거웠다. 시간은 거의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리에네는 언젠가도 이 비슷한 일을 겪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작게 웃었다. 그땐 나 혼자 발을 동동 구르다가 페르모스 경한테 찾아갔었는데. 라피트가 추방되던 날이었다. 감정이 그때그때 달라진다지만 그날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무서웠던 날이었다. 왜냐면 나는 이제껏 그 남자 같은 걸 가져 본 적이 없었으니까. 너무 좋아서, 믿기지 않은 그런 것 말이야. 그래서 금방 사라져 버릴 것 같았거든. 작은 웃음은 작은 한숨이 되었다. 알아.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거. 그런데 나는 가끔 무서워. 눈을 뜨면, 다시 그 남자가 없던 시절로 돌아가 있을까 봐. 어제와 오늘이 똑같고, 내일도 다를 게 없는 그런 시간으로. 아무런 기대도 없고, 계절은 무섭기만 하고, 건조한 바람 때문에 살갗이 아프고. 매일 하루를 또 어떻게 버티나 하는 생각밖에 할 수 없던 그때로.

16550960151855.jpg“…….”

갑자기 어깨가 떨려와 리에네가 팔뚝을 쓸었다.

1655096010445.jpg“어, 여, 여기…….”

어떻게 알았는지 클리마가 담요를 들고 왔다.

16550960151855.jpg“아, 고마워요.”

그는 직접 덮어 주려 하지 않고 담요를 든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리에네가 클리마의 손에서 담요를 받아 들었다. 어깨를 덮자 한결 따듯해졌다.

16550960151855.jpg“잠이 오질 않나요? 잘 시간일 텐데.”

1655096010445.jpg“아니요. 괜찮습니다. 오늘은 자지 않을 겁니다. 왕자님…… 어, 주군이 돌아오실 때까지.”

리에네가 농담처럼 가볍게 말했다.

16550960151855.jpg“그래요? 잘됐다. 나도 그럴 건데.”

1655096010445.jpg“네.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클리마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람에 조금 미안해졌다.

16550960151855.jpg“먼저 자라고 하고 싶은데, 그러질 못하겠어요. 나도 왠지 불안해서.”

1655096010445.jpg“괘, 괜찮습니다. 제가 안 자고 잘 지킬 겁니다. 공주님은 주무셔도 되지만 저는 안 됩니다. 안 잘 겁니다.”

16550960151855.jpg“그래요. 그럼 조금 더 버텨 봐요.”

리에네는 더는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왕실 기록서를 억지로 펼쳐 들었다. 집무실은 밤이 되면 너무 쌀쌀해지는 바람에 장소를 사실로 옮겼다. 클리마가 그 커다랗고 무거운 기록서를 방으로 날라 주었다.

16550960151855.jpg“감시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겠죠? 그러니까,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요. 오늘은 이상하게 그런 사람들이 많아서.”

나우크에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상한 밤이었다. 클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6010445.jpg“돌아가면서 계속, 계속 성을 순찰합니다. 두 명씩, 두 번씩이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금방 알, 알 수 있습니다.”

16550960151855.jpg“든든하네요.”

성 안팎의 경비는 걱정할 게 없었다. 페르모스는 이제까지 발견된 뒷문에 모두 새로 문을 달고 빗장을 내렸다고 했다. 누가 몰래 숨어들어오는 일은 이제 없었다. 그런데 왜 자꾸 불안하지. 리에네는 쓸데없이 부산스러운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 다시 왕실 기록서로 눈을 돌렸다. 왕실 기록서는 너무 방대했고, 잡다했다. 그리고 리에네가 찾고자 하는 것은 너무 막연했다. 강우량 외에도 혹시 가뭄이나 물에 대한 기록이 있을까 싶어 무작위로 기록서를 훑던 리에네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16550960151855.jpg“아……?”

20년보다 훨씬 더 먼 과거의 어느 날, 가이너스 왕가의 반지에서 보석이 떨어져 나가 수선을 했다는 그런 사소한 기록이었다. 평소라면 별생각 없이 넘겼을 법한 일이었다. 그러나 리에네는 기록과 함께 실려 있는 섬세한 반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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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지는 가이너스 왕가의 상징을 본떠 여러 개의 보석을 배치한 특이한 모양새였다. 워낙 다양한 보석이 박혀 있다 보니 그중 한두 개가 영문도 모른 채 떨어지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왕이 크게 화를 내면서 세공을 새로 하게 시켰다. 보석들이 걸려서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재주를 부리다 보니 점점 손가락 모양에 맞춰 보석들이 길쭉하게 배치되었다. 그래서 그 반지는 반지치곤 조금 이상한 모양이 되었는데, 덕분에 별명을 얻게 되었다. 길쭉하고 끝이 둥근 물건을 닮았다고 해서, 열쇠라는 별명을.

16550960151855.jpg“이거……였나 봐.”

리에네가 놀란 눈으로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흘렸다.

16550960151855.jpg“이 반지가 그…….”

똑똑. 사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 건 그때였다.

1655096010445.jpg“공주님.”

알리토 공국의 대공자였다.

1655096010445.jpg“허락하신 부탁을 청하러 왔습니다.”

  * * *

1655096010445.jpg“순찰 끝냈습니다. 별 이상 없습니다.”

랜달이 길게 하품을 했다.

1655096010445.jpg“어, 그러냐? 뭔지 모를 그놈들은?”

1655096010445.jpg“불침번이 지키고 있습니다. 수상쩍긴 합니다. 술은 거의 마시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있더랍니다.”

1655096010445.jpg“젠장. 그러니 나도 못 자겠잖아.”

1655096010445.jpg“경계를 일부러 늦춰 볼까요? 그럼 알아서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1655096010445.jpg“그럴까?”

놈들이 먼저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기도 지루한데, 일부러 빈틈을 보여 덫을 놓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1655096010445.jpg“너무 급작스러우면 눈치챌 테니까 천천히 해. 자러 가는 것처럼.”

1655096010445.jpg“염려 놓으십시오. 설마 그걸 못 하겠습니까.”

경비대 숙소 주변을 밝히던 등불이 하나둘씩 시차를 두고 꺼지기 시작했다. 원래 그런 일정인 것처럼 불 하나만 남긴 채 순찰을 돌던 인원이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잠시 후, 주위가 고요해지자 웨로즈를 데려왔던 수상쩍은 자들이 숨을 죽인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그 뒤를 마찬가지로 소리 없는 걸음을 한 티와칸이 뒤따랐다. * * *

16550960151855.jpg“제가 무얼 해 드리면 될까요?”

리에네는 몰려오는 피로감을 다독이고 디에렌을 마주했다.

1655096010445.jpg“통행증을 써 주셨으면 합니다. 샤르카 왕국과는 누이의 혼인 이후로 국경을 넘을 때 통행증이 필요하지 않지만, 늦은 시간이기도 하고 나우크에서 출발하는 터라 혹시 모를 오해를 대비하고 싶습니다.”

상식적인 부탁이었다.

16550960151855.jpg“아, 그렇겠네요. 그럼 잠시만 기다리시겠어요? 집무실에 가서 펜과 종이를 가져와야겠네요.”

1655096010445.jpg“혹시 번거로우실까 봐 미리 챙겨 왔습니다.”

디에렌이 손짓을 하자 시종이 다가와 양손에 공손히 들고 있던 함을 내려놓았다. 멋들어진 은세공으로 모서리를 장식한 함을 열자 그 안에는 종이와 펜, 잉크가 들어 있었다.

16550960151855.jpg“준비성이 좋으시네요. 그런데 인장을 찍어야 할 텐데.”

1655096010445.jpg“그렇게까지 번거로움을 끼쳐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현 나우크의 통치자시니 서명만으로 충분합니다.”

16550960151855.jpg“그렇다면요.”

시종이 돌돌 말려 있던 종이를 펴서 차를 마실 때 쓰는 작은 탁자 위에 놓았다. 리에네가 펜을 드는 사이 시종이 잉크병의 뚜껑을 열어 디레엔에게 건넸다. 디에렌이 펜을 쥔 손 옆에 잉크병을 놓아주었다. 긴장을 했는지 잉크병이 쏟아질 것처럼 흔들렸다.

16550960151855.jpg“……엇!”

디에렌은 자칫 잉크를 리에네의 손등에 쏟을 뻔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저편에 조용히 서 있던 클리마가 어느새 다가와 잉크병을 들고 있는 디에렌의 손을 확 움켜쥐었다.

1655096010445.jpg“무슨 짓……!”

잉크가 넘쳤다. 넘친 잉크가 디에렌과 클리마의 손등을 적셨다.

1655096010445.jpg“……! 저하!”

시종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디에렌도 마찬가지였다.

1655096010445.jpg“이 무슨 무례냐! 어째서 이런 짓을!”

디에렌은 소리를 지르며 클리마의 손을 뿌리쳤다. 무례가 맞긴 해도 디레엔의 반응은 확실히 이상했다. 그는 잉크가 묻은 손을 다른 손으로 꽉 움켜쥐고 있었다. 클리마는 그가 하는 짓을 유심히 바라보다 손에 묻은 잉크를 옷자락에 문질러 닦으며 작게 말했다.

1655096010445.jpg“잉크에 뭘 탔으니까.”

1655096010445.jpg“뭐…… 뭐라고?”

1655096010445.jpg“나라면 그랬을 겁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게 제일 효과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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