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테르난 클라인펠터2022.03.02.
“고생했군.”
용병들에게 붙들려 끌려온 테르난 클라인펠터를 보고 블랙이 한 말이었다. 지팡이를 짚는 성치 않은 몸으로 창문을 넘어 뛰어내렸으니 고생은 당연했다. 옷과 얼굴, 긴 머리카락과 수염이 온통 흙투성이였다. 그 고생을 한 보람도 없이 미리 창문 밖을 지키고 있던 티와칸에게 붙들려야 했다. 아마도 그게 가장 억울할 것이다. 티와칸의 입장에서 보자면 창문이 있는 곳을 지키지 않으리라 생각한 클라인펠터가 더 어이없었다. 늙은이가 한평생을 팔자 좋게만 살았던 모양이었다. 그 늙은이를 데리고 창문을 뛰어내린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끌려온 클라인펠터 가의 일꾼들도 손과 얼굴이 까져 있었다.
“얌전히 있지 그랬나. 어차피 이 위에서는 달아날 길도 없었을 텐데.”
시간은 거의 새벽이 다 되어가는 늦은 밤이었다. 벽에 걸린 촛불이 되살아난 자의 얼굴 위에 음산한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펨브로윈 왕은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테르난 클라인펠터가 입을 열었다. 더러워진 수염이 입술을 따라 출렁였다.
“가이너스 왕가의 피에 대대로 내려오는 병이지. 젊은 나이에 미쳐 색과 술에 찌들어 살다 일찌감치 죽을 운명이었다. 그 전 왕이, 그 전전 왕이 그랬듯이. 우린 모두가 그걸 지켜보아 왔다. 가이너스는 왕이 되어서는 안 될 핏줄이야.”
끓는 쇳물 같은 목소리는 탁하고 음울했다. 무슨 말을 하든 그 목소리가 내뱉는 소리는 저주처럼 들릴 것이다.
“너도 그럴 것이다. 너 역시 같은 피를 타고났으니. 그 저주받은 운명에서 달아날 수 없다. 일곱 가문이 모인 것은 그래서였어. 나는 나우크를 구하려 했던 게야. 가이너스의 피를 더 이상 이 땅에 흐르게 할 수는 없었다.”
……그 말의 일부는 사실일 것이다. 선친이 종종 미치광이처럼 굴 때가 있다는 걸 블랙도 기억했다. 며칠씩 방에 틀어박혀 먹지도 자지도 않거나, 하루 종일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중얼대거나 했다. 가끔 이유도 모를 분노를 터트리기도 했고, 어쩔 땐 끝도 없는 우울에 잠겨 넋을 놓고 있기도 했다. 선친은 제 기억에도 훌륭한 왕은 아니었다. 어쩌면 제 마음의 일부가 반란이 일어났던 이유를 이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리에네는 핏줄에 얽힌 원한을 깡그리 잊을 수 없는 사람 같은 건 세상에 없다고 했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자신은 잊은 게 아니라, 받아들였던 것일지도.
“그래서.”
블랙은 더러워진 몰골로 제 앞에 무릎이 꿇린 테르난 클라인펠터를 감흥 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라고?”
테르난 클라인펠터가 고개를 뻣뻣이 치켜세웠다.
“그래서 반역을 저질렀고, 착하게 왕 노릇을 할 아르사크 가문을 골라 왕좌에 앉혔고, 그 뒤에서 너희들끼리 희희낙락 왕관을 쪼개어 가졌고. 그래서 뭐. 그래서 나우크가 더 살기 좋은 곳이 됐나?”
“……미치광이 왕이 살아 있는 것보다는 나았겠지.”
“설마. 20년 전까지는 남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왕국이 지금은 가장 가난한 곳이 됐는데. 아, 아직 거기까진 못 들었나? 무덤을 파고 기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
테르난 클라인펠터가 말없이 이를 으득 갈았다.
“그리고 너희들은 그런 고상한 이유로 반란을 일으킨 게 아냐.”
블랙은 검은 그림자로 침식된 얼굴 위로 천천히 과거를 내뱉었다.
“신의 권능. 그걸 훔치려 했을 테지.”
“……!”
테르난 클라인펠터가 눈을 부릅떴고, 주위의 사제들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떨떠름하게 입을 벌렸다. 그 반응을 보자 더 확실해졌다. 신의 권능이라는 말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그건 20년 전, 반란을 일으킨 가문들 중에서도 아주 소수만이 독식하려 했던 비밀이었을 것이다.
“그건 아마도 물과 관련된 것일 테고…… 열쇠가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건가?”
“…….”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니 제대로 짚었다.
“너는 신의 권능에 대해 알기 위해 마나우를 고문했겠군. 마나우는 운이 좋아 죽지 않았을 뿐이고. 클라인펠터가 이 왕국을 집어삼킨 뒤로 내내 입을 다물어야 했겠지. 살아남기 위해.”
그건 사제들도 이제껏 몰랐던 얘기였다.
“뭐라고? 그게 사실입니까?”
사제들이 흥분해 다가오려 했지만 용병들이 적절히 가로막았다.
“이제 네가 말해 줄 차례다. 신의 권능과 열쇠에 관해.”
블랙의 입술이 슬쩍 비틀렸다.
“마나우가 깨어나면 시작해야겠군. 20년 전 당한 고문을 잘 기억하고 있을 테니. 네게 똑같이 갚아 줄 수 있다고 하면 뭐라고 할지 기대되는데.”
“……그럴 일은 없다.”
하지만 블랙이 아직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테르난 클레인펠터가 하필 오늘 우연히 신전에 숨어들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너는 내 몸에 손가락 하나 대어 보지 못하고 제 발로 이 땅을 떠나게 될 것이다.”
“어째서.”
“아니면 아르사크의 딸이 대가를 치를 테니.”
“뭐?”
테르난 클라인펠터가 죽지도 못한 망령에 어울리는 스산한 웃음을 흘렸다.
“내 손톱이 빠지면 아르사크의 딸은 손가락이 잘리고, 내 다리가 부러지면 아르사크의 딸은 발목이 잘릴 것이다.”
“…….”
블랙의 얼굴이 쩍 소리가 날 것처럼 굳었다. * * * 머릿속이 늪 같았다. 피부는 타들어 가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입술에 툭툭 떨어지는 몇 방울의 물이 간절했다. 리에네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입을 벌려 물을 받아 마셨다. 아…… 맛이 이상해. 물이 아닌 것 같았다. 몹시 썼다. 비린 풀냄새가 잔뜩 났다. 이게 뭐야……. 내가 왜…….
“리에네.”
뭐야, 이건……. 악몽인가. 왜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들리지……. 눈을 뜨고 싶었지만 눈꺼풀이 움직이지 않았다. 온몸이 그랬다. 불이 나서 살갗이 녹아도 꼼짝하지 못할 듯했다.
“리에네. 나의 리에네…….”
이마를 스쳐 가는 손이 느껴졌다. 이어서 뺨을 쓰다듬은 손이 입술을 눌렀다. 그 손…… 치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무슨 꿈이 이래…….
“입을 벌려야 해요.”
왜……. 뭘 하려는…… 건데.
“조금만 더. 조금만…….”
손가락이 입술 새를 파고들어 와 다물고 있던 이를 벌렸다. 제 몸에 손을 대지 말라는 의미로 확 물어뜯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제 됐습니다.”
벌려진 잇새로 좀 전의 그 쓰고 비린 물이 울컥 넘어왔다.
뱉으려고 했지만 누군가 코를 막는 바람에 목이 제멋대로 그르륵거렸다.
“으…… 쿨럭!”
그 지독한 물이 한참이나 목으로 넘어왔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 드디어 끝났고, 제 목은 기침을 내뱉었다.
“리에네!”
“……!”
몸이 어느 정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에네는 악몽에서나 들려올 목소리가 지금도 울리고 있으며,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과 동시에 손이 움직였다. 퍽! 리에네는 아주 힘껏, 남은 힘을 그러모아 라피트 클라인펠터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윽! 리에네!”
많이 아플 리가 없었다. 그러기엔 몸 상태가 너무 엉망이었으니까. 라피트의 왼쪽 뺨엔 그저 어설픈 손자국이 남은 정도였다. 그게 너무 억울해 이가 갈렸다. 제대로, 코피가 나도록 후려쳤어야 하는데.
“무슨 짓…… 내게 손 대지…… 허억!”
온몸이 쥐어짜이는 것처럼 아팠다. 리에네는 손발을 잡아당기는 것 같은 현기증을 느끼며 몸을 홱 기울였다. ……그래, 이건 독이야. 웨로즈 경이 내게 독을 발랐잖아. 그리고 쓰러졌던 거야. 그런데 눈을 뜨니 라피트 클라인펠터가 제게 무언가를 먹이고 있었다. 맛은 끔찍했지만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아마도 해독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떫고 비린 맛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다. 웨로즈가 클라인펠터와 손을 잡고 왕실을 배반했다는 뜻이었으니.
“원하는 게 뭐죠?”
리에네는 몸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클라인펠터가 할 짓이야 뻔했다. 나우크에서 티와칸을 내쫓겠다는, 말도 안 되는 망상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망상에는 먹이를 주는 자가 있었다. 샤르카 왕국의 왕자비였다.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아. 내게 뭘 원하는지나 말해요. 듣고 결정하겠어.”
“그 전에 내게 먼저 인사를 해 줄 수는 없는 겁니까?”
라피트 클라인펠터가 미친 소리를 해댔다. 가물대는 눈에 이제야 주위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리에네는 그들이 말라 버린 폭포 뒤, 미로 같은 동굴 입구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주위에는 일단 아무도 없었다. 라피트 클라인펠터 혼자였다. 하지만 더 귀를 기울여 보면 분명히 작은 목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저 바깥쪽에 사람이 더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 싫어요.”
“리에네…….”
라피트가 울 것처럼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나는 당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었습니다. 마차 의자 속에 몸을 구겨 넣고, 목뼈가 부러질 것 같은 고통을 참아 가면서요!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서 나우크로 돌아왔는지 궁금하지도 않습니까?”
“조금도요. 차라리 그때 목뼈가 부러졌다면 좋았을 텐데.”
“리에네! 어떻게 그런 말을!”
“그대는 추방이 아니라 교수형을 당해야 했어!”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온 힘을 주어 내뱉어 봤자 제 목소리는 이 어둠조차 벗어나지 못했다. 조금만 참자. 해독제가 듣기 시작하면 몸을 움직일 수 있을 거야. 소리는 그때 지르면 돼. 이곳은 성에서 아주 멀지 않았다. 티와칸은 진작 자신이 없어진 사실을 알고 수색에 나섰을 것이다. 도망치면서 소리를 지르면 금방 발견될 수 있었다.
“마지막 적선을 베풀었던 내가 바보였어. 그 남자는 내 손에 대륙에서 제일 무서운 칼을 쥐여 줬는데! 그걸 휘두르지 못해서 기어코 이런 꼴을 다시 겪다니…… 나 같은 바보는 또 없을 거야.”
“리에네!”
라피트가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지르자 저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조용히! 여기 숨어 있다는 걸 일부러 알려줄 참입니까?”
어둠과 뒤섞여 일그러진 몸 선은 누구의 것인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웨로즈였다.
“외람되지만 지금은 입을 막겠습니다. 공주님께서도 사실을 깨달을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그런 시간은 필요 없어! 당장 나를 성으로 돌려보내요. 그럼 편히 죽게라도 해 줄 테…… 읍!”
웨로즈는 단호한 동작으로 리에네의 입에 천을 묶었다. 소리를 지를 수는 있어도 건장한 기사를 떼어 놓을 힘은 없었다. 머리를 이리저리 비틀며 웨로즈를 피해 보려 했지만 애쓴 보람도 없이 입이 막혔다.
“해독제가 생각보다 빨리 효과를 보는 모양입니다. 죄송하지만 묶겠습니다, 공주님.”
웨로즈가 자루를 묶었던 끈을 가져와 리에네의 손을 등 뒤로 돌려 묶었다. ……기운 없는 척해야겠다. 이러다 발도 묶이겠어. 리에네는 힘없이 바닥에 머리를 기댔다.
“빌어먹을.”
라피트가 양손을 꽉 마주 잡고 이를 갈았다.
“그대가 내게 이럴 수 없어……. 내가 그대를 되찾기 위해 무슨 짓까지 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말지 그랬어. 멍청한 인간 같으니.
“나는 그런…… 몸을 파는 짓까지 해야 했는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듣다 보니 화가 날 것 같았다. 그런 짓을 나 때문에 했다고? 내가 그러라고 시키기라도 했다는 거야? 어이가 없네, 정말. 라피트가 바닥에 쓰러진 리에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나를 봐요, 리에네. 내가 그대를 위해 하나 남김없이 전부 바쳤다는 걸 알겠습니까? 나는 이제 더 이상 남은 자존심도 없습니다. 내게 남은 건 그대가 유일합니다. 나를 봐요. 나를 가여워해 줘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 그가 이마에 키스라도 할 것처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