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중독 (3)2022.02.23.
“……!”
몰라볼 수가 없었다. 리에네는 순간 디에렌의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시종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무슨 짓을 할 생각이었나요, 디에렌 공자?”
“그…… 아니…… 증거도 없이 사람을…… 이 무슨 외교적 결례입니까, 공주님.”
“믿을 수가 없군요. 로드 티와칸이 성을 비우자마자 이런 일을 꾸미다니요.”
“그…… 아니, 그게…… 증거가 없…….”
증거는 확실했다. 디에렌의 창백한 얼굴과 식은땀이 증거였다.
“정말 그렇게 우길 참이면 남은 잉크를 손에 부어 보든가요.”
“그게 무슨…… 어떻게 그런 말을…… 내, 내가…….”
디에렌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더 많아졌다. 리에네는 잉크가 치덕하게 쏟아진 잉크병에서 점점 기묘한 냄새가 풍겨 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클리마가 다른 손으로 리에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물러서세요, 공주님. 냄새가 안 좋습니다. 코를 막고 계세요.”
리에네가 소매로 코를 막고 뒤로 물러섰다. 클리마가 디에렌을 향해 다가섰다. 순하던 얼굴은 이 순간 텅 빈 것처럼 기묘해졌다. 겁에 질린 디에렌이 뒷걸음질을 쳤다.
“내, 내게 손대지 마! 너는 뭣 하고 있는 거야! 가서 바이야르를 데려와!”
“으, 으……!”
쾅! 어쩔 줄 모르고 눈을 흔들고 있던 시종이 문을 홱 열고 뛰쳐나갔다. 클리마는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디에렌에게 다가갔다. 어차피 시종은 이 성에서 혼자 달아날 길이 없을 것이다.
“죽이진 않을 겁니다, 공주님.”
클리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디에렌은 다 틀렸다고 느꼈는지 아예 등을 돌려 시종처럼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클리마에게 덥석 뒷목을 잡혔다. 목을 움켜쥔 커다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섬뜩한 공포가 느껴졌지만 리에네는 죽이지 않겠다는 클리마의 말을 믿고 기다렸다.
“……?”
그러나 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디에렌이 입가로 흰 거품을 쏟으며 눈을 뒤집었다. 양손을 허우적대던 그가 힘없이 무릎을 꺾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렌펠 경……?”
리에네가 클리마를 불렀다. 클리마가 비어 버린 손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 건가요? 종제님?”
클리마가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문지르며 뒷걸음질을 쳤다.
“다, 다가오지 마세…… 마, 만지면 안…….”
……쿵! 클리마도 쓰러졌다. 손에 묻은 독이 문제였다.
“이럴 수가!”
사람을 부르기 위해 리에네가 문으로 달려갔다. 쿵! 정신없이 문을 열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누군가가 말을 건넸다.
“공주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
순간 찬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이 차가워졌다. 그는 클리마가 계속 이상하다고 말했던 샤르카 왕국의 사자였다.
* * * 당황할 건 없었다. 당황한 모습을 보이면 손해였다. 그가 누군지 모른다는 식으로 굴어야 했다. 리에네는 성 안에 늘 일정 인원의 티와칸이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본궁 3층을 지키는 경비대는 이상하게도 보이지 않았지만 북쪽 탑 입구만 가도 티와칸이 있을 것이다. 일단은 이자와 떨어지는 게 순서였다.
“사람이 쓰러졌어요. 가서 의사를 불러오세요. 북쪽 탑으로 가면 경비대가 있을 겁니다. 이 방으로 의사를 데려오라고 하세요. 한시라도 빨리요.”
“제가 의사입니다.”
샤르카 왕국의 사자가 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낭패다 싶었지만 리에네는 빠르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그럼 두 사람의 상세를 살피고 있어요. 나는 가서 돌봐줄 사람을 데려올 테니.”
“공주님.”
쾅! 말릴 틈도 없이, 샤르카 왕국의 사자가 문을 쾅 닫았다. 동작이 이상할 정도로 빨랐다. 겉으로 보는 것과 움직일 때가 전혀 다른 게, 마치 클리마를 보는 듯했다.
“달아날 생각은 마시지요. 공주님이 제 목숨 하나 챙긴다고 달아나는 순간 저 충성스러운 신하의 목숨은 사라집니다.”
그는 리에네의 머릿속을 꿰뚫어 보고 있기라도 한 듯 말했다. 어쩐지 이자의 이름을 알 것 같았다. 잉크가 손에 묻었을 때 디에렌이 불러오라며 소리친 이름이 있었다.
“……그대의 이름이 바이야르인가요?”
그가 뒤에서 디에렌을 움직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샤르카 왕국의 사자라는 신분은 믿을 게 못 되었다.
“눈치가 빠르시군요. 아니, 저하께서 경망스레 입을 놀리신 모양입니다.”
“그대는 샤르카 왕국이 아니라 알리토 공국의 사람인가요? 바셰드 왕자가 정말로 죽긴 했나요?”
“시간을 끌려는 노력은 가상하지만 그래 봤자 저자의 죽음을 앞당길 뿐입니다.”
“내게 무얼 바라나요.”
“내게는 해약이 있습니다. 얌전히 제 발로 나를 따라온다면 해약을 주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다른 사람이 올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그리 길진 않을 것이다. 성의 경비에는 빈틈이 없다고 들었다. 타 왕국의 손님으로 가장한 불청객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고 쳐도, 이자가 자신을 데리고 무사히 성을 빠져나갈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리에네는 애써 숨을 가다듬었다. 비로소 생각이 이어졌다. 디에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면서도 바이야르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해약을 먹이겠다고 수선을 피우지도 않았다. 어쩌면 잉크에 섞인 독은 그렇게 쉽게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종류일 수도 있었다.
“그대를 부리는 사람은 누구죠?”
“해약이 필요 없다면 강제로 모시겠습니다.”
바이야르가 소리 없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리에네는 힘껏 몸을 틀어 욕실로 뛰어들었다.
“겁이 없군.”
바이야르가 중얼대며 리에네의 뒤를 따라왔다. 탁!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반대쪽 문으로 빠져나간 리에네가 제 침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는 게 아니라 왕의 화랑으로 들어섰다. 벽에 등을 바싹 기댄 리에네는 바이야르가 욕실로 들어갔다는 확신이 들자 죽을힘을 다해 사실로 뛰어나갔다. 퍽! 그대로 어깨로 문을 밀고 방을 나선 리에네는 때마침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경비대를 발견하고 소리 내어 울 뻔했다.
“공주님! 왜 밖에 나와 계십니까?”
“안에……! 샤르카 왕국의 사자를 자청한 자가…… 후우, 독을 썼어요. 어서 그자를 잡아서 해약을 받아내야 해요. 렌펠 경이 쓰러졌어요.”
“네에?”
경비대가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리에네가 소리를 쳤다.
“어서요! 놀라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아아, 네! 알겠습니다!”
경비대는 보통 두 명이 함께 움직였다. 침입자가 있다는 걸 안 이상 리에네를 혼자 두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공주님을 다른 방으로 모셔가. 그리고 침입자 경보를 울려.”
경비대원 한 명이 사실로 들어섰다. 리에네는 다른 경비대원 한 명과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 * * 뎅, 데엥! 북쪽 탑의 종이 거세게 울렸다. 일전에 클리마가 클라인펠터의 심부름꾼으로 잠입한 이후로 두 번째 일이었다. 잠을 잘 준비를 하던 나우크 성이 전부 깨어났다. 성 곳곳이 불로 밝혀지고 경비대와 티와칸은 신속히 인원을 나눠 성 안을 수색했다. 혼자 바이야르를 뒤쫓던 경비대원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바이야르가 노련한 암살자라는 게 시체의 상흔으로 드러났다. 경계가 한층 강화되었다. 혼자 도망쳤던 시종은 곧 붙잡혀 방에 갇혔다. 독을 묻히고 쓰러진 디에렌과 클리마는 별 도리가 없이 그 자리에 눕혀 두고 의사를 기다렸다. 어떤 독인지 알 도리가 없는데 함부로 만질 수가 없었다. 길고, 더딘 밤이었다.
“대체 사람 하나 찾는 일이 왜 이리 오래 걸린답니까! 의사라는 인간들은 또 왜 이리 궁둥짝이 무겁고요!”
플램바드 부인이 발을 동동 구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내 헨튼 부인을 간호하던 플램바드 부인은 환자가 늘었다는 얘기를 듣고 사실을 찾아왔다. 그렇다고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리에네 혼자 환자를 돌보게 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헨튼 부인은 잠들어 있어서 아들에게 변고가 생긴 사실을 몰랐다.
“아들이 저리 쓰러진 걸 알면 그이가 또 얼마나 힘들지…….”
말하는 걸 들어보면 두 부인은 그새 친구가 다 된 모양이었다.
“곧 찾을 거예요. 아직 한 시간도 안 됐잖아요. 조금만 기다려 봐요.”
“어휴, 정말.”
방을 서성대던 플램바드 부인이 리에네의 곁으로 다가왔다.
“밤이 뭐 이리 수상한지 모르겠습니다. 티와칸 경은 왜 이리 소식이 없으신 걸까요?”
“그러게 말이에요.”
불안함이 멈추질 않았다. 클리마가 쓰러진 게 다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마음이 괴로울 지경이었다.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리에네가 막 그런 혼잣말을 내뱉었을 때였다. 탕탕.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공주님. 문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전언이 있습니다.”
경비대 부대장이었다.
“아, 린데로이 경이네요. 그냥 있어요, 부인. 내가 갈게요.”
리에네가 서둘러 문을 열어 주었다.
“침입자는 잡았나요? 해약은요?”
“그게…… 아직입니다, 공주님. 송구합니다.”
경비대 부대장은 혼자였다. 성에 들어온 외지인이 하필 두 부류였다. 웨로즈를 데려온 정체 모를 이들과, 디에렌 일행이었다. 숙소를 몰래 떠났던 이들은 후원을 어슬렁대다 연초를 피운 게 고작이라 다시 원래 내주었던 방에 데려다 놓았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감시는 해야 했다. 의사도 데려와야 했고, 독을 쓴 자를 잡기 위해 이 넓은 성을 이 잡듯이 뒤지기도 해야 했다. 경비대 전원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인원이 넉넉하진 않았다.
“그럼 누구에게서 온 전언인가요?”
“아, 그게, 대장이 정신을 차렸습니다!”
“웨로즈 경이 깨어났다고요? 이런. 기쁜 소식이네요.”
이 긴 밤에 유일하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부대장의 표정은 그리 좋지가 않았다.
“그런데 대장께서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공주님께 꼭 전할 말이 있으니 지금 모셔오라고 일렀습니다.”
“아, 저런…….”
마음이 조여들었다. 리에네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장서세요. 부인, 나는 잠시 웨로즈 경에게 다녀올게요.”
부인 역시 침통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함께 가겠다고 나서지는 못했다.
“알겠습니다, 공주님.”
리에네가 서둘러 부대장을 따라나섰다. 웨로즈에게 할 얘기도, 그가 들려줄 얘기도 아주 많았다. 왕실을 구속하던 리세베리 조약이 힘을 잃고 클라인펠터 가가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웨로즈 또한 몹시 기뻐할 것 같았다. * * *
“웨로즈 경…….”
웨로즈는 경비대 숙소에 혼자 있었다. 경비대 숙소는 텅 빈 채였다. 옆방에 웨로즈를 데려온 낯선 자들과 그들을 감시하는 경비대원이 둘 있을 뿐이었다.
“공주님.”
리에네가 도착하자 웨로즈는 부대장에게 자리를 비워 달라는 손짓을 보냈다. 부대장이 방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웨로즈가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경! 그대로 있어요. 인사는 필요 없습니다.”
리에네가 웨로즈를 말렸다. 그러나 웨로즈는 인사를 하려던 게 아니었다. 그는 완전히 몸을 일으킨 다음 침대 머리맡의 벽을 쿵쿵 두드렸다.
“웨로즈 경……?”
위화감이 몰려왔다. 웨로즈는 전혀 죽어 가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걸을 수도 없어서 들것에 실려 올 이유가 하나도 없어 보였다.
“다치지…… 않았군요.”
온몸을 칭칭 감고 있던 붕대는 눈속임이었다.
“내게 거짓말을 했나요?”
“……저들의 눈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웨로즈가 자신을 속였다. 대체 왜. 무슨 이유로.
“저들이라는 게 티와칸을 말하는 건가요? 경, 티와칸은 아르사크의 수호기사단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름은 이름일 뿐입니다, 공주님.”
“그 생각은 틀렸어요. 웨로즈 경, 경이 나우크를 떠나 있는 동안 많은 일이 벌어졌어요. 티와칸은 나우크의 적이 아니에요. 로드 티와칸은 이제 나우크의…….”
“압니다. 그가 누군지.”
웨로즈는 무서울 정도로 굳은 얼굴로 리에네의 말을 잘랐다.
“가이너스의 마지막 핏줄이라는 걸. 그리고 그 피에는 지금도 저주가 흐르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