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 최초의 지도 (110/145)


110. 최초의 지도
2022.04.20.


16550963948264.jpg

 

1655096394827.jpg

“그랬군요…….”

리에네는 여전히 블랙의 손을 꼭 잡은 채 말을 했다.

1655096394827.jpg

“진작 물어볼 걸 그랬어요.”

16550963948282.jpg

“그때는 제 입이 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나우는 과거를 묻을 생각이었다고 했다.

블랙이 페르난드 가이너스라는 이름으로 되돌아온 게 아니었듯이, 나우크에는 가이너스라는 이름이 되살아날 이유가 없었다.

그는 가이너스 왕가의 비극도, 클라인펠터 가의 죄도 그대로 묻을 생각이었다.

그게 나우크를 지키는 길이라고 믿었으니까.

16550963948282.jpg

“그 또한 너무 늦게 알게 되었지요. 그저 사라지는 죄는 없다는 걸 말입니다.”

벌하지 않은 죄는 끝까지 자신이 죄라는 것을 몰랐다.

테르난 클라인펠터가 또다시 신전을 더럽힌 것은 죄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나우는 21년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야 모든 죄를 청산해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16550963948282.jpg

“저는 신전을 그 어떤 세속의 힘도 닿지 않는 곳으로 되돌리려 합니다. 신께서 이 목숨을 질기게 살려 놓으신 것은 그러한 이유라 믿고 있습니다.”

1655096394827.jpg

“저 역시 그렇다고 믿어요.”

마나우의 긴 얘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16550963948282.jpg

“그러니 가이너스 왕실이 지켜오던 물을 다루는 힘이 명맥을 잃은 것에도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 남은 눈이 깊고도 준엄하게 블랙을 바라보았다.

16550963948282.jpg

“인간이 지녀서는 안 되는 큰 힘이었습니다. 신께서 그 힘을 도로 거두어 가셨을 겝니다. 부디 청컨대 그 힘을 신께 이대로 돌려 드리시길. 가이너스 왕실에 대대로 신의 권능과 함께 병이 전해진 것은 결국 빼앗긴 힘을 거두기 위한 신의 뜻일 겝니다.”

1655096394827.jpg

“그건 말도 안 돼요.”

리에네가 고개를 흔들었다.

1655096394827.jpg

“어떻게 대사제께서 그런 말을 하시나요. 지난 20년 동안 나우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떠나갔는지 아시잖아요. 물이 없는 땅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에요. 신께서 거두어 가셨다니요. 그럼 신께서는 나우크가 이대로 말라죽길 바라시는 건가요?”

16550963948282.jpg

“신의 뜻을 인간이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공주님.”

1655096394827.jpg

“나는 그런 뜻을 받을 수 없어요. 이대로 다 같이 죽으라는 말과 다름없어요.”

16550963948282.jpg

“그 또한 신의 뜻이라면 따라야 합니다.”

1655096394827.jpg

“그런 신이 어디 있는데요!”

리에네가 울컥 소리를 질렀다. 20년 간 강물과 함께 말라붙어 온 분노와 원망을 담은 목소리는 듣는 귀를 아프게 했다.

16550963969638.jpg

“네, 그런 신은 없습니다.”

마나우를 대신해 단호한 답을 한 사람은 엉뚱하게도 페르모스였다.

16550963969638.jpg

“신이라면 비를 내리게 하지 장치를 만들고 숨겨 두진 않습니다. 그걸 만든 건 가이너스 왕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가이너스 왕실의 저주라는 그 병이 뭔지도 알 것 같습니다.”

1655096394827.jpg

“뭐라고요?”

리에네의 눈이 아주 크게 벌어졌다.

블랙이 리에네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늘 뜨겁던 손은 긴장이 고여 아주 차가웠다.

16550963969649.jpg

“그게 뭔데.”

이렇게 묻는 목소리는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 * *


16550963969638.jpg

“천재병일 겁니다.”

리에네는 처음 듣는 병명이었다. 웨로즈와 마나우도 마찬가지였다.

16550963969638.jpg

“머리가 너무 좋은 인간에게 나타나는 병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이 하나……. 아, 감출 것도 없겠군요. 숙부가 그 병을 앓았습니다. 듣기로는 조부도 같은 병으로 일찍 죽었다 했습니다.”

페르모스의 집안은 대부분 머리가 비상했다.

그 역시 어릴 때부터 엄청나게 똑똑한 축이었지만, 숙부를 넘어서진 못했다.

숙부의 지식체계는 방대했다. 남들은 평생토록 공부해야 하는 영역들을 숙부는 자유자재로 넘어들었다.

그러나 너무 방대한 지식은 그만큼 헝클어지기도 쉬웠다. 어느 순간 숙부의 머릿속은 모든 것이 뒤엉킨 혼돈이 되었다.

16550963969638.jpg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들으니 그럴 겁니다.”

페르모스는 숙부가 날마다 조금씩 죽어가는 시간들을 지켜보았다. 숙부의 죽음은 씁쓸했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 또 다른 아주 복잡한 세상을 구겨 넣고 사는 사람이었으니 육신이 버거운 것은 당연했다.

1655096394827.jpg

“그 병은…… 나을 수 없는 건가요?”

리에네가 성급히 물었다.

페르모스는 아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싱긋 웃었다.

16550963969638.jpg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주군께는 천재병이 없을 겁니다.”

1655096394827.jpg

“장담할 수 있나요? 그 말을 믿어도 되는 건가요?”

16550963969638.jpg

“네. 믿어도 됩니다. 천재병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병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함께 있는 병이라 자라면서 증세가 계속 심각해지는 겁니다. 만일 주군께서 병을 지니고 있었다면 제가 진작 알아챘을 겁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주군보다야 제가 더 머리가 좋지 않습니까? 저도 없는 병이 주군께 있을 리가요.”

마지막 말은 농담이었다.

금방이라도 목 놓아 울 것 같은 리에네를 달래기 위해서였다.

16550963969649.jpg

“……그런 말을 공주님 앞에서 듣고 싶진 않은데.”

블랙이 적당히 페르모스의 말을 받았다.

리에네가 울컥 소리를 쳤다.

1655096394827.jpg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페르모스 경이 당신보다 열 배쯤 더 똑똑하다고 해도 기뻐해야죠!”

블랙이 리에네를 다정하게 안았다.

16550963969649.jpg

“울지 말아요.”

1655096394827.jpg

“네? 안 울어요.”

16550963969649.jpg

“공주님이 받아 준다면 나도 멍청한 인간이 되는 것쯤은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울지 말아요.”

1655096394827.jpg

“안 운다니까요. 그리고 진짜…… 멍청한 게 훨씬 낫다고요. 그게 훨씬…….”

안 운다던 리에네가 그즈음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블랙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리에네를 토닥였다.

16550963969649.jpg

“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1655096394827.jpg

“훨씬…… 훨씬 좋아요. 진짜, 너무 좋아…….”

좋다는 말을 하면서 저렇게 크게 우는 사람도 없을 것 같았다.

16550963969649.jpg

“나도 좋습니다.”

그래서 좋다는 말이었다.

우느라 코가 빨개진 리에네의 얼굴을 블랙이 소매로 닦아 주었다. 그 모습을 웨로즈가 입을 다물고 지켜보았다.

* * *

페르모스가 마나우를 보려 했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신전에는 나우크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가 있었다.

마나우는 신의 권능이나 저주 같은 건 없다는 말에 화를 내는 대신 그들을 지도 앞으로 데려갔다.

지도는 대회당 정중앙, 제단을 밀어내면 나오는 석실에 보관되어 있었다.

단순한 지도가 아니라 신의 성물이라 알려진 지도였다.

신께서 나우크에 허락하신 대지의 원형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는 이유였다.

16550963948282.jpg

“인간의 눈앞에 성물을 내놓기 전에…….”

마나우가 제단 밑에 감춰진 석실의 입구 앞에서 말을 꺼냈다.

16550963948282.jpg

“약속을 해 주셔야겠소. 내가 하는 이 일이 신을 등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페르모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63948282.jpg

“나우크의 풍요도, 가뭄도 신의 저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게 증명될 겁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주군께서는 정말로 가이너스 왕가의 비밀이 드러나도 괜찮겠습니까?”

블랙도 망설이지 않았다.

16550963969649.jpg

“언젠가는 드러났어야 할 비밀이다. 물을 한 가문에서 독점한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짓이었지. 그런 짓을 했으니 클라인펠터 같은 쥐들이 들끓었던 것이고.”

16550963948282.jpg

“음……. 저는 좀 아깝다는 입장입니다만, 그 말씀을 부정할 수는 없겠군요.”

비밀이 지켜지는 한 가이너스 왕가의 통치권도 견고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영원한 비밀은 없었고, 영원한 영화도 없었다. 영원한 신도, 영원한 왕도 없었다.

그러니 해야 할 일은 영원하지 않은 이 순간에 가장 좋은 길을 택하는 것뿐이었다.

리에네가 블랙의 손을 끌어와 잡았다.

1655096394827.jpg

“당신이 옳다고 믿어요.”

블랙이 언제나처럼 리에네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16550963969649.jpg

“공주님이 좋은 쪽이 내게는 언제나 옳은 길입니다.”

1655096394827.jpg

“아, 정말…….”

리에네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런 말 아무데서나 하면 안 돼요, 라는 작은 말을 다들 듣지 못한 척했다.

16550963948282.jpg

“그럼 문을 열겠습니다.”

끼이이익.

마나우가 성치 않은 손으로 힘겹게 석실의 문을 열었다.

누구도 거들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이 문은 오로지 대사제가 열어야 하는 문이었다.

16550963948282.jpg

“들어가시지요.”

마나우가 앞섰다. 석실은 그리 깊지 않았다. 블랙이 고개를 살짝 숙여야 할 정도의 높이였다.

16550963948282.jpg

“이것이 최초의 지도입니다.”

마나우는 석실에 놓인 궤를 하나 열고 그 안에서 커다란 지도를 꺼냈다.

종이에 글을 쓴 것이 아닌, 천에 실로 새긴 지도는 한 겹씩 펼쳐질 때마다 바스락 바스락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16550963969638.jpg

“엄청난 지도군요.”

페르모스가 눈을 빛냈다.

16550963969638.jpg

“그 옛날 이런 지도를 만들다니. 그간 나우크가 누린 영화는 우연이 아닐 겁니다.”

다들 숨을 죽이고 석실 바닥에 펼친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페르모스는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바싹 들이댔다.

16550963948282.jpg

“가이너스 왕가가 만들었다 하는 그것이 무엇이오?”

마나우가 물었다.

16550963969638.jpg

“여기.”

페르모스는 대답을 대신해 지도에 그려져 있지 않은, 저 너머를 짚었다.

1655096405797.png

 

16550963948282.jpg

“거긴 아무것도 없잖아요.”

16550963969638.jpg

“여기가 동쪽 아닙니까?”

16550963948282.jpg

“그건…… 아, 맞아요. 거기가 동쪽이에요.”

16550963969638.jpg

“여기 혹시 산맥이 있지 않습니까? 아마도, 엄청나게 높은.”

그 말에 나우크에서만 살아온 이들이 눈을 크게 떴다.

16550963948282.jpg

“그걸 어떻게 안 거죠?”

16550963948282.jpg

“맞소이다. 그곳은 신의 땅이라 불리는 에렌디라 산맥이 있소이다.”

페르모스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63969638.jpg

“여기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1655096394827.jpg

“뭐가요?”

흥분으로 리에네의 말이 빨라졌다.

1655096394827.jpg

“거기에 그 장치가 있는 건가요? 아니, 그건 폭포 뒤에 있는 게 아니었나요? 어떻게 에렌디라 산맥에 있을 수 있죠? 거긴 너무 험해서 인간은 다닐 수 없는 곳이에요.”

16550963969638.jpg

“그렇겠지요.”

덩달아 페르모스의 답도 빨라졌다.

이제껏 머릿속에서 짐작으로만 존재하던 일이 실체를 드러내자 그도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1655096394827.jpg

“그럼?”

16550963969638.jpg

“공주님이 알아보신 대로 나우크는 비가 많은 곳이 아닙니다. 비가 많은 곳은 아마도 여기 에렌디라 산맥일 겁니다.”

대륙 남단을 동서로 나누어 놓은 에렌디라 산맥은 까마득히 높았다. 어느 정도냐면 구름이 산 중턱에 걸려 있을 정도였다.

16550963969638.jpg

“구름이 비를 가져오는 건 다들 알잖습니까. 구름이 산을 넘지 못하니 비 또한 그럴 겁니다.”

1655096394827.jpg

“아…….”

16550963969638.jpg

“그럼 이 산맥은 엄청나게 많은 물을 지니고 있을 겁니다. 산맥이 이쯤이라 하고 이렇게 나우크와 연결되는 길을 찾아보면…….”

페르모스가 지도 밖을 짚었던 손가락을 움직여 지도 안으로 옮겨 왔다.

16550963969638.jpg

“아홉 개의 폭포로 연결됩니다.”

1655096394827.jpg

“세상에!”

리에네가 석실이 다 울릴 정도로 커다란 소리를 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건 마나우와 웨로즈도 마찬가지였다.

나우크에서 태어나 살아온 사람들에게 가장 간절한 것은 언제나 물이었다.

16550963969638.jpg

“혹시 주군께서는 알리함 궁전의 전설을 알고 계십니까?”

16550963969649.jpg

“알고 있다.”

리에네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신의 지도만큼이나 아주 오래된 얘기였다.

16550963969638.jpg

“알리함은 산꼭대기에 지어진 성입니다. 해가 사계절 내내 뜨겁고 건조한 지역이라 산꼭대기에 궁전을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커다란 궁전에서 쓰는 어마어마한 물을 매일 길어 오기가 벅찼던 겁니다. 그래서 알리함 궁전의 주인 아바스 왕이 신께 제물을 바쳤고, 신께서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신의 사자는 산 아래 강에서 흐르는 물을 산꼭대기의 궁전까지 끌어올리는 기적을 이행하고 사라졌습니다.”

기적이 아닐 것이다.

당시에는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16550963969638.jpg

“알리함 궁전의 전설은 나우크의 건국보다 오래된 얘기입니다. 저는 어쩐지 그 신의 사자의 이름이 가이너스일 것 같습니다.”

 

16550964108191.jpg

 


0