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 반지의 행방 (100/145)

100. 반지의 행방2022.03.16.

오래도록 생각을 했지만 자신이 아는 것은 한 가지였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이유로 지금 이 관계를 다른 것으로 바꾸고 싶진 않았다. 만일 당신이 아파진다면, 그 사실로 인해 몹시 괴로울 테지만 그게 당신을 잃는 것보다 괴롭지는 않을 거예요.

16550961529852.jpg“무슨 말인데 그런 표정을 짓습니까?”

리에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블랙에게 귀를 빌려 작게 속삭였다.

16550961529858.jpg“클라인펠터가 말한 열쇠 말이에요. 그게 뭔지 알 것 같아요.”

16550961529852.jpg“열쇠?”

블랙은 열쇠가 뭔지 몰라서 되묻는 게 아니었다.

16550961529852.jpg“공주님을 납치해 간 자가 경비대장이라 들었는데 그가 열쇠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까?”

16550961529858.jpg“아뇨. 그게 아니라 왕실 기록서를 뒤져서 찾아냈어요.”

16550961529852.jpg“그게 기록으로 남아 있었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비밀이 아니었을 텐데.”

16550961529858.jpg“그게 정말로 신의 권능과 연관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가이너스 왕실에 열쇠를 닮은 반지가 있었대요. 왕가의 문장을 따라 보석을 배치한 게 열쇠처럼 길쭉한 모양이라고 했어요.”

16550961529852.jpg“…….”

블랙의 표정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16550961529858.jpg“이미 알고 있는 얘기였나요?”

16550961529852.jpg“아니요……. 그 반지를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는 말을 하는 얼굴에 이상하게도 그늘이 돋아났다.

16550961529858.jpg“어떤 반지인데요?”

리에네가 막 그렇게 묻는 사이 플램바드 부인이 허둥지둥 욕실에서 돌아왔다.

16550961543545.jpg“공주님! 물이 다 데워졌습니다. 어서 욕실로 가십시다.”

그러자 블랙이 침대 가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리에네를 번쩍 안아 올렸다. 

16550961529852.jpg“자세한 얘기는 씻고 난 다음 하겠습니다.”

16550961529858.jpg“그러니까 좀 걱정이 되는데요. 엄청 무섭거나 마음 아픈 얘기가 숨겨져 있는 건가요?”

리에네의 말은 절반이 농담이었다. 그러나 블랙은 웃지 않았다.

16550961529852.jpg“나도 걱정이 됩니다.”

16550961529858.jpg“네? 왜요?”

16550961529852.jpg“얘기를 듣고 난 공주님이 몹시 마음 아파하거나, 아니면 무섭게 변할까 봐.”

그러자 더는 물어볼 수가 없었다. 가이너스 왕가의 반지에 자신이 마음 아파하거나 무서워질 일이 대체 뭐가 있을까. 블랙은 욕조 가장자리에 리에네를 앉혀 주었다. 그때까지도 내내 표정이 어두워 리에네를 긴장시켰다. * * * 리에네가 욕실로 들어가고 난 뒤 약간의 신경전이 있었다. 플램바드 부인은 벌써 소매를 걷어붙이고 목욕시중을 들 준비를 하던 참이었는데, 블랙이 끼어들었다. 옷을 벗는 걸 거드는 건 부인이 했으니 씻기는 건 자신의 몫이라고 했다. 부인은 몹시 억울하고 분한 얼굴을 했고, 랜달은 혼란스러워했다. 그는 욕실로 들어가려는 블랙을 붙들고 말했다.

16550961543545.jpg“주군. 제가 진짜 눈치가 없어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닌데 말입니다, 혹시 잊고 계신가 해서……. 아직 경비대장과 클라인펠터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16550961529852.jpg“알고 있어. 잡아 오라고 시켰을 텐데.”

16550961543545.jpg“네, 물론 지금도 열심히 찾고 있습니다만…… 그걸로 되는 겁니까?”

그가 아는 블랙이라면 잡을 놈이 있을 때 게으름을 피울 리가 없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아내의 목욕 시중을 드는 일을 게으름이라 부를 수는 없겠지만, 하여간 그가 아는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16550961529852.jpg“중간에 낀 몸통을 잘라 놨잖아.”

머리를 굴렸던 건 바이야르였다. 그가 잡혔으니 웨로즈나 라피트 클라인펠터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페르모스 덕에 사람들은 리에네가 없어진 이유가 클라인펠터라는 것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신의 광장에 매달린 테르난 클라인펠터를 구하겠다고 덤벼드는 귀족들도 없었다. 앞으로 닥칠 문제는 블리니 대공녀가 미쳐 날뛰는 것이었는데, 그건 아직 시간이 남은 일이었다. 블랙에게는 지금 리에네의 곁에 있는 시간을 포기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16550961529852.jpg“문제가 생기면 알아서 처리해. 네가 감당할 수 없다면 페르모스를 불러.”

16550961543545.jpg“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연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주군!”

뒤늦게 눈치를 챙긴 랜달이 깍듯이 고개를 숙인 뒤 재빨리 모습을 감추었다.

16550961543545.jpg“……뜻이 아주 확고하신 듯하니, 이번은 제가 양보하겠습니다.”

랜달이 사라지자 부인도 블랙을 막아설 수가 없었다.

16550961543545.jpg“공주님은 작은 상처에 너무 무심한 성격이시라 티와칸 공께서 잘 돌보셔야 합니다.”

16550961529852.jpg“알겠다.”

블랙이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리에네를 빼앗긴 기분에 조금 서글프기도 했고, 저리 좋을까 싶어 흐뭇하기도 했다.

16550961543545.jpg“나는 옷을 준비해 드려야지.”

플램바드 부인이 고개를 살살 내저으며 침실로 향했다. * * *

16550961529858.jpg“두 사람은 아직 잡히지 않았군요.”

욕실 밖에서 이뤄지는 대화는 안에서도 들렸다.

16550961529852.jpg“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곧 잡힐 테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별다른 일을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전처럼 리에네는 몸에 수건을 두르고 욕조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욕조에 들어가지 않은 건 상처 때문이었다. 블랙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다가왔다.

16550961529858.jpg“음, 걱정은 안 돼요. 그런데 좀…….”

16550961529852.jpg“좀?”

16550961529858.jpg“지금은 부인이 나을 것 같기도 해서.”

블랙은 나가 달라는 점잖은 말을 귓등으로 흘려 넘겼다.

16550961529852.jpg“그렇지 않습니다.”

16550961529858.jpg“그렇거든요. 욕조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걸 깜박했어요.”

16550961529852.jpg“그게 문제가 됩니까?”

16550961529858.jpg“네. 물 속에 들어가 있을 때도 부끄러웠는데, 지금은 더 부끄러워요.”

16550961529852.jpg“그럼 들어가요. 나는 양보할 생각이 없으니까.”

16550961529858.jpg“안 돼요. 발이 아파요.”

저렇게 생채기가 났으니 물이 닿으면 아프기도 할 것이다.

16550961529852.jpg“그럼 이렇게 해요.”

16550961529858.jpg“어떻게요?”

블랙은 겉옷과 신발을 벗더니 리에네를 번쩍 안아 들었다.

16550961593758.png

16550961529858.jpg“앗, 뭘 하려고요?”

16550961529852.jpg“욕조에 넣어 주려고.”

블랙은 리에네를 안은 채 욕조로 들어갔다. 제 몸을 의자처럼 만들어 리에네를 올려놓은 그가 발을 조심스레 들어 욕조 가장자리에 걸쳐 두었다.

16550961529858.jpg“아…….”

이런 방식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함께 욕조에 들어오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수건은 얇았고, 물은 따듯했다. 기분이 자꾸만 이상해졌다.

16550961529858.jpg“이건…… 더 부끄러운 것 같은데요.”

16550961529852.jpg“보여서 부끄럽다고 한 게 아니었습니까?”

16550961529858.jpg“그야…… 그렇죠.”

16550961529852.jpg“지금은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안 보이긴 뭐가. 그리고 지금은 보이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제 몸이 블랙을 침대처럼 쓰고 있는 게 더 문제였다. 너무 이상해. 물이 따듯하면 노곤하고 나른한 거 아니었어? 숨도 못 쉬겠어. 이 남자가 의식돼서. 블랙이 손을 들어 올리자 차르륵 물소리가 번졌다. 그는 욕조에 걸쳐진 리에네의 발에 따듯한 물을 조금씩 끼얹었다.

16550961529852.jpg“마음이 아픕니다.”

아……. 그런 말도 지금은 좀. 위험하다고.

16550961529858.jpg“지금에서야 아픈 거지, 그땐 아픈 줄도 몰랐어요.”

블랙의 입술이 뒷목을 눌러 왔다.

16550961529852.jpg“앞으로 이 발로 걸어 다닐 생각은 하지 말아요. 어디든 내가 데려갈 테니.”

간지럽지 않은데 몸이 자꾸 움찔거렸다.

16550961529858.jpg“하루 종일 내 시중을 들겠다고요? 그러기엔 할 일이 많은 분이잖아요.”

16550961529852.jpg“그럴 겁니다. 지금 나한테 가장 중요한 일은 공주님을 보살피는 거라.”

아……. 그 말도 안 돼. 리에네는 꿀꺽 침을 삼키고 다른 말을 꺼냈다.

16550961529858.jpg“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해야죠. 그 반지에 얽힌 가슴 아픈 얘기가 뭔가요?”

16550961529852.jpg“……벌써 하긴 싫은데.”

상처 난 발을 천천히 문지르듯 닦아 낸 블랙이 이번에는 맨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16550961529852.jpg“목욕을 마치고 하면 안 되겠습니까?”

16550961529858.jpg“왜요?”

16550961529852.jpg“공주님이 무서워지는 게 싫어서.”

그 말은 좀 우스웠다. 내가 무섭게 굴면 뭐 얼마나 무섭다고. 이 남자가 엄살이라니, 안 어울려.

16550961529858.jpg“그건 좀 말이 안 되지 않아요? 반지에 얽힌 일이라면 까마득히 옛날 일일 텐데 내가 그 일로 무서워질 정도로 화를 낸다는 게요.”

16550961529852.jpg“화를 내면 다행이지.”

한숨을 섞은 뜨거운 체온이 어깨선을 따라 이어졌다.

16550961529852.jpg“하여간 목욕을 마치고 해요. 나는 아직 무서워진 공주님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16550961529858.jpg“……아뇨. 지금 해요.”

그러니까 너무 이상했다. 왜 자꾸 저런 말을 하는 거야. 그럼 나도 불안해진다고.

16550961529858.jpg“미뤄 둔다고 달라질 일이 아니라면 지금 해요. 그게 더 낫겠어요.”

블랙이 입술을 멈췄다.

16550961529852.jpg“그럼 하나만 약속해 줘요.”

16550961529858.jpg“뭘요?”

16550961529852.jpg“꼭 뭔가를 해야겠다면, 화를 내겠다고.”

16550961529858.jpg“……? 화가 안 날 수도 있잖아요.”

16550961529852.jpg“나한테는 그쪽이 더 무서운 일이라.”

……모르겠어.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욕조 밖으로 내민 발을 블랙이 부드럽게 쓸었다. 물이 닿으면 따끔하던 감각도 이제는 무뎌졌다.

16550961529858.jpg“왜 그러는지는 통 모르겠지만, 화가 날 상황이 되면 최선을 다해 화를 낼게요.”

16550961529852.jpg“약속한 겁니다.”

블랙은 물 속에서 리에네를 더 바짝 끌어안은 다음 천천히 얘기를 시작했다. * * *

16550961529852.jpg“그건 왕의 반지였습니다. 대관식을 치른 왕이 몸에 지니는 반지.”

반란이 일어난 사냥터에서 도망친 기사 헨튼이 그에게 건네주었다. 가이너스의 상징이자 그 자체로 왕의 신분이 되는 반지였다. 펨브로윈 왕은 여덟 살의 병약한 아들에게 나우크라는 짐을 떠넘겼다.

16550961529852.jpg“반지를 지키는 일은 그 당시 내게 꽤 어려웠습니다.”

시체들과 함께 버려져 죽어 가는 그를, 지나가던 상단이 발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단에서 가장 부유한 왕궁이었던 나우크의 국경 근처는 늘 시장이 열리는 등 물자 거래가 활발했다. 도움에는 대가가 따랐다. 상단은 그를 주워 정신을 차리길 기대했다가 블루와렌 시의 노예상에게 팔았다.

16550961529852.jpg“반지를 지니고 있을 곳이 없어 상처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옆구리에 난 상처에.”

블랙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리에네는 끝도 없이 몸을 떨었다. 그냥 있을 수가 없어 몸을 돌려 그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16550961529858.jpg“어떻게…… 참았어요? 많이 아팠을 텐데.”

16550961529852.jpg“오래가진 못했습니다. 상처가 곪는 바람에 들켰습니다. 그리고 나를 안아 주는 건 고마운데 발이 물에 잠겼습니다.”

16550961529858.jpg“괜찮아요. 이젠 안 아파요.”

이런 건 아프다고 할 수도 없잖아요. 당신은 그런 일을 겪었는데. 여덟 살의 나이에, 혼자서. 나는 아파도 당신이 곁에 있는데. 당신 말고 어리광을 피울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데. 이걸 어떻게 아프다고 해요.

16550961529852.jpg“그래도 안 됩니다.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 고생해요. 아무는 것도 더뎌지고.”

블랙은 물에 젖은 발을 잡아 리에네의 자세를 바꾸며 다시 욕조 가장자리에 올렸다. 그 전에 몸을 구부려 복사뼈에 짧고 짜릿한 키스를 남겼다. 상처보다 키스가 더 아파서 울 것 같았다.

16550961529852.jpg“화내기로 한 약속 잊으면 안 됩니다.”

등 뒤에서 블랙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리에네는 이를 꾹 물고 울음을 참았다.

16550961529852.jpg“반지는 빼앗겼습니다.”

노예상이 반지를 가져갔다. 상처가 곪아 꽤 오래 앓았다.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었다. 살아남아서 빼앗긴 것을 되찾고 싶기도 했고, 그냥 포기하고 싶기도 했다.

16550961529852.jpg“기회를 봐서 도망쳤습니다.”

상처가 덜 아물 때라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탔다. 뭔가 목적이 생겨난 건 아니었다. 뭘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머무르면 지는 것 같아서.

16550961529852.jpg“그저 노예로 살기 싫었던 것일 수도 있고.”

도망치듯, 혹은 벗어나듯 살다 보니 나이가 들었고 몸이 자랐다. 열네 살이 되던 해 나이를 속이고 작은 용병단에 들어갔다.

16550961529852.jpg“용병단이 오래 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길게는 삼사 년, 짧게는 일 년에도 두어 차례씩 계속 소속을 옮겨야 했습니다.”

열일곱 살이 되자 더 이상 무기가 무겁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전쟁터가 도시보다 익숙했다. 그즈음 블랙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그때 그가 속한 용병단이 전투에 패했다. 반은 죽고, 반은 살아남아 전쟁포로가 되었다. 몸값을 지불할 수 없는 포로는 대개 노예상에 팔렸다. 몸이 튼튼한 용병들은 노예상이 선호하는 상품이었다. 그를 포함해 용병 넷을 사들인 노예상이 공교롭게도 블루와렌 시의 그 노예상이었다.

16550961529852.jpg“운이 좋았습니다.”

블랙은 짧게 웃으며 용병 넷이 노예상의 저택을 뒤엎은 얘기를 했다. 너무 상등품을 골랐던 게 오히려 화근이었다. 괜찮은 용병 넷에게 노예상이 고용한 경비들을 처리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블랙은 덜덜 떨면서 살려달라는 노예상에게 반지의 행방을 알아냈다. 반지는 진작 팔아치웠다고 했다. 노예상은 처음에는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래서 제 외형이 그새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열여덟 살 그날을 계기로 수하 넷이 생겼다. 셋은 함께 포로가 되었던 용병이었고, 하나는 노예상에게서 도망치게 해 준 노예였다. 그가 페르모스였다. 다섯이라는 인원으로 돈이 될 만한 전쟁터를 몇 년 구르다 보니 인원이 계속 늘었다. 스물셋이 되던 해 사람들은 그가 이끄는 무리를 두고 티와칸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16550961653286.jpg

16550961653294.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