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단서2022.03.13.
“앗.”
걷다 보니 알 수 있었다. 이 미로는 장치와 길로 구분되어 있었다. 길은 평평했다. 발바닥이 아프지 않았다. 평평한 곳을 따라가면 성으로 이어질 것 같았다.
“…….”
리에네는 길이 이어지는 곳에서 잠깐 멈춰 섰다.
“여기, 장치가 끝나.”
혹시 무슨 장치인지 알 수 있을까 싶어서 리에네는 바닥과 벽을 꼼꼼히 더듬었다. 내내 그렇게 어둠을 더듬으며 오는 통에 손톱 끝이 깨지고 피가 났지만 리에네는 아픈 것도 모르고 있었다.
“장치 때문에 열쇠가 필요하다면…… 어딘가에 자물쇠가 있다는 건데.”
손이 닿는 한 꼼꼼히 더듬었지만 자물쇠 같은 건 만져지지 않았다.
“여기가 아닌 걸까…….”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리에네는 걸음을 추슬렀다.
“일단 길을 따라가 보자.”
길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다. 당장이라도 웨로즈나 라피트가 저 어둠 속에서 자신을 붙잡기 위해 달려올 것 같았는데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길이라고 생각되는 평평한 바닥을 따라갈수록 확신이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계단이 나왔다.
“길이 맞았어. 곧 성이 나올 거야.”
손과 마찬가지로 맨발도 상처투성이였지만 리에네는 숨이 차도록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계단을 거의 다 올라갔을 때 리에네는 저 끝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빛을 발견했다. * * * 처음에는 그은 내가 심하게 나는 석문이었다. 잠겨 있을까 봐 조마조마했던 문을 밀고 나가자 나온 것은 다시 아주 좁고 가파른 돌계단이었다. 다행히 계단은 길지 않았다. 몇 칸 오르지 않아 계단은 끝났고, 리에네는 사람 한 명이 겨우 서 있을 것 같은 좁은 공간을 마주했다.
“여기가 어디지?”
알 수가 없었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낯설지도 않았다. 왠지 조금만 단서가 주어지면 알아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탕, 탕! 리에네는 빛이 새어 들어오는 작은 틈 주위를 두드려 보았다. 그것은 그리 두껍지 않은 철문이었는데, 밖에서 잠금쇠가 걸려 있었다.
“아, 이런.”
탕탕! 리에네가 더 힘껏 문을 두드렸다.
“밖에 누구 없나요?”
탕탕!
“이것 좀 열어 줘요.”
탕탕! 반응이 없었다. 밖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모양이었다.
“하아…….”
허탈감에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여기서 넘어졌다간 저 아래까지 사정없이 굴러갈 것이다. 리에네는 가파른 계단 한쪽에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있다 보면 누가 오겠지. 발소리가 들릴 거야. 이 통로는 왕의 화랑으로 연결된다고 했잖아. 그럼 누구든 소리를 듣겠지. ……아, 가만. 우리 침실은 지금 아무도 없으려나.”
자신이 사라졌는데 블랙이 침실을 지키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가 없으면 다른 사람이 굳이 침실을 들여다볼 일도 없었다.
“기다리는 건 소용이 없겠네.”
어떻게든 잠금쇠를 열고 나가야 했다.
“뭐라도 있어야 문을 열 텐데.”
리에네가 틈새에 눈을 바짝 들이대고 혹시 방법이 있는지 살폈다. 아직은 한참 어두운 때라 잘 보이지 않았다.
“아, 잠깐만. 지금 무슨 소리가…….”
희미하게 귀를 건드리던 그 소리는 그렇게나 기다린 발자국 소리였다.
“여기요!”
탕! 리에네가 다시 철문을 두드리던 그 순간이었다. 쾅! 그 소리보다 몇 배나 더 요란한 소리가 방 안을 거칠게 후려쳤다. 직접적으로 들리는 건 아니었고, 그 옆방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공간을 두고 울리는 소리였다.
“으윽! 악!”
누군가의 비명도 들려왔다. 퍽, 쿵!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사람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말해.”
비명과는 다른, 낮고 뚜렷한 음성이 들려왔다. 안도와 환희가 정신없이 밀려들었다. 저건 블랙이었다. 블랙이 옆방에 있었다. 리에네가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로드 티와칸!”
탕탕! 그러나 저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묻혀 제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뭐, 뭘……. 아, 아는 건 다 말했다고……. 나는 편지를 받기 전까진 아무것도 몰랐어. 정말로 아무것도……. 바이야르가 한 짓이야. 독을 가져온 것도, 일을 꾸민 것도…… 나, 나는 나우크의 경비대장 따위는 있는 줄도 몰랐어. 그랬다고.”
“네 눈엔 내가 한가해 보이나 보지.”
“아니, 그럴 리가……. 갑자기 왜,”
평소보다 낮고 거친 블랙의 목소리는 몹시 지친 것처럼 들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있는 지금은 내 아내를 찾는 데 써야 할 시간이야. 내 시간을 낭비하지 마. 대공녀가 마차에 숨겨서 데려온 인간이 누구야.”
“나, 나는 진짜 모른다고……. 나도 독에 쓰러져서 방금 깨어났잖아.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냔 말이야…….”
한숨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럼 쓸모가 없다는 말이겠군.”
이어서 뭔지 모를 큰 소리와, 숨 막히는 긴장이 들려왔다.
“으아악! 으악!”
디에렌의 비명이 길게도 울려 퍼졌다.
“로드 티와칸!”
리에네가 더 힘껏 철문을 두드렸다. 탕탕! 여기 있단 말이야. 이 문 하나만 열면 된다고!
“으아아아아악! 악!”
디에렌의 비명 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다. 그 와중에도 낮고 지친 목소리는 뚜렷하게 들렸다.
“붙잡아. 이번에는…….”
블랙의 뒷말이 입속으로 사라졌다. 이어서 디에렌의 비명도 뚝 잘린 듯 멎었다. 들은 건가? ……탕, 탕탕.
“로드 티와칸?”
리에네가 반신반의하면서 철문을 두드렸다. 탕탕!
“여기예요!”
쾅! 문이 뜯기듯 열렸다.
“아…….”
다음 순간 보이는 것은 물같이 밀려드는 푸른색 시선이었다.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몸이 들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에게 숨 쉴 틈도 없이 끌어안겨 있었다. 아……. 좋다. 제 몸을 떠안는 단단한 팔뚝의 감촉이 세상에서 제일 안락한 무엇 같았다. 뺨에 와 닿아 바스락 비벼지는 옷감의 감촉도, 약간 아프다 싶게 몸을 죄이는 손가락도, 거칠어진 숨이 귓바퀴를 적시는 것도 전부 안락했다.
“무사했군요.”
한참 만에 블랙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파도에 탄 것처럼 울렁거렸다.
“네에……. 아무 일 없었어요.”
“하아…….”
블랙은 아주 긴 한숨을 뱉어낸 다음 몸을 약간 떼어 리에네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폈다.
“공주님이 지금 내게 무얼 주었는지 아무도 모를 겁니다.”
그건 그가 자신만큼 안도했다는 뜻 같았다. 이 남자는 그런 걸 자꾸 자기가 받았다고 말을 해. 나는 그저 돌아왔을 뿐인데.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는데. 이 남자한테 선물을 주려던 게 아닌데. 그런데 자꾸 그런 것처럼 얘기를 해. 리에네가 블랙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
“지금 당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것도 아무도 모를 거예요.”
* * * 그다음부터는, 좀 정신이 없었다.
“공주님……! 공주님…….”
일단 클리마가 너무 큰 소리로 울었다. 플램바드 부인은 새파래진 얼굴로 입만 벙긋거렸고, 그 옆에서 환자인 헨튼 부인이 플램바드 부인을 부축했다. 티와칸은 말만 없었지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싶다는 표정들이었고, 블랙은 석상처럼 굳어 제 손발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사이에 끼인 의사가 죽고 싶다는 얼굴을 했다. 그 와중에 리에네는 블랙의 얼굴과 옷 여기저기에 핏방울이 튀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피가 묻었어요.”
“……네?”
“여기하고 저기에. 아니, 이쪽도. 많이 묻었어요. 어디 다쳤어요?”
“그게…….”
블랙이 곤란해진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좀 봐 봐요.”
피 묻은 옷을 벗기려 드는 리에네를 블랙이 말렸다.
“내가 다친 게 아닙니다.”
“그럼…… 아, 디에렌 공자.”
“…….”
블랙이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 핏자국은 디에렌의 다리를 자르다 만 흔적이었다. 잘라서 각자 한 쪽씩, 블리니 왕자비와 알리토 대공에게 보낼 생각이었다. 리에네의 행방을 섣불리 짐작할 수 없는 지금, 혹시라도 그쪽에서 손을 쓰는 일이 없도록 만들려는 경고였다. 디에렌에게는 다행히도, 마침 그 순간 블랙이 리에네의 목소리를 듣는 바람에 도끼가 허벅지 살에 박히는 것으로 끝났다. 물론 매일 전쟁터에서 구르며 살았던 게 아닌 사람에게는 끔찍하고 야만적인 일일 것이다. 그런 모습을 리에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많이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목숨에 지장이 있지도 않고. 겁을 줬을 뿐입니다.”
디에렌이 들었다면 억울함에 사흘을 앓아누웠을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샤르카 왕국에서……. ……아, 맞아! 샤르카 왕국에서 군대를 보낼 거라고 했어요! 미쳤어. 어떻게 이 얘기를 잊어버리고 있었지? 샤르카 왕국의 군대가 곧 국경에…….”
“아니요. 국경까지 오지 못했습니다.”
다급하게 말을 쏟아내던 리에네가 블랙의 표정을 보고 흥분을 잊었다.
“그걸…… 알고 있었어요?”
“그러리란 생각이 들어서 미리 나우크의 군대를 보냈습니다. 좀 전에 소식이 왔는데, 바셰드군은 국경에 발을 대기 전에 퇴각했습니다.”
퇴각이라는 말은 잘못된 구석이 없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 바셰드군은 하나만 남기고 말끔히 목이 잘린 시체가 되었다. 살아남은 하나가 샤르카 왕국에 도착하면 시신을 수습해 갈 예정이었다.
“아아……. 다행이다.”
한숨을 내쉰 리에네가 블랙의 목을 끌어당겨 안았다.
“큰일이 나는 줄 알았어요.”
그가 있어서 무사했을 것이다. 웨로즈의 말은 전부 거짓이었다. 가이너스가 이 땅에 있으면 안 되는 게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했다.
“정말 다행이에요. 정말로.”
당신이 있어서. 블랙이 약간 머뭇대다 물었다.
“그럼…… 괜찮은 겁니까?”
“뭐가요?”
“디에렌 공자를 다치게 한 일.”
“그야…… 필요해서 한 일이었을 거라 믿어요.”
“맞습니다.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디에렌이 이 자리에 없는 게 블랙에게는 퍽 다행이었다.
“그럼 이제 나를 놓아줘요.”
블랙이 그를 안은 팔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좀 더 있으면 안 되나요?”
“마음은 그러고 싶지만 공주님의 상처를 돌봐야 합니다. 많이 다쳤잖아요.”
방금 전부터 그 말을 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플램바드 부인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맞습니다! 공주님이 무사히 돌아오신 게 너무나도 기쁘지만, 그 손과 발은 이제 닦아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아…….”
정신이 없어서 모르고 있었다. 손과 발은 아주 더러웠고 상처투성이였다. 하얀 침대를 제 몸이 더럽히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럼 욕실로 갈게요.”
“네, 공주님! 잠시 기다리세요. 제가 물을 데워 놓겠습니다.”
플램바드 부인이 허둥지둥 욕실로 달려갔다. 그즈음 클리마도 간신히 눈물을 멈추었다. 막내가 우는 게 안쓰러웠던 용병 하나가 뒤통수를 토닥여 주었다.
“어쩌다 신발을 잃었습니까?”
블랙이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발을 살짝 쥐며 물었다. 리에네는 그가 속으로 신발을 뺏어간 인간이 있으면 발을 뎅겅 잘라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
“제가 벗었어요.”
“이렇게 다치지 않았습니까.”
“길을 찾으려면 그게 편할 것 같아서요.”
“……길을 찾는 법을 알아냈군요.”
리에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비밀이라는 건 알고 있는데…… 제가 알아서 곤란한 건가요?”
“그럴 리가. 감탄한 겁니다. 그곳에서 맨발로 길을 찾아 돌아올 생각을 해 준 공주님에게.”
그러면서 블랙이 이마에 입술을 붙이는 바람에 그를 약간 밀어내야 했다.
“지금은 좀 떨어져 주세요. 할 말이 있거든요.”
“이러고 해요. 입을 막은 게 아닌데.”
“마음은 그러고 싶지만 진지하게 할 얘기라서요.”
둘은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마주 보며 싱겁게 웃었다.
“이제 해요.”
블랙이 크게 양보했다는 듯 입술을 떼어냈다. 리에네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질릴 때까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젊은 나이에 모두 미쳐서 죽는다고 했나. 이 남자도 그렇게 될까. 그럼 나는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