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저주가 사실이라면2022.03.27.
웨로즈를 데려온 놈들은 바이야르가 고용한 용병들이었다. 도망칠 길이 없다는 걸 깨달은 놈들은 곧 투항했으나, 페르모스는 가차 없이 목을 잘랐다. 피곤이 누적된 페르모스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블리니가 보낸 바셰드 군을 처리하고 난 뒤, 이제껏 내내 웨로즈와 라피트를 뒤쫓았다. 블랙은 절대 리에네의 곁을 떠날 마음이 없었으니 남은 일 처리는 페르모스의 몫이었다. 블랙이 일 처리를 맡긴 데 유감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일을 만들어낸 놈들에게 화가 났다.
“등신이라는 말도 아까운 돌대가리들. 여기가 티와칸 텃밭이라는 걸 알고도 덤벼들어? 아오, 머저리들.”
페르모스는 영 화가 안 풀리는지 시체를 퍽퍽 걷어찼다.
“관두세요, 부관. 아까 잡힐 때 들어보니 여기 올 때까지 몰랐답니다.”
“뭐? 뭘 몰라?”
“티와칸이 나우크에 자리잡은 거요. 나중에 알게 돼서 자기들끼리도 도망가느냐 마느냐 한참 싸웠다던데요.”
“그럼 진작 투항하든가! 이놈들이 멍청하다는 이유로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어야겠냐!”
“에이,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이제 고생도 얼추 다 끝났는데요.”
웨로즈가 붙잡혔고 라피트가 남았다. 리에네가 폭포 뒤로 도망친 것을 알고 그들도 하필 그 미로 속에 발을 들였다. 페르모스가 길을 보는 방법을 알아내지 않았다면 다 같이 한참을 더 고생했을 것이다. 하여간 그 덕에 티와칸은 보다 수월히 미로 안을 움직이면서 웨로즈 일당을 잡을 수 있었다.
“……클라인펠터는 너무 빨리 잡지 마.”
“네, 부관?”
“벌써 잡아 가두면 너무 편하지. 길이 아닌 데로 몰아놓고, 나오지 못하게 해. 일주일쯤 굶기자고.”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부관.”
피로에 절어 있던 티와칸이 히죽 웃으며 라피트를 미로 안쪽으로 몰아넣었다. 그사이 페르모스의 머리는 다음 그림을 바쁘게 그려댔다.
“여기는 분명히 기관이야.”
길을 찾는 방법을 알아냈다는 건, 이곳이 일부러 만들어졌다는 걸 알아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홉 개의 폭포……. 물을 다루는 장치였을 것이다. 가이너스 왕가의 핏줄만 아는 장소라고 했으니 왕가에서 그 장치를 독점했겠지. 클라인펠터는 그걸 훔치고 싶었을 테고…… 열쇠라는 건 이 기관을 작동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닐까 싶은데. 주군께 얘기를 해 봐야겠군.”
심장이 설레기 시작했다. 가이너스 왕가의 몰락과 함께 사라진 나우크의 영화를 되찾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성으로 부리나케 달려온 페르모스는 리에네와 블랙이 이미 폭포의 장치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세 사람이 전부 같은 생각을 했다면 틀림없을 겁니다.”
조금 허탈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 페르모스가 눈을 반짝이며 두 손을 맞잡았다. 세 사람은 왕실 집무실에 자리를 잡고 아주 예전 기록까지 살펴보는 중이었다. 혹시라도 물을 다루는 장치에 대한 흔적이 있을까 해서였다. 아직까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왕과 왕들에게서 입으로만 전해져 온 비밀이지 않을까 싶었다.
“안을 살펴봐야겠네요. 혹시 테르난 클라인펠터가 장치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을까요? 아니면 대사제가.”
“둘 다 제대로 아는 건 없을 겁니다. 그러나 사소한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 입을 열게 해야겠습니다.”
“대사제도 중독이 됐다면서요. 몸은 회복되었나요?”
“좀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단순히 피부에 바른 게 아니라 음식에 타서 먹였답니다. 그럼 몸에 남아 있는 독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아, 저런…….”
리에네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탁자를 툭툭 두들겼다. 그러는 미인이 손과 발에 붕대를 두둑이 감고 있어서 그게 더 안쓰러웠다. 블랙도 같은 생각인지 공연히 손을 끌어와 손가락 끝에 입술을 댔다.
“손을 조심해요. 이런 짓은 하지 말고.”
“아……. 별로 아프질 않아서 다친 걸 잊고 있었어요.”
블랙이 혀를 찼다.
“붕대를 이렇게 감고 있는데 어떻게 그걸 잊어버립니까?”
“그야…….”
사실 깊게 베인 것도 아니고 살갗이 까진 정도라 약을 바르니 금방 딱지가 앉았다. 더는 아프지도 않았고, 붕대를 감아놔 봤자 가렵기만 했는데, 블랙은 오늘 아침에도 이렇게 두툼하게 붕대를 갈아 놓았다.
“붕대가 너무 두꺼워서 그런 거 아닐까요? 이러니까 더 잘 모르겠어요.”
리에네가 웃는 얼굴로 블랙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좀 풀어 주셔도 될 것 같아요.”
블랙도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안 됩니다.”
“안 된다는 말을 웃으면서 하시네요?”
“공주님을 보면 좋은 것과 붕대는 별개니까.”
“발은 양보할게요. 사실 스타킹을 신지 않아도 돼서 그건 오히려 편하더라고요. 하지만 손까지 이런 건 너무해요. 오늘 식사 시간만 해도 포크를 제대로 못 써서 음식을 다 흘렸잖아요.”
음식을 흘린다는 핑계로 블랙은 음식을 전부 먹여 주었다. 그래도 먹는 것 반, 흘리는 것 반이었다. 몸이 자꾸 서로에게 기울었고 키스가 멈추지 않았다. 두 번째 요리를 들고 들어오던 헨튼 부인이 당황해 접시를 들고 그대로 식당을 떠날 정도였다.
“조금만 더 참아요.”
“너무해요. 손을 제대로 못 쓰고 있잖아요.”
“그래서 공주님이 손을 쓸 일이 없도록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게 문제였다.
“이러다 응석쟁이가 될 것 같아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게 생겼다고요.”
“그래도 좋을 텐데.”
리에네와 페르모스가 동시에 어이를 잃었다. 리에네가 블랙에게 붙들린 손을 잡아 빼며 페르모스에게 물었다.
“페르모스 경. 밖에 다른 급한 일은 없나요? 샤르카 왕국에서 군대를 더 보내올지도 모를 일이잖아요. 로드 티와칸이 필요한 일이 어딘가에는 있을 텐데요.”
“음……. 유감이지만 지금 당장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유감이네요.”
“네, 유감입니다.”
뒤져 보면 있겠지만, 그렇다는 말을 하기에 페르모스는 너무 영리했다. 지금 블랙을 리에네에게서 떼어놓는다는 건 화를 자초하는 행위였다. 그것도 몹시 크게. ……내가 눈치 없이 너무 오래 끼어들고 있는 건가. 이만 자리를 비켜드려야 하나.
“흐음, 흠. 그럼 저는 나가서 죄수를 호송하는 일을 감독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경비대 말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대로 계속 가둬 둘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경비대 문제가 조금 골치 아프긴 했다. 웨로즈의 단독 범행이긴 했지만, 이번 일로 경비대는 쓸모가 없다는 게 너무 명확히 드러났다.
“그렇긴 해도 물갈이는 해야 해.”
“적극 동의하는 바입니다. 공주님께서는요?”
“그게 참……. 어려운 일이에요.”
경비대에는 충성을 다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클라인펠터의 입김이 닿은 이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경비대장 웨로즈를 따르는 자들이 많아서 그가 처형당할 경우 반발이 심할 것이다. 지금도 티와칸과 손발이 맞지 않아 잡음이 들리는 중이었다. 어려워도 뭔가를 해야 했다.
“일시에 전부 다 해고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을 겁니다. 공주님 마음도 불편할 테고.”
블랙이 절충안을 내놓았다.
“왕실 근위대로 이름을 바꾸고 대신 기사 자격을 가진 자들만 허용하는 걸로 해요. 기사가 될 수 있도록 반년의 기한을 준다고 하면 반발도 적을 겁니다.”
“확실히 다들 환영할 만한 대안이네요.”
“경비대장의 일탈을 근거로 든다면 경비대를 해체하고 근위대로 재정비한다고 해도 명분이 충분할 테고.”
“네. 그건 맞아요.”
리에네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지금도 웨로즈의 선택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그간 보여 줬던 충성심을 버린 것 같진 않았다.
“그가 아쉽습니까?”
블랙은 빠르게 리에네의 표정을 읽었다.
“네……. 아무래도요. 당신이 오기 전까지 그는 몇 안 되는 내 사람이었어요.”
여섯 가문을 상대하는 길고 외로운 전쟁에서 그는 늘 곁을 지키던 아군이었다.
“경비대장이 변절한 게 아니라 믿습니까?”
“잘못된 선택을 한 게 아닐까요……. 웨로즈 경은 당신을 잘못…….”
무슨 말을 하려던 리에네가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블랙은 그 공백의 의미도 이해했다.
“괜찮으니 말해 봐요. 내가 해야 할 게 있습니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웨로즈 경은 가이너스의 핏줄은 모두 병이 있다고 믿어요. 당신도 그럴 거라고 했어요. 그 얘기가 당신을 어떻게 괴롭게 만들지 몰라서 두려워요. 그건 그저 블리니 왕자비가 심어 둔 거짓이라고 하고 싶은데. 설령 그렇다 해도 나는 얼마든지 결과를 감당하겠다고, 그런 이유로 당신을 잃고 싶진 않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런 말조차 괴로운 일이 될까 봐 무서워요.
“……조금, 시간을 줘요.”
리에네는 읽기 편하도록 블랙이 자신의 무릎 위에 세워 놓은 왕실 기록서를 조심스럽게 쓸며 말했다. 어쩌면 이 안에 가이너스 왕가의 병에 대한 기록이 남았을지 모르잖아. 그걸 좀 알아봐야겠어. 그러고 나서 얘기해도 늦지 않아. 모든 왕들이 발병해서 일찍 죽은 건 아니라고, 얼마든지 예외가 있었다고 말해 줄 거야. 그리고 그게 새빨간 거짓말일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일단, 기록부터 찾아봐야 해.
“웨로즈 경을 어떻게 할지. 경비대 해체 건은 당신에게 맡길게요.”
“뜻대로 해요.”
블랙이 이마에 다정한 키스를 남겼다. 리에네가 그에게 어깨를 기대는 걸 본 페르모스가 눈치껏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이었다.
“공주님.”
플램바드 부인이 리에네를 찾아왔다. 어쩐지 안색이 어두웠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따로 뵐 수 있는지요.”
* * * 블랙은 흔쾌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너무 응석을 부리게 만드니 차라리 좀 나가 있으라던 리에네는 그새 허전함을 느꼈다.
“앉으세요, 부인. 안색이 좋지 않은데.”
리에네가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플램바드 부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보다는 곁으로 가고 싶습니다, 공주님.”
“왜 그래요, 부인.”
플램바드 부인은 리에네의 옆으로 다가와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잡더니, 붕대가 두툼하게 감긴 것을 보고 작게 웃었다.
“붕대를 이리 감아 놓다니……. 저는 공주님께서 이만한 상처에 붕대를 감은 모습을 처음 봅니다.”
“그러게요……. 과하긴 하죠.”
부인이 살살 붕대 위를 쓰다듬었다.
“행여나 잘못될까 아프실까 염려하는 마음을 어찌 과하다 하겠습니까. 이런 마음이라면 얼마라도 받아야지요.”
하지만 부인의 작은 웃음은 무겁고 슬펐다. 도무지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인가요.”
“……제가, 그 양반을 보고 왔습니다.”
그 양반이란 웨로즈일 것이다.
“너무 화가 나서……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양반이 그랬다는 게 너무너무 화가 나서 제 손으로 뺨이라도 쳐 줄 생각으로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웨로즈는 부인에게 블랙의 정체와 가이너스 왕가의 유전병에 대해 얘기했을 것이다.
“그건 누구도 모르는 일이에요, 부인. 사람이 어떤 병에 걸릴지, 그걸 대체 누가 안다고요. 거짓말일 거예요. 웨로즈 경이 잘못된 얘기를 함부로 받아들인 것뿐이에요.”
“……이미 알고 계셨군요.”
“네.”
“그래도…… 상관이 없으신 겝니까?”
“함부로 믿을 얘기가 아니잖아요. 아무런 근거도 없어요.”
“언젠가 공주님께서 가이너스 왕가의 마지막 왕에 대해 물으신 적이 있었지요.”
리에네도 기억했다. 플램바드 부인은 그 왕은 저주를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말을 했다.
“……믿지 않아요. 저주니 뭐니 하는 얘기는 이제껏 전부 클라인펠터가 신전을 통해 흘려댄 거짓이었어요. 나우크의 가뭄도 아르사크 가문에 내려진 저주라고 했었잖아요.”
그러기엔 소문이 제법 많았다. 너댓 살밖에 되지 않았던 리에네는 아무것도 모를 테지만, 유령 같은 펨브로윈 왕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성 안에서도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둥, 그러다 한밤중에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는 둥, 영혼을 반쯤 빼앗겼다는 둥 등골이 오싹대는 소문이 늘 뒤따랐다. 그가 사냥터에서 급작스럽게 죽었다는 말에도 아무도 반란을 의심하지 않았다. 펨브로윈 왕은 언제 어디서 죽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만일…… 저주가 사실이라면 어떡하실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