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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말도 안 되는 일 (1) (106/145)


106. 말도 안 되는 일 (1)
2022.04.06.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샤르카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했다.

썩 달가워하진 않겠지만 절대 금기시되는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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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왕비가 있으니 공식적으로 드러낼 수도 없는 관계인데, 그것만 믿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왕비의 가문은 샤르카 왕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사병을 보유한 곳입니다. 왕이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리에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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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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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네? 두 사람은 아직 아이가……. 아, 임신을 했을 수도 있겠군요.”

통치권이 적장자의 핏줄을 따라 흐르는 한, 아이는 방패이자 칼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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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했던 거짓말을 이렇게 다시 꺼내자니 부끄럽지만, 블리니 왕자비가 아이를 가졌다면 자리보전은 어렵지 않을 거예요. 적어도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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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그렇다면 골치 아파지는데요. 블리니 왕자비가 이렇게 빠져나가고, 대공자 문제는 대공에게 떠밀어 버린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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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이 하나 있을 것 같긴 해요.”

리에네는 잠깐 고민을 하다 말을 꺼냈다.

블리니 왕자비에 관한 얘기는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리 짧았다고 해도 블랙과 블리니 왕자비는 한때 서로의 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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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키지 않는 방법입니까?”

블랙이 리에네의 표정을 읽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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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요. 내가 블리니 왕자비의 비밀을 하나 알고 있다고 한 말, 기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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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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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타드 공은 클라인펠터와 연관이 있어요. 나이가 비슷해서 어릴 때부터 왕래가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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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서로 엮였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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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인펠터가 내게 이런 말을 했어요. 나우크에 오기 위해서 몸까지 팔았다고요. 나는 그걸 블리니 왕자비와 관계를 맺었다고 이해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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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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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니 왕자비가 그런 식으로 사람을 이용했다면, 왕실에서 문제를 삼을 수도 있는 일 같아요. ……너무 저열한 방법 같아서 가능한 한 쓰고 싶진 않지만. 블리니 왕자비가 먼저 알아채길 바랐는데.”

블랙이 쓰게 웃으며 리에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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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합니다.”

페르모스가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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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게 사실이라면 저열한 건 공주님이 아니라 블리니 왕자비가 아닐까 합니다. 그럼 가능한 한 고상하게 이용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클라인펠터를 사자로 쓰는 겁니다. 샤르카의 왕비에게 보낼.”

왕비는 아마도 왕실에서 블리니 왕자비를 가장 싫어할 인간일 테니 나온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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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가능할까요? 시킨다고 해서 명령을 따를 사람이 아니잖아요, 클라인펠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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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로 하게 만들어야지요. 입을 여는 건 아마 샤르카 왕비가 할 겁니다. 나우크에서 할 일은 클라인펠터를 샤르카 왕비에게 보내는 것까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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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 그런데 클라인펠터는 아직 잡히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어요?”

페르모스는 갑자기 신이 난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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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잡지 않은 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5일째군요. 그동안 굶겼으니 지금쯤 정신을 차렸겠지요. 허락하시면 이제 그만 잡아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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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런…….”

리에네가 여러 감정이 담긴 복잡한 얼굴을 했다.

블리니 왕자비의 얘기가 불편한 것처럼, 라피트에 관련한 일도 마음이 늘 언짢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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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렇게 해. 나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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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주군!”

페르모스가 날 듯한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탁!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난 블랙이 리에네가 앉아 있던 의자를 제 몸 쪽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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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이 왜 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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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내 표정이 어떤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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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아프다는 얼굴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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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음, 좀 그렇잖아요. 가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블리니 왕자비도 그렇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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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

블랙이 단정하게 묶여 있던 셔츠 매듭을 풀었다.

그가 양손으로 팔걸이를 붙잡고 고개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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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갑자기 몰려드는 긴장에 리에네가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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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주님의 모습을 전부 좋아합니다. 그렇게 쓸데없는 인간을 동정하는 모습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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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그런데 왜…….”

별로 좋아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는데요.

……그리고 매듭은 왜 푸는 건데요. 대낮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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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공주님이 나 때문에 무리하는 건 나도 원치 않으니까.”

말은 안 한다고 하면서……. 지금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끼이익.

낡은 의자가 블랙의 무게로 눌리며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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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상대가 클라인펠터라면 나는 좀 힘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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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알겠어요.”

힘이 드는데 왜 자꾸 가까워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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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드니까 공주님이 나를 위로해 주면 좋겠습니다.”

음……. 그래요. 그럴 수 있어.

위로를 받는데 왜 셔츠를 벗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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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요?”

그리고 역시나 모를 이유로, 리에네는 셔츠가 벌어져 드러나는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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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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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니 왕자비요. 어떤 결과를 겪게 될지 모르는데 동정이 가진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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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를 모르고 일을 벌이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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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동정도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요. 감정은 별개 문제니까.”

툭.

블랙은 리에네의 드레스 단추 하나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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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게 클라인펠터한테 감정이 있다고 말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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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런 감정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마음이 안 좋아지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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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공녀에게 느끼는 감정은 동정보다 더 격렬합니다.”

툭.

두 번째 단추가 풀렸다.

블랙은 드러나는 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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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당신이야말로 감정이 있다는 말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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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화가 나. 당신한테 그런 짓을 했다는 게.”

제 살갗을 울리며 쏟아지는 목소리가 끓고 있는 것 같았다.

아……. 그런 감정 말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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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공녀가 어떤 결과를 맞이한다고 해도 성에 차지 않을 겁니다.”

나는 무사한데……. ……아니, 아니야.

만약 클라인펠터가 이 남자에게 독을 썼다고 하면 나도 그랬을 거야. 아무리 비참하게 죽는다고 해도 여전히 화가 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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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요. 왜 위로가 필요한지.”

툭.

세 번째 단추가 풀렸다. 이번에 단추를 푼 사람은 블랙이 아니라 리에네였다.

블랙은 숨을 멈추고 리에네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네 번째 단추를 풀려던 리에네가 그 눈길을 바라보고 손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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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장소를 옮기는 게 더 좋을 것 같지 않아요? 마음껏 위로하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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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감입니다.”

블랙이 먼저 일어나 리에네를 안아들었다.

그에게 안긴 적도, 안겨서 침실로 간 적도 아주 많았지만 오늘처럼 동작이 빨랐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리에네가 블랙의 귀를 잡아당기며 농담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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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이 성 안에서 달리면 안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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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예법을 손봐야겠군요.”

쿵!

침실에 들어서자 등 뒤로 문이 닫혔다.

때는 오후였고, 침실은 구석구석 환했지만 마음은 햇볕보다 급했다.

겉 드레스가 쓸리며 머리를 헝클였다. 뺨을 간질이는 감촉에 리에네가 소리내어 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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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있어요. 빨리 오겠습니다.

잠결에 그런 말을 들었던 것도 같았다.

하늘이 붉어질 무렵 잠에서 깨어난 리에네는 눈을 비비며 허전한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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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디 간다고 했지, 참.”

폭포 뒤 미로에 간다고 한 것 같았다.

라피트를 잡아 오는 김에 그 안에 만들어진 장치를 페르모스와 함께 살펴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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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해. 나도 데려가지.”

리에네가 나른하게 하품을 하며 중얼댔다.

하지만 눈을 못 뜨고 웅얼대고 있으면 블랙이 자신을 깨우지 못했으리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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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도 참……. 내게 쉬라고 하지만 자기가 더 부지런하단 말이야.”

눈을 떴을 때 그가 옆에 없으면 뭐가 하나 빠진 기분이었다.

똑똑.

그때 부인들이 침실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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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 잠에서 깨셨습니까? 들어가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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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잠시만요.”

리에네는 헝클어진 속 드레스에 대충 머리와 팔을 꿰어 넣었다.

등 뒤의 매듭을 조이는 건 부인들에게 맡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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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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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공주님.”

이제 헨튼 부인은 많이 나아서 걸어 다니기도 했다.

나우크의 시녀장이 된 부인은 손을 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며 어쩐지 신이 났는데, 몸이 마음을 따라 주지 않아 안타까워하는 중이라고 했다.

문을 연 부인들이 부리나케 다가왔다.

그들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빗과 리본을 가져와 한 사람은 머리를 빗겨 주고, 한 사람은 옷 입는 것을 거들었다.

리에네는 혹시라도 목덜미에 입술 자국 같은 게 남았을까 은근슬쩍 부인들을 눈치를 보았는데, 둘 다 들떠서 그런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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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 오늘 장이 오지 않았겠습니까. 저기 빈자리에 놔둘까 하는데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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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요? 무슨 장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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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에 닿을 만큼 아주 큰 장입니다. 이불과 매일 입는 옷을 넣어 두면 되겠습니다. 예전에 쓰시던 건 낡기도 한데다 작으니 다른 방으로 치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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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거 좋네요. 그런데 갑자기 왜 새 장이 생겼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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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와칸 공께서 준비하신 혼인 선물이었는데, 장이라서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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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선물이 또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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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말입니다. 내일 또 뭐를 보내셔도 저는 하나도 놀라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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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럴 것 같아요.”

두 부인은 눈을 반짝이며 침실에 새로 들어올 장이 얼마나 근사한지, 세공이 얼마나 정교하고 화려한지 지치지도 않고 떠들었다.

리에네가 옷을 다 입고 나자 장이 들어왔다. 전에 쓰던 것을 옮기고 그 안에 넣어 둔 물건을 새것으로 옮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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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와칸 공의 물건도 함께 두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공주님? 어차피 두 분이 한 방을 쓰시니까요.”

벽 하나를 채울 정도로 커다란 장은 공간이 넉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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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잖아도 그 말을 하려고 했어요. 옷을 갈아입으려고 매번 사실로 가는 게 불편해 보였거든요.”

사실 이렇게 큰 장을 만들게 한 건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그런 건 내가 먼저 생각했어야 하는데.

왠지 좀 미안하네.

부인들이 옆방에서 블랙의 짐을 옮겨 왔다. 장에 들어간 것도 있었고, 아직도 트렁크에 담겨 있는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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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을 쓸까요?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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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좋아요. 그쪽으로 옮겨 주세요. 정리는 내가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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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말고 말씀을 하세요. 몸 쓰는 건 저희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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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가 뭐 힘들다고요. 차라리 몸이 덜 나은 헨튼 부인이 가만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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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움직이는 건 괜찮다고 페르모스 경이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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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모스 경 말을 다 믿으면 안 돼요. 그 사람 환자는 전부 티와칸이었으니까.”

간간이 웃어 가며 사이좋게 짐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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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옷가지에 섞일 물건이 아닌데…… 어디에 보관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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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게 뭐죠?”

리에네가 몸을 돌려 플램바드 부인이 내민 것을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함이었다. 손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함은 금테를 두르고 보석을 박아 아주 화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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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좀…….”

리에네가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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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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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제 눈에도 그렇습니다.”

다들 인상이 써지는 이유가 있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여자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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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께 드릴 선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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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옷가지 속에 숨겨 둘 리는 없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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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게 이상하긴 합니다. 이제껏 선물을 하신 적이 한두 번도 아닌데 왜 숨겨 두셨을까요?”

헨튼 부인이 함을 지그시 노려보다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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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열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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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리에네가 갈등을 씹듯이 입술을 꾹 물었다.

대체 저게 뭘까. 왜 숨겨 두고 있었던 걸까.

아냐.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어. 놔두고 잊어버린 걸 수도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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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냥…….”

놔두도록 해요. 내가 물어볼게요.

그런 말을 하려고 했으나, 늦었다. 헨튼 부인이 달깍, 함을 열었다.

함이 열리자마자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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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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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좋지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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