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 절반의 확률 (104/145)

104. 절반의 확률2022.03.30.

1655096267181.jpg“부인.”

리에네가 제 손을 잡은 플램바드 부인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다시 부인의 손을 쥐었다. 붕대가 감겨 있어서 동작이 서툴렀다.

1655096267181.jpg“만약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가이너스의 피를 이은 사람이 전부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로드 티와칸을 봐요. 죽어도 죽을 것 같지 않은 사람이잖아요. 저렇게나 건강한 사람이 갑자기 발병할 리 없다고요.”

16550962671823.jpg“저도…… 저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정말이지 저도 그렇습니다.”

그 말에 눈물이 울컥 흐를 뻔했다. 리에네는 마음을 굳게 먹고 부인의 손을 놓아주었다.

1655096267181.jpg“그렇다면 기도를 해 주세요. 아무 일 없도록, 괜한 걱정이 되도록. 만일, 정말로 만일 로드 티와칸에게 병이 생긴다 해도 나는 곁을 지킬 거예요. 그게 헤어지는 것보다 더 행복할 거예요. 그건 장담할 수 있어요.”

16550962671823.jpg“공주님…….”

플램바드 부인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1655096267181.jpg“울지 말아요, 부인. 부인이 내게 이러면 안 돼요. 내 편을 들어줘야죠.”

리에네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부인에게 크고 묵직한 왕실 기록서를 한 권 안겨 주었다.

1655096267181.jpg“여기서 역대 가이너스 왕들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찾아줘요. 정말로 다들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었는지, 아니었는지 찾아보면 나오겠죠. 기록을 전부 찾아내기 전까지 떠날 생각은 말아요.”

부인이 우는 얼굴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6267181.jpg“아이 참. 기록서에 물기가 묻으면 안 된다고요. 제발 그만 그쳐요.”

리에네가 손등에 감긴 붕대로 부인의 눈물을 닦아냈다. 부인이 울면 안 돼요. 그럼 나도 울고 싶어져요. 나는 아직 사실인지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울지는 않을 거야.

1655096267181.jpg“빨리요.”

16550962671823.jpg“……네, 공주님.”

  부인의 도움으로 열세 명의 왕에 대한 기록을 정리했다. 열아홉 중 아홉이 젊은 나이에 죽었다. 사인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진 않았지만 비슷한 기록들이 남아 있었다. 이른 나이에 죽은 왕들은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 했고, 극도로 모습을 감추었다. 극단적으로 오래 잠에 빠져 있다가도 며칠씩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성 안에서 감쪽같이 모습을 감추는 바람에 왕을 찾는 일이 자주 있었다는 기록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열아홉 중에 아홉. 발병 확률은 절반인 셈이었다. * * *

16550962671823.jpg“……네?”

라피트의 외당숙, 위스타드는 당밀을 훔쳐 먹은 것처럼 입술을 딱 붙였다. 바셰드 왕자의 느닷없는 죽음 때문에 왕국의 안팎이 어수선했다. 그 와중에 바셰드군 50이, 정확히는 49명이 시체로 돌아온 일 때문에 또다시 왕실이 발칵 뒤집혔다. 살아남은 한 명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데, 몇 시간 뒤면 왕실 재판정에 끌려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샅샅이 털어놓을 예정이었다. 그 틈에 블리니 왕자비가 위스타드를 불러들였다. 위스타드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왕자궁으로 들어왔다. 왕자를 잃은 왕자궁은 온통 애도를 뜻하는 검은색이 가득했다. 침대와 탁자, 장식장이 검은 천으로 뒤덮였다. 왕자의 초상화도 마찬가지였다. 꽃은 전부 치워졌고 창문은 굳게 닫혔다. 숨 막히도록 우중충하고 우울한 왕자궁에서, 블리니 왕자비만이 파피꽃처럼 화려했다. 상복은 저 지독한 미모에 아무런 흠도 되지 못했다. 블리니 왕자비는 제 집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더 느슨한 자세로 있었다. 소파에 기대듯이 누워 한쪽 다리를 발판에 올려놓았는데, 치맛자락이 흘러내리며 곧게 뻗은 흰 다리와 맨발이 보였다.

16550962690735.png“뭘 자꾸 묻는지요.”

블리니 왕자비가 고개를 돌리며 반쯤 식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마시라고 내어주긴 했지만 위스타드는 찻잔에 손도 대지 못했다. 그보다는 옷깃이 벌어진 상복에 온 신경이 쏠렸다. 블리니 왕자비가 가늘게 숨을 내쉴 때마다 젊고 싱싱한 가슴이 오르락거렸다.

16550962690735.png“일전에 소개해 준 자는 쓸모가 없었단 간단한 말을.”

샤르카 왕실은 이전부터 엉망진창으로 문란했지만, 블리니 왕자비가 오고 나서부터는 아예 새 역사를 쓰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바셰드 왕자를 블리니 왕자비가 죽였다고 했다. 그걸 왕이 눈감아 줬기에 블리니 왕자비가 무사하다는 얘기가 있었다. 왕이 아들의 죽음을 눈감아준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밖에 없었다. 저 지나치게 아름다운 육신이 아니었을까. 애초에 블리니 왕자비는 제 남편에게 관심이 없었다고도 했다. 왕자비를 손에 넣지 못한 왕자가 홧김에 매일 왕자궁으로 매춘부를 불러들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왕자가 그럴수록 블리니 왕자비는 보란 듯 왕제의 젊은 아들들과 어울렸다. 위스타드 역시 왕제의 아들이었지만, 한 번도 블리니 왕자비와 어울릴 기회는 얻지 못했다. 블리니 왕자비는 자신과 어울릴 인간들의 외모를 깐깐히 따졌다. 그걸 알게 된 위스타드는 제게 볼품없는 외모를 안겨 준 모친과 신을 저주했다.

16550962671823.jpg“제 조카를…… 워, 원하셨던 것은 왕자비 전하셨, 습니다.”

위스타드가 한참 만에 더듬대며 말했다.

16550962671823.jpg“그에게 볼일이 있다고 먼저 말씀하셨…….”

16550962690735.png“나는 쓸모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16550962671823.jpg“어, 어떻게…….”

16550962690735.png“글쎄.”

블리니 왕자비가 가르릉 웃으며 찻잔을 흔들었다. 찻잔의 물이 금방이라도 가슴 위로 쏟아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16550962690735.png“과부가 됐으니 한시라도 빨리 새 남편을 골라야겠죠.”

16550962671823.jpg“그, 그건…….”

위스타드가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블리니 왕자비가 그를 다음 남편감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16550962690735.png“나는 아직 못 잊는 남자가 있어요.”

16550962671823.jpg“저런…….”

맥락을 짚어낼 수가 없는 얘기에 위스타드는 침묵했다. 알아서 입을 다무는 그를 보며 블리니가 꽃처럼 웃었다. 이 세상의 남자들은, 하나를 빼고 전부 비슷했다. 그래서 블리니는 남편감으로 제 말을 착하게 잘 듣는 사내를 선호했다. 눈치는 빠르되 너무 영리하지도, 고집이 세지도 않은. 심심할 때 침대를 데워 줄 수컷이 아니라면 외모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라피트 클라인펠터의 얼굴은 제법 쓸 만했지만 그렇다고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사실 어떤 남자라도 만족감을 느끼긴 어려울 것이다. 라피트 클라인펠터를 침대로 데려간 이유는 하나, 그가 멋도 모를 배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배짱은 배짱일 뿐이었다. 여자 하나 훔쳐 오는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해 붙잡혔다. 그 역시 쓸모없는 사내 중 하나가 되었다. 사내들에게 실망하게 될수록 마음속의 저울은 더 극심하게 한쪽으로 기울었다.

16550962690735.png“여인이란 참 딱하기도 하지. 첫 남자가 뭐라고.”

16550962671823.jpg“아아…….”

위스타드가 애매한 신음을 흘렸다. 블리니의 곁눈질이 진해졌다.

16550962690735.png“스무 살이 되던 했어요. 나는 내 손으로 첫 남자를 고르고 싶었죠.”

그래서 골랐다. 아니, 어쩌면 운명이 자신을 위해 골라 준 것일지도 몰랐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씹어 삼키고 싶은 남자가 마침 그 순간 그 자리에 나타났으니까.

16550962690735.png“차라리 노예였다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살 수 있었을 텐데.

16550962671823.jpg“그, 그가 전하께 상처를 주었습니까?”

위스타드가 물었다.

16550962690735.png“상처?”

블리니가 까르륵 웃었다.

16550962690735.png“상처를 줬으면 뭘 어쩔 건데?”

16550962671823.jpg“그럼 제가 상처를 되갚아 주겠습니다.”

위스타드가 나름 크게 마음을 먹고 유혹의 말을 던졌다.

16550962690735.png“음……. 그건 주제를 넘는 말이고.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블리니는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저렇게 수컷 흉내를 내려고 드는 사내들이 우스웠다. 그래 봤자 그 남자를 끌어와서 내게 바치진 못할 테니까. 내 첫 남자. 내겐 죽음 같은 그 남자를.

16550962690735.png“나는 아주 작은 걸 바라.”

블리니가 스르륵, 발을 움직여 맨살을 드러냈다. 위스타드의 눈이 정신없이 제 치마 속을 따라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16550962690735.png“곧 재판이 있잖아요?”

16550962671823.jpg“그렇…… 그렇지요.”

16550962690735.png“나는 일을 망친 주제에 살아 돌아온 입이 헛된 말을 지껄이길 원치 않아요. 분명히 내 이름을 언급할 텐데, 그건 억울하지. 나는 얻어낸 게 아무것도 없는데.”

16550962671823.jpg“그건……. 그러면…….”

위스타드가 당황해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저 꼴을 보면 말은 잘 들어도 배짱은 없는 인간이었다. 블리니가 속으로 혀를 찼다. 없는 배짱을 만들어 줘야 했다.

16550962690735.png“시간은 별로 없고.”

주르륵! 블리니는 제 가슴팍에 식은 찻물을 따랐다.

16550962671823.jpg“엇, 그…… 오, 옷이 젖…….”

위스타드가 허둥대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블리니가 손을 뻗어 그의 소매 끝을 잡아당겼다. 엄지에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반지가 끼워져 있는 걸 위스타드가 알아챘다. 가까이서 보니 반지를 돌려서 장식을 손바닥 쪽으로 감추고 있었다.

16550962690735.png“닦아 줄래요?”

위스타드가 마른침을 삼켰다. 몽땅한 손이 젖은 옷에 닿았다. 블리니가 가늘게 웃으며 조카와 딱 하나 닮아 있는 갈색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16550962750303.png

  잠시 후 위스타드는 왕자궁을 나섰다. 그다음에 그가 한 일은, 왕제의 이름으로 감옥의 경비를 매수하는 것이었다. * * * 감옥에서 쓴 편지가 완성되었다. 디에렌의 시종이 편지를 들고 샤르카 왕국으로 출발했다. 디에렌은 시종이 답장을 받아 돌아올 때까지 얼마가 될지 모르는 시간을 혼자 버텨야 했다.  

16550962785564.jpg“필요 없는데.”

블랙은 언짢은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바지런히 움직이는 리에네를 응시했다. 리에네는 그새 붕대를 풀었다. 블랙이 과하게 상처를 돌본 덕에 여느 때보다 훨씬 빠르게 아물었다. 여전히 구두 대신 슬리퍼를 신고 있긴 했지만 발이 아플 일은 없었다.

1655096267181.jpg“필요해요.”

리에네는 디에렌의 감옥으로 보낼 음식과 담요를 챙기는 중이었다.

1655096267181.jpg“죽이지는 말아야죠. 알리토 대공을 이용하려면.”

나라 세 개가 얽힌 일은 제법 복잡했다. 간만에 티와칸의 소식망이 바쁘게 움직였다. 샤르카 왕국의 동향을 기민하게 살피는 동시에 알리토 대공의 의도도 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페르모스와 블랙은 최악의 상황까지 미리 계산을 했다. 블리니가 순순히 반지를 내어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자신이 한 일을 일체 부정하고 디에렌을 모르는 체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반지를 찾을 방법은 복잡해졌다. 그때는 알리토 대공을 이용해야 했다. 알리토 대공은 아들을 되찾으려 할 것이다. 그에게 아들을 돌려받을 방법은 반지를 되돌려주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대공 또한 교환을 거부하고 군대를 보낼 수도 있었지만, 페르모스나 블랙은 대공의 성격상 그럴 일은 없다고 보았다. 일단 거리가 너무 먼데다, 대공의 입장에서는 딸에게서 반지를 빼앗는 게 훨씬 저렴한 방법이었다.

16550962785564.jpg“죽을 일은 없게끔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지와 맞바꿀 게 디에렌만 있는 건 아닙니다. 찾아보면 어딘가에 또 있을 겁니다.”

1655096267181.jpg“대공자가 가장 확실한 수단인 건 사실이잖아요. 그리고 몸에 난 상처만 상처인 건 아니에요. 대공을 이용하려면 일단 대공자부터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해요.”

리에네의 말이 틀렸다는 건 아니었다. 그저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었다.

16550962785564.jpg“좋아요, 그럼. 대신 디에렌에게 가는 건 내가 하면 안 됩니까?”

리에네가 피식 웃었다.

1655096267181.jpg“그런 마음이라 안 될걸요. 당신은 대공자를 싫어하는 걸 감추지 못하니까.”

16550962785564.jpg“좋아할 이유가 없는 인간입니다.”

1655096267181.jpg“나도 알아요. 내게도 좋아할 이유가 없고요. 처음 인사했을 때부터 별로였어요. 대뜸 남의 얼굴을 평가나 하고 말이에요. 그런 건 조금도 칭찬이 아닌데.”

16550962785564.jpg“아주 좋은 태도입니다. 디에렌은 그냥 싫은 인간으로 남아 있으면 됩니다.”

1655096267181.jpg“좋진 않지만 딱히 싫은 것도 아닌데요.”

블랙이 눈썹을 구기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16550962785564.jpg“싫어하도록 해요. 그 이상의 감정은 가치가 없는 인간입니다.”

1655096267181.jpg“지금은 공자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요.”

16550962785564.jpg“……압니다. 그런데도 기분 나빠.”

블랙이 오늘따라 약간 막무가내라고 느끼던 리에네가 장난처럼 물었다.

1655096267181.jpg“공자를 왜 그렇게 싫어할까……. 설마 질투해요?”

16550962785564.jpg“…….”

블랙은 답을 피했다. 그게 답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1655096267181.jpg“너무 이상해. 내가 바보예요? 그런 사람한테 호감 비슷한 거라도 느낄 리가 없잖아요. 공자는 나우크에서 그런 짓을 했는데.”

16550962785564.jpg“……그런 짓을 했는데도 싫어하질 않으니까.”

1655096267181.jpg“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이 있잖아요. 디에렌 대공자가 못난 인물은 아니지만 당신 옆에 있으면 못나져요. 대공자에게는 유감스럽게도 나는 눈이 아주 정확하고요.”

16550962785564.jpg“못난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긴 했다는 건데.”

블랙의 뺨 근육이 미세하게 실룩대는 게 정확히 보였다. 리에네가 블랙의 뺨을 손바닥으로 톡, 두들겼다.

1655096267181.jpg“네, 말했듯이 눈이 정확해서요. 디에렌 대공자가 못나지 않으면 당신은 어떻다는 얘기겠어요?”

실룩대던 뺨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게 뭐라고 계속 웃음이 나왔다. 이 남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게 너무 이상해. 자기도 말이 안 되는 걸 알 텐데. 그래도 막무가내로 속에 있는 감정을 드러내 보이는 게. 그만큼 자신에게 경계가 없다는 말 같았다.

16550962785564.jpg“대신 나도 같이 가는 겁니다.”

잠시 후에 블랙이 손을 끌어와 쥐며 말했다.

1655096267181.jpg“당신이 나를 혼자 가게 만들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요.”

그 말에 블랙이 잠깐 웃었다. 함께 있는 시간은 이렇게나 달고 애틋했다. 발병 확률이 절반인 유전병 같은 건 마음속에 머물 틈이 없었다.

16550962823145.jpg

16550962823151.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