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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스무 고개 (102/145)

102. 스무 고개2022.03.23.

16550962243682.jpg“뭔데요?”

리에네가 기대에 들떠 물었다.

16550962243688.jpg“발이 다쳤다고 사람을 안고 다닐 생각이 든 건 공주님이 처음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좀 안겨 있어요.”

16550962243682.jpg“…….”

그러니까 할 말이 없네.

16550962243682.jpg“디에렌 대공자가 나를 우습게 보면 어떻게 해요. 협상을 하러 가는 길인데.”

16550962243688.jpg“공주님이 내게 안겨 있거나 업혀 가거나 아무도 우습게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디에렌과 하는 건 협상이 아닙니다.”

16550962243682.jpg“그럼요?”

16550962243688.jpg“통보. 그리고 약간의 자비. 너무 많이 베풀진 말아요. 나는 그 인간이 공주님께 독을 썼다는 걸 잊지 않고 있으니까.”

맞아. 잘못한 건 그쪽이지. 알리토에서 내가 디에렌 대공자를 붙잡아 놓는다고 해서 멋대로 군대를 보낼 수는 없어. 오히려 그 반대라면 모를까.

16550962243682.jpg“알리토 대공은 어떤 사람이에요? 아들 일에 무모해지기도 하는 인물인가요?”

16550962243688.jpg“아니요. 노련한 장사꾼에 더 가깝습니다. 아들의 목이 붙어 있는 한 쓸데없이 전쟁처럼 돈이 많이 드는 일을 감행할 성격은 아닙니다.”

그건 다행이었다.

16550962243682.jpg“디에렌 대공자를 어떻게 하고 싶어요?”

16550962243688.jpg“반으로…….”

블랙이 말을 하다 걸음을 멈칫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반으로 갈라 각자 알리토 공국과 샤르카 왕국에 보내 버리고 싶다는 말을 내뱉을 뻔했다.

16550962243682.jpg“반으로요?”

16550962243688.jpg“……그 말은 잊어 줘요. 블리니 대공녀가 고국의 사정을 생각한다면 그를 반지와 맞바꾸자는 제안에 응할 겁니다.”

16550962243682.jpg“아, 그런 방법이 있군요.”

반지 얘기가 나오자 리에네가 갑자기 블랙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16550962243682.jpg“한 번 더 말해 줘요. 대공녀를 좋아한 적이 없다고.”

블랙은 걸음을 멈추고 리에네를 아주 다정히 토닥였다.

16550962243688.jpg“말했듯이 애를 써도 안 됐습니다.”

16550962243682.jpg“왜 애를 썼는데요?”

16550962243688.jpg“나와 닮았다고 생각해서.”

16550962243682.jpg“어떤 모습이요?”

16550962243688.jpg“왕족으로 태어났고, 비틀려 있는 게.”

16550962243682.jpg“…….”

16550962243688.jpg“말했듯이 그때는 막 티와칸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시절이었습니다. 덕분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갈등을 했습니다. 나우크로 돌아가 내 자리를 빼앗을지, 아니면 이대로 용병으로 살 건지. 블리니 대공녀를 만난 건 그 무렵이었습니다.”

16550962243682.jpg“대공녀는…… 당신의 고민을 들어 줬나요?”

16550962243688.jpg“내 입으로 말을 하진 않았습니다. 다만 공녀는 내가 알려진 대로 노예 출신이 아니라 왕족이라는 걸 스스로 눈치챘습니다. 공녀 역시 공국의 통치권을 두고 갈등을 겪던 중이라 제멋대로 비슷한 처지라고 여겼습니다.”

16550962243682.jpg“공녀가 비슷한 상황이라는 게…… 당신에게 위안이 됐나요?”

16550962243688.jpg“처음에는.”

16550962243682.jpg“나중에는 달랐어요?”

16550962243688.jpg“그런 이유로 사람을 좋아할 수는 없다는 걸 생각보다 빨리 깨달았습니다. 블리니 대공녀는…….”

블랙은 잠시 말을 골랐다.

16550962243688.jpg“……집처럼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16550962243682.jpg“…….”

16550962243688.jpg“언제든지 내가 돌아갈 곳이라고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한 순간도.”

그 말에 화가 전부 녹아 버렸다. 리에네는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은 나우크를 떠난 그 순간부터 집이 갖고 싶었다고 했잖아요. 그가 집을 찾으려 했다는 이유로 서운해하고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나는 그 시간이 너무 미안하고…… 그리고 너무 고마워요. 당신이 다른 집을 찾지 않았다는 게. 결국 내게로 왔다는 게. 리에네가 그에게 볼을 문지르며 작게 속삭였다.

16550962243682.jpg“이제 됐어요. 스무 개까지 안 찾아도 돼요.”

16550962243688.jpg“화가 너무 금방 풀리는 거 아닙니까?”

16550962243682.jpg“화내는 것보다 낫잖아요.”

16550962243688.jpg“더 내도 괜찮은데. 공주님이 나 때문에 화를 내는 것도 좀 기뻤고.”

이 남자 말하는 것 좀 봐.

16550962243682.jpg“그래서 내가 귀를 꼬집었는데 그건 기억도 나지 않나 봐요?”

16550962243688.jpg“아픔에도 종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블랙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제 리에네도 쓸데없이 내려 달라는 고집은 피우지 않았다.

16550962243682.jpg“설마 아픈 게 좋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죠.”

16550962243688.jpg“전부 다는 아니고.”

블랙은 또 걸음을 멈추고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것처럼 리에네의 코끝을 깨물었다. 리에네가 웃으며 콧등을 찡그렸다.

16550962243682.jpg“아, 아파.”

16550962243688.jpg“이 정도는 좋을 것 같습니다.”

16550962243682.jpg“코에 잇자국이 남으면 남들에게 뭐라고 말할 거예요? 나우크에 강아지가 있는 것도 아닌데.”

16550962243688.jpg“공주님에게 있는 잇자국이니 장식인 줄 알 겁니다.”

이 남자가 이렇게 어이없는 말도 하는구나…….

16550962243682.jpg“그 말은 내가 들어도 너무 심한 과장인데요. 남들이 웃을 거예요.”

16550962243688.jpg“웃으라고 해요. 그래도 코를 물 수 있는 공주님을 가진 건 나니까.”

이 남자는 좀, 너무 과한 것 같아……. 하지만 누가 지금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싫다는 말은 절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말들을 주고받는 동안 디에렌이 갇혀 있는 지하 감옥에 도착했다. * * *

16550962296876.jpg“이쪽입니다.”

랜달이 재빨리 길을 안내했다.

16550962296876.jpg“알리토의 대공자는 이제 좀 정신을 차렸습니다. 아까 다리가 잘…… 아니 아니, 아주 조금 다친 뒤로 놀라서 얼이 빠진 것 같더니 지금은 괜찮습니다. 주제 파악도 슬슬 하는 것 같고.”

16550962243688.jpg“다행이군.”

랜달이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지만 리에네는 그가 자꾸만 곁눈질을 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역시 너무 유난으로 보이겠지. 나도 좀 부끄러워…….

16550962243682.jpg“여기 길이 좁은데요. 계속 저를 안고 가려면 다른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겠어요?”

16550962243688.jpg“그럴 리가요. 불편한가?”

갑자기 자신에게 훅 돌아오는 질문에 당황한 랜달은 발목이 꼬여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16550962296876.jpg“부, 불편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럴 리가요!”

……그런데 표정은 참 불편해 보여서요.

16550962296876.jpg“기, 길이 험하니 당연히 공주님께서는 이런 길을 걸으시면 안 됩니다! 그게 당연합니다. 저도 압니다!”

랜달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컸다. 지하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주군이 이러시는 걸 나도 처음 본다, 라는 의미를 확실하게 전달했다. 리에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블랙의 옷자락을 남들에게 표시 나지 않게 잡아당겼다.

16550962243682.jpg“안다니 다행이에요……. 내가 정말로 발을 다치긴 했어요.”

16550962296876.jpg“무, 물론입니다!”

16550962243682.jpg“…….”

리에네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셋 중에 블랙만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했다. 랜달이 당황하긴 했지만 그도 아주 눈치가 없진 않았다. 결국은 다들 이런 광경에 익숙해지게 될 것이다. 블랙에게 리에네는 언제 어느 때라도 예외가 된다는 걸 알았으니까. 발이 다쳤다면 타국의 대공자를 만나러 갈 때에도 안아서 나르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16550962296876.jpg“이 방입니다.”

랜달이 보초를 세워 둔 감방 앞에서 멈춰 섰다. 보초를 서던 용병이 재빨리 문을 열었다. 끼이익!

16550962243688.jpg“머리를 조심해요. 천장이 낮으니까.”

블랙은 한 손으로 부드럽게 리에네의 머리를 감싼 다음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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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62296876.jpg“…….”

두 사람이 들어서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던 디에렌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원래도 살갗이 쩍 갈라진 허벅지의 부상 때문에 좋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더 심했다.

16550962296876.jpg“그림 같은 한 쌍이네.”

16550962296876.jpg“저, 저하…….”

시종이 말조심을 하라는 의미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디에렌은 블랙을 비꼬는 게 아니었다. 누이와 자신을 향한 자조였다.

16550962296876.jpg“이런 걸 갈라놓겠다고 헛고생을…… 하, 어이가 없어서 미치겠군.”

그를 씁쓸하게 바라보던 리에네가 블랙에게 말했다.

16550962243682.jpg“이제 내려 주세요. 안긴 채 신문을 할 수는 없으니까.”

16550962243688.jpg“그럼 잠시만.”

블랙이 감옥 밖을 향해 소리쳤다.

16550962243688.jpg“의자를 가져와.”

16550962296876.jpg“예, 주군.”

곧 의자가 하나 들어왔다. 블랙은 그 의자에 리에네를 앉게 했다.

16550962243682.jpg“물어볼 게 있어요.”

16550962296876.jpg“지금 이 꼴을 누이가 봤어야 하는데.”

디에렌은 대답 대신 이런 말을 했다. 하지만 그가 한 말은 아직 하지 않은 질문에 대한 답이나 다름없었다.

16550962243682.jpg“나를 샤르카 왕국으로 납치하도록 지시한 게 블리니 바셰드 왕자비겠군요.”

16550962296876.jpg“내 입으로 그렇다는 말은 못 합니다. 알리토 공국에도 체면이라는 게 있으니.”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결론은 실패였다. 바이야드가 머리를 굴려 이중 삼중으로 그물을 쳤지만, 리에네 공주는 어떻게든 그물에 구멍을 내고 빠져나갔다. 통 모를 일이었다. 저렇게 선하고 얌전할 것만 같은 사람이 어째서 그물을 찢을 수 있는 날카로운 발톱을 가지고 있었던 건지.

16550962243682.jpg“이유는요?”

16550962296876.jpg“말했잖습니까. 말 못 한다고. 티와칸의 수장이 저를 놔두고 혼인한 게 눈꼴시어서 그렇다고 하면 공국의 꼬락서니가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안 그래요?”

설마 했지만, 그런 이유는 아니기를 바랐다. 리에네가 쓴 얼굴로 말을 이었다.

16550962243682.jpg“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왕자비도 로드 티와칸이 이미 혼인했다는 걸 알고 있지 않나요?”

16550962296876.jpg“그게 대숩니까? 이 세상에는 혼인이 피를 잇는 것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인간들이 더 많습니다.”

16550962243682.jpg“하지만 왕족이죠. 이런 식으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들다간 그게 양국 간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벌어지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잖아요. 블리니 왕자비는 암살자를 사자로 보냈을 뿐 아니라 나우크의 경비대장을 이용해 나를 배신하게 했어요. 이건 사과가 통할 일이 아닙니다.”

디에렌이 피식 웃었다.

16550962296876.jpg“공주님. 그건 공주님 생각입니다. 공주님이 그런 왕족인 것이고요.”

16550962243682.jpg“블리니 왕자비는 아닌가요?”

16550962296876.jpg“네. 대신 빠져나갈 길을 잘 만들어 뒀을 겁니다. 바이야르는 죽어도 누이가 시켰다는 말은 안 할 테고, 나 역시 마찬가지고. 그 외에 누이가 끌어들인 사람은 나우크의 인간들이니 그건 죽이든 살리든 공주님 몫이 되겠지요.”

16550962243682.jpg“아니요.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블리니 왕자비가 자신이 한 짓에서 혼자 빠져나간다 해도, 공자가 여기 있잖아요. 공자가 어떤 곤란을 겪어도 블리니 왕자비는 괜찮다는 건가요? 그건 결국 알리토 공국의 문제가 될 텐데?”

16550962296876.jpg“내가 괜찮으리라 생각했을 겁니다. 티와칸의 수장이 설마 나를 죽이지는 않을……. ……젠장.”

디에렌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끼가 몸을 내리찍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죽이지 않을 거라 믿었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리에네 공주가 그 순간 등장하지 않았으면 제 몸이 몇 조각으로 토막 났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과연 누이가 그걸 몰랐을까. ……어쩌면 알았을 것이다. 그래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가 죽으면 공국을 물려받을 사람은 자연히 누이가 되니까. 이번 일로 샤르카 왕국 내에서 입지가 위태로워지면 누이는 공국으로 돌아와 대공이 된다는 계산을 해뒀을 것이다.

16550962296876.jpg“젠장, 젠장, 젠장.”

디에렌이 눈을 꽉 감고 연달아 욕설을 내뱉었다.

16550962296876.jpg“저, 저하…….”

시종이 리에네의 눈치를 살피며 디에렌을 말렸다. 디에렌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면서 계속 몸을 떨어댔다.

16550962243682.jpg“편지를 쓰세요. 블리니 왕자비에게.”

이렇게 말하며 리에네가 블랙의 손을 살짝 쥐었다. 블랙은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16550962243682.jpg“반지를 돌려주면 공자의 목숨을 보장한다는 내 뜻을 전하도록 하세요.”

16550962296876.jpg“……바, 반지?”

디에렌은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16550962243682.jpg“그렇게만 하면 알 거예요. 그리고 내가 왕자비의 비밀을 하나 알고 있다고도 전하세요. 반지가 무사히 도착하면 그 비밀은 조용히 사라지겠지만, 아니면 모두의 눈앞에 살아날 것이라고요.”

말을 마친 리에네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일어서려고 하는 순간 블랙이 재빨리 리에네를 안아 들었다. 이제는 부끄럽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리에네는 원래 감옥을 오갈 때는 안겨서 와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태연한 표정을 지어냈다. 사실 힘들긴 했다.

16550962243682.jpg“알리토 대공가에서 작문 교육을 얼마나 잘 시켰는지 기대하죠.”

그것으로 대화가 끝났다. 지하 감옥을 나오자 때를 맞춘 듯, 웨로즈 일당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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