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말도 안 되는 일 (3)
(108/145)
108. 말도 안 되는 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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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말도 안 되는 일 (3)
2022.04.13.
블랙은 이불을 걷어내려고 애쓰는 대신 이불째로 리에네를 끌어안았다.
“이러지 말아요. 혼자 놔둬요. 제발.”
“열흘은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을 따지면 공주님이 다른 자와 연인이었던 기간이 훨씬 더 길었고.”
“아, 뭐야……. 그럼 할 말이 없긴 하지만 나는 좀 경우가 달랐다고요.”
사실 크게 다르진 않았다. 리에네도 라피트 클라인펠터에게 애정을 가지려고 애를 쓴 적이 있었다.
그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억지로 택한 관계가 조금이라도 덜 끔찍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훨씬 더 길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도 공주님이 다른 자를 언급할 때마다 머리가 달아오르는 것이고.”
“……그 표현 좋네요. 나도 머리가 너무 뜨겁거든요.”
“그래서 괴로웠는데 공주님의 위로 덕에 살았습니다.”
“음……. 그래서 지금 같은 방식으로 나를 위로해 주겠다는 건가요?”
“같지 않아도 됩니다. 원하는 걸 말해 봐요. 뭐든 할 테니.”
“…….”
리에네가 이불을 조금 끌어 내렸다.
“내가 좀, 귀찮고 한심하진 않아요? 이미 끝난 얘긴데 계속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잖아요.”
“공주님은 내가 귀찮았습니까?”
리에네가 심각하게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사실은…….”
그러다 두 볼이 붉어졌다.
위로가 필요하다는 핑계로 시작된 관계는 더할 나위 없었다.
오후 해가 솜털 하나하나를 비추었고, 세밀한 표정을 전부 드러냈다.
열에 들떠 흐트러지던 얼굴은 지금도 생생했다. 아마 제 머릿속에서 가장 좋은 것을 꺼내 든다면 반드시 그 안에 있을 것이다.
블랙은 이불 위로 뻐끔 드러난 발간 볼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말해요.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잘, 모르겠는데.”
리에네는 결국 몸을 돌려 블랙을 마주 안았다. 힘껏 어깨를 조여 오는 손이 안쓰럽고도 너무 예뻤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을 땐 무슨 생각을 했어요?”
블리니 대공녀를 알리토 공국에서 다시 만났을 때를 묻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좋았습니다.”
“……뭐라고요?”
“반지를 돌려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리에네가 고개를 약간 떼어내고 의심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것뿐이죠?”
“정말입니다. 곧 부질없는 바람이었다는 걸 알았지만.”
블리니는 반지를 미끼로 그를 휘두를 생각이라는 게 뻔했다. 반지를 돌려받고 싶으면 청혼을 하라는 말에 차라리 반지를 버리기로 했다.
다시 나우크의 왕이 될 게 아니었으니까.
한편으로는 개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도 보이지 않는 꼬리처럼 매달려 있던 정체성을 끊어낸 기분이기도 했다.
“블리니 왕자비는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요? 당신이 너무 친절했던 건 아니고요?”
“그건 나도 물어야 할 것 같은데. 공주님은 오늘 낮까지 다른 자에게 연민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이건 거절과는 상관없는 거잖…… 아니, 맞아요. 클라인펠터도 내가 한 말을 듣지 않았어요. 자기 좋을 대로 이상하게 해석하고.”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풀렸다.
리에네는 다시 블랙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블랙은 눈치 빠르게 리에네의 동작을 따라 했다.
“이런 마음은 점차 나아지겠죠.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 거야.”
블랙은 대답 대신 그냥 웃었다.
리에네는 그럴지 몰라도 자신은 아니었다. 리에네가 어쩌다 라피트 클라인펠터가 가엾다는 식으로 말을 하면 그때도 위로를 받아낼 것이다.
“그래도요……. 그건 돌려주면 안 될까요? 지난 일이라면 별 의미도 없는 물건이잖아요. 계속 갖고 있진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누구한테?”
블랙은 앞으로 흘러내린 리에네의 앞머리를 이마 뒤로 넘겨주며 물었다.
“블리니 왕자비한테요. ……아니, 설마 다른 사람이 또 있었어요?”
“그건 아닐 겁니다. 그런데 무슨 물건을 말하는 겁니까?”
“가위요.”
“가위?”
“당신이 숨겨 뒀잖아요.”
“……아, 그걸 봤군요.”
블랙은 침실이 달라져 있는 걸 지금에서야 인지했다. 새로 짠 장이 들어왔는데, 리에네가 제 짐을 옮겨 놓은 모양이었다.
리에네가 이마를 제 어깨에 문지르며 어리광을 피우듯 말했다.
“없어도…… 되는 거죠?”
“……이런 사람인 줄 알았으면 숨겨 두지 않았을 텐데.”
블랙이 짧게 숨을 내뱉었다.
“미안해요, 이런 사람이라. 나도 내가 이렇게 마음이 좁은 줄 몰랐어요.”
“그게 싫다는 건 아니고……,”
블랙은 불쑥 말을 끊고 리에네를 제 몸에서 떼어냈다.
“손을 이리 줘요.”
“내 손을요?”
리에네가 그를 안은 팔을 풀고 얼떨결에 손을 내밀었다.
블랙은 그 손을 잡아 엄지손톱 밑을 눌러 살갗이 벌어지게 했다.
리에네가 어깨를 움찔했다.
“아픕니까?”
“많이는 아니고요. 그런데 왜 이러는 거예요?”
“공주님이 여기를 다친 적이 있었습니다. 손톱 가위에 베었다고.”
“아……? 언제요?”
작은 상처에 무심한 리에네는 기억을 하지 못했다.
제 상처를 잘 모르는 건 블랙도 마찬가지였지만, 리에네에게 난 상처는 달랐다. 전부 기억했다.
그는 언젠가처럼 엄지를 붙들어 손톱 아래를 핥았다.
“그래서 샀습니다.”
“어…… 음? 뭐라고요?”
“다치지 말라고.”
“내게 주려고 샀다고요? 그런데…… 새 물건이 아니었는데.”
“네. 그래서 그냥 놔뒀습니다.”
나우크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구하는 일은 별로 쉽지 않았다.
얼마 안 되는 선택지 중에서 가장 나은 것을 골랐는데, 자신에게도 썩 마음에 드는 물건이 아니라 내놓기가 그랬다. 그걸 떠나서도 편하게 선물을 할 수 없는 관계이기도 했다.
그때는 매 순간을 짐작할 수 없었다.
한 걸음 다가갔다고 생각하면 다시 멀어져 있었다.
다시는 무딘 가위에 손톱을 다칠 일이 없었으면 했는데,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런 걸 받고 좋아할지 알 수가 없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 둔 채 방치하고 있었는데 리에네가 재봉 가위로 손을 크게 다치는 일이 또 생겼다.
그 뒤로는 정말로 줄 수 없는 물건이 되어 버렸다.
이 작은 가위로도 리에네는 얼마든지 자신을 다치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얘기를 듣고 난 리에네가 끄응, 앓는 한숨을 흘렸다.
“그러니까 내가 진짜 한심해졌어요.”
“그러라고 한 말이 아닌데.”
“당신은 매번 내 생각을 해 줬는데 나는 의심만 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아니라고 해요.”
리에네가 무릎을 모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날 봐요. 못 믿겠습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지금은 쳐다보기 부끄러워서요.”
“그럼 고개를 돌리지 말고 눈을 감아요.”
“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리에네가 순진하게도 눈을 감았다.
블랙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입술을 내렸다.
“눈 뜨지 말고 있어요.”
“음……. 지금은 부끄러우니까 감는 건데…… 앗.”
입술이 잠옷 자락을 걷어 올리며 복사뼈를 스치자 리에네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눈을 감았으니까 부끄럽지도 않을 겁니다.”
복사뼈를 간질이던 그가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리에네가 빨개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이상해요……. 눈을 감는 게 더 부끄러운 것 같아.”
“그럼 떠도 됩니다.”
“그게 뭐야…….”
이러든 저러든 마찬가지라는 말이었다.
리에네가 오해로 투정을 부려도, 화를 내도, 쓸데없는 일로 눈을 외면해도 그가 하는 일은 똑같았다.
곁에서 애정을 퍼붓는 일이었다.
리에네는 허벅지 근처를 간질이는 숨결에 어쩔 줄 모르며 이리저리 몸을 틀었다.
“가위는 그럼…… 내…… 거죠?”
리에네가 블랙의 머리를 양손으로 헝클이며 물었다. 블랙이 잠시 입술을 떼고 답했다.
“아니요. 이제는 줄 마음이 없습니다.”
“왜요?”
“공주님이 가위를 쓰는 일이 없었으면 하니까. 그때도 말했지만.”
“그건…… 그때는 내가 좀…….”
“지금도 가끔 꿈에 나옵니다. 그 광경이.”
“많이 놀랐죠……. 내가, 앗…….”
“네. 그러니까 앞으로는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해 주면 좋겠습니다. 악몽을 꾸다 잠이 깨면 공주님을 깨우고 싶어질 테니.”
“그땐…… 깨, 깨워요.”
리에네가 완전히 빨개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블랙이 잠옷 자락을 조금씩 걷어 올리며 리에네를 눕혔다.
“약속한 겁니다.”
“네…….”
살갗에 미끄러지는 잠옷의 감촉이 오늘따라 더 야했다.
리에네는 마른침을 삼키며 블랙이 가운을 벗는 것을 바라보았다.
결국 그 가위는 플램바드 부인의 몫이 되었다.
보석이 박힌 가위로 손톱을 다듬어 줄 때마다 부인은 절대 가위를 만질 생각을 하지 말라며 블랙과 똑같은 소리를 했다.
* * *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평온한 듯하지만 평온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나우크의 지하 감옥에는 아직도 죄수 둘이 남아 있었다.
하나는 테르난 클레인펠터였고, 다른 하나는 웨로즈였다.
“오셨습니까.”
오늘도 지하 감옥을 찾아간 리에네는 인사를 건네는 티와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오늘은 어떤가요?”
“여전합니다.”
“…….”
여전하다는 건, 웨로즈가 음식을 먹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제 목숨을 거는 방법을 택했다.
“문을 열어 줘요.”
“네.”
끼이익.
감방 문이 열리며 습기와 우울에 잠식된 냄새가 흘러왔다.
매번 맡는 냄새지만 여전히 코가 메웠다.
리에네는 이 감옥에 아무도 없기를, 그래서 다시는 같은 냄새를 맡을 일이 없기를 속으로 기도했다.
“……웨로즈 경.”
리에네가 들어서자 기운 없는 몸을 벽에 기대고 있던 웨로즈가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방 안이 어두운데도, 까맣게 죽어 껍질이 일어난 입술이 보였다.
마음이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자주 오실 필요 없습니다. 그자를 버리기로 한 게 아니라면 오지 마십시오.”
“그럴 일은 없어요.”
“그럼 저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웨로즈는 가이너스 왕가의 유전병이 블랙에게도 이어질 것이라 굳게 믿었다.
나우크를 지키기 위해서 리에네가 그를 떠나야 한다고 했다.
테르난 클라인펠터는 붙잡혔고, 샤르카 왕국과의 인연도 끊어져 아무런 방법이 남지 않은 지금에도 제 몸을 망쳐 가면서 고집을 피우고 있었다.
“내 말을 믿어 줄 수는 없나요? 열아홉 명 중에 단명한 왕은 아홉뿐이었어요. 가이너스의 핏줄이라고 해서 전부 같은 병에 걸리는 건 아니에요.”
“절반밖에 안 되는 확률에 나우크의 앞날을 거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까?”
“나는 그 사람을 믿어요. 그 사람은 내게 해가 되는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거예요.”
“미치면 그 모든 게 소용없습니다, 공주님.”
“그럼 경이 나를 지켜줘요. 만에 하나 로드 티와칸이 아파졌을 때, 그때 뭔가를 해도 되잖아요.”
“나우크가 이미 가이너스의 손에 굴러떨어지고 난 뒤에 말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로드 티와칸은 가이너스의 왕이 될 마음은 조금도 없어요. 내 남편으로, 아르사크의 수호기사로 산다고 했어요. 몇 번을 말했잖아요. 왜 믿지 않나요?”
“저 역시 몇 번이고 말씀드렸습니다.”
웨로즈가 그새 나뭇가지처럼 말라비틀어진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는 공주님과 나우크를 지키기로 맹세한 몸입니다. 제가 지금 하는 일은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방법입니다.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사의 목숨은 아깝지 않습니다. 저를 이대로 내버려 두십시오. 대신 제가 왜 죽어야 했는지만 기억해 주십시오. 그게 제가 공주님께 드리는 마지막 충정입니다.”
“……아뇨. 마지막이라고 하지 말아요. 나는 이런 식으로는 경을 잃고 싶지 않아요.”
“나우크 대신 그자를 택한 순간 이미 정해진 길일지도 모릅니다.”
고집쟁이 같으니.
리에네가 속마음을 참느라 발끝에 힘을 꾹 주었다.
그 병은 내가 괜찮다는데 왜 그러는 거야.
아무리 걱정이 되어도 나만큼은 아닐 거면서. 아무리 무섭고 슬퍼도 나만큼은 아닐 거야.
그런데 내 편이 되어야 할 경이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해요.
“경이 식사를 할 때까지 내가 세 끼를 챙겨 올 거예요. 나를 계속 괴롭히고 싶은 게 아니라면 식사를 하세요.”
“……돌아가십시오, 공주님. 더는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집은 나도 부릴 줄 알아.
“허튼소리 말고 다 먹기나 해요. 내가 가져온 음식을 경이 먹지 않으면 상한 음식을 치워야 하는 건 나라는 것도 생각을 좀 해 줘요.”
리에네가 몸을 돌려 감방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어? 어떻게 왔어요?”
기척도 없이, 블랙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