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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처음으로 하는 것 (101/145)

101. 처음으로 하는 것2022.03.20.

리에네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던 페르난드 왕자의 삶은 그렇게 로드 티와칸의 삶으로 이어졌다.

16550961718383.jpg“전쟁터에도 휴식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반지는 그럴 때 가끔 수소문했습니다.”

늘 떠도는 삶이 정신없긴 했지만 나우크를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었다. 꺼내 보기 두려워 파묻긴 했어도 그 무게감이 사라지진 않았다.

16550961718383.jpg“반지를 찾은 것은 얼마 뒤였습니다.”

다시 블루와렌 시로 돌아왔다. 반지를 사들인 사람은 어느 귀족가의 영애였는데, 고국을 벗어나 블루와렌 시에서 젊은 한때를 보내는 중이었다. 그가 대륙을 떠돌았던 만큼, 반지도 그랬다.

16550961718383.jpg“반지의 주인이 블리니 대공녀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신분까진 몰랐지만.”

스물셋은 젊었다. 반지값을 돈이 아닌 다른 것으로 치르라는 대공녀 또한 젊었다. 젊다는 건 블루와렌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에 대한 변명이 되었다.

16550961718383.jpg“……반지 때문이었다고 변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유가 없었더라도 그런 식으로 얽혔을 겁니다. 그땐 좀, 무모하던 시절이었으니.”

16550961718406.jpg“……?”

거기까지 말을 했을 때 리에네는 확실히 화가 났다. 방금 전까지 울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는데, 거짓말처럼 눈물이 쑥 들어가 버렸다.

16550961718406.jpg“잠시만요. 그런 식으로 얽혔다는 말에 설명이 필요한 것 같은데요. 그런 식이라는 게 대체 어떤 식이라는 건가요?”

16550961718383.jpg“……짐작하는 대로.”

리에네가 그에게 안겨 있던 몸을 홱 뒤로 돌렸다.

16550961718406.jpg“내가 뭘 짐작하고 있는데요?”

16550961718383.jpg“그게…….”

갑자기 얼굴을 마주하게 된 블랙이 눈매를 찌푸렸다.

16550961718383.jpg“발이 또 물에 잠겼습니다. 이러지 말고…….”

제 몸을 돌리려는 블랙의 손을 리에네가 홱 밀어냈다.

16550961718406.jpg“말 돌리지 말아요. 대답이나 해요.”

16550961718383.jpg“그게 답니다. 열흘 정도 어울리다 관계를 끝냈습니다. 반지는 끝내 돌려받지 못했고.”

16550961718406.jpg“열흘!”

어느샌가 리에네는 소리를 치고 있었다.

16550961718406.jpg“열흘씩이나!”

16550961718383.jpg“공주님. 일단 발을…….”

16550961718406.jpg“말 돌리지 말라니까요! 열흘 동안 뭘 어떻게 어울렸다는 건데요!”

16550961718383.jpg“…….”

사실 대답은 꼭 필요하지 않았다. 곤란하게 일그러지는 표정만으로도 충분했다.

16550961718406.jpg“……알아요. 사실 이런 걸 묻는 건 좀 이상하다는 거. 내게도 어쨌거나 오래도록 연인이 있었고…… 물론 그건 말만 그런 거지만, 하여간 있긴 했고…… 아냐, 나는 그래도 그 사람을 좋아한 적은 없었어. 그런데 당신은, 열흘씩이나…… 정말로 열흘이나……. 아니, 과거가 있어서 용납 못 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그때부터 무슨 사이였던 건 아니잖아요? 당신에게 다른 연인이 있었던 건, 그래요. 그럴 수 있는 일이에요. 내게도 연인이 있었고…… 아니, 그런데. 나는 다른 사람을 좋아한 적이 없단 말이에요!”

자신이 내뱉은 말이 엉망진창이라는 것은 리에네도 알았다. 지금 몹시 화가 나는데, 화가 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니 막상 그럴 이유가 없었다. 블랙은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고 해도 문제 삼지 않았는데, 자신이 딱 열흘 만난 연인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건 이상했다. 무엇보다 오 년도 넘은 과거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너무 화가 났다. 부당한 걸 알면서도 화가 났다.

16550961718383.jpg“……애정을 느끼진 않았습니다.”

블랙이 물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리에네의 발을 꺼내 제 어깨에 올렸다. 나는 화가 났으니 이런 짓도 소용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입이 열리지 않았다. 자세가…… 이상해서 그런 것 같아. 수건이 흘러내릴 것 같잖아. 얼굴이 물에 잠길 것 같고. 그래서 그래.

16550961718383.jpg“애를 쓰기도 했습니다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정착해도 좋겠다는 마음이 도무지 들지 않아서.”

반지는 그래서 놔두었다. 블리니는 관계가 끝나는 마당에서 절대 곱게 반지를 내놓지 않을 테고, 그럼 결국 억지로 빼앗아야 했을 테니까. 믿기지는 않았지만 진심이 됐다고 말하는 여자에게 반지까지 빼앗을 정도로 밑바닥 사내가 된 건 아니었다. 반지는 나중에 다른 대가를 치르고 받아올 생각이었다.

16550961718383.jpg“공주님이 처음이었습니다.”

블랙은 어깨에 올려둔 발을 붙들어 상처 난 발바닥에 입술을 댔다.

16550961718383.jpg“무슨 짓을 해서라도 갖고 싶어진 사람은. 내게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도.”

16550961718406.jpg“……이런 것도, 다 했을 거잖아요.”

어쩌다 간신히 토해낸 말이 그랬다. 당신이 한 말을 믿는다고, 나도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16550961718383.jpg“안 했습니다.”

16550961718406.jpg“어떻게 믿어요. 당신은 전부 다 너무 능숙한데.”

16550961718383.jpg“육체관계가 없었다는 말은 못 하겠지만, 아주 많은 것들이 공주님과 처음 해 본 겁니다.”

16550961718406.jpg“못 믿겠어. 나는 당신이 이 욕조를 가져다 놓기 전에는 함께 욕조에 들어가는 일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고요.”

16550961718383.jpg“나도 수건을 두른 사람과 함께 욕조에 들어온 건 처음입니다.”

16550961718406.jpg“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너무 화가 나는 바람에 눈물이 울컥 터져 나왔다.

16550961718406.jpg“수건도 없었다면 그럼 뭘 어떻게 했다는 건데요!”

16550961718383.jpg“이런…….”

말실수를 깨달은 블랙이 초조하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리에네를 안으려 해도 자세가 뒤틀리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16550961718383.jpg“나가면 안 됩니까? 아니면 발만이라도 물에 닿지 않게…….”

16550961718406.jpg“내 발 핑계는 그만 대요!”

첨벙! 리에네가 욕조 안에서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물이 넘쳤다.

16550961718383.jpg“공주님.”

블랙이 당황해 리에네의 손을 붙잡았다. 리에네는 그 손을 홱 뿌리친 다음 블랙을 떠밀었다. 순순히 떠밀린 블랙의 등이 욕조 벽에 닿았다. 리에네가 작게 이를 갈면서 그의 양쪽 귀를 꾹 쥐었다.

16550961718406.jpg“말해 봐요. 또 뭘 했는지. 블리니 대공녀 하나였어요? 다른 사람이 또 있었던 건 아니에요?”

16550961718383.jpg“블리니 대공녀가 처음인 건 아니었고…….”

16550961718406.jpg“봐, 그럴 줄 알았어.”

왜 이렇게 억울하고 서러운 걸까. 이 남자가 자신이 처음일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리에네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자 블랙이 물에 젖은 손을 천천히 들어 뺨을 쥐었다.

16550961718383.jpg“함께 욕조에 들어와 이렇게 몸을 꽁꽁 싸매고 있는 사람은 공주님이 처음입니다.”

16550961718406.jpg“정말이지……. 더 화를 내라는 거예요? 그런 말을 꼭 해야 해요?”

16550961718383.jpg“그런데 그 모습이 가장 자극적입니다.”

16550961718406.jpg“그건 또 무슨…….”

갑자기 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니, 무슨……. 난 막 화를 내던 중이었는데.

16550961718383.jpg“가장 아름답고, 가장 흥분됩니다. 내가 나를 제어하지 못하고 정신이 나갈 것처럼 안고 싶어진 사람은 공주님이 처음입니다.”

진짜……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16550961718406.jpg“그런 말로 대충 넘어가려고…… 그러는 거죠. 아니야……. 난 화가 났다고요.”

16550961718383.jpg“그러니까.”

블랙이 물을 먹은 것처럼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16550961718383.jpg“약속을 지켜줘서 고맙습니다.”

16550961718406.jpg“그게 왜……. 아…….”

그러고 보니 화를 내겠다고 약속했지. 그런데 왜 그런 거지? 그런 얘기를 듣고 화가 나는 게 당연하지 않아?

16550961718383.jpg“내가 싫어진 게 아니라서.”

16550961718406.jpg“그건…… 그럴 일은 아니잖아요. 과거에 다른 사람을 만날 수는 있는 거니까……. 물론 굉장히, 굉장히 화가 나지만.”

16550961718383.jpg“화는 얼마든지 내도 됩니다. 무슨 짓을 하든 다 받아 줄 테니까 내가 싫어졌다고는 하지 마요.”

리에네가 얄미운 마음에 꾹 쥐고 있던 귀를 놓고 블랙의 머리를 헝클였다.

16550961718406.jpg“차라리 좀 싫어졌으면 좋겠어요.”

화가 나는 이유는, 그가 너무 좋아서였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에게 하듯 다정하고 뜨겁게 굴었다고 생각하면 너무 아까워서였다.

16550961718383.jpg“그런 무서운 말은 하지 말아요.”

16550961718406.jpg“화내는 건 안 무섭고요?”

16550961718383.jpg“그건 내게 애정이 있다는 말이라.”

뭐야, 알고 있잖아. 이 남자는 너무 능숙해. 그래서 더 얄미워.

16550961718406.jpg“당신, 지금 좀 미워요.”

16550961718383.jpg“압니다. 미안해요.”

16550961718406.jpg“오늘 잠들기 전까지 내가 처음인 걸 열 개쯤 생각해 놔요. 아니, 열 개는 너무 적어요. 스무 개.”

16550961718383.jpg“최선을 다하겠습니다.”

16550961718406.jpg“그래도 아직 미워요.”

16550961718383.jpg“방금 하나 생각났는데.”

블랙이 입술을 아래로 미끄러트렸다.

16550961718383.jpg“이건 공주님이 처음입니다.”

그가 이로 수건 끝을 물었다. 느릿느릿, 수건이 풀렸다. 맨살에 따듯한 물이 밀려들었다. * * *

16550961718383.jpg“하아…….”

욕실에서 있던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물 때문에 상처 주변이 부푸는 걸 본 블랙은 수건이고 뭐고 리에네를 들고 일어섰다. 젖은 몸을 새 수건으로 감싸서 그대로 침대에 올려두었다. 손발을 못 쓰게 된 게 아니라고 말해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물에 젖은 옷을 대강 아무렇게나 갈아입고 와서는 손과 발에 꼼꼼히도 자상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약을 바를 때마다 한숨이 이어졌다.

16550961718383.jpg“진작 말렸어야 했는데.”

16550961718406.jpg“내가 제멋대로였죠…….”

16550961718383.jpg“그래도 말렸어야 했어.”

축 늘어진 눈꼬리가 말도 못 하게 속상해 보였다. 리에네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런 표정도 다른 여자들 앞에서 지었던 적이 있었을까.

16550961718406.jpg“이것도 처음이에요?”

16550961718383.jpg“뭐가 말입니까?”

16550961718406.jpg“상처에 약을 발라 주는 거요.”

16550961718383.jpg“처음은 아닙니다.”

……괜히 물어봤어. 실망하려던 참에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16550961718383.jpg“그러나 이렇게 속이 상했던 적은 처음입니다.”

그게 정말이라는 건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16550961718406.jpg“미안해요. 속상하게 해서.”

이 남자는 계속 내 발이 물에 닿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는데. 내가 그걸 몰라줘서. 리에네가 괜히 발끝을 꾸물댔다. 블랙이 꾸물꾸물 움직이는 발가락을 잡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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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61718383.jpg“하지 마요. 쓸데없이 귀엽고 야하니까.”

16550961718406.jpg“그런 말이 더 야해요.”

16550961718383.jpg“공주님이 발가락을 움직이지 않으면 내가 이런 말을 할 일도 없습니다.”

16550961718406.jpg“그런데 왜 쓸데없다는 거예요?”

16550961718383.jpg“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는 아무것도 못 하니까.”

안 다쳤으면 뭘 했을 거라는 말이지? 와……. 그 말이 더 야한 것 같아.

16550961718406.jpg“그게…… 크흠, 큰 상처도 아니잖아요.”

16550961718383.jpg“크든 작든 상처는 다 상처입니다.”

블랙은 양쪽 발에 차례대로 붕대를 감았다.

16550961718383.jpg“이제 됐어요.”

그가 발을 놓아주자 리에네가 몸을 옆으로 돌려 침대 아래서 슬리퍼를 찾았다. 그러다 발목을 도로 붙들렸다.

16550961718383.jpg“뭐 하는 겁니까?”

16550961718406.jpg“……? 일어나야죠. 이 시간에 침대에 계속 있을 수는 없잖아요.”

16550961718383.jpg“어디를 갈 건지 말해요.”

16550961718406.jpg“음, 일단…… 디에렌 대공자한테요?”

16550961718383.jpg“그 인간은 왜.”

16550961718406.jpg“협상을 해야죠. 알리토 공국과 전쟁을 할 수는 없잖아요.”

블랙이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16550961718383.jpg“그새 또 할 일을 찾았습니까. 하루 정도는 그냥 쉬어도 될 텐데.”

16550961718406.jpg“벌써 몇 번을 말하지만, 몸이 잘못된 게 아니에요. 그냥 생채기가 좀 났을 뿐이지.”

16550961718383.jpg“그 생채기가 나한테 얼마나 아픈지 공주님도 좀 알았으면 좋겠는데.”

블랙은 몹시도 뜨거운 말을 별것 아닌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게 오히려 리에네를 당혹스럽게 했다.

16550961718383.jpg“이리 와요.”

16550961718406.jpg“……네, 네?”

16550961718383.jpg“손을 조심해야 하니까.”

블랙이 침대에 앉아 있는 몸을 훌쩍 안아 들었다. 엉겁결에 그의 목에 팔을 감은 리에네가 물었다.

16550961718406.jpg“설마 안고서 가겠다는 건가요?”

16550961718383.jpg“이미 말했을 텐데.”

16550961718406.jpg“아니, 그건……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죠. 그리고 옆방에 가는 것도 아니고, 디에렌 대공자한테 가는 건데요?”

16550961718383.jpg“그 인간이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 가는 길이라도 공주님은 그 발로 못 걷습니다.”

16550961718406.jpg“슬리퍼를 신을게요. 푹신한 걸로.”

16550961718383.jpg“신고 싶으면 신어요. 걸을 생각은 말고.”

16550961718406.jpg“이건 너무 과해요.”

16550961718383.jpg“공주님.”

블랙은 리에네의 고집을 꺾을 다른 방법을 찾았다.

16550961718406.jpg“왜요.”

16550961718383.jpg“하나 더 생각났습니다. 공주님이 처음인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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