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 미로 (97/145)

97. 미로2022.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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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60914478.jpg“……으읏!”

리에네가 꽉 막힌 비명을 흘리며 고개를 홱 뒤로 젖혔다. 차라리 벌레가 닿는 게 더 나으리라는 몸짓이었다.

16550960914484.jpg“지금 나를 거부하는 겁니까? 내가 이런 말까지 했는데도?”

16550960914478.jpg“으! 으으읍!”

16550960914484.jpg“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데! 어떻게!”

라피트가 리에네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쓰러진 몸을 홱 끌어당겼다.

16550960914484.jpg“어떻게!”

16550960914507.jpg“그만! 지금 설마 공주님께 손을 올리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웨로즈가 적절한 순간에 끼어들어 라피트를 밀어냈다.

16550960914507.jpg“흥분한 것 같으니 저기 가서 머리라도 식히고 계십시오. 공주님께는 제가 말을 올리겠습니다.”

16550960914484.jpg“…….”

라피트가 이를 갈며 웨로즈를 쳐다보다가, 그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고개를 홱 돌렸다. 웨로즈가 리에네를 조심스럽게 붙들어 바닥에 앉혀 주었다. 그 역시 믿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자신을 해칠 생각이 없다는 건 알 수 있었다.

16550960914507.jpg“공주님. 많이 혼란스러우시다는 건 압니다. 허나 제가 이래야 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는 무슨 놈의 이유. 나우크의 경비대장인 그대가 나를 납치했잖아요. 거기에 대체 무슨 변명이 있을 수 있는데.

16550960914507.jpg“공주님께서는 제가 충성하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걸 아셔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왜 내게 이런 짓을 하느냐고요.

16550960914507.jpg“저는 공주님 같은 군주는 그 어디에도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가장 가까운 곁에서 공주님을 모시면서 느낀 것은 공주님보다 더 나우크를 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한 모든 행동은 어디까지나 충정이라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아니야. 그대가 하는 건 충성이 아니야. 내게 가장 가까이 있었던 경이 왜 그걸 모르나요.

16550960914507.jpg“가이너스의 피를 가진 자는 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경은 속고 있는 거예요. 그건 클라인펠터가 지어낸 개소리일 뿐이야.

16550960914507.jpg“그 가문에는 신의 저주가 걸려 있습니다. 모든 왕이 그랬습니다. 젊은 나이에 미쳐서 죽었습니다.”

뭐……라고?

16550960914507.jpg“그걸 더는 두고 볼 수 없기에 일곱 가문이 칼을 뽑았던 겁니다. 그걸 어찌 반역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게 무슨…… 그럼 그 남자도 그럴 거라는 말이야? ……아냐, 그럴 리 없어. 미치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 남자만큼 차분하고 이성적인 사람을 나는 이제껏 본 적이 없는데.

16550960914507.jpg“그날, 클라인펠터 경에게 그자의 의도가 복수라는 말을 듣고 그걸 확인하고자 나우크를 떠나 샤르카 왕국까지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덕분에 그자가 가이너스 왕가의 마지막 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피트는 블리니 바셰드 왕자비에게 받았던 미끼를 던졌고, 그것을 웨로즈가 물었다. 20년 전 웨로즈는 기사 견습생 신분으로, 로사델 가문의 나이든 기사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 기사가 술에 취해 중얼대는 혼잣말을 들었다.

16550960914507.jpg-아무리 그래도 애는 못 죽이겠더라고.

나이든 기사는 당시 영문도 모르고 기사 헨튼의 뒤를 쫓았던 인물이었다. 그가 들었던 얘기는, 펨브로윈 왕이 사냥터에서 죽었고 가이너스 수호기사단의 기사 하나가 왕이 지녔던 보석을 훔쳐 달아났다는 것이었다. 죽은 왕이 가여워 열심히 도둑놈의 뒤를 쫓았다. 도둑놈은 클라인펠터 가의 사병들에게 붙들려 목이 잘렸다. 한 발 늦게 도착한 로사델 가의 기사는 목이 잘린 시체 옆에서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어린아이를 발견했다. 아이는 죽지 않았다. 다들 못 보았지만 나이든 기사는 아이가 잠깐 속눈썹을 흔드는 것을 보았다. 시체를 대충 수풀에 던져 놓고 가자는 말에 기사는 스스로 나서서 아이를 옮겼다.

16550960914507.jpg-하지만 죽긴 했을 게야. 칼을 맞고 버려졌는데 그 조그만 아이가 무슨 재주로 혼자 살아났겠어.

복수라는 말을 듣자 달아난 수호기사와 함께 있던 아이가 연결되었다. 수호기사가 가지고 달아났던 게 보석이 아니라 왕자였다면. 그 피가 지금껏 악귀처럼 살아남아 이 땅에 돌아올 날짜를 세고 있었다면. 그렇다면 이해가 됐다. 성을 포위한 채 원하는 답이 아니면 다 죽이겠다던, 미친 협박 같은 청혼이.

16550960914507.jpg“공주님. 그자는 곧 미치게 될 겁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인간을 죽이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웨로즈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16550960914507.jpg“제발, 공주님……. 이미 혼인을 하셨다는 건 들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십시오. 누구보다 나우크를 위하는 공주님께서 그런 자를 공동 통치자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16550960914478.jpg“…….”

리에네는 몇 번이고 눈을 깜박거렸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가이너스의 저주…… 유전병 같은 게 있는 걸까. 왕실 기록서에서는 보지 못했어. 그러나 가이너스 가문의 왕들은 집권 시기가 짧고 단명한 경우가 많았다. 그건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그 남자도 어릴 때 허약했다고 하니까…… 유전병이 있을 수도 있겠어. 그런 생각을 하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건데. 선조들처럼 일찍 죽을 테니까, 미리 죽이기라도 하자는 거야?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만약 블랙에게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차마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이렇게 떨어져 있는 시간이 너무 아까울 것이다. 단 한 순간도 허투루 쓰지 않고 그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에 쓰고 싶을 것이다. 미쳐서 죽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일곱 가문이 나우크를 위해서 펨브로윈 왕을 죽이지 않았다는 건 분명했다. 정말로 그랬으면 아픈 아이한테 와서 열쇠를 훔쳐 오라느니 그런 소리를 했을 리가 없으니까. 그게 본심이야. 가이너스 왕실이 소유한 신의 권능을 훔치고 싶었던 것뿐이라고. 나머지는 다 핑계야. 안 속아.

16550960914478.jpg“…….”

리에네는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것처럼, 그러나 선택의 여지 없이 큰 결단을 내린 것처럼.

16550960914507.jpg“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공주님은 현명하신 분이니까요.”

웨로즈가 안도하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16550960914507.jpg“일단은 공주님을 샤르카 왕국으로 모셔갈 겁니다. 그렇게 얘기가 됐습니다. 공주님은 그곳에서 안전히 계십시오. 클라인펠터 경이 나우크의 귀족들을 모아 티와칸을 이 땅에서 몰아낼 겁니다. 샤르카 왕국이 지원군을 약속했습니다. 티와칸이 패배하면, 아니, 만에 하나 패배시키지는 못한다고 해도 협상을 할 수는 있을 겁니다. 그때 혼인이 무효로 돌아갈 겁니다. 가이너스의 피를 숨겼으니까요.”

16550960914478.jpg“…….”

리에네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60914507.jpg“내일 샤르카 왕국의 지원군이 도착할 겁니다. 오늘 밤은 이곳에 숨어 있다가 내일 샤르카 왕국으로 가십시오. 제가 모시겠습니다.”

16550960914478.jpg“…….”

웨로즈가 리에네를 따라하듯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60914507.jpg“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공주님. 저들의 이름이 티와칸이라 해도 용병단입니다. 왕국과 맞서 싸울 힘은 없습니다. 나우크는 곧 다시 안전히 신의 품으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16550960914478.jpg“…….”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웨로즈는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리에네는 애써 몸을 틀어 그에게 묶인 손을 내보였다. 이제 그만 풀어달라는 뜻이었다.

16550960914507.jpg“네, 공주님.”

웨로즈가 리에네의 혼인식을 지켜봤다면 그렇게 쉽게 마음을 놓진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시간은 한 달 전 그대로였다. 리에네는 억지로 청혼을 승낙하고 그 야만인을 참고 견디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리에네와 나우크를 위해 옳은 일을 하는 중이라고 굳게 믿었다. 웨로즈가 몸을 묶은 줄을 풀어 주었다. 리에네는 입을 막았던 천을 끌어 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자꾸 헛손질을 하는 바람에 웨로즈가 마저 내려 주었다.

16550960914478.jpg“나는…… 좀 쉬겠어요. 너무 지쳐서…….”

16550960914507.jpg“예, 공주님. 그렇게 하십시오.”

리에네가 몸을 기대는 척, 웨로즈와 거리를 좁히며 아주 작게 속삭였다.

16550960914478.jpg“클라인펠터를 떼어놔 주세요. 무슨 짓을 할지 무서워요.”

16550960914507.jpg“아……. 그래도 클라인펠터 경은 공주님의 연인…….”

16550960914478.jpg“이유가 뭐가 됐든 내가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아요. 아까도 봤잖아요.”

16550960914507.jpg“……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웨로즈는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도 라피트 클라인펠터는 불안정해 보였다. 웨로즈가 라피트 클라인펠터에게 다가가 무슨 말인가 건넸다. 라피트가 홱 고개를 돌려 이쪽을 노려보았다. 리에네는 무서운 척 시선을 외면했다. 그걸 본 웨로즈가 라피트의 팔을 붙잡아 저쪽으로 이끌었다. ……이 안쪽에, 길이 있을 거야. 리에네는 멀어지는 두 사람의 등을 보며 소리 나지 않게 몸을 조금씩 뒤로 움직였다. 아홉 개의 폭포는 말 그대로 겉에서 볼 때는 아홉 개로 갈라져 있었다. 지금 있는 곳이 아홉 개 중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리에네는 클리마가 알려 줬던 미로를 기억했다. 그 넓은 규모를 보면 이 안쪽이 전부 막혀 있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 어두워서 지금은 전부 막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틈이 있으리라 믿었다. 내일 샤르카 왕국의 군대가 도착한다고 했잖아. 그 전에 알려야 해. 그건 침략이야. 웨로즈나 클라인펠터가 정말로 티와칸을 몰아내기 위해선 그게 방법이라 믿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리에네가 볼 때는 아니었다. 샤르카 왕국이 아무런 흑심 없이 군대를 보낼 리 없었다. 순수하게 나우크를 도울 생각이었다면 처음 지원군을 요청했을 때 진작 보냈을 것이다. 군대를 보낸다는 것도 그 왕자비일 거야. 애초에 지원군을 거절했던 바셰드 왕자가 죽자마자 군대를 보내는 의도는 불순하게만 여겨졌다. 어서 빨리 성으로 돌아가야 해. 그를 만나야 해. 신전에서도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자꾸만 늦는 게 아닐까. 생각할 게 너무 많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16550960914478.jpg“……!”

계속 뒷걸음질을 치던 리에네는 미약하게 불어나오는 찬 공기를 느꼈다. 틈이었다. 리에네는 망설임 없이 어디로 향할지도 모르는 그 비좁은 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바위와 흙이 사정없이 피부를 긁었다. 그러나 안심이었다. 웨로즈나 라피트는 이 좁은 틈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16550960914507.jpg“공주님……? 공주님!”

뒤늦게 자신을 발견한 웨로즈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욱! 미친 듯이 달려온 웨로즈가 미처 여미지 못한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옷이 길게 찢어졌으나 리에네는 무사히 통로를 지나왔다.

16550960914507.jpg“공주님!”

리에네가 어둠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해독이 다 되지 않은 몸은 무거웠고, 눈앞은 그저 캄캄하기만 했다. 그래도 달려야 했다. * * *

16550960914478.jpg“후우…… 길이…… 비슷하게는 온 것 같은데…… 그런데 잘 모르…… 하아, 후.”

익숙해질 수 없는 어둠이었다. 여전히 너무 캄캄했다. 방향을 짐작하기는커녕 당장 코앞에 뭐가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클리마가 알려 줬던 길은 여기서는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대신 리에네는 발밑의 감각을 기억해 냈다.

16550960914478.jpg“그때 분명히…….”

발바닥이 아팠다. 자꾸만 뭔가가 뾰족하게 발을 찔러 와서 그것을 피하면서 걷느라 방향을 잃어버렸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뾰족한 게 있는 바닥이 나오면 길을 찾을 수도 있을 거라는 뜻이었다. 리에네는 몸을 굽혀 까만 바닥을 손으로 더듬으며 움직였다. 지금은 간간이 튀어나온 돌 같은 게 만져질 뿐, 그냥 축축한 흙바닥이었다.

16550960914478.jpg“이렇게는 속도가 너무 느려.”

리에네는 구두를 벗어 던졌다. 맨발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발바닥에 감각을 집중하고 한참을 걸었다. 피곤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 발바닥이 뭔가를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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