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말도 안 되는 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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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말도 안 되는 일 (2)
2022.04.10.
함을 열자 나온 것은 자그마한 손톱 가위였다.
몸체는 반짝이는 은이었고, 겉을 루비로 장식했다.
그러나 새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깨끗하게 닦았다고 해도 쓰던 물건과 아닌 물건은 차이가 있었다.
“새것이 아니니 선물은 아니겠군요.”
헨튼 부인이 도로 뚜껑을 닫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대체 이런 물건을 왜…….”
다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였다.
이제껏 버리지 못한, 과거의 누군가가 지녔던 물건일지도 모르겠다는.
“유품은 아니겠죠.”
리에네가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를 냈다.
설마 모친의 유품은 아닐 것이다. 나우크를 떠날 당시 페르난드 왕자가 몸에 지녔던 건 열쇠라 불리던 반지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엉뚱하게도, 며칠 전에 흘려 넘겼던 말이 떠올랐다.
-반지와 맞바꿀 물건이 있습니다.
찾아보면 어디 있을 거라고 했지.
그럼 이건 블리니 왕자비의 물건일까.
“……후우.”
리에네가 거칠어진 숨소리를 냈다.
“공주님.”
두 부인이 걱정 어린 눈으로 리에네를 살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저 예쁜 손톱 가위밖에는.
……알아, 안다고.
정표 같은 거야 주고받을 수 있지. 저쪽도 아직 반지를 가지고 있잖아. 달라는 말에 대답도 없고 말이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 과거에 있던 일을 뭐 어쩌려고.
알아. 알고 있어. 알고 있는데…….
……기분 나빠.
자기는 내가 동정하는 것도 싫다며. 그런데 왜 이런 걸 가지고 있는 거야?
“이리 주세요. 다시 넣어 두게.”
리에네는 서랍장 깊숙한 곳에 뚜껑을 덮은 함을 넣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공주님?”
“물어보긴 할 거예요. 그런데 내가 저걸 마음대로 처분할 수는 없어요.”
말은 반듯했는데, 미간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부인 둘이 리에네의 표정을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정리나 마저 하죠. 거기 짐들을 이리 주세요. 이쪽 서랍에 넣어 두게요.”
“네, 공주님…….”
괜히 벌집을 건드렸다는 생각에 부인 둘은 끝내 리에네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 * *
라피트 클라인펠터를 잡는 건 쉬웠다.
그는 허기와 갈증으로 반쯤 정신을 잃고 있었다. 살이 훌쩍 빠져 어디서나 미남자 소리를 들었던 얼굴이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아마도 여기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라피트를 밖으로 끌어낸 다음 페르모스와 블랙은 미로 속에 숨겨진 인공적인 흔적을 뒤쫓았다.
“공주님께서 말씀하신 장소도 여기 같고요. 막다른 길 같지만 이게 무슨 장치라면 이 뒤에 뭔가가 있을 겁니다.”
단단한 돌벽은 그저 벽일 뿐이었다. 단서가 될 만한 것도, 그저 수상해 보이는 것도 없었다.
“음……. 힘으로 밀어 볼 수도 없고요. 어떤 장치일지 모르니. 그리고 대체 자물쇠가 어디 있는 걸까요?”
페르모스도 리에네와 똑같은 얘기를 했다. 열쇠가 있으면 그걸로 열어야 할 자물쇠가 있다는 뜻이었다.
등불을 아무리 가까이 들이대도 자물쇠로 보이는 건 없었다.
“어딘가에는 있겠지.”
블랙이 돌벽을 쳐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리에네가 그러던데. 나우크는 원래 비가 자주 오는 곳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물은 풍부했을 것이라고.”
“아, 벌써 그런 것도 알아내셨습니까? 그럼 모든 정황이 신의 권능은 물이라는 것과 맞아떨어집니다. 클라인펠터 가의 그 늙은이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긴 합니다만, 물이라는 얘기를 꺼내자 게거품을 물던데요.”
“마나우가 깨어나면 좀 더 알 수 있는 게 있겠지.”
“사실 그쪽은 별 기대가 안 되긴 합니다. 뭘 알았다면 고문하는 동안 클라인펠터가 알아내지 않았을까 싶고요. 저는 일단 이 지도를 그렸으면 합니다. 정확히 이 뒤가 어디로 연결되는지 알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골치 아프겠군.”
“제도법을 배워 두긴 했는데 한 번도 써먹어 본 적은 없어서……. 근방 지리를 잘 아는 자가 있으면 편할 텐데요.”
“수소문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샤르카 왕비에게 사자를 보내는 일 말입니다, 변수가 너무 많습니다. 일단 샤르카에서 나우크의 사자를 어떻게 대우할지 모른다는 것부터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간을 보자니 샤르카 왕실에는 딱히 연줄이 없고요. 정보상이 쓸 만은 하지만 왕실 내부의 면밀한 사정까지는 모릅니다.”
“그렇다고 계획을 바꾸자는 얘기로는 안 들리는데.”
“음……. 그렇지요. 지금으로는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요. 그저 생각할 게 많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페르모스는 쓸데없이 엄살을 부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생각할 게 많다는 것은 이미 생각을 해 봤지만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냥 말을 해. 돌리지 말고.”
“……화내지 않으실 겁니까?”
“방법이 없으니 하는 얘기잖아.”
“그렇긴 합니다.”
“뭔데?”
“주군께서 가시는 겁니다.”
페르모스가 밑밥을 깔았던 이유가 있었다.
“물론 시간이 한참 걸리겠고 공주님과도 그만큼 떨어져 지내시게 되겠지만, 주군께서 가시면 샤르카 왕비가 거절할 도리가 없습니다. 나우크의 통치자가 아닌 티와칸의 수장으로 가도 그렇습니다.”
“……화내지 않기가 힘들겠는데.”
페르모스가 펄쩍 뛰며 거리를 벌렸다.
“마, 말해도 된다고 하신 건 주군입니다!”
“짜증이 나는 건 사실이잖아. 샤르카에 다녀오라고? 가는 데만 사흘이야.”
“주군이야 어차피 빨리 달리실 테니 이틀이면 될…… 실언했습니다. 다른 방법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못 참겠어.”
블랙이 나직하게 덧붙이는 말에 페르모스가 어깨를 움찔했다.
“화, 화를요?”
“아니. 떨어져 있는걸.”
“…….”
페르모스가 어두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소리 없이 혀를 찼다.
“내가 없는 데서 또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아……. 그건……. 뭐, 그럴 만도 하지요. 그런데 문제 될 것들은 다 잡아 가두지 않았습니까.”
“그때도 그랬지. 하지만 문제는 자꾸 생겨나잖아. 클라인펠터뿐 아니라 더한 것들이.”
“그게, 음……. 샤르카 왕국이나 알리토 공국이 끼어들 줄은 몰랐으니까……. ……물론 주군의 심정은 백번 이해합니다.”
두 번씩이나 같은 일을 겪었으면 인이 박일 만도 했다.
저렇게 애지중지하는데 그게 당연할 것이다.
페르모스는 그게 당연하다고, 절대 주군께서 유난이신 건 아니라고 속으로 거듭 중얼거렸다.
……유난 같긴 하지만. 아니, 그래도 내가 무슨 힘이 있나. 가시기 싫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이해한다니 다행이군.”
“그, 그렇…… 그렇지요.”
두 사람은 조금 더 미로 안을 둘러보다가 결국 별다른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 * *
성으로 돌아와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칠 때까지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리에네가 부인들과 먼저 식사를 했다는 건 아쉬운 일이었지만, 자신을 기다리느라 시장기를 참고 있는 것보단 나았다.
리에네가 혼자 먼저 욕실을 썼다는 것도 아쉽기는 했지만, 문제 삼을 일은 아니었다.
“…….”
그러나 리에네가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내내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확실히 잘못되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도 됩니까?”
블랙은 괜히 리에네를 따라 몸이 굳어 있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아무 일 없어요.”
……그럴 리가.
함께 침대에 누운 지 한 시간이 지나도록 말없이 천장만 쳐다보고 있는데 아무 일 없다는 말을 믿으면 제 머리가 심각하게 나쁜 것이었다.
“아니라는 걸 압니다. 그냥 말을 해요.”
“이미 했던 얘기라 또 하는 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결국 자신이 뭔가 잘못을 반복했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그게 대체 뭘까.
블랙이 심각하게 오늘 리에네와 겪었던 시간을 되짚었다.
낮부터 침대 신세를 지게 해서 그런 걸까.
자신이 성숙하게 굴지 못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리에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인간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클라인펠터에게 보내는 동정은 아까웠다.
그런 인간에게 쏟을 마음이 아무리 부스러기라도 내게 주면 좋을 텐데.
그래서 붙들었을 것이다.
질투심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모르는 애처럼.
……그건 이해한 줄 알았는데.
리에네가 조금이라도 꺼려하는 기색을 비쳤더라면 늦은 오후가 다 되도록 침대에 붙들어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와서 화를 내는 건 리에네답지 않았다.
“보통은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짐작이 가긴 하는데, 이번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블랙은 다시 한번 말을 건넸다.
“얘기해 줘요. 오늘 밤 나를 구해준다 치고.”
“…….”
리에네는 터무니없이 선량했다. 약한 소리 한 번에 고개를 돌려주었다.
“……말 못 하겠어요.”
하지만 이쪽을 향했던 시선은 잠깐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왭니까?”
“그냥…… 이런 일로 기분이 상한 걸 감추지 못하는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요.”
“나도 같습니다. 공주님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게 나라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잘못은 아닌데, 원인이긴 하죠. 아무튼 이 일은 그냥 넘어가고 싶어요. 시간이 지나면 내 기분도 풀리겠죠.”
말이 되는 소린가, 그게.
이대로 나란히 누워서 멀뚱히 천장만 보는 시간을 더 보내야 한다니. 이건 강도 높은 고문이었다.
“나는 싫습니다. 이건 못 견뎌요.”
“그럼 어떡해요?”
“이러지 말고 얼굴을 보고 화를 내요.”
“얼굴을 보면 마음이 더 안 좋아져요. 나는 최대한 빨리 기분을 풀고 싶어서 일부러 얼굴을 보지 않는 거예요.”
꼴도 보기 싫다는 말은 충격이었다.
“……리에네.”
벌떡 몸을 일으킨 블랙이 리에네의 시야에 강제로 끼어들었다.
“아……. 이러지 말아요.”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됩니까.”
“아무것도요. 말했잖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내 잘못입니다.”
“아니라니까요.”
“공주님이 내게 화를 내고 있으니 내 잘못이 맞습니다.”
“하아…….”
리에네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대체?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라 그냥 내 기분이 혼자서 안 좋은 건데 내가 화를 내니까 당신 잘못이라는 말이 어디 있어요. 내가 길을 가다 혼자 넘어지고 곁에 있는 당신에게 화를 내면 그게 당신 잘못이라는 거예요?”
“그건 확실히 내 잘못입니다. 곁에 있으면서 잡아 주지 못했으니까.”
“와……. 어떻게 그런 말을.”
혼자 숨을 고르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댄 리에네가 블랙의 가운 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당신은 내 기분이 알아서 나아지도록 기다려 줄 생각이 없는 거죠?”
블랙이 고개를 내려 제 옷자락을 붙든 리네에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한 번만 봐줘요. 못 참겠습니다.”
“이러면 안 돼요.”
리에네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잡아 뺐다.
“키스하면 안 됩니까?”
“네. 지금은. 화가 나니까.”
“보통은 키스를 하면 화해를 하던데.”
“보통의 경우라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라서요.”
“왜 아닙니까?”
“자꾸…….”
리에네가 눈을 꾹 감고 마른침을 삼켰다. 입 안이 껄끄러웠다.
“떠올라요.”
“뭐가?”
“당신이…… 이제껏 간직하고 있었다는 걸 안 뒤로. 계속 생각이 나요. 다른 사람한테도 이랬겠지, 하는 생각이.”
“…….”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거 알아요. 그러니까 가만히 내버려 둬요. 이런 말 하는 것도 부끄러워요.”
말을 마친 리에네는 다시 드러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홱 뒤집어썼다.
“…….”
블랙은 잠깐 이불 고치가 된 리에네를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지금 질투가 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맞나?
“공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