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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왕자비의 사자 (98/145)

98. 왕자비의 사자2022.03.09.

16550961077822.jpg“아얏!”

발바닥이 찢어졌는지 따끔했다. 리에네는 다시 몸을 숙여 바닥을 더듬어 보았다. 바닥은 삐죽삐죽 튀어나온, 무언가 단단한 게 계속 이어져 있었다.

16550961077822.jpg“여기가 맞는 것 같아.”

그때의 기억과 비슷했다. 이 부근에서는 맨발이 유달리 아프다는 생각이었다.

16550961077822.jpg“그런데 이거…… 이상해.”

그때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이 길은, 아무래도 미로 같다고. 자연스럽게 생겨난 게 아닌 것 같다고. 바닥을 더듬어 보니 그런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16550961077822.jpg“간격이 너무 일정해.”

삐죽삐죽 튀어나온 것들은 그저 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규칙적이었다.

16550961077822.jpg“이건…… 이건 누가 만든 거야.”

누군지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가이너스의 피에게만 허락된 길. 가이너스만 알고 있는 길. 만든 이도 가이너스일 것이다. 갑자기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16550961077822.jpg“이게 그…… 신의 권능과 연관이 있는 걸까?”

여기는 아홉 개의 폭포가 흐르는 뒤편, 나우크 성이 세워진 언덕이었다. 어쩌면 제 머리 위로 나우크의 지하실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16550961077822.jpg“신의 권능은 물일 거라고 했지.”

물. 아홉 개의 폭포. 알 수 없는 장치. 가이너스 왕가의 비밀. 그리고 클라인펠터가 훔치려고 했던 열쇠. 뭔가 간질간질, 손끝에서 만져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뭔지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16550961077822.jpg“아, 미치겠네. 그게 뭘까.”

일단은 이곳을 벗어나는 게 더 우선이었다. 리에네는 계속 두근거리는 심장을 손으로 꼭 누른 채 걸음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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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신전을 출발한 블랙은 신속히 나우크 성으로 돌아왔다. 갈 때는 여덟이었지만 돌아오는 숫자는 단둘, 블랙과 페르모스뿐이었다. 나머지는 신의 광장에 있었다. 신의 광장 가운데 말뚝을 박고 테르난 클라인펠터와 일꾼들을 매달아 두었다. 그 정도면 이쪽에서 인질을 잡고 있다는 의사는 확실히 전달이 될 것이다.

16550961077857.jpg“주군! 말씀드릴 일이…….”

말이 멈추기도 전에 뛰어내리는 블랙을 보며 랜달이 죽을 각오로 입을 열었다. 휙!

16550961077857.jpg“……읏!”

그러다 대뜸 목이 잡혀 발이 들렸다. 옅은 푸른색 눈이 이 순간은 아예 색이 없는 것처럼 번들거렸다.

16550961094593.jpg“리에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입술이 달싹였다. 석상이 말을 하는 것처럼 몹시 이상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16550961094593.jpg“그땐 전부 죽을 각오를 해라.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16550961077857.jpg“큽, 아, 알겠…… 알겠습니다…….”

퍽! 블랙이 랜달을 팽개치듯 내려 주었다. 본궁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블랙의 뒤를 부지런히 쫓으며 페르모스가 물었다.

16550961094609.jpg“렌펠은?”

16550961077857.jpg“도, 쿨럭, 독에 당했습니다.”

16550961094609.jpg“독? 증상이 어떤데?”

16550961077857.jpg“죽지는 않았고…… 의식이 없습니다. 열이 있긴 한데 높진 않고…… 손등에 발진이 생겼는데, 의사 말로는 독을 발라 그럴 것 같답니다.”

16550961094609.jpg“같은 독이네. 옷은 안 벗겨 봤지?”

16550961077857.jpg“네.”

16550961094609.jpg“일단 가 봐야겠군. 의사는 옆에 있나? 해약을 만들어야 하니 재료를 가져올 놈을 하나 대기시켜. 그리고 알리토에서 온 망나니는?”

16550961077857.jpg“그 망나니도 나란히 쓰러져 있습니다. 시종은 신문 중입니다. 망나니한테 온 편지를 빼앗았는데, 샤르카 왕국의 바셰드 왕자가 죽었답니다. 편지를 가져온 사자가 도망쳤는데 찾아서 가둬 놓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신문 중입니다.”

16550961094609.jpg“해약으로 거래를 해. 알고 있는 걸 죄 불지 않으면 망나니가 먹을 해약은 없다고 해.”

16550961077857.jpg“알겠습니다.”

16550961094609.jpg“이건 혹시라도 변명의 여지가 있을까 봐 묻는 건데, 어쩌다 그랬냐?”

16550961077857.jpg“경비대장이 배신했습니다. 그래서 경비대가 속아 넘어갔고, 신속히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그 바람에 시간이 더 걸렸다. 경비대를 신뢰하지 못하게 된 티와칸이 경비대를 수색 작업에서 제외하는 바람에 경비대와 내내 마찰이 있었다.

16550961094609.jpg“뭐? 경비대장이라면 한 달 전 사라진 그 양반 말이야?”

16550961077857.jpg“네.”

16550961094609.jpg“하, 어쩌다가…… 미치겠네.”

랜달이 몹시 서럽다는 듯 입술을 비죽거렸다.

16550961077857.jpg“주군께 말씀 좀 잘해 주시면 안 됩니까? 아니, 그 양반이 배신자가 됐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인간은 철저히 공주님의 사람 아니었습니까? 아니,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일국의 사자가 그래도 된답니까? 이 개자식이 마차 의자 속을 비워 왔지 뭡니까. 누굴 태워 온 게 확실한데, 대체 무슨 놈의 사자가 그런 짓을 하느냔 말입니다! 그건 전쟁 때나 하는 짓인데요!”

페르모스가 랜달의 뒤통수를 갈겼다.

16550961094609.jpg“입 다물어! 그런다고 뭐 오냐, 고생했다, 그런 말이라도 들을 수 있을 것 같냐? 뭐가 됐든 공주님은 지켰어야지!”

16550961077857.jpg“그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아…….”

랜달이 꺼질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지금도 어젯밤에 벌어진 일이 사실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16550961094609.jpg“하여간 뛰어. 주군께선 벌써 보이지도 않는다.”

16550961077857.jpg“네…….”

두 사람은 본궁의 계단을 허겁지겁 뛰어 올라갔다. * * *

16550961094593.jpg“다 집어 처넣어.”

16550961077857.jpg“네, 주군.”

블랙은 아주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는 경비대 부대장이 아무리 억울하다 목이 터지도록 소리를 쳐도 듣지 않았다. 경비대 전원이 감옥에 갇혔다.

16550961094609.jpg“주군의 결정은 이해하고 동의합니다만, 인력이 비는 것은 문제입니다. 수색에는 인원이 많을수록 유리하니까요.”

16550961094593.jpg“손발이 안 맞는 것들은 방해밖에 안 돼.”

16550961094609.jpg“그래서 말인데, 나우크의 국민을 동원하는 건 어떻습니까? 자발적으로, 다섯 정도가 조를 짜서 움직인다면 정신 나간 것들이 껴 있다고 해도 서로 감시가 될 겁니다.”

리에네가 사랑받는 군주라는 전제하에 가능한 일이었다.

16550961094593.jpg“클라인펠터 가에서 일하던 놈들이 끼어든다면?”

16550961094609.jpg“공주님을 납치한 놈들이 클라인펠터 가의 사주를 받았다고 알리면 됩니다. 클라인펠터 가와 연관이 있는 놈들은 사람들이 알아서 가려낼 겁니다.”

16550961094593.jpg“그럼 그렇게 해.”

생각을 더 해야 될 것 같았지만 블랙은 지금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두 번째 겪는 일이었다. 한 번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벌써 두 번째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더 끔찍했다.

16550961094609.jpg“알겠습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페르모스가 곧장 랜달에게 지시를 전달했다. 랜달이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갔다.

16550961077857.jpg“이쪽입니다.”

용병 하나가 감옥 문을 열었다. 공교롭게도 예전에 린든 클라인펠터가 갇혀 있던 그곳이었다.

16550961077857.jpg“여기 뒀습니다.”

16550961094593.jpg“…….”

블랙은 말없이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 찢어진 이마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던 바이야르가 고개를 들었다.

16550961077857.jpg“이제 오시는군.”

감옥 안은 늘 그렇듯이 어두웠다. 그래도 사람을 알아보기엔 충분했다.

16550961094593.jpg“대공이 보냈나?”

블랙이 알리토 공국에 머물 때, 바이야르는 대공의 심부름꾼이었다. 대공이 그를 기이하게 아꼈음을 기억했다.

16550961077857.jpg“아닙니다.”

16550961094593.jpg“그럼 대공녀겠군.”

바이야르가 피에 젖은 얼굴로 이상한 웃음을 지었다.

16550961094593.jpg“뭘 원하나.”

16550961077857.jpg“혼인을 무르길 원하십니다.”

16550961094593.jpg“하지 않으면?”

16550961077857.jpg“리에네 공주가 죽습니다.”

16550961094593.jpg“리에네는 어디 있는데?”

16550961077857.jpg“지금쯤이면 국경을 넘어 샤르카 왕국으로 향하고 계실 겁니다.”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바이야르는 거짓말을 아주 잘했고, 블랙은 리에네의 행방에 대한 단서가 아무것도 없었다. 블랙이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61094593.jpg“원하는 대로 하겠다. 리에네를 데려와.”

16550961077857.jpg“……거짓말을 하시는군요.”

바이야르는 예리했다. 그는 블랙이 그렇게 간단히 블리니 대공녀의 말을 들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16550961077857.jpg“혼인 무효가 먼저입니다. 제게 필요한 증서를 주시면 그걸 대공녀 저하께 전달하겠습니다. 리에네 공주는 그 이후에 나우크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16550961094593.jpg“리에네가 없어진 건 어제 자정 무렵. 시간을 따지면 다섯 시간이 채 안 됐고……. 탈 것을 이용할 수는 없었을 테니 걸어서 갔다고 쳐도 아직 국경에 도착할 시간은 안 됐어.”

블랙은 미간을 찌푸리고 낮게 중얼거렸다. 바이야르에게 던지는 게 아니라 혼잣말에 가까웠다.

16550961094593.jpg“아직 나우크 어딘가에 있다. ……리에네를 데려간 자가 웨로즈라면 남들이 찾지 않을 장소 정도는 알고 있겠지. 거기서 기다렸다가…… 그게 이상하군. 기다린다고 한들 뭔가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하지만 움직이는 게 있다는 보고는 없었고.”

16550961077857.jpg“시간이 갈수록 리에네 공주의 목숨도 줄어든다고 생각하십시오. 제가 독을 썼습니다. 신전을 다녀오셨으니 눈으로 보셨을 테지요. 대사제 말입니다. 그것과 같은 독입니다. 해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백치가 돼서 침이나 흘리고 있다가 죽을……. …….”

바이야르의 말이 멈췄다. 블랙이 그의 턱을 붙들고 있었다. 번들대는 푸른 눈이 텅 비어 보였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아났다. 전쟁의 신은 전장에서 저런 눈을 했다.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듯한, 그래서 그 누구라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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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61077857.jpg“으, 으…… 흐, 흐아악!”

우두득! 블랙이 움켜쥐고 있던 턱뼈가 부러졌다. 바이야르가 비명을 내지르자 피가 함께 튀었다. 눈도 한 번 깜박이지 않는 얼굴 위로 핏방울이 튀었다. ……툭. 블랙이 바이야르의 턱을 놓았다.

16550961094593.jpg“아까 뭐라고 했나.”

16550961094609.jpg“……네, 주군?”

바닥을 나뒹구는 바이야르를 잠시 쳐다보느라 대답이 늦었다. 페르모스가 재빨리 머릿속을 가다듬고 등줄기를 곧게 세웠다.

16550961094593.jpg“랜달하고 얘기할 때. 마차 의자 속을 비워 왔다는 말을 하면서.”

한참 앞서가면서도 그 말을 전부 들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16550961094609.jpg“사자가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건 전쟁 때나 하는 짓이라고……. ……아, 설마?”

16550961094593.jpg“분명 바셰드 왕자가 죽었다고 했지.”

16550961094609.jpg“그렇습니다. 그럼…….”

16550961094593.jpg“군대를 보내겠군. 블리니 바셰드가.”

16550961094609.jpg“미친.”

페르모스가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16550961094609.jpg“아무리 제정신이 아닌 인간이라 해도 대공녀 아닙니까. 설마하니 결과를 짐작하지 못했다는 말입니까? 왕비도 아닌 왕자비가 움직일 수 있는 군대야 뻔하잖습니까. 왕자궁에서 사냥이나 거들던 한량들일 텐데. 숫자가 많지도 않을 겁니다. 와 봤자 전부 개죽음이나 당할…… 이런, 씨.”

빠르게 말을 하던 페르모스가 갑자기 욕설을 내뱉었다.

16550961094609.jpg“그래서 리에네 공주님께 먼저 손을 썼겠군요. 주군의 손을 묶어 놓을 방법은 그것뿐이라. 그 여자는 전쟁을 하려는 게 아니라 시늉만 내고 대신 전리품을 챙길 생각인 겁니다.”

마음이 급해졌다. 반면에 머리는 차가워졌다.

16550961094593.jpg“국경으로 가. 선수를 친다. 샤르카에서 오는 길은 하나니 잡아 죽이는 것도 쉽겠지. 모두 목을 자르고 한 놈만 빼서 돌려보내. 빠를수록 좋아.”

16550961094609.jpg“알겠습니다. 리에네 공주님은 그럼…….”

16550961094593.jpg“여기 있어.”

블랙이 제 가슴께를 움켜쥐며 작게 내뱉었다.

16550961094593.jpg“여기 어딘가에. 멀지 않을 거야. 내가 찾겠다.”

16550961094609.jpg“네, 그럼…….”

무슨 말을 하려던 페르모스는 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말을 아끼는 게 나았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16550961094609.jpg“인원은 얼마나 남겨 놓을까요?”

16550961094593.jpg“샤르카가 몇이나 보내올 것 같나?”

16550961094609.jpg“끽해야 백일 겁니다. 그것도 많이 쳐 준 겁니다.”

16550961094593.jpg“그럼 오십을 데려가.”

16550961094609.jpg“네? 너무 많지 않습니까?”

16550961094593.jpg“빨리 끝내야 하니까. 놈들을 처리하고 나서 리에네를 찾는 데 합류해.”

얘기를 들어보면 블랙은 블리니 왕자비가 보낸 군대를 처리하는 데 반나절도 들일 생각이 없는 게 확실했다.

16550961094609.jpg“알겠습니다.”

이동 중 기습은 페르모스의 특기였다. 그는 벌써부터 머릿속에서 길을 그리며 샤르카 왕국의 군대를 때려 부술 방법을 찾았다.

16550961094609.jpg“생각하시는 것보다 빠르게 돌아오겠습니다.”

페르모스가 새벽길을 밟고 떠났다. 턱이 부서진 바이야르는 그대로 감옥에 갇히는 게 아니라 신의 광장으로 옮겨져 테르난 클레인펠터와 함께 말뚝에 매달렸다. 그가 마차에 숨겨 온 인간이 누구든 그 꼴을 보면 간이 오그라들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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