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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중독 (4) (95/145)

95. 중독 (4)2022.02.27.

기가 막혔다. 한 달씩이나 나우크를 떠나 있었던 사람이 클라인펠터가 했던 말을 똑같이 하고 있었다.

16550960537308.jpg“무슨…… 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대체 저주 같은 게 어디 있다고. 경은 그런 허무맹랑한 말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라 믿어요.”

16550960537314.jpg“저주는 있습니다, 공주님. 가이너스는 신의 권능을 훔쳤습니다. 그 대가로 신께서는 나우크에 영원한 가뭄이라는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가이너스가 살아 있는 한 가뭄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 피는 사라져야 합니다.”

기가 찼다.

16550960537308.jpg“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인간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요! 대체 어떤 신이 인간보다 못해서 권능을 빼앗기고도 가만히 있겠냐고요!”

16550960537314.jpg“죄송합니다, 공주님.”

웨로즈는 대답 대신 리에네의 입을 막았다. 리에네가 몸부림을 치는데, 웨로즈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리에네의 손등에 떨어트렸다.

16550960537308.jpg“……!”

손등에 보라색 얼룩이 생겨났다. 비록 색은 달랐지만 리에네는 그게 바이야르가 쓴 것과 같은 독이라는 사실을 짐작했다. 같은 방식을 쓴 데다 같은 냄새가 올라왔으니까. 알리토의 대공자, 샤르카 왕국의 사신, 웨로즈……. 그들을 한 데 묶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마도, 이 땅에서 가이너스라는 이름을 두 번 다시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누군가가. 그런 사람은 클라인펠터……뿐일 텐데. 얼핏 떠오르는 것은 라피트와 샤르카 왕국의 연관성이었다. 그리고 샤르카 왕국의 왕자비가……. 공교롭게도 갓 과부가 된 샤르카의 왕자비는 블랙에게 청혼한 적이 있던 알리토의 대공녀였다. 세 개의 적이 머릿속에서 하나로 묶이는 순간, 리에네는 정신을 잃었다. * * * 탁, 탁탁, 탁탁탁. 짧은 간격을 두고 울리는 노크 소리는 미리 정해 둔 수신호였다. 웨로즈가 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저를 들것에 실어 데려온 자들이 서 있었다. 방금 전 웨로즈가 벽을 친 것을 신호로, 그들은 감시하던 경비대를 처리하고 웨로즈의 방으로 건너왔다. 그들 중 하나가 웨로즈에게 커다란 자루를 건넸다. 웨로즈의 짐이라며 가져온 것이었는데, 안에 담은 쓸모없는 옷가지들은 이미 다 빼놓은 뒤였다. 웨로즈는 빈 자루 안에 리에네를 넣었다. 자루는 리에네의 작은 몸을 거짓말처럼 삼켜 버렸다.

16550960537314.jpg“하나는 나를 부축해라. 이대로 나가면 의심을 받을 테니.”

하나가 나서서 웨로즈의 팔을 제 목에 걸었다. 다른 하나는 리에네가 들어간 자루를 등에 멨다.

16550960537314.jpg“가자.”

16550960537387.jpg“…….”

웨로즈를 포함한 네 명이 텅 빈 경비대 숙소를 나섰다. 성문을 넘을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웨로즈가 끼어 있다고 해도 그건 충분히 의심을 살 일이었다. 대신 웨로즈는 이번 일을 위해 손을 잡은 자가 알려준 길을 택했다. 후원에서 지금은 말라 버린 폭포 아래로 이어지는 샛길이었다. 티와칸이 나우크의 성에서 이어지는 비밀통로에 꼼꼼히도 빗장을 걸어 놨다고 했지만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은 막을 수 없을 터였다. 후원까지 이동은 수월했다. 이미 방비가 되어 있는 곳은 상대적으로 티와칸보다 경비대가 더 많았다. 경비대는 웨로즈가 의식을 차렸다는 사실에 기뻐했고, 모종의 이유로 서둘러 떠나게 된 은인들을 배웅하는 길이며, 그 전에 잠깐 연초를 태우려 한다는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끼이익. 그렇게 도착한 후원 구석에서 웨로즈는 굳게 닫아 놓은 빗장을 열고 통로를 막아선 문을 열었다.

1655096053739.jpg“리에네부터.”

문을 열자 나타난 이가 말했다. 불쾌감과 우려가 웨로즈의 표정 위로 드러났지만, 그는 별수 없이 리에네가 들어간 자루를 건넸다.

16550960537314.jpg“…….”

그가 서둘러 밧줄로 묶어 놓은 자루의 입구를 풀었다. 웨로즈가 그의 손을 쳐냈다.

16550960537314.jpg“뭐 하는 겁니까?”

1655096053739.jpg“얼굴을 보려는 것뿐이야. ……얼굴만이라도.”

헐렁해진 자루가 흘러내리며 헝클어진 금발이 드러났다. 얼굴만이라도 보겠다던 자가 금발을 한 움큼 손에 쥐고 제 입술을 비볐다.

16550960561473.jpg“리에네…….”

그는 어제 샤르카 왕국의 사자 일행에 섞여 국경을 넘어온 라피트 클라인펠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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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예상이 맞았다. 테르난 클라인펠터는 신전에 숨어 있었다. 사제들이 기를 쓰고 길을 가로막는 것을 보면 뻔했다. 처음에는 딱하다가 나중에는 슬슬 짜증이 났다.

16550960537314.jpg“주군. 점잖게 대하니 시간이 너무 걸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블랙도 동감이었다. 클라인펠터가 뭘 얼마나 해 줬기에 사제들이 이렇게 제 몸을 내던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칼집을 씌운 채 손짓은 흉내만 내는 수준이어도 뼈가 부러지는 정도의 사고는 있었다. 리에네를 폭군으로 만들 수는 없기에 애는 쓰고 있지만 이 느려터진 속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에도 못 기다리겠다고 랜달을 조르고 있으려나. 리에네를 떠올리자 웃음이 픽 나왔다. 신발을 신는 것도 잊고 방을 나와서 누굴 하나 곤란하게 만들고 있을지도. 신신당부를 해두었으니 랜달이 리에네를 데려올 일은 없겠지만 그래서 절절매고 있긴 할 것이다. ……생각을 말아야겠어. 한 번 생각이 흐르자 짜증이 배가되었다. 리에네를 안고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할 시간에 왜 시커먼 사제들을 눈치 봐 가면서 살살 다루고 있어야 하는지, 불만이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16550960561489.jpg“방법을 바꿔야겠어.”

블랙은 예의를 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클라인펠터를 감싸겠다고 나서는 인간들에게 예의는 무의미했다.

16550960537314.jpg“어떻게 말입니까?”

블랙은 칼을 내려 바닥을 쿡 짚고 서서 사제들에게 말했다.

16550960561489.jpg“여기에 테르난 클라인펠터가 숨어 있다는 걸 안다.”

16550960537314.jpg“……좀 전부터 그 무슨 모함입니까.”

그나마 연차가 좀 있는 듯한 사제 하나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16550960537314.jpg“우리는 세속의 칼이 신의 집을 더럽히는 것을 참을 수 없기에 이곳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누굴 숨겨 주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어쩌면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사제들은 고위 사제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말했듯이, 저들의 사정이야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16550960561489.jpg“1000밀론.”

블랙은 우뚝 선 자세로 숫자를 읊었다.

16550960537314.jpg“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16550960561489.jpg“길을 비키면 주겠다.”

16550960537314.jpg“어찌 그런 모욕을! 지금 신의 자식 앞에 세속의 금을 들이대고 신을 배신하라 하는 겁니까?”

16550960561489.jpg“배신이 아니라 확인할 기회를 달라는 것이다. 길만 비키면 돼. 클라인펠터가 여기 없더라도 같은 금액을 지불하겠다.”

16550960537314.jpg“어, 없다고 해도?”

16550960561489.jpg“너희들이 끝내 길을 막겠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몇 놈은 뼈가 부러지고 몇 놈은 기절하거나 하겠지. 내 입장에서는 시간이 좀 더 걸릴 뿐이야. 그러느니 확인을 해 보는 게 낫지 않겠나? 클라인펠터가 여기 없다면 깨끗이 물러서지. 사과까지 얹어서.”

16550960537387.jpg“…….”

사제들이 주춤거렸다. 거의 다 넘어왔다는 증거였다.

16550960561489.jpg“너희들이 정말로 숨기는 게 없다면 내가 이만큼 굽히고 들어가는 걸 끝내 막아설 이유도 없지. 너희들이 지키고자 하는 게 정말로 신의 집일 뿐이라면.”

16550960537314.jpg“……그, 그렇다면.”

앞장서서 나섰던 사제가 주저하며 물었다.

16550960537314.jpg“정말로 사과를 하실 겁니까? 왕실의 명예를 걸고, 다시는 세속의 이유로 신께서 거하시는 신성한 곳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주실 겁니까?”

16550960561489.jpg“약속하겠다.”

사제들이 눈알을 굴리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블랙의 짐작이 맞았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고위 사제들의 명을 따라 사제관으로 향하는 길을 막고 있을 뿐이었다.

16550960537314.jpg“그럼…….”

젊은 사제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슬금슬금 길을 비켜섰다. 돈도 돈이었지만 사과를 하겠다는 말이 더 컸다. 칼이 무서운 거야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블랙은 적당한 당근을 내밀어 사제들이 체면 구기는 일 없이 물러날 수 있게 해 주었다.

16550960537314.jpg“세속의 군주가 하는 말이니 그만큼의 무게로 믿겠습니다.”

사제관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블랙이 바닥을 짚었던 칼을 가볍게 들어 올려 걸음을 옮겼다. 쉽게 열린 길을 티와칸이 쉽게 따라왔다. 페르모스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싸움보다 협상을 더 잘하는 게 맞느니 마느니 했을 것이다. 사제관을 뒤지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그리고 테르난 클레인펠터는, 예상대로 사제관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 * * 이번에는 고위 사제들이었다. 저 악착같은 연관성이 이제 좀 궁금해지기도 했다.

16550960561489.jpg“너희들은 얼마야?”

블랙이 물었다.

16550960561489.jpg“불러 봐. 적당한 가격이면 넘어가 줄 테니.”

테르난 클라인펠터가 숨어 있을 것 같은 방문 앞을 가로막고 선 고위 사제들이 은근슬쩍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꼭 세속의 부스러기에 눈이 멀어 이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16550960537314.jpg“신의 자식을 돈으로 사고파는 물건으로 보는 그 천박한 세속성을 경멸하는 바요. 당장 말을 거두시오.”

16550960561489.jpg“이렇게 나오면 피차 피곤한데.”

16550960537314.jpg“신께서는 힘을 앞세워 당신의 집을 짓밟는 이에게 반드시 대가를 물으실 것이외다. 그 이름에 더해질 저주가 무섭다면 돌아가시오.”

16550960561489.jpg“내가 세속적이라고 쳐. 그럼 너희들은.”

블랙이 평소보다 빠르게 나직한 음성을 내뱉었다. 짜증이 섞이면 그는 말이 빨라졌다.

16550960561489.jpg“클라인펠터와 너희를 묶는 건 뭔데.”

그게 돈이 아니라는 말을 믿을 바보는 없었다. 그러나 돈으로 맺어진 관계라 해도, 이번만큼은 달랐다. 사제들은 테르난 클라인펠터가 되살아온 게 신의 뜻이라고 믿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럴 만한 과거가 있었으니까.

16550960537314.jpg“신께서는 그대의 이름을 알고 있소이다.”

16550960561489.jpg“그래?”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테르난 클라인펠터가 되살아났으니 과거도 되살아났을 것이다.

16550960537314.jpg“신의 자식들은 두 번 다시 나우크의 대지에 그 저주받은 이름이 뿌리내리는 것을 허락지 않을 것이오. 그게 신의 뜻이오.”

16550960561489.jpg“너희들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사제들이 멋대로 지껄이는 거야 새삼스러울 일이 아니었다. 과거에도 그랬으니까. 저주라는 말이 신전을 통하지 않고 흘러나오는 경우는 없었다. 그를 저주받은 왕자로 만든 것도, 선친을 신을 등진 미치광이 폭군으로 만든 것도 신의 입이었다. 신전이 없었다면 반란도 이뤄질 수 없었다. 제 얼굴을 알아본 마나우가 죽여 달라며 눈물을 흘렸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20년 전과는 사정이 달랐다. 지금 나우크의 군주는 흠잡을 데 없이 이상적이었고, 신전을 부렸던 여섯 가문은 착실히 말을 듣도록 만들어 놓았으니까. 클라인펠터는 이름밖에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재주껏 재산을 빼돌려 놓았다 해도 예전처럼 당당히 쓸 수도 없었다.

16550960561489.jpg“허락하지 않으면 뭐가 어떻게 되는데?”

이제는 왕실이 제 밑에 있어야 할 것들에 휘둘릴 일은 없었다.

16550960561489.jpg“다시 머리를 맞대서 내 목이라도 따려고? 그게 가능하다고 믿나?”

16550960537314.jpg“그…….”

사제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건 저들 눈에도 보일 것이다. 여기서 칼을 쥔 자는 여섯 가문이 아니라 블랙이었고, 그 칼의 이름은 티와칸이었다.

16550960561489.jpg“내가 봐주는 건 여기까지다. 고위 사제나 종제나 내게는 그저 목숨 하나야. 수십을 죽이는 건 피했으니 남은 일곱의 목을 따는 건 문제가 안 돼.”

16550960537387.jpg“…….”

16550960561489.jpg“너희들이 앞으로 지껄이고 다닐 걸 생각하면 미리 입을 없애 놓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고.”

사제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16550960561489.jpg“알아들었으면 비켜.”

새파래진 얼굴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16550960537314.jpg“그, 그건…… 그건…….”

16550960561489.jpg“안 된다고?”

철걱. 블랙이 허리를 툭 치자 칼집 안에 들어가 있는 칼이 섬뜩한 쇳소리를 만들었다. 블랙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60561489.jpg“그렇다면.”

슷! 칼이 뽑히는 건 순간이었다.

16550960537314.jpg“아, 안 돼!”

칼날이 눈앞에서 번뜩이자 겁을 집어먹은 사제 하나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16550960537387.jpg“으, 으…….”

사제들이 슬금슬금 물러서기 시작했다. 블랙이 한 발을 내딛자 비켜나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16550960537314.jpg“아, 안 돼……. 우리는 이미 맹세를 한 몸. 목숨으로 나우크를 지키겠다 했는데…….”

사제 중 하나가 뒤늦게 중얼댔으나 이미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승자는 블랙이었다. 과거는 지워지지 않았지만 되풀이되지도 않았다.

16550960561489.jpg“문 열어.”

블랙이 나직하게 내뱉자 사제 중 하나가 주춤주춤 문을 열었다.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대신 밖으로 향하는 창문이 열려 있었다.

16550960537314.jpg“어, 없다니?”

그래도 블랙은 별로 당황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16550960561489.jpg“비켜.”

사제를 밀치고 블랙이 창문가로 향하는 사이, 창문 밖에서 티와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0960537314.jpg“잡았습니다, 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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